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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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1776년 7월 4일 ~ 2004년 10월 15일
국기 국장
이름
공식 명칭 영어. United States of America
중국어. 美利坚合众国(měi lì jiān hé zhòng guó)
한국어. 미합중국
역대 명칭 연합 식민지(영어: United Colonies) 1776년 ~ 1776년
미합중국(영어: United States of America) 1776년 ~ 2004년 10월 15일
여럿으로 이루어진 하나
(라틴어: E pluribus unum)
1776년 ~ 2004년 10월 15일
우리는 신을 믿는다
(영어: In God We Trust)
1956년 ~ 2004년 10월 15일
역사
성립일 1776년 7월 4일
해체일 2004년 10월 15일
전신 정체성상 전신
13개 식민지
후신 정체성상 후신
아메리카 연합국
지리적으로 독립한 국가(지역, 집단)
노르다메리카 국가판무관부[1]
아메리카 북태평양 연방
오대호 정부 1965년 3월
텍사스 제2 공화국 1965년 3월
주목할 만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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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 1776년 7월 4일
남북 전쟁 1861년 4월 12일
제1차 세계대전 참전 1917년 4월 6일
제2차 세계대전 참전 1941년 12월 8일
인문 환경
수도 워싱턴 D.C. 1790년 9월 16일 ~ 1948년 8월 20일
덴버 D.C. 1948년 8월 20일 ~ 2004년 10월 15일
국교 국교 없음
공용어 영어
데모님 미국인
총인구 약 80,000,000명 1949년 집계
경제
화폐 미합중국 달러 1776년 7월 4일 ~ 1990년 12월
미합중국 국내 통화 1965년 8월 3일 ~ 2004년 10월 15일
경제권 종합 경제 개발 전략 1965년 8월 3일 ~ 2004년 10월 15일
정치
독립성 주권국
지도자 국가 수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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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대 - 허버트 후버 대통령 1929년 3월 4일 ~ 1933년 3월 4일
제32대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1933년 3월 4일 ~ 1940년 3월 4일
제33대 - 토머스 E. 듀이 대통령 1940년 3월 4일 ~ 1948년 3월 4일
제34대 -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1948년 3월 4일 ~ 1950년 8월 9일[2]
제35대 - 버튼 K. 휠러 대통령 1950년 8월 9일 ~ 1952년 1월 20일
제36대 - 에버릿 덕슨 대통령 1952년 1월 20일 ~ 1956년 1월 20일
제37대 - 헨리 M. 잭슨 대통령 1956년 1월 20일 ~ 1960년 1월 20일
제38대 - 조지 월리스 대통령 1960년 1월 20일 ~ 1998년 9월 13일
제39대 - 알프 S. 딘코 대통령 1998년 9월 13일 ~ 2004년 10월 15일
국가 부수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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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대 - 찰스 커티스 부통령 1929년 3월 4일 ~ 1933년 3월 4일
제32대 - 존 낸스 가너 부통령 1933년 3월 4일 ~ 1940년 3월 4일
제33대 - 존 W. 브리커 부통령 1940년 3월 4일 ~ 1948년 3월 4일
제34대 - 버튼 K. 휠러 부통령 1948년 3월 4일 ~ 1950년 8월 9일
제35대 - 프레스콧 부시 부통령 1952년 1월 20일 ~ 1956년 1월 20일
제36대 - J. 윌리엄 풀브라이트 부통령 1956년 1월 20일 ~ 1960년 1월 20일
제37대 - 해피 챈들러 부통령 1960년 1월 20일 ~ 1965년 1월 5일
제38대 - 커티스 르메이 부통령 1965년 1월 5일 ~ 1989년 4월 1일
제39대 - 알프 S. 딘코 부통령 1989년 4월 1일 ~ 1998년 9월 13일
여당 DP 1933년 3월 4일 ~ 1940년 1월 20일 | 1948년 1월 20일 ~ 1949년 11월 22일 | 1949년 11월 22일 ~ 1952년 1월 20일
GOP 1940년 1월 20일 ~ 1948년 1월 20일 | 1952년 1월 20일 ~ 1956년 1월 20일
SRC 1956년 1월 20일 ~
군대 미합중국군

개요

미합중국(영어: United States of America, USA), 약칭 미국(영어: America)은 북아메리카에 존재했던 연방제 공화국이다.

1776년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건국된 미합중국은 1800년대 두각을 드러내며 영토를 확장했다. 1860년대에는 농업 중심의 남부와 산업화 중심의 북부 간에 노예제 확대 문제를 두고 미국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 북부가 승리하면서 노예제를 폐지하고 영구적인 국가 분열 사태를 막았지만 미국 내에서 인종 간의 갈등은 여전히 문제가 되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미국은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에 패배하면서 미국은 몰락했고, 전후 국토의 6할을 잃었다. 3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2차 세계 대전 당시 잃었던 고토 수복에 성공했고, 이후 미연합국이 출범하면서 전신이 되었다.

역사

전간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경제적·문화적으로 눈부신 번영의 시기를 맞이했다. 전후 호황 속에서 전기, 주택, 석유, 고속도로 등 새로운 산업 영역이 급속도로 성장했고, 재즈와 아르데코 예술, 할리우드 영화 산업은 미국 문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른바 ‘광란의 20년(Roaring Twenties)’이라 불린 이 시기는 미국인들에게 기술 진보와 소비사회의 가능성을 각인시킨 시기였다.

그러나 이 번영은 탄탄한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1929년 10월, 월스트리트의 주가가 붕괴되며 주식시장 대폭락이 시작되었고, 이는 곧 미국 사회 전반을 무너뜨리는 전대미문의 경제 공황으로 이어졌다. 불과 4년 만에 실업률은 3%에서 24%까지 치솟았고,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렸다. 수많은 이들이 다음 끼니를 가족 식탁이 아닌, 붐비는 자선 급식소에서 해결해야 했다.

대공황 기간 중 시카고의 실업자들이 수프 키친 밖에서 식사를 받기 위해 서 있는 모습

이 경제적 절망은 자연 재해로 더욱 악화되었다. 수십 년간 지속된 무리한 경작과 방목으로 황폐해진 대초원 지대에서는 대규모의 상층토 유실 현상이 발생했고, 이른바 '더스트 볼(Dust Bowl)'이라 불리는 재난이 중서부와 대평원 지역을 강타했다. 농작물은 제대로 자라지 않았고, 거대한 흙먼지 폭풍은 마을 전체를 덮쳤으며, 농민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대거 캘리포니아와 서부 지역으로 이주했다.

당시 연방 정부는 이 위기를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초기에는 시장의 자정 작용을 믿고 개입을 자제했으며, 후에 제한적인 구제 정책을 시행했지만 그 영향력은 미미했다. 금융권과 산업계는 정부의 신뢰를 잃었고, 일반 시민들은 지도층에 대해 분노와 실망을 쌓아갔다. '후버빌(Hoovervilles)'이라 불린 빈민촌들이 도시 외곽에 우후죽순처럼 세워졌고, 전국 곳곳에서 실업자 행진과 노동쟁의가 벌어졌다.

결국,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고, 유권자들은 변화를 요구했다. 민주당 후보 프랭클린 D. 루스벨트뉴딜(New Deal)을 통한 국가 주도의 경제 회복을 약속하며 등장했고, 이는 절망에 빠진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루즈벨트 행정부

공황의 깊이를 더한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미온적 대응은 곧 공화당 전체에 대한 국민적 불신으로 이어졌다. "후버는 은행을 구했고, 루스벨트는 우리를 구했다"는 구호는 당시 대중의 정서를 정확히 대변했다. 이에 따라 1932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했다. 비록 공화당 측에서는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이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이 시도한 신경제정책(NEP)과 유사하다며 극렬히 비판했으나, 이미 국민은 절망에서 벗어날 새로운 리더십을 갈망하고 있었다.

1933년 3월 취임한 루스벨트는 즉시 일련의 대규모 구제 정책을 시행하며 위기 극복에 나섰다. 전국의 실업자들을 공공 인프라 건설에 동원한 공공사업진흥국(WPA), 농산물 가격 회복을 위한 농업조정법(AAA), 산업 구조 재편을 겨냥한 국가산업부흥법(NIRA) 등은 국민들에게 ‘행동하는 정부’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특히 WPA는 예술가, 작가, 기술자까지 고용의 범위를 확장하며 경제 회복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1933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TVA 설립 법안에 서명하는 모습

그러나 뉴딜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적 역풍에 시달렸다. 보수 진영은 뉴딜을 "국가가 자유기업을 억압하는 사회주의적 실험"이라 비판했으며, 남부 민주당 내에서도 ‘연방의 개입이 지역 자율성을 훼손한다’는 반발이 거세졌다. 보수 언론들은 루스벨트의 정책이 “소련을 무너뜨린 바로 그 길”이라고 경고했고, 1937년의 경기 후퇴(Recession of 1937)는 이런 비판에 불을 붙였다.

그럼에도 루스벨트는 1936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했으며, 그의 리더십은 여전히 다수 국민에게 희망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세 번째 임기 도전 여부를 두고는 끝없는 고민에 빠졌다. 당시 소련이 정치적으로 혼란에 빠지고, 유럽에서는 파시즘이 확산되는 가운데 루스벨트는 미국의 정치적 안정성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1940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고, 자신의 최측근이자 WPA의 실무 책임자였던 해리 홉킨스를 민주당 후보로 추천했다.

홉킨스는 1940년 봄 위장성 위암 진단을 받았지만, 선거운동에서는 타협하지 않는 투지를 보였다. 캘리포니아 베이커즈필드에서 유세를 벌이는 공화당 후보 토머스 E. 듀이와 팽팽한 접전을 벌였고, 결국 0.4%의 박빙 차이로 듀이가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12년간 지속된 루스벨트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공화당이 다시금 백악관을 되찾게 되었다.

루스벨트는 퇴임 후 덴버에서 조용한 삶을 보내며 정치적 평론가로 활동했다. 그의 정책은 한편으론 "미국 민주주의의 복원자"로, 또 한편으로는 "연방 권력의 과도한 확장"으로 평가되며 논쟁의 중심에 남게 되었다.

듀이 행정부

1940년 9월 캘리포니아 베이커스필드에서 선거 운동을 펼치는 듀이

토머스 E. 듀이는 1941년 1월, 루즈벨트의 그림자가 여전히 짙게 남아있는 백악관에 입성했다. 그는 선거 기간 동안 줄곧 "정부의 크기를 줄이고, 시장의 자율을 회복시키겠다"는 공약을 내세웠고, 취임 이후 불과 열 달 동안 FDR 정권의 핵심 뉴딜 정책들을 급속히 해체했다. 공공사업진흥국(WPA)과 민간보존단(CCC), 그리고 국가산업부흥법(NIRA)과 같은 주요 기관들은 대폭 축소되거나 폐지되었고, 연방정부의 재정 투입은 줄어들며 경제는 다시 침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듀이 행정부는 국내 문제뿐 아니라 외교에서도 루즈벨트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유럽과 아시아에서 추축국의 팽창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도, 듀이는 철저한 고립주의 노선을 고수했다. 그의 외교 전략은 "미국이 강대국의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그들도 우리를 자극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적 계산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군비는 감축되었고, 해군과 공군의 예산은 루즈벨트 시절보다 30% 이상 줄어들었다. 이 결정은 특히 태평양 함대에 치명적 영향을 미쳤다.

국내에서는 이러한 정책에 대해 ‘현명한 긴축’이라는 평가도 있었으나, 국제 정세는 듀이의 계산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일본 제국은 이미 중국 대륙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고, 독일프랑스를 점령한 뒤 영국 본토를 위협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듀이 행정부는 고립주의 외교와 군비 축소라는 이중 실책을 범하며 미국의 국제적 입지를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결국, 이 신중함은 비극적인 실수로 귀결되었다. 듀이가 취임한 지 불과 10개월 후, 미국은 진주만과 서부 해안에서 전격적인 공격을 받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 끌려들어가게 된다. 그의 낙관적 접근은 완전히 뒤집히며, “듀이 독트린”은 전후 미국 정치에서 가장 무능한 전략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2차세계대전

개전

진주만 탈출 시도 후 화재가 발생한 USS 요크타운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에 정박 중이던 미국 태평양 함대는 일본 제국 해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USS 렉싱턴과 USS 엔터프라이즈를 포함한 23척의 함정이 침몰하거나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수천 명이 사망했다.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듀이 행정부 하의 미국은 이 공격에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했다. 미국은 단지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 본토에 소수의 병력을 파견하여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그쳤으며, 그 사이 일본은 태평양 전역에서 미국 및 유럽 식민지를 연달아 점령해 제국을 확장해 나갔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 해군은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진주만에서 살아남은 함정들과 새로 투입된 전력은 일본 해군의 정밀한 타격에 의해 궤멸되었고, 필리핀과 말레이반도 등 동남아시아 전선에서도 연이어 패퇴했다. 그러나 미국의 산업력은 여전히 건재했다. 자동차 공장들은 전차와 폭격기를 쏟아냈고, 조선소는 매일같이 군함을 진수했다. 이 시점부터 미국은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반격을 시작했으며, 1943년까지 대부분의 해전에서 일본보다 우세한 전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바다사자 작전과 영국의 몰락

미국이 전쟁에 참전했을때 유럽의 상황은 아주 좋지 않았다. 1941년 6월, 독일은 소련보다 먼저 영국을 상대로 대규모 상륙작전인 바다사자 작전(Operation Sealion) 을 개시하였다. 당시 미국은 고립주의적 기조 하에 군비를 충분히 확충하지 못한 상태였고, 영국은 프랑스에 이어 독일의 다음 목표가 되었다.

독일은 IRA와의 접촉을 통해 벨파스트를 경유한 북아일랜드 침공에 성공했고, 아일랜드 항구들을 해군 기지로 활용해 미국-영국 간의 보급선을 차단하였다. 공중에서는 루프트바페가 제공권을 장악했고, 지상에서는 독일 국방군이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남부에 동시 상륙하여 전선을 확대해 나갔다.

미국은 아이젠하워 장군을 중심으로 스코틀랜드 방어에 병력을 파견하였으며, 에든버러 일대에서 치열한 방어전을 펼쳤으나, 결국 1942년 초 런던이 함락되고 영국은 1942년 8월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통해 독일에 항복하였다. 영국 왕실은 캐나다로 망명했고, 미국·호주·뉴질랜드·캐나다는 연합국의 최후 보루가 되었다.

태평양에서의 패배

1942년 8월, 하와이에서 미 해군과 일본 해군 간 사상 최대의 해전이 벌어졌다. 일본 제국 해군은 진주만 재습격 작전을 개시해 하와이를 점령했다. 미국은 1942년 중반 대규모 반격을 감행하여 일시적으로 진주만을 탈환했지만, 1943년 초 다시 일본의 제2차 공세에 의해 하와이는 완전히 함락되었다. 이 전투에서 미국은 함대의 절반 이상을 잃었지만, 일본 해군도 거의 전멸했다. 그러나 이 전투 후, 미 해병대는 결국 이오지마를 포기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10월, 일본군은 뉴질랜드에 상륙해 오클랜드와 웰링턴을 점령했다. 이로인해 미국과 호주와의 해상 연결망이 차단되었고, 태평양 연합군의 보급선은 붕괴되었다.

소련의 몰락

1942년 말, 영국 본토를 완전히 장악한 독일은 소련으로 방향을 틀었다. 1942년 7월, 독일은 B-B 작전을 개시하며 소련을 침공했다. 독일의 침공을 예상하지 못했던 소련은 곧바로 미국과 접촉하여 연합국에 들어갔으나, 독일군의 빠른 진격과 동방에서 일본군의 참전으로 3개월채 안되서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가 함락되었다. 그럼에도 소련군은 격렬히 저항하며 우랄산맥 뒤편으로 후퇴했다.

듀이의 절망적인 재선

듀이는 전쟁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1944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이는 아이젠하워 장군이 스코틀랜드 방어에서 보여준 활약과, 민주당의 분열 덕분이었다. 그러나 재선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최악의 국면이었다.

같은 시기, 대서양과 태평양에서는 미국과 추축국 간의 해전이 거세게 벌어졌다. 대서양에서는 노퍽 해전과 버뮤다 항로 전투에서, 태평양에서는 사이판 해전과 필리핀 해협 전투에서 수많은 함대가 격침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방향을 바꾸진 못했다.

본토 상륙

1946년 봄, 독일과 일본은 각각 아레스 작전(Operation Ares)과 광야 작전(Operation Wüste)을 실행하며 미국 본토 상륙을 단행했다. 일본군은 샌디에이고와 시애틀에, 독일군은 보스턴과 노퍽에 상륙했다. 뉴욕은 독일군에게 점령되었고, 대서양 함대는 사실상 괴멸했다.

1946년 7월 4일, 독일의 전략폭격기 Messerschmitt Me.264가 버뮤다에서 출격해 미국의 레이더망을 피해 미 동부 상공에 도달했다. 오전 8시 39분, 하이젠베르크 장치(Heisenberg Device), 즉 독일의 원자폭탄이워싱턴 D.C. 상공에서 폭발했다.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국방부는 단숨에 증발했고, 대통령 관저는 지하 벙커로 옮겨졌다. 수도는 임시로 시카고로 옮겨졌으나, 이는 미국 패배의 상징적 순간이었다.

샌프란시스코 & 뉴욕 조약

1949년 6월, 워싱턴 D.C. 점령지에서 독일 및 일본 대표단이 미국 영토 분할을 협의하였다. 그리고 1949년 8월 13일, 독일은 뉴욕에서, 일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동시에 생중계로 종전조약에 서명하였으며, 이는 역사상 유례없는 이중 조약으로 불린다.

미국은 전체 영토의 60%를 상실하고, 텍사스 해안을 제외한 모든 해안선을 상실하였다. 중부 내륙만이 제한적 자치권을 가진 미국 본토 정부로 남았다. 종전 이후, 미국은 패전국으로서 독일과 일본에 대한 100년간의 비무장 중립 조약을 체결하였다.

전후

정치

참고

비고(Obsidian)

1944년 대선에서는 대통령 듀이가 전시 지도자의 연속성을 호소했지만, 민주당은 루스벨트 정권의 체계적 정비 능력을 회상시키며 제임스 A. 팔리를 내세웠다. 그러나 헨리 A. 월리스가 급진 좌파 성향의 진보당을 창당하며 표를 분산시켰고, 이로 인해 듀이가 재선되었다. 하지만 전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독일군이 캐나다를 통해 뉴욕 북부까지 진출하는 상황에 이르자, 미국의 국내 정치 구조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1948년 대선에서는 민주당이 해리 S. 트루먼을 전면에 내세워 복귀를 노렸고, 보수 공화당의 상징인 로버트 A. 태프트와 대결을 벌였다. 하지만 선거는 정당 정치의 붕괴를 보여주는 서막이었다. 남부의 조지 S. 패튼 장군이 국민당(National Party)을 창당하고 강경한 반공, 반독 노선을 주장하면서 남부 유권자들을 흡수했고, 좌파 유권자들은 월리스의 진보당에 결집했다. 선거 결과 트루먼은 간신히 승리했으나, 국내 정치 지형은 완전히 파편화되었다.

트루먼은 독일군의 상륙 이후 수도를 워싱턴 D.C.에서 덴버로 이전하고 “산맥 방어선” 구축했으나, 이미 전략 자산의 상당수가 파괴된 상황이었다. 1949년 내슈빌이 함락되면서 여론은 급속도로 반전했고, 결국 같은 해 가을, 샌프란시스코 뉴욕에서 종전 협정[3]에 서명하며 미국은 공식적으로 패전국이 되었다.

패전 직후 트루먼은 참전 결정과 전략 실패의 책임을 지고 임기 도중 사임했으며, 그의 뒤를 이은 부통령 버튼 K. 휠러는 1952년까지 위기 대응에 집중했으나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는 데 실패했다. 그 해 대선에서는 공화당의 신진 정치인 에버릿 덕슨이 승리했으나, 민주당, 진보당, 국민당이 각각 선거인단을 확보하며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4개 정당이 본선에서 의미 있는 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1956년 대선에서는 이 같은 정치 혼란 속에 신생 진보당과 국민당을 주축으로 군소 정당들이 주권연합이라는 연합체를 결성하며 반민주·반공화당 전선을 구축했고, 헨리 M. 잭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당선된 헨리 M. 잭슨 대통령은 “강한 연방, 회복하는 경제, 존엄한 평화”를 기치로 내세우며 미국 재건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주권연합은 전쟁 패배 이후 정치적 신뢰를 잃은 민주당과 공화당을 대체해 급부상했으며, 잭슨은 이 새로운 정치 연합의 중심 인물로서, 전시 체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질서 있는 회복을 이끌었다.

1960년에는 주권연합 내에서 남부 보수파가 주도권을 장악하며 조지 월리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월리스는 ‘전시 비상령’을 이유로 1964년 대선을 무기한 연기했으며, 야당 활동을 금지하고 주요 언론 기관을 국유화했다. 이에 반발한 오대호 주변 주(미시간, 위스콘신, 일리노이 등)는 연방에서의 이탈을 선언하고 오대호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외부 문서

  1. 이스트 코스트(East Coast) 지역은 전역이 국가판무관부에 합병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상징적인 일부 도시들은 독일식 명칭으로 개칭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사례로, 뉴욕(New York)이 노이 이오르크(Neu Iork)로, 워싱턴 D.C.(Washington D.C.)가 비스마르크슈타트(Bismarckstadt)로 개칭된 것이 있다.
  2. 임기 도중 사임
  3. 1949년 6월 동안 워싱턴 D.C.에서 일본측과 독일측이 영토 분활에 대해 협의했고, 최종 종전 확정 조약은 각각의 점령지인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 8월 13일, 생방송에서 공동으로 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