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불요

신미불요
辛未佛擾 | Franco-Korean War
기간
1871년 6월 1일 ~ 1872년 7월 3일
장소
한반도, 대월 반도, 남중국해
원인
한국-프랑스 간 무역 분쟁
프랑스의 보불전쟁 패배
교전국
대한제국
프랑스 공화국
지휘관
건양황제 아돌프 티에르
병력
180,000명 120,000명
피해
7,483명 15,183명
결과
대한제국의 승리
영향
대한제국의 인도차이나 확보
프랑스의 동인도 영향력 약화
한국의 태평양 확장 정책 수립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

개요

France's Great Humiliation in Asia!

아시아에서 프랑스가 겪은 대굴욕!


1872년 7월 3일 영국 더 타임즈 1면

1871년(건양 6년), 대한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 간에 벌어진 전쟁. 남중국해 해상 무역로에 대한 통제권과 아시아 내 영향력 확대를 둘러싼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프랑스는 보불전쟁 패전의 여파 속에 아시아에서 국위를 회복하고자 했고, 대한제국은 주권적 무역권 수호와 해상 장악력 강화를 위해 군사 대응에 나섰다.

이 전쟁은 몽골 제국 이래 아시아 국가가 유럽 열강에 안긴 가장 뼈아픈 패배로 유럽 전역에 충격을 안겼으며, 서구 중심 세계관에 균열을 낸 사건으로 평가된다. 반면 대한제국은 이번 승리를 통해 국제적 위상을 급격히 높이며 대외 팽창 정책의 서막을 열게 되었다.

배경

19세기 후반, 대한제국은 개항 이후 성공적인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며 아시아에서 유례없는 산업적·군사적 성장을 이루어냈다. 철도와 전신, 근대적 병영 체제와 공업 기반을 갖춘 한국은 서구 열강으로부터 더 이상 "은둔의 나라"가 아닌 잠재적 경쟁국이자 새로운 질서의 중심 국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과 해상 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남중국해와 대월 해역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이러한 해양 진출은 단순한 교역 확대를 넘어서, 아시아 해상권에 대한 전략적 통제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여러 외국 상선들과 충돌했으며, 그중 프랑스와의 갈등이 가장 격화되었다.

프랑스는 당시 보불전쟁에서의 참패로 인해 국내 정치 불안과 국제적 위신 하락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위기를 돌파하고 제국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프랑스는 대월을 비롯한 아시아 식민지를 강화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한국은 대월 지역의 민간 왕조들과 직접 외교와 교역을 추진하며 프랑스의 경제적 기반을 잠식했고, 여기에 관세 자주권 행사, 해상세 징수, 현지 민족운동 지원 등은 프랑스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는 도발이었다. 양국 간의 외교 마찰은 결국 항만 봉쇄, 선박 나포, 외교 사절 모욕 사건 등으로 격화된다.

국제 사회 역시 이 갈등을 예의주시했다. 영국은 남중국해 무역로의 안정성을 중시하며 프랑스의 군사적 개입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고, 러시아는 대한제국과의 기술 협력을 통해 극동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려 했다. 청나라는 마지막 남은 조공국인 월남의 통킹마저 잃을까 걱정하는 처지였으며, 미국은 중립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대서양을 넘어 아시아로 확장되는 새로운 세력 구도를 관찰하고 있었다.

한편, 프랑스 식민 지배에 고통받던 대월 반도의 주민들은 대한제국의 개입을 새로운 희망으로 받아들였다. 한국은 전통적 문화와 자치를 보장하면서도, 식민 착취가 아닌 '형제 국가'로서의 협력 모델을 제시했으며, 이에 따라 일부 지방은 자발적으로 한국에 우호적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전쟁은 단순한 국지전이 아닌, 동아시아와 유럽 간 지배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충돌로 확산되었다.

원인

19세기 후반, 대한제국은 대외 교역 확대와 해상 영향력 강화를 목표로 남중국해 및 인도차이나 반도 일대에 활발한 무역 거점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인 다낭(Đà Nẵng)은 응우옌 왕조의 동의 아래 설립된 대한제국 교역소가 설치된 중요한 전진기지였다. 이는 프랑스 식민 통치권이 자리잡은 인도차이나 중남부와 접하는 지점으로, 갈등의 뇌관이 되고 있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이 교역소를 식민 통치 질서를 위협하는 외세의 침투로 간주하고 1871년 봄부터 지속적으로 철수 요구를 전달했지만, 대한제국은 응우옌 왕조와의 조약을 근거로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대한제국 조정은 다낭 일대 상선 보호를 위해 소규모 수비함과 무역선단을 파견하며 해상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긴장 상태가 지속되던 5월 24일, 프랑스 해군은 다낭 인근 해역에서 조업 중이던 대한제국 국적 상선 2척을 발견, 해역 침범 및 무허가 교역을 이유로 선체 나포를 시도했다. 이에 대한제국 선박이 퇴거 지시를 무시하고 대응하자, 프랑스 해군은 이를 즉각 포격 격침하였다. 선체는 반파되어 침몰했고, 선원 30여 명이 사망, 다수의 민간인이 실종되었다.

이 사건은 한국 내에 격렬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조정은 즉시 항의 외교문서를 프랑스 측에 전달하고, 사건 경위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한편, 전국적인 대비 태세에 돌입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오히려 이 사건을 빌미로 삼아, 대한제국을 "자국 식민지 해역을 위협하는 불법 무장국"으로 규정하고, 1871년 6월 1일, 공식적으로 한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프랑스 정부는 선전포고 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대한제국은 인도차이나의 평화와 질서를 해치는 무단 무역 활동과 해상 도발을 반복해왔다. 다낭 해역의 교전은 불행한 필연이며, 프랑스는 문명국의 이름으로 아시아의 질서를 바로잡을 것이다.

프랑스 국내에서는 보불전쟁 이후 실추된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전쟁 지지 여론이 들끓었고, 일부 언론은 "작은 동방 국가에게 프랑스가 제대로 응징을 가할 때"라는 선정적 보도를 일삼았다. 한국은 6월 3일, 즉각적으로 자위권 발동과 해상 반격을 선포, 사실상 전면전에 돌입했다. 대한제국 황제는 국조(國詔)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침략은 이미 시작되었고, 피로 씻지 않으면 안 될 치욕이 하늘을 찌른다. 대한의 백성은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이로써 양국은 신미불요(辛未佛擾)라는 이름 아래 1년 1개월에 걸친 전면적 해양·지상전으로 빠져들게 된다

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