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공주

대한국의 황녀
문조 ~ 숭영제
[ 펼치기 · 접기 ]
대한국 광종의 황녀
명화공주 | 明華公主
출생 1902년 9월 29일
한성부 창경궁 인정당
사망 1940년 6월 5일 (향년 37세)
심양부 연성호텔
능묘 이선혜지묘(李善惠之墓)
[ 펼치기 · 접기 ]
본관 전주 이씨(全州 李氏)
선혜(善惠)
부모 부황: 광종 열황제
모후: 효신열황후, 생모: 영비 정씨
형제자매 1남 3녀중 차녀
배우자 김중언(1931년 결혼, 1933년 이혼)
자녀 장녀 - 이효원(李孝媛, 1932~2022)[1]
봉호 명화공주(明華公主)

개요

대한국의 황녀, 배우, 가수.

뛰어난 외모와 연기력, 가창력을 통해 대중문화의 유행을 선도하였고 황녀라는 신분, 비극적인 최후등을 말미암아 1920~30년대 한국 문화의 상징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생애

초년기

결혼과 이혼

동성애 부명

훙서

都夜深闌 도시의 밤은 깊어만 가는데
身無所臥 이 몸 하나 누일 곳 없네
娜鴛彌往 예쁜 원앙 한 마리 날아가니
爲誰點燭 누굴 위해 촛불 밝혀야 하나
명화공주가 훙서 석 달 전 남긴 한시[2]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도 정부의 요청으로 선전영화등을 찍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지만 애인 류정희의 자살, 기자들의 미행등으로 그녀의 정신건강은 점점 악화되었다.

친오빠인 선문왕은 명화공주를 걱정하며 계속 연락을 이어가려 했지만 그녀가 의도적으로 접촉을 회피했다. 그녀의 의도적인 가족과의 관계단절은 정신적 문제의 원인이 되면서도 다시 악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는데 이것이 비극의 실마리가 되고 말았다.

1940년 6월 6일, 심양에서 열린 현충일 행사에 참석하기로 한 그녀가 행사장에 나타나지 않자 관계자 두 명이 그녀가 묵던 연성호텔에 방문하여 그녀가 침대 위에 엎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호흡이 멎은 것을 알아챈 관계자는 급히 의사를 불렀지만 이미 훙한 뒤였다. 사인은 약물 오용으로 인한 급성 중독. 불면증으로 인해 바르비탈과 여러 진통제, 그리고 술을 동시에 복용하였고 이것이 치명적인 급성 심부전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 심양경무국은 자살로 사건을 종결내리려 했으나 조사 결과 뚜렷한 자살 징후를 드러내지 않았던 점[3], 유서가 없는 점, 부검 결과 여러 약물들을 정량으로 한꺼번에 복용한 점, 사망 두 시간 전 인근 상점에서 새 담배를 열갑이나 사간 점을 미루어보아 자살은 아닌 약물 오용 사고로 결론내렸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졌으며 이복오빠 세조 황제가 내탕금으로 장례비를 지원했다. 묘소는 전시라 심양 인근 기판산에 마련되었다가 1958년 조선성 양평으로 이장되었다. 제사는 매년 기일마다 그녀의 팬들과 친딸인 이효원의 자손들이 함께 지내고 있다.

기타

  • 문화사학자 김은규는 명화공주를 전근대와 근대의 충돌지점에 있었던 인물로 거론하며 그녀의 비극적 인생이 1920, 30년대 한국의 물질적 근대화와 정신적 근대화의 괴리로 인한 사회적 고통을 대변했기에 그녀가 불멸의 문화상징으로 남을 수 있었다고 평했다.
  • 그녀가 남긴 소설, 시도 상당히 많지만 훙서 직후 알려진 것은 한시 2수와 시 한편 뿐이었다. 남은 원고는 오빠 선문왕이 소유하고 있다 그의 사후인 2003년에서야 공개됐다. 그녀의 작품들은 형식적으로 중세 문학과 근현대 문학을 아우르는 동시에 과도기적 특성을 보인다. 다수의 평론가들은 뛰어난 문장력으로 근대인의 고뇌를 묘사하여 고도의 문학적 성취를 이뤘다고 보았으며 그녀가 생전 작품을 공개했더라면 문학가로도 이름을 떨쳤으리라는 아쉬움도 남겼다.
  1. 김중언 사이의 자녀. 선문왕 이계가 입양.
  2. 훙서 뒤 유품인 공책에서 쓴 날짜와 함께 발견되었다. 팬들에게는 실질적 유서로 여겨졌다.
  3. 다만 주위 사람들에게 힘들다, 피곤하다등 피로를 호소하는 말은 자주 남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