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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36년 9월 10일부터 1947년 8월 15일까지 11년간 벌어진 일련의 전쟁을 일컫는 말로 한중전쟁으로도 불린다.
배경
대한제국
1932년 이승만 집권후,한국은 중국을 꺾을 작정을 하고있었다.1934년 몽골사변으로 몽골또한 괴뢰화했고 이제 칼날은 중원을 향해갔다.
반화교정책및 국민선동으로 국내에서 반중정서를 북돋우며 중국을 공격할준비를 하고있었다.
중국

국민당의 북벌실패 이후 북양군벌과 국민당은 분열되었다.
크게 우페이푸중심의 북양정부,장쭤린중심의 남경군사정부,된치루이 중심의 우한정부,장제스 중심의 국민당의 광주국민정부와 그 영향력하의 광서군벌,마오쩌둥 중심의 란저우공산정권,독립적세력을 구축한 사천군벌,운남군벌까지 7개의 세력들로 분열된상태로 한국이 침공하지않았더라도 통일은 어려웠을것이며 통일이 된다한들 최소한 냉전기에는 와서 통일될것이라는 의견이 다수이다.
하지만 통일된중국을 극도로 경계하던 한국이었고,결국 이승만 내각은 정권을 공고히한후,직접 한국의 영향력하에 두겠다는 강경책을 준비하기에 이르게되는것이다.
전개
1차작전:을지작전
1936년 6월부터 우한군벌과 북양정부간의 충돌이 가시화되며 북양군벌의 군세가 남쪽에 치우친틈에,한국정부는 9월 10일을 기해 성서도독부와 청도에 있던 한국군이 공격을 개시한다.북양정부군이 남부의 전선의 군대를 동부로 이동시켰지만 이미 산동반도 동부와 북경(현 북평) 외곽이 함락당했고,결과적으로 다면의 전선을 감당하지못한 북양정부군은 1937년 2월경 붕괴하며 우한군벌은 섬서성과 산서성을,한국이 하북성과 산동성을 점령,대연국을 수립하였다.
1차휴전기
을지작전이후 우한군벌은 큰 영토를 확보한동시에 주변군벌들의 눈엣가시가 되었다.한국정부는 또다시 이러한 상황을 이용할계획을 세운다.
이때에는 남경정부는 물론 서북의 공산당정권에도 제의를 건네었고,한국은 이들에게 북경의 정부는 그저 또하나의 군벌세력일뿐임을 주장하며 협상을 이어갔다.
물론 이들이 그말을 곧이곧대로 믿을만큼 어리석진않았지만 서로에대한 경계에 눈이 멀어 제의를 수락하기에 이른다.
2차작전:금례작전
1938년 4월,각지의 군벌세력군과 대연국 군사로 위장한 한국군이 우한군벌세력의 영내로 진입하며 전쟁이 벌어졌고,우한군벌군은 단 5주만에 붕괴하였다.
대연국이 산서성과 황하이북 하남성을,남경정부군이 하남성과 호북성을,공산당군이 섬서성을 점령한다.
2차휴전기
1938년 황하이북이 한국에 넘어간가운데,남경정부와 국민정부는 대립하였고,여타 군벌세력에대한 포섭이 진행되었고,사천군벌과 운남군벌은 국민당에 협력하게되며 남경정부는 위태로워지게되었고,국민당정권은 승기를 확실히 잡기위해 다음해인 1939년 북벌을 선언하며 남경군벌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제2차 북벌
1939년 2월 남부의 군세가 장강을 향했고,호북성과 절강성에서 전면적인 전투가 벌어졌다.하지만 예상외로 남경군벌의 저항은 강했고,전선은 6달이 넘어가도록 장강에 당도하는데 실패하였고,마침 2차대전으로 유럽이 혼란에 빠진틈에 한국은 좀더 과감한 군사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하며 11월,황하를 건넌다.
3차작전:광개토작전
1939년 11월 화북방면에서 대규모 군대가 황하를 건너 남하하였고,상해에도 5만의 병력이 상륙하며 상해지역을 장악하였다.
제국군의 제1목표는 남경(현 금릉) 장악이었으나 화북에서 내려온 주력군은 장강을 넘어오는데 실패하고,상해의 군대는 추가적인 진격에 실패하며 남경은 국민당군이 장악한다.그렇게 1940년 4월,남경군벌의 세력은 장강을 경계로 분할되었다.문제는 이 당시의 분할점령은 합의된 상황이 아니었고,장강에서 3달여의 대치가 이어진다.
4차작전:이화작전
7월에 이르러 대치는 끝나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상해와 동부에서 장강을 넘은 군대가 남경으로 돌입하였고,9월이되어서 안휘성,절강성전역까지 장악한다.하지만 이즈음에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며 공산정권이 국민당측에 가담하였다.
그러자 섬서-호북-강서-복건에 전선이 형성되었다.
그러자 한국은 묘책을 생각해내는데,바로 태국과 손잡고 비시프랑스가 장악중인 인도차이나를 연합국 영토에 대한'보호'를 명목으로 장악하고 광서방면에대한 육군공세및 광동지역에대한 상륙으로 남부를 급습할 계획을 세우고,실행하기에 이른다.프랑스정부에게서 항의가 들어왔으나 차후 전쟁이 끝나면 반환한다며 이를 어찌저찌 무마시킨다.그렇게 광서일대에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자 국민당정권은 연합국과 대립각을 세우게되고,결국 홍콩을 점령하는 초악수를 두게되며 사실상 서방의 대중지원 가능성이 사라지게된다.
결국 1941년 7월 광주가 함락되며 국민정부는 중경으로 파천했고,광서와 광동,복건,강서가 1941년 1년에 걸쳐 한국에 점령되었고,이와중에 독소전까지 터지며 소련의 지원마저 끊기기에 이르렀다.그렇게 1942년 8월즈음에 이르러 전선은 청해-사천-귀주-운남에 형성되었다.
상황이 이지경에 이르자 국민당정권은 결호작전을 개시하며 최후의 1인까지 저항할것을 선포한다.
한국은 이에대해 전선을 무리하게 돌파하기보단 후방을 안정화하고 중국내륙을 고립시켜 자원부족상태로 유도한다.점령지에 대명국,대송국,대초국,호남국,광서국등 위성국을 수립하는한편 후방의 공장및 보급로를 폭격하였고,이는 실제로 효과를 보이며 전선은 점점 중국을 조여오게된다.
5차작전:몰락작전
하지만 이러한 고립작전에는 차질이 생기게된다.
우선 소련이 독일과의 전선에서 승기를 잡자 소련의 지원이 조금씩 재개되고,결정적으로 1945년 9월 7일 유럽에서의 전쟁이 드레스덴·함부르크 핵투하로 끝나자 한국에게 전쟁장기화는 부담이 되는 선택지였고,1946년 말 몰락작전의 개시를 알리며 대규모 폭격을 가했고,1947년 한국이 핵개발에 성공하자 곤명·성도 핵투하가 개시되었고,그렇게 국민당정권이 최종적으로 항복하며 11년에걸친 전쟁이 끝을 보인다.
전쟁의 끝

중국이 항복하자 중국군은 무장을 해제하고,한국군이 남하하던한편 공산당군은 신강소비에트공화국의 독립을 선포,소련이 이를 비호하며 한소간 긴장이 고조되었다.(1947년 동투르크 위기)결과적으로 한소,양국이 더이상 대립하기어려운 판국에서 동투르키스탄은 소련에,청해성은 한국의 영향력하의 후이국으로 편입하며 종결된다.
이후 1947년 11월 4일 한성 조약이 체결되며 중국은 해체되며 한국은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서 국제무대에 나서게된다.
또한 한국은 국가간의 이해관계및 내부간섭과정에서의 상호간 갈등을 유발하며 중국이었던곳의 국가들을 분열시켰고,1985년의 호국군사태이후론 현재까지 대규모 저항시도조차 없는상태에 이르는중이다.
영향
전체적으로 한국의 동아대전의 승리는 이후 세계의 향방을 크게 뒤흔들게되었다.
크게는 전통적 강자이던 중국의 몰락,한국의 초강대국화,미-소냉전의 주요전장변화가 있다.
한국
한국은 동아시아의 강적이던 중국을 분열,종속시킴에따라 동아시아 유일의 강자로 올라섰으며,향후 미국,소련과 함께 냉전초기부터 초강대국으로서 올라서게된다.
이후 한국의 세력은 이전에 영향력을 확보한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시아는 물론,대리전을 거치며 인도네시아일대와 방글라데시까지 확장하게되었고,중국의 자원과 막대한 인력에서오는 산업력을 한국이 거의 독점하며,한국의 경제는 급성장하게된다.
중국
오랜세월 동아시아의 패자(覇者)로 군림하던 중국은 여러 요충지를 한국에 빼앗긴채 10개국으로 해체당한 패자(敗者)로 전락했으며,현재까지도 한국의 영향력하에 있다.
한국은 내정에 개입해 각국의 교육과정에서 '하나의 중국'이라는 개념을 역사,사회,언어등의 면에서 제거해내가는 동시에 각국에 대한 지원정도를 조절하고 각국간의 이간질등으로 서로에대해 앙금을 만들며 오랜세월에 걸쳐 중국이라는 정체성 대신 각국의 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한국에 대해 저항할수 없게했다.
그 결과 거대한 저항시도는 1985년의 호국군 사태가 전부였으며,이마저도 사전에 발각되어 분쇄되었으며 한국의 충실한 번국들로 남게되었다.
동남아
이전부터 한국의 영향을 받은 독립세력이 준동하던 동남아였기에 전쟁과정에서 태국과 함께 프랑스령이던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의 독립을 선포하게하고,이들을 사실상 비호하는등 서방의 영향력을 거세해나가기 시작하였다.
가장 극적인 영향을 받은곳은 네덜란드령이던 인도네시아로 1947년,한국이 중국과 전쟁하던사이 서방의 강력한 지원으로 제1차 인도네시아 전쟁이 반란군의 패배로 이어졌다.이후 유화책으로 친서방적 국가인 인도네시아 연방이 수립되었지만 현실의 남베트남과 같은 부패하고 혼란한 국가였고,결과적으로 1964년 여러 반군이 준동하며 제2차 인도네시아 전쟁 통칭 인니전이 벌어지는등 큰 변화를 맞는다.[3]
인도
소련이 동아시아대신 중동에 영향력을 행사해 파키스탄이 공산권에 편입되고,한국이 동남아에서 위세를 떨치고,결과적으로 1965년 제2차 인도-파키스탄전쟁에서 파키스탄이 한,소의 지원을 받아 승리하며 인도의 국수주의적인 독재정이 확립되는 결과로 이어지게되었다.
또한 중국이 분열된채 한국의 영향력하에 들며 세계의 공장의 역할은 인도가 맡으며 인도가 90년대부터 초강대국에 가까운 국력을 가지는데까지 영향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