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레이넬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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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세도스
Arsedo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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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동북부 젊은이의 놀이터, 밴드의 성지 라레이넬
라레이넬동의 모토.

라레이넬 거리카피톨리아 최고의 밴드 성지로 불린다.

엘리시아 영역에서 정궁 쪽을 지나 동쪽으로 가면 나오는 카피톨리아 구시가지에 서 손꼽히게 활기찬 길거리다.

라레이넬 거리는 비사마리아구 동부 라레이넬동의 중심 길의 이름이며, 중심이 거기일 뿐, 사실 동네의 절반 정도는 이러한 젊은이들의 밴드거리다.

역사

라리이넬과 같은 문화의 성립은 7기 말기이다. 당시 동서정보전이 점점 풀려가던 생활상. 서국동국은 그동안 문화교류가 강제적으로 막히면서 오히려 서로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기만 하고 있었다. 동국은 서국의 활기차고 자유분방한 문화를 받아들였고, 서국은 동국의 자연친화적이고 정갈한 문화를 받아들였다.

아무튼, 그러한 새로운 외국 문화가 처음으로 들어오는 곳은 유동 인구가 많거나, 개방적인 성향이 강한 청년층이 많거나, 해외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사는 곳이 되는 법이다.

최초의 밴드 문화, 즉 악기는 물건을 직접 배로 운송하는 건 꺼려하는 분위기였기에 육로 접경지역인 플라다렌시에 거대한 서부악기촌이 형성되었다[1].

그러다가 기술인력 교류도[2] 슬슬 활성화되자, 저기 멀리 있는 동북부 끝자락인 카피톨리아 광격권에셀리아 광역권에도 이런 문화가 들어오게 된다.

마침 도시로 올라와 새로운 문화를 즐기고 싶은데, 바쁜 일에서 그나마 여유가 있고 경제적으로 괜찮은 편이었던 카피톨리아 시민들이[3] 당시 젊은이들에게 가장 번화한 거리였던 케핀소리아 영역 비사마리아구 한가운데에 이러한 문화가 생겨났고, 점점 젊은이들이 주말이나 일 끝난 밤에 모여서 놀던 곳이 이렇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라레이넬 거리에는 일리레망 지방의 "밴드 문화", 그리고 에르일레니시아 지방의 "재즈 문화"가 슬슬 들어오며 주점과 소형 음악당 등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년층들을[4] 주축으로 이 문화를 받아들여, 점차 거리 규모를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마침 이곳은 비사마리아구; 서카피톨리아와 동카피톨리아[5]를 잇는 도로가 바로 지나는 교통 요충지에 속했다[6]. 북쪽의 테리시아구는 거대한 중산층 이하 거주지구요, 남서쪽은 고위층 거주지역, 남동쪽 해안가는 무역지구였으며 항만에는 항상 배가 많아 활기찼다.

이렇게 처음 거리가 형성된 건 5330년대 전후에 일어났는데, 이때를 보통 초창기라고 부른다. 당시는 빈 주점과 계약하거나, 그 소유자가 원해서 가게를 개조하는 식으로 공연장이 생겨났는데, 그중 유명했던 것은 에르멜스계 아리야 미르코샤르였다. 그녀는 에르멜스계 클레도리아 이주민 2세로, 그 문화를 전파하는데 앞장섰던 이다.

어느 정도 돈이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재정적인 지원을 해줄 수 있었다. 그녀의 주도로 세워졌던, 당대 가장 유명했던 공연장은 "타르네론"이었다. 약 250명 정도가 한번에 관람할 수 있는 당시 기준 대형 악장으로, 어쿠스틱 기타, 혼키 통크 피아노, 드럼셋, 확성기를 단 초기 어쿠스틱 베이스, 색소폰 등의 재즈/밴드 악기가 한데 모여 음악을 연주했던 곳이다.

이외에도 약 40~60명 규모의 중소형 음악당이 많았으며, 음악상가도 들어오기 시작해 에르멜스의 유명 제조사들도 슬슬 입점하면서 발전하기 시작한다.

대략 1910~1930년대의 재즈나 밴드를 생각하면 편하겠다. 하지만 아직 전자기술이 발전하지 않아[7] 밴드 공연은 "생길까 말까" 한 정도에서 오가고 있었고, 대개는 중산층 이하 청년층, 외국인 노동자층 등이 모여 재즈를 즐기고 놀았다.

하지만 두 번의 커다란 위기가 이 거리에서 활보하던 젊은 음악가들을 강타한다.

첫 번째는 5345년경에 찾아온 불경기[8]. 준 대공황 급으로 세계를 강타했다. 이때 동국과 서국의 경제교류가 갑자기 확 틀어막히는 바람에, 각종 악기상들과 밴드들이 큰 피해를 봤다.

본래 버스킹이나 공연 수수료로 먹고 사는, 안 그래도 빡빡하고 돈에 쪼들리는 사람들이었는데... 아무튼 실업자가 가득가득하고 국가가 침울해진 것이 5347년~5348년 즈음의 일.

이때, 경제 방면으로는 극찬의 손색이 없는 당대 총리의정, 니델레이센 일리아미키르가 그래도 거대하게 남아 있던 클레도리아의 내수를 이용해 일자리를 억지로라도 끌어내 창출시키게 된다[9].

아무튼 불경기라 한들 이 나라가 세계에서 가지고 있던 지위는 어디 가지 않았다. 그러니 외국의 무역단은 이러나저러나 계속 오가고 있었다. 그걸 이용하여 일자리를 창출해낸 건 당연지사. 평소에 자본주의에 찌든 대기업들에 눌려 하지 못하고 있던 공공시설을 이때 대폭 발전시킨 것이다.

그래도 반짝반짝하게 닦아두어야 하는 외국인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도시인 플라다렌시, 오르세이렌시, 카피톨리아 수도시, 그리고 에셀리아시를 가장 열심히 재정비했는데, 이때 해당 도시 및 근교에 거주하던 실업자 주민들이 대거 참가하면서 길을 보수해나가고, 병원을 다시 짓고, 가로등을 짓고, 골목을 청소하고, 하천을 깨끗하게 보수하는 등의 사업을 펼쳤다.

평소에는 '돈이 안 되는데' 하고 그냥 넘어갔던 일들이었는데, 막상 그 '돈이 되는 일들'을 하고 있던 대기업들이 잠시 휘청거릴 때 이걸 잡은 것은 엄청난 선수였다.

덕분에 니델레이센 의정은 서민층에게도 열렬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으며, 특히 에셀리아를 비롯한 클레도리아의 공장도시[10]와 오르가르호 근처의 공장도시가 급발전했다. 특히 이 정책은 오르가르시의 환경을 대폭 개선하는 결과를 낳았다.

좋은 건진 몰라도, 경제가 잠시 맛이 갔을 때 공장도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으므로 돈은 못 벌었다지만 오히려 오염물질이 한순간 줄어드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때의 깨끗한 공기는 클레도리아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남겼는지 "공황의 공기"라면서 웃픈 추억으로 남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점점 경기가 돌아오고 나라 경제가 탄력을 맞으니, 클레도리아는 다시금 언제 그랬냐는 듯 최강국으로 우뚝 서 돌아올 수 있었다. 자본가를 위시한 상류층 귀족들도 자신들의 이권이 다시금 확립되는 모습을 보고 잘 안 그랬는데도 좌파에 살짝 가까웠던 입헌당에 큰 지지를 보낸 것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일레미르칸 세르네세 카스비르트 황제의 대관식 영상을 보면 길이 유독 깔끔하고 시민들도 많고 특별히 활기찬데, 이건 자신들이 대공황을 이겨냈음을 기쁘게 여기는 시민들의 분위기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이건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대공황의 어두운 면이 몇 가지가 있었는데... 에르멜스가 안 그래도 버겁게 했던 무역이 난데없는 옆 나라의 돌풍으로 인해 폭삭 무너져내렸다. 그래서 경제가 좀 맛이 갔고, 잠깐 정치적인 혼란이 찾아오지만 이내 "그 어떤 통솔력 좋은 인물" 덕에 통합된다.

그리고 리브데보리아 토후국은 자신들의 최대 자원 수출 파트너가 잠시 가라앉고 일어나는 동안 리브데보리아답지 않게 계속 경제가 휘청였으며[11] 기회를 노리고 있던 클레도리아에게 너무나도 허망하게 털리며 거의 반의존국가, 속국처럼 점점 잠식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공황에서 극볼될 떄쯤인 5348년, 10대 카스비르트 초공황제가 급사하면서 세르네세가 즉위하였다[12].

밴드 거리의 역사에 이게 왜 튀어나오는가 싶을 수도 있긴 할 테지만, 7기 말의 격동을 온몸으로 겪은 상권인 만큼 이걸 알아두어야 지금 시점으로 정확히 100년 후 테리시아구립 메르센니 고등학교까지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고 나서 다시 활기차지는가 싶었더니만, 5352년~5353년 들어 계속 외교적 마찰이 심화되며, 그러니까 대공황의 후폭풍과 양국에 나타난 약간 맛이 간 지도자들의 평화협상 실패로, 5354년~5355년에는 무력 충돌인 제2차 동서전쟁이 벌어진다.

드람리아 자유국은 클레도리아에 기가 눌려 있었건만 이때다 싶었는지 에르멜스에 엄청난 이점을 주는 메르데소르 대양 중앙에 공군기지를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클레도리아 동부는 애석하게도 에르멜스와 물리적으로는 멀었건만 비행기 폭격을 자주 받았다. 그중 "쇠까마귀"라 불리는 열한 번째 공습이 가장 컸다. 코르네이레 전대 등이 맞붙어 아군 피해를 줄이는 임무를 맡기는 했으나, 카피톨리아가 불바다가 되는 것을 쉬이 막지는 못하였다.

자연적인 장벽이 있어서 광역권이나 시가지 전체가 불타는 일은 없었고, 서쪽으로는 네이르-에르센디아 "언덕"이, 동쪽으로는 메르센니천이 줄줄 흐르고 있었기에 기어코 방어를 해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라레이넬 거리는 피해 범위 중 하나였으며, 이곳을 포함해 케핀소리아 시가지 상당수가 불에 타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전후 케핀소리아는 "재건"을, 서쪽의 엘리시아는 "번영"을 목적으로 재개발되었다.

아무튼 이렇게 박살이 난 상황이었으나, 다행히도 좀 최근에 지어진 상권이었던데다 석재 건물이 많았기에 물리적인 피해가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았다. 내부는 엉망이 되어 있던 건 맞는데, 건물이 전소한다거나, 하는 사례는 그닥 많진 않았건만, 그 중 하나가 하필이면 옛 타르네론 건물.

당대 클레도리아를 좌우하고 있던 쿠데타 세력이 잡히고 동서전쟁이 마무리된 것은 어언 5360년 언저리였는데, 5370년 클레도리아 민주헌법이 승인되며 다시 공동즉위하기 전까지 이곳은 민주화 시위의 현장으로, 젊은이들이 많이 모였던 공간이었다.

그래서 시위의 격렬한 흔적이 지금도 조금 남아 있으며, 덕분에 특이한 컨셉의 공연장이 몇 있다. 총탄이나 최루탄 자국이 선한 벽이라던지, 시위대 중 누군가가 잃어버린 신발을 유리장 안에 전시해둔다던지.

아무튼, 5370년 나라가 안정화되고, 5380년쯤 되자 근방이 어느 정도 재건되어 살만해졌다. 그런데, 클레도리아는 해안 지역이 마구마구 털린 것이지 오르가르시를 위시한 내륙 경제 기반, 특히 에르멜스 세력이 그토록 털고 싶어 했던 오르가르호를 둘러싼 공장지구는 여전히 말짱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니 중부를 기점으로 생산력을 마구마구 공급한 끝에, 특히 에레수리아 만을 둘러싼 대도시권이 형성되었으며 오히려 오르가르를 뛰어넘게 되었다.

당대 잠깐 행정 공백이 있었던 5360~5370년 사이에 수많은 이동 행렬이 있었으며, 전쟁 때문에 반토막 이하로 줄어 있던 카피톨리아 수도시, 에셀리아시의 인구가 오히려 더 큰 폭으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전해 진행했다고 했던 공공토목사업의 흔적은 어디 안 갔고, 그때의 흔적으로 "근교" 지역이 번성하기 시작했기에 아직 재건되지 않은 도시 근처에 사람들이 마구마구 모여 살면서 어느 정도의 연담화[13]가 일어났다.

그렇게 만들어진 도시권이 펜니렐리시멜라네이르시, 에르가르네시... 이후 해당 지역은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재개발로 개도국식 닭장 주택지역에서 벗어났으며[14] 에르세리아시를 신도시로 개발하면서 사람들이 몰려가게 되었다[15].

아무튼 이렇게 재건의 활력을 맞은 라레이넬 거리엔 다시 젊은 음악가들이 붐비기 시작했다. 그런데 5366년에 큰 사건이 하나 일어난다. 바로 산봉우리 5대 연구소의 개방. 그들이 지니고 있던 시대를 초월한 전기기술력은 갑작스레 삶의 질을 엄청나게 높여 주었다.

공개된 기술을 적용하는, 소위 말해서 공학 붐은 5390년대까지 쭉 이어졌으며 이때 일렉기타, 그리고 전자 베이스, 신스 등의 악기 기술도 쭉 발전해온다. 이런 새로운 소리를, 사람들은 선호하며 즐기게 되었고 클레도리아에는 밴드 문화가 어느새 융성하게 되었다.

에르멜스식 코드 진행, 북부식 코드 진행, 남쪽 멜란/제셰이크식 코드 진행이 적절히 섞여 다양한 장르가 튀어나오며, 지금도 작은 밴드들의 성지로 열일하고 있다.

지금은 카피톨리아 광역권이 3,700만 명의 집이 되었고 수도시 혼자서도 거의 1,000만 명을 감당하고 있기에 이쪽은 관광 명물이 되어 놀러오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클레도리아 수도에 맞는 규모였으며, 행정기관에서도 유심히 보았는지 이곳을 특별문화거리로 만들어서 지금은 아주 깔끔하게 정돈이 잘 되는 유명 관광지로 거듭났다.

다양한 장르,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계층이 어우러져 밴드와 재즈를 즐기는 공간으로 거듭난 라레이넬 거리.

실력 좋은 학생 밴드도 종종 초청되는[16] 이 개방된 공간은 이런 역동적인 근현대사를 모두 겪은 젊은이들의 예술혼이 깊게 뿌리박은 공간이었던 것이다.

특징

공연장

여담

  1. 그래서 그곳도 클레도리아 최고 밴드의 성지 중 하나로 꼽힌다.
  2. 동서정보전이 기술뺏기 냉전이었다는 걸 잊지 말자
  3. 에셀리아는 당시 저임금 공장노동자의 소굴이었다. 제3제국 초기에 죽어라 해당 지역 소득을 올려서 그나마 평균에 가까워진 것일 뿐.
  4.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워서 근처 대학에서 공부하였으나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인 규율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반항층들
  5. 당시엔 여기가 본시가지.
  6. 지금도 CSC 케핀소리아역이 여기 있다.
  7. 밴드의 핵심은 일렉기타, 베이스, 앰프인데!
  8. 일단 회사의 생산-판매 전략 실패로 과다생산으로 인한 물품이 남아돌게 된다. 당연히 회사 입장에서는 수익이 제대로 안 들어오고 물건들에 부담이 가기 시작하며, 직원을 자르게 될 수밖에 없어진다. 하지만 이런 회사가 어디 한둘이었던가. 탄탄한 소비층이 되어줄 노동자 계층이 차츰차츰 해고라는 날벼락 앞에서 무너져가게 되었기 때문에, 역으로 제품을 사갈 고객을 대량으로 잃어버린 회사는 불경기의 구렁텅이 속에 빠져들게 되었다.
  9.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동네 방식 뉴딜이다.
  10. 이 재정비 프로젝트는 전국의 더러운 대도시를 기점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기에 공공토목공사로 인한 일자리 창출이 가능했다
  11. 특정 국가에 너무 많이 의존하는 현실을 한탄했다고 알려져 있다
  12. 아무튼 이게, 클레네이르 오르네리스가 입학하러 간 5350년까지 일어났던 모든 사회상 변화이다.
  13. 그리고 스프롤. 특히 펜니렐리와 멜라네이르가 심하다.
  14. 사실 어느 정도는 남아 있다
  15. 클레니에스는 예전부터 컸던 도시이기에 별개.
  16. 아주 좋은 예시로는 메르센니고엘랴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