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인민공화국 최고영수 박영준 朴永俊 | Arai Eishun | |
출생 | 1906년 5월 18일 |
대한제국 함경북도 부령군 청하면 | |
사망 | 1988년 8월 11일 |
동아인민공화국 경도 진영구 여래정 | |
임기 | 동아인민공화당 영수 |
1943년 7월 27일 ~ 1988년 8월 11일 | |
동아인민공화국 최고영수 | |
1942년 10월 12일 ~ 1988년 8월 11일 | |
동아인민공화국 총리 | |
1942년 10월 12일 ~ 1967년 1월 31일 | |
동아인민혁명군 총사령관 | |
1944년 8월 8일 ~ 1986년 1월 2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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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동아의 초대 최고영수이자 독재자, 동아인민공화국을 건국한 국부.
여러 의미로 현대 동아 정치인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축에 드는 인물이다. 오늘날 동아에선 국부급인 인물로 부산 신 공항의 이름도 박영준 국제공항이다. 허나 동아의 반공주의 성향 반 체제 세력들과 5.7 전쟁 당시 이탈리아 등으로 망명한 옛 대일본제국 시대의 기득권층, 박영준 치하에서 정치범으로 몰려 탄압받은 일부 동아 국민들은 그를 국부로 인정하지 않는 실정이다. 물론 국내외 동아 민주화 세력들의 경우 이전 천황 세력에 대해서도 그닥 호의적이진 않기 때문에, 반정부 세력도 세부적으로 나눠 볼 필요는 있다.
사상
그의 사상은 간단하게 말해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사회적/경제적으로 평등해야 한다는 사회주의로, 자본주의 및 봉건제는 철폐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당연히 계급은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천황제 타도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생애
초기 생애
그는 1906년 5월 18일 대한제국 함경북도 부령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6년 11살의 나이로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효고현 고베시에 정착하였다.
이후 그는 1922년 일본공산당에 입당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입문했고 1936년에 스즈키 젠비와 결혼해 3남 3녀를 두었다.
그리고 그는 비밀리에 일본 내 사회주의자들 및 추종자,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인민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1939년 9.18 인민혁명을 주도했다.
동아의 지도자
1939년 9.18 인민혁명이 일어난 이후 그는 일본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스스로 총리직에 취임한 후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가 이끄는 황군과 내전을 벌이면서 일본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혁명에 참가했던 다른 정파들이 반발했다. 우선 황도파는 통제파를 몰아내는 것에는 찬성했지만 공화국에는 고개를 저었다. 또한 그동안 일본 정권에 대항하여 비밀리에 반전 운동을 해온 가타야마 데쓰 역시 그에 의해 1940년 7월 체포되기도 했다. 그는 만 15세 이상의 모든 국민들에게 인민민주주의 체제 찬반투표를 실시했는데 98% 이상이 찬성했다. 이에 따라 1942년 10월 신헌법을 공포하여 동아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는 스스로 종신 최고영수 겸 총리가 되었다.
1940년 5월 25일 실시된 총선에서는 전투혁명동맹 측에 유리하게 진행된 선거 과정에도 불구하고 일본사회당 우파가 총선에서 승리하며 정치 혼란이 심화되었고, 결국 1940년 7월 19일 가타야마 데쓰 총리를 긴급 체포하고 의회를 해산하였다. 이후 일본은 약 7년 간의 내전으로 접어들게 된다.
사후
그는 1988년 8월 11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82세. 그가 사망한 후 동아의 최고영수는 야마다 도시오가 승계했다. 경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그의 시신을 안치한 영묘가 건설되었고 그곳에 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