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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루마니아 왕국(루마니아어: Regatul României)은 1881년부터 1970년까지 존재했던 동남유럽 발칸반도에 위치한 군주주의 체제 국가이다.
역사
루마니아는 1940년 11월 추축 동맹에 공식 가입하고, 독일의 B-B 작전에 동참하여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전쟁을 성전으로 규정하였다. 루마니아군은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를 탈환하였으며, 일시적으로 트란스니스트리아까지 점령하였다. 이러한 군사적 성과로 이온 안토네스쿠는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였고, 상실된 영토를 회복한 지도자로서 권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동부 전선의 장기화로 루마니아군도 큰 희생을 치렀다. 대표적으로 1941년 오데사 전투에서 루마니아군은 9만 명에 달하는 병력이 사상당하며(전투 투입 병력의 약 26.5%) 전쟁에 대한 회의 여론이 확대되었다. 트란스니스트리아 점령은 군과 민간 모두에서 열의가 낮았다는 평가도 존재하였다.
루마니아는 독일의 동부 전선 작전에 지속적으로 협조하였으며, 유대인에 대한 탄압과 학살에도 가담하였다. 그러나 유럽에서의 전쟁 종결 후에도 루마니아는 심각한 경제난과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독일과의 불평등 조약에 따라 석유·식량·원자재가 공출되었고, 국민 생활 수준은 전쟁 이전으로 후퇴하였다. 1946~1947년에는 가뭄과 혹한이 겹치며 대기근이 발생하였고, 베사라비아 및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에서는 아사와 질병, 심지어 식인 사례까지 보고되었다. 독일은 해당 사태에 실질적 개입을 하지 않았고, 루마니아 정부의 통제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트란스니스트리아에서는 루마니아계 정착민에 대한 우선 배급 정책으로 우크라이나계 주민의 불만이 고조되었으며, 국경을 넘나드는 레지스탕스 세력은 현지 봉기를 유도하였다. 이에 따라 루마니아 당국의 치안 부담이 가중되었고, 불안은 국내로 확산되었다. 혼란이 심화되자 일부 기득권층은 1907년 농민 반란과 같은 사태를 우려하며 이온 안토네스쿠에게 제한적 개혁을 요구하였다. 그는 군수 공장 소유지를 퇴역 군인에게 재분배하는 조치를 시행하였으나, 이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국민농민당(PNT)등 야당 세력은 이를 "큰 문제를 덮기 위한 미봉책"이라 비판하며 정권의 무능을 공격했다. 한편, 안토네스쿠는 국정에서 후퇴하고 전쟁 수행에 집중하였으며, 민정은 부수상 미하이 안토네스쿠에게 위임되었다. 이로 인해 정권은 군사독재자와 민간 관료가 병존하는 이중 권력 구조로 이행하였다. 독일은 미하이를 신뢰하지 않았으나, 이온은 그를 측근으로 유지하였다.
1950년대 초 루마니아는 독일에 철저히 종속된 상태였으며, 독일은 전시 경제 조약을 유지한 채 루마니아 자원을 지속적으로 수탈하였다. 이탈리아와 독일 간 외교 균열이 발생하자 루마니아 내부 일각에서는 독일 의존 탈피를 시도하였으나 성과는 없었다. 미하이 안토네스쿠는 민정 권한 일부 이양을 시도하며 자유당과 비밀 협상을 벌였고, 1952년 제한적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는 관제 선거에 불과했으며, 야당 후보 자격 제한과 투개표 조작이 동반되었다. 경제 상황 악화는 계속되었고, 미하이는 독일 기업 자산 국유화 및 무역 다변화를 시도하였다. 이 조치는 일정 부분 인플레이션 억제와 생산 회복에 기여했으나, 사회 개혁은 수반되지 않아 노동자·농민의 처우는 개선되지 않았다.
1955년 전국에서 노동자 및 농민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정부의 강경 진압 시도는 국왕 미하이 1세의 개입으로 저지되었다. 이 사건은 군주가 독재 권력을 제지한 사례로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고, 독일과 루마니아 내부에서는 이온 체제의 한계가 표면화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1956년 이온 안토네스쿠가 병으로 사망하였고, 권력은 미하이 안토네스쿠에게 승계되었다. 그는 북트란실바니아 회복을 목표로 헝가리 침공을 시도하였으나, 독일의 개입으로 무산되었다. 이후 독일은 루마니아 정국에 간접 개입하여 미하이를 축출하고, 국왕은 게오르게 브러티아누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군부독재 체제는 종결되었다.
1956년 5월, 브러티아누 내각은 야당과 협상 끝에 '5월 협정'을 체결하였고, 국왕 주도 하에 거국 과도내각이 출범하였다. 과도정부는 선거법 개정과 여성 참정권 확대를 포함한 민주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1957년 총선에서 국민농민당이 제1당으로 부상하였다. 새로 임명된 이온 미할라케 총리는 농지 개혁과 국유 자산 일부 민영화, 산업 합작 투자 확대 등을 중심으로 경제 정책을 개편하였다. 루마니아는 독일과의 외교를 유지하는 한편 무역 다변화를 통해 자립을 모색하였고, 소수민족 포용 정책을 통해 국내 안정을 도모하였다. 유대인, 롬인, 우크라이나계, 헝가리계에 대한 차별 법령은 철폐되었으며,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의 우크라이나계는 정치적으로 포섭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다민족 국가로의 통합에 일정 성과를 거두었으나, 일부 민족주의 세력의 반발도 불러일으켰다.
1960년대 초반, 루마니아는 국민농민당 중심의 내각책임제와 국무평의회 단원제를 도입하는 헌법 개정을 단행하며, 의회민주주의 체제를 제도화하였다. 국왕 미하이 1세는 입헌군주로서 중립적 국가원수 역할에 주력하였다. 독일은 루마니아의 민주화에 비판적이었으나, 내정 개입 여지가 크지 않아 표면적 외교 관계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독일 내전 이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정권이 들어서자, 루마니아는 정치적 위협 대상으로 간주되었고, 독일은 루마니아에 대해 파시스트 체제 복원과 전략 자원 통제권 회수를 요구하였다. 1968년 8월 12일, 독일은 '테페스 작전'을 발동하며 루마니아 침공을 개시하였다. 루마니아군은 카르파티아 산맥과 다뉴브 강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저항하였으나, 전력 열세로 인해 이를 유지하지 못하였다. 1970년 4월 19일, 독일은 루마니아의 완전 점령을 선언하였고, 루마니아 왕국은 공식적으로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