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공방전 (게르마니아)

모스크바 공방전
Битва за Москву
Die Schlacht um Moskau[1]
기간 1941년 9월 30일[2] ~ 1941년 11월 7일
장소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SFSR 모스크바
원인 독일의 침공
교전국 추축국 연합국
독일국 소비에트 연방
지휘관 추축국 연합국
아돌프 히틀러
발터 폰 브라우히치[3]
페도어 폰 보크[4]
하인츠 구데리안[5]
헤르만 호트[6]
귄터 폰 클루게[7]
알베르트 케셀링[8]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9]
에리히 회프너[10]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11]
아돌프 슈트라우스[12]
니콜라이 부하린
미하일 투하쳅스키
알렉산드르 예고로프
바실리 블류헤르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13]
게오르기 주코프[14]
이반 코네프[15]
안드레이 예료멘코[16]
세묜 부됸니[17]
세묜 티모셴코
보리스 샤포시니코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레오니트 고보로프
이사 플리예프
미하일 카투코프
니콜라이 바투틴
결과 독일국의 승리.
영향 바르바로사 작전의 성공 및 종료
모스코비엔 국가판무관부 수립
소비에트 연방의 쿠이비셰프 천도
소비에트 연방측에서 배부한 선전 포스터 "모스크바를 사수하라!"

개요

"동부전선의 병사들이여 동지들이여, 오늘 결정적이고 위대한 마지막 전투가 시작된다."
-아돌프 히틀러가 모스크바 공방전을 앞두고 병사들에게 보낸 편지

1941년 9월 30일부터 1941년 11월 7일까지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에서 독일과 소련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이 100만 명에 달하는 희생을 치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모스크바가 독일에게 함락당하면서 끝이 났다.

배경

아돌프 히틀러는 상징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소비에트 연방의 수도인 모스크바를 점령하는 것을 매우 중요한 최우선 과제로 생각했고 더 나아가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소련이 붕괴될 것이라고도 여겼는데 똑같은 이유로 소비에트 연방 또한 절대적으로 모스크바를 사수해야만 했다.

전개

양측의 준비

중부집단군은 총병력 190만, 전차 2,000대, 각종 대포 14,000문 그리고 전투기 780대의 대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여기에 전격전의 주인공인 각각 구데리안이 이끄는 2기갑군, 호트가 이끄는 3기갑집단, 회프너가 이끄는 4기갑집단도 보유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일반 야전군인 바익스가 이끄는 2군, 클루게가 이끄는 4군, 슈트라우스가 이끄는 9군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붉은 군대는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인해 초반에 최소 300만여 명의 어마어마한 병력 손실을 보았고, 전차와 전투기 또한 각각 오천 대를 넘게 잃는 등 예비 병력까지 모두 소진한 상태였다. 또한 전쟁 전 부하린의 경제 실책으로 인해 군비축소가 이루어져 약화된 붉은 군대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왕자왕하는 니콜라이 부하린을 비롯한 붉은 군대 지도부의[18] 혼란이 겹쳐 계속해서 전선에서는 계속해서 하루에 최소 수천 명에서 수만여 명의 병력을 계속해서 잃는 대참사가 잃어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가장 가까이 있었던 대규모 병력 집결지인 키예프가 함락되면서 당장 모스크바 전선에 투입할 병력과 장비가 모자란 상황이었다. 결국 모스크바 방위를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은 다 긁어모아도 병력 105만, 전차 900여 대, 대포 3,500문, 전투기 300여 대로 양과 질 모든 면에서 독일군에 비해 절망적으로 뒤져 있었다.

전투

1941년 10월 2일, 페도어 폰 보크 중부집단군 사령관은 작전명 폭풍을 하달하고 모든 병력에게 모스크바로의 진격을 시작하라고 명령했다.[19]

당시 독일군은 특유의 양익 돌파 전법으로 굉장한 재미를 보고 있었는데, 이 전술로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 정면 앞에서 방어하는 붉은 군대 서부집단군과 남쪽의 브랸스크 전선군을 포위섬멸하는 것을 계획중이었다.[20] 붉은 군대 입장에서는 그러나 안타깝게도 2중 방어망이 무력하게도 서부집단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은 결국 중부집단군에게 포위되었고, 결국 분투와 끊임 없는 저항에도 불구하고 양과 질 모든 면에서 밀려 결국 10월 27일 모든 병력이 항복하고 말았다.[21]

패배가 잇따르고 모스크바의 방위가 어려워지자 부하린은 상황을 비관하고 수도 천도를 준비하게 되고 10월 28일에 전연방 공산당과 정부의 모든 부서를 볼가 강 하류의 쿠이비셰프로 옮기라고 지시했다.[22] 상황이 매우 절망적으로 돌아가자 모스크바 시민들은 패닉 상태가 되어 피난 가려는 사람들과 혼란을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 또는 절망하는 사람들로 인해 무질서를 이루기 시작했다. 며칠 내로 독일군이 모스크바 시내에 입성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23]

결국 10월 30일, 쿠이비셰프행 열차가 위원들을 실어날랐고, 부하린은 익일 새벽에 기차에 올라 모스크바를 버리고 빠져나갔다.[24] 결국 이렇게 모스크바와 대부분의 시민들은 비참하게 버려지고 무방비 상태로 남겨졌다.

함락

모스크바 시내로 진격중인 3호 전차들

결국 11월 2일, 모든 행정 기관이 철수하고 모스크바에는 한줌의 병력과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남겨진 무기들로 무장한 민병대 밖에 남지 않았다. 이후 11월 3일부터 7일까지 모스크바의 그나마 남은 병력들과 민병대가 힘을 합쳐 산발적인 저항을 했으나 결국 11월 7일, 붉은 광장까지 진격한 적을 막을수 없었고 크렘린의 마지막까지 휘날리던 소비에트 연방의 국기가 내려가고 독일 국기가 올라가면서 모스크바 공방전은 막을 내렸다.

이후 다음날 11월 8일, 모스코비엔 국가판무관부가 수립되면서 독일의 기존의 시민들에 대한 강압적인 통치 및 탄압이 시작됐다.



"There would never again be silence for People of Germania"
"앞으로 다시는 게르마니아의 사람들에게 고요란 없을 것이다"
가장 현실적인 추축국 승리 시나리오... 그리고 그후...
대문 설정 국가 인물
  1. 혹은 Unternehmen Taifun
  2. 본격적인 모스크바 공세는 (태풍 작전) 10월 2일부터 시작됐다.
  3. 육군최고사령관
  4. 중부집단군 사령관
  5. 제2기갑군 사령관
  6. 제3기갑집단 사령관
  7. 제4군 사령관
  8. 제2항공함대 사령관
  9. 제3기갑집단 사령관, 헤르만 호트가 제17군 사령관으로 전출되어서 후임 사령관이 되었다.
  10. 제4기갑집단 사령관
  11. 제2군 사령관
  12. 제9군 사령관
  13. 붉은 군대 부총참모장
  14. 서부 전선군 사령관
  15. 칼리닌 전선군 사령관
  16.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
  17. 예비 전선군 사령관
  18. 스타프카
  19. 또한 동장군이 오기전 적어도 11월 7일에는 작전을 종료하라고 훈시했다.
  20. 그리고 당시 서부집단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은 모스크바 주변에 2중 방어망을 형성하고 중부집단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21. 그러나 그들의 저항으로 인해 중부집단군의 모스크바 진격을 3주 정도 연기시키고 꽤 많은 피해를 야기시켰다, 오죽했으면 중부집단군이 예비 병력까지 투입시키게 만들었으니...
  22. 또한 모스크바에 위치한 외교 공관들에게 모스크바에서 철수할것을 요청했다.
  23. 심지어 가게의 점주들은 아예 시민들에게 독일놈들이 가져가는 것보다는 낫다면서 아예 모든 상품을 무상으로 풀어버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24. 이때 독일군은 전방 30km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또한 이때 소비에트 연방 정부는 독일군에게 모스크바를 무방비 도시로 선포하고 시민들에게 피난령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