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원군 (조선)

조선 국왕
[ 펼치기 · 접기 ]
추존
목조
태조 4대조
추존
익조
태조 3대조
추존
도조
태조 2대조
추존
환조
태조 1대조
초대
태조
1392 - 1398
2대
정종(定宗)
1398 - 1400
3대
태종
1400 - 1418
4대
세종
1418 - 1450
5대
문종
1450 - 1466
6대
광종
1466 - 1480
7대
인종
1480 - 1501
8대
성종
1501 - 1529
9대
현종
1529 - 1538
10대
혜종
1538 - 1543
11대
경종
1543 - 1558
12대
명종
1558 - 1581
13대
중종
1581 - 1605
14대
숙종
1605 - 1617
15대
덕종
1617 - 1634
16대
정종(正宗)
1634 - 1656
17대
단종
1656 - 1660
18대
영성군
1660 - 1678
19대
고종
1678 - 1699
20대
헌종
1699 - 1742
21대
철종
1742 - 1745
22대
순종
1745 - 1791
23대
영종
1791 - 1814
24대
성원군
1814 - 1828
조선 국왕 · 조선 총재 · 대한 황제
조선 국왕
[ 펼치기 · 접기 ]
추존
목조
태조 4대조
추존
익조
태조 3대조
추존
도조
태조 2대조
추존
환조
태조 1대조
초대
태조
1392 - 1398
2대
정종
1398 - 1400
3대
태종
1400 - 1418
4대
세종
1418 - 1450
5대
문종
1450 - 1466
6대
광종
1466 - 1480
7대
인종
1480 - 1501
8대
성종
1501 - 1529
9대
현종
1529 - 1538
10대
혜종
1538 - 1543
11대
경종
1543 - 1558
12대
명종
1558 - 1581
13대
중종
1581 - 1605
14대
숙종
1605 - 1617
15대
덕종
1617 - 1634
16대
정종
1634 - 1656
17대
단종
1656 - 1660
18대
영성군
1660 - 1678
19대
고종
1678 - 1699
20대
헌종
1699 - 1742
21대
철종
1742 - 1745
22대
순종
1745 - 1791
23대
영종
1791 - 1814
24대
성원군
1814 - 1828
조선 국왕 · 조선 총재 · 대한 황제
대한 황제
[ 펼치기 · 접기 ]
추존
태조 고황제
조선왕조 시조
추존
철조 의황제
세조 4대조
추존
순조 열황제
세조 3대조
추존
희조 목황제
세조 2대조
추존
영조 명황제
세조의 숙조부
추존
장조 무황제
세조 1대조
초대
광무제 세조 태황제
1844 - 1861
4대
강정제 효종 혜황제
1921 - 1922
비정통 추존
 회황제
조선 국왕 · 조선 총재 · 대한 황제
대한 황제
[ 펼치기 · 접기 ]
추존
태조 고황제
조선왕조 시조
추존
철조 의황제
세조 4대조
추존
순조 열황제
세조 3대조
추존
희조 목황제
세조 2대조
추존
영조 명황제
세조의 숙조부
추존
장조 무황제
세조 1대조
초대
세조 태황제
1844 - 1861
2대
열조 인황제
1861 - 1888
3대
문종 소황제
1888 - 1921
4대
효종 혜황제
1921 - 1922
비정통 추존
 회황제
조선 국왕 · 조선 총재 · 대한 황제
조선의 연호
경성
慶成
1792년 1월 24일 ~ 1815년 2월 8일
경성 1년 1월 1일 ~ 경성 23년 12월 30일
가평
嘉平
1815년 2월 9일 ~ 1829년 2월 3일
가평 1년 1월 1일 ~ 가평 14년 12월 30일
건헌
建憲
1829년 2월 4일 ~ 1844년 9월 9일
건헌 1년 2월 4일 ~ 건헌 15년 9월 9일
조선 24대 국왕
誠源君 · 성원군
대한 비정통 추존 황제
懷皇帝 · 회황제
왕세자
1792년 11월 28일 ~ 1814년 7월 17일
경성 1년 10월 15일 ~ 경성 23년 6월 1일
국왕
1814년 7월 17일 ~ 1828년 5월 11일
경성 23년 6월 1일 ~ 가평 14년 3월 28일
출생
1784년 8월 30일
융희 39년 7월 15일
즉위
1814년 7월 17일 (29세)
경성 23년 6월 1일
사망
1829년 10월 24일 (45세)
건헌 1년 9월 27일
본관
전주 이씨
훤 · 煊
부모
영종 / 명희왕후
형제자매
3남 중 장남
왕비
회양군부인 · 회령군부인 · 회인군부인 · 회덕군부인
봉호
성원군 · 誠源君
24대
성원군
1814 - 1828
조선 24대 국왕
誠源君 · 성원군
대한 비정통 추존 황제
懷皇帝 · 회황제
왕세자
1792년 11월 28일 ~ 1814년 7월 17일
경성 1년 10월 15일 ~ 경성 23년 6월 1일
국왕
1814년 7월 17일 ~ 1828년 5월 11일
경성 23년 6월 1일 ~ 가평 14년 3월 28일
출생
1784년 8월 30일
융희 39년 7월 15일
즉위
1814년 7월 17일 (29세)
경성 23년 6월 1일
사망
1829년 10월 24일 (45세)
건헌 1년 9월 27일
본관
전주 이씨
훤 · 煊
부모
영종 / 명희왕후
형제자매
3남 중 장남
왕비
회양군부인 · 회령군부인 · 회인군부인 · 회덕군부인
봉호
성원군 · 誠源君
조선 24대 국왕
성원군의 업적
[ 펼치기 · 접기 ]
홍통교작친팔방
금불로익원작
태정시이도란세
남만입공
인도차이나 영향력 확대
시암, 버마, 월남, 문래에서 조공-책봉을 맺어 외교적 우위를 확립하고 남만 삼국의 안정을 보존키로 약조했다. 이에 따라 조선의 중재 아래 각국의 국경이 정해지고 분란을 종식시키는데 큰 힘을 쏟았다.
경진남정
브루나이 내정 안정화
양이가 문래국에 대해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술탄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자 국정을 돌볼 수 없었고, 포도아와 영길리, 화란의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에 문래의 산탄은 상국 조선의 힘을 빌려 정국을 회복시키고자 했다. 이에 원병과 사절을 보내 정사를 바로세우도록 도왔다.
영선사 파견
대규모 서양 사절
토이고, 나선, 화란, 덕의지, 불란서, 포도아, 서반아, 영길리, 미리견, 서전, 오지리 일대를 돌아보고 양이의 풍속과 기예를 두루 알아보기위해 파견한 대규모 사절단으로 오백여명으로 외륜식 증기목선 다섯 척을 타고 남만, 인도양, 희망봉, 지중해, 흑해, 북해, 북미, 마젤란 해협을 거쳐 아카풀코에서 귀환하였다.
바세라 조약
필리핀의 공동통치
반도전쟁 이후 스페인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는데, 1821년 멕시코 제국이 독립하면서 필리핀, 쿠바, 푸에르토리코 일대의 영향력도 감소하게 되었다. 또한, 영국의 필리핀 침공에서도 조선의 원군으로 승리하였으니, 조선의 필리핀 영향력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나아가 여송도 북부의 전권은 조선에게 있었으나 그 경계가 모호하여 마니라 외의 주요 지역에 대해서 조선의 관리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통치 지역의 확대는 오히려 조선의 재정을 다소 악화시키는데 일조했다. 이에 조선은 필리핀의 자치권을 확대하는 대신 필리핀의 정치주체는 스페인과 조선이 양분하여 가지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필리핀 도독령(여송 도독부)는 양국의 공동관할 식민지로 지정되었으며, 플렌테이션 농업과 고무 생산을 새로 도입하였다.
조영수호통상규약
영국과 교역 증대
기존 교역 상대국이였던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요청에 의해서 영국의 동남아 진출은 계속해서 지체되었다. 영선사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영국 외무부는 이에 대해 토로하였으며, 영국 측에서는 지속적으로 교역 증대를 요구했다. 이에 따라 조선은 네덜란드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영국 상선의 입선을 허락하였으며, 이들과 조선인 사이에서 교역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 다만, 조선은 영국의 세력 확대 특히, 인도 잠식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으며, 영국의 독점무역 금지와 보호관세 감조등을 요구하여 약조받았다.
가평지역
대몽골 예방전쟁
성원군은 몽골의 위협을 극도로 민감했으며, 튀시예드와 세첸 칸국에 대해 친정에 나서서 그들을 복속시키길 원했다. 그러나 관료들은 세첸 칸국이 이미 우리에게 조공을 바치고 우호적인 상태이며, 나선의 남하를 저지해줄 동맹이라는 점에서 만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원군은 병사를 일으켜 대규모 북벌에 나섰다. 북벌은 총 세차례에 이루어졌으나 조정 관료가 이를 세첸 칸국에 미리 알리거나 몽골이 충돌을 피했기 때문에 그렇다 할 전투없이 막대한 물자만 소모하였으며, 고비사막을 횡단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낙오되거나 고사하였으며 보급 또한 힘들어 많은 국력을 소모하였다. 이 때문에 민심이 크게 흉흉해졌다.
탄화등 도입
가로등·가로수의 설치
석탄을 태운 기체를 태워 밝은 빛을 내는 탄화등을 도입하여 거리와 마을을 비추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밤에도 치안을 유지하고 산짐승을 내쫓으며 안정적으로 일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야간에도 우정 업무나 배달, 운송의 업이 쉬지 않도록 하여 해가 지더라도 많은 일이 성사되도록 장려하였다.
수원화성 축조
행정 계획도시
사대문 안에 너무 많은 관청과 중앙군이 자리잡으면서 관청 이전을 통해 수도 과밀화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수원에 화성을 축조하고 팔청과 금위청을 이전시켰다. 또한, 화성과 한성 사이에 철로를 놓아 쉬이 이동토록 고려했으며, 수원군을 화성군으로 개칭하고 한성부에 편입시켰다.
상하수도 정비사업
도시 위생 관리
한성과 각 부의 부청소재지에 방대한 상하수도 매설, 준공 작업과 정화소를 설치하여 정비토록 하였으며, 새로이 제작된 변기를 설치한 공공변소를 확대하였다. 공욕탕도 정비되어 위생적으로 개선되었고 저온 살균과 근대 정수 과정을 수립하여 물의 오염을 줄이고자 노력하였다.
임수보만정
정국의 문란
가평 말에 이르러 수보 서은평를 신임해 수보를 종신 상설 직위로 지정하고 이에 반대하는 중추원을 해산시켜 탄핵을 막았으며, 궁내 정치에 골돌하여 상박제를 마비시키고 한림원을 영합 기관으로 전락시켰다. 이후 대구 서씨가 정권을 좌지우지하여 각종 폐단과 비리를 양성했으며, 기존 열왕이 제정한 복지 정책을 줄여 방탕한 삶을 살았다. 이는 성원군에게 큰 영향을 미쳐 주색과 환락에 빠지도록 했으며, 나아가 정사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 서은평의 후광으로 입궁한 서현공은 수보를 핑계로 각종 숙청과 암살을 꾸몄으며 성원군을 타락시켜 정사를 문란하게 하였다. 1827년 서은평은 서현공의 악행에 화를 입을 것을 우려하여 파십사신을 일으켜 난서섬으로 유배보내고 서현공의 외척인 풍천 임씨 관리로 모조리 파직시켰다. 그럼에도 정사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아 서은평은 자신을 탓하여 자결하였다.
정해사변
군주제 폐지
각종 토목공사와 원병, 정국의 문란과 횡포에 참지 못한 지식인과 서민들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일본과 만주 각지에서도 청과 막부 복권을 위시하여 토호가 거병하였으니, 정사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만주에서 일어난 맹특아태의 난과 일본에서 일어난 등원의 난은 제압되었으나 이를 제압한 지방관이 조정을 배반하고 왕을 참칭했다. 성원군의 형제는 모두 성원군에 의해 숙청되었으나 조카인 이청을 옹위한 조응영 지원수부사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러나 이청은 왕위를 거부했고, 결국 중추부에서 이 일을 의논토록 하였다. 그 사이 국정은 혼란해져서 대구에서는 근왕을 내세워 대구서씨를 중심으로 거병했으며, 평양 일대에서는 영선사 인물을 중심으로 군주제 폐지 운동이 격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권리를 억압당한 지주들도 지역에서 봉기하며 조선은 내전의 구렁텅이로 떨어졌다. 이 혼란의 시기에 중추부는 미리견의 제도를 본 따 이청을 4년 임기의 수상에 임명토록 결의했는데, 이청은 실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강화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弘通交作親八方
널리 통교하여 팔방과 친해져라
今不勞翌怨昨
오늘에서 일하지 아니하면 내일이 되어 어제를 원망한다.
怠政是以到亂世
정무를 돌보지 않아 난세에 이르렀다.
조선 틀 목록
성원군
조선 24대 국왕
성원군의 업적
[ 펼치기 · 접기 ]
남만입공
인도차이나 영향력 확대
시암, 버마, 월남, 문래에서 조공-책봉을 맺어 외교적 우위를 확립하고 남만 삼국의 안정을 보존키로 약조했다. 이에 따라 조선의 중재 아래 각국의 국경이 정해지고 분란을 종식시키는데 큰 힘을 쏟았다.
경진남정
브루나이 내정 안정화
양이가 문래국에 대해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술탄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자 국정을 돌볼 수 없었고, 포도아와 영길리, 화란의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에 문래의 산탄은 상국 조선의 힘을 빌려 정국을 회복시키고자 했다. 이에 원병과 사절을 보내 정사를 바로세우도록 도왔다.
영선사 파견
대규모 서양 사절
토이고, 나선, 화란, 덕의지, 불란서, 포도아, 서반아, 영길리, 미리견, 서전, 오지리 일대를 돌아보고 양이의 풍속과 기예를 두루 알아보기위해 파견한 대규모 사절단으로 오백여명으로 외륜식 증기목선 다섯 척을 타고 남만, 인도양, 희망봉, 지중해, 흑해, 북해, 북미, 마젤란 해협을 거쳐 아카풀코에서 귀환하였다.
바세라 조약
필리핀의 공동통치
반도전쟁 이후 스페인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는데, 1821년 멕시코 제국이 독립하면서 필리핀, 쿠바, 푸에르토리코 일대의 영향력도 감소하게 되었다. 또한, 영국의 필리핀 침공에서도 조선의 원군으로 승리하였으니, 조선의 필리핀 영향력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나아가 여송도 북부의 전권은 조선에게 있었으나 그 경계가 모호하여 마니라 외의 주요 지역에 대해서 조선의 관리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통치 지역의 확대는 오히려 조선의 재정을 다소 악화시키는데 일조했다. 이에 조선은 필리핀의 자치권을 확대하는 대신 필리핀의 정치주체는 스페인과 조선이 양분하여 가지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필리핀 도독령(여송 도독부)는 양국의 공동관할 식민지로 지정되었으며, 플렌테이션 농업과 고무 생산을 새로 도입하였다.
조영수호통상규약
영국과 교역 증대
기존 교역 상대국이였던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요청에 의해서 영국의 동남아 진출은 계속해서 지체되었다. 영선사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영국 외무부는 이에 대해 토로하였으며, 영국 측에서는 지속적으로 교역 증대를 요구했다. 이에 따라 조선은 네덜란드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영국 상선의 입선을 허락하였으며, 이들과 조선인 사이에서 교역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 다만, 조선은 영국의 세력 확대 특히, 인도 잠식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으며, 영국의 독점무역 금지와 보호관세 감조등을 요구하여 약조받았다.
가평지역
대몽골 예방전쟁
성원군은 몽골의 위협을 극도로 민감했으며, 튀시예드와 세첸 칸국에 대해 친정에 나서서 그들을 복속시키길 원했다. 그러나 관료들은 세첸 칸국이 이미 우리에게 조공을 바치고 우호적인 상태이며, 나선의 남하를 저지해줄 동맹이라는 점에서 만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원군은 병사를 일으켜 대규모 북벌에 나섰다. 북벌은 총 세차례에 이루어졌으나 조정 관료가 이를 세첸 칸국에 미리 알리거나 몽골이 충돌을 피했기 때문에 그렇다 할 전투없이 막대한 물자만 소모하였으며, 고비사막을 횡단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낙오되거나 고사하였으며 보급 또한 힘들어 많은 국력을 소모하였다. 이 때문에 민심이 크게 흉흉해졌다.
탄화등 도입
가로등·가로수의 설치
석탄을 태운 기체를 태워 밝은 빛을 내는 탄화등을 도입하여 거리와 마을을 비추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밤에도 치안을 유지하고 산짐승을 내쫓으며 안정적으로 일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야간에도 우정 업무나 배달, 운송의 업이 쉬지 않도록 하여 해가 지더라도 많은 일이 성사되도록 장려하였다.
수원화성 축조
행정 계획도시
사대문 안에 너무 많은 관청과 중앙군이 자리잡으면서 관청 이전을 통해 수도 과밀화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수원에 화성을 축조하고 팔청과 금위청을 이전시켰다. 또한, 화성과 한성 사이에 철로를 놓아 쉬이 이동토록 고려했으며, 수원군을 화성군으로 개칭하고 한성부에 편입시켰다.
상하수도 정비사업
도시 위생 관리
한성과 각 부의 부청소재지에 방대한 상하수도 매설, 준공 작업과 정화소를 설치하여 정비토록 하였으며, 새로이 제작된 변기를 설치한 공공변소를 확대하였다. 공욕탕도 정비되어 위생적으로 개선되었고 저온 살균과 근대 정수 과정을 수립하여 물의 오염을 줄이고자 노력하였다.
임수보만정
정국의 문란
가평 말에 이르러 수보 서은평를 신임해 수보를 종신 상설 직위로 지정하고 이에 반대하는 중추원을 해산시켜 탄핵을 막았으며, 궁내 정치에 골돌하여 상박제를 마비시키고 한림원을 영합 기관으로 전락시켰다. 이후 대구 서씨가 정권을 좌지우지하여 각종 폐단과 비리를 양성했으며, 기존 열왕이 제정한 복지 정책을 줄여 방탕한 삶을 살았다. 이는 성원군에게 큰 영향을 미쳐 주색과 환락에 빠지도록 했으며, 나아가 정사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 서은평의 후광으로 입궁한 서현공은 수보를 핑계로 각종 숙청과 암살을 꾸몄으며 성원군을 타락시켜 정사를 문란하게 하였다. 1827년 서은평은 서현공의 악행에 화를 입을 것을 우려하여 파십사신을 일으켜 난서섬으로 유배보내고 서현공의 외척인 풍천 임씨 관리로 모조리 파직시켰다. 그럼에도 정사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아 서은평은 자신을 탓하여 자결하였다.
정해사변
군주제 폐지
각종 토목공사와 원병, 정국의 문란과 횡포에 참지 못한 지식인과 서민들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일본과 만주 각지에서도 청과 막부 복권을 위시하여 토호가 거병하였으니, 정사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만주에서 일어난 맹특아태의 난과 일본에서 일어난 등원의 난은 제압되었으나 이를 제압한 지방관이 조정을 배반하고 왕을 참칭했다. 성원군의 형제는 모두 성원군에 의해 숙청되었으나 조카인 이청을 옹위한 조응영 지원수부사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러나 이청은 왕위를 거부했고, 결국 중추부에서 이 일을 의논토록 하였다. 그 사이 국정은 혼란해져서 대구에서는 근왕을 내세워 대구서씨를 중심으로 거병했으며, 평양 일대에서는 영선사 인물을 중심으로 군주제 폐지 운동이 격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권리를 억압당한 지주들도 지역에서 봉기하며 조선은 내전의 구렁텅이로 떨어졌다. 이 혼란의 시기에 중추부는 미리견의 제도를 본 따 이청을 4년 임기의 수상에 임명토록 결의했는데, 이청은 실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강화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 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