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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의 원유관 세계관의 주요 사건들과, 시간에 따른 일들을 정리한 문서이다. 사건의 경우, 사건 문서에 각 사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이 적혀있는 식으로 분업되어있다.
일부 시간대의 일들은 개인작이라는 한계상 조금 부정확할수도 있으니 유의.

- 1559년:폭풍우가 치던 날, 뒷처리를 하던 중인 원균이 변소에서 발을 헛딛은 뒤 뒤늦게 세균감염이 심각하게 진행된 상태에서 발견되다. 4달 후 향년 20세를 일기로 사망하다.
- 1591년:훗날의 충원곤 최호가 경상우수사 직에 임명되다. 일본 다도의 대부 센노 리큐가 할복으로 숨을 거두다. 향년 69세.
- 1592년:임진왜란이 발발하다. 부산진 전투에서 최호가 장렬한 저항 끝에 산화하다. 시간이 끌어진 결과 일본군의 진격속도가 늦추어져 봉원군의 봉화가 제때 불을 올렸고, 이로 인해 대구까지 진격해온 일본군이 봉화의 신호를 받은 조선 수군과 육군에게 포위되다. 경상좌수영이 방화를 면하다.
- 1593년:겨울을 나는동안 악에 받친 일본군을 상대로 이순신이 대규모 유인책을 발동, 육지와 바다로 일본군을 끌어낸 뒤 격파하다. 부산탈환전 발발, 일본군, 대구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부산 해안가에서 근근히 방어를 이어가는 신세로 전락하다. 패전의 위기를 느낀 일본군 지휘관 측에서 서둘러 부산의 재물을 실어 나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1594년:도요토미 히데요시, 졸전에 대한 다이묘들의 거세져가는 불만을 우려하여 조선, 명과의 강화협정을 시도하다.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을 요구하는 등의 요청으로 인해 강화 실패. 도요토미 정권, 4달 후인 1595년부터 전투를 다시 재개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다.
- 1595년:나고야의 변 발생, 졸전의 책임을 지고 다아묘들에게 포위당한 히데요시가 할복을 종용받다. 후임자 및 새 막부의 개최를 둔 일본 내분의 조짐 발생. 일본군, 부산을 떠나 대마도에서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상대로 최후의 퇴각전을 벌인다.
- 1596년:조명연합군의 마지막 대마도 공세가 감행되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퇴각을 끝으로 대마도 해전 종료. 이순신, 대마도 해전에서 시마즈 요시히로와 격돌하던 중 전사. 향년 51세. 조선은 대마도호부를 설치하여 대마도에 대한 영향력을 어느정도 보장받는 것을 끝으로 전쟁을 종료했다.

- 1602년:도쿠가와 가문이 주도하는 동군이 일본 내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히데쓰구가 죽음을 선택, 적진으로부터 둘러싸인 성의 방 안에서 할복으로서 생을 마감했다.
- 1605년:히데요리를 확보한 동군의 승리를 끝으로 일본 내전이 종료되었다. 전후 에도막부는 조선에 화친의사를 밝혔고, 조선은 조선 측에서 설치한 대마 도호부의 인정과 기타 요구사항들을 조건으로 화친을 승낙하였다. 이로서 왜란은 끝을 맺었다.
- 1608년:이연이 붕어하였으며, 사후 묘호는 수군에게 명령하여 쓰시마를 정복하고 일본을 몰아세운 점,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여 왜란을 평정한 점 등이 고려되어 '장조'로 결정되었다. 사후 그의 아들인 광해군 이혼이 대를 이었다.
- 1618년:더 이상 늦어지면 명나라를 칠 기회가 없으리라 판단한 누르하치의 주도 아래에, 10년간 만반의 준비를 마친 후금이 명나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당시까지 명나라와 책봉 문제로 감정이 좋지 못하던 광해군은 적극적 파병을 거부, 소극적으로 요동 일대에서만 후금을 공략하기 시작하자 조정에는 불안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 1620년:인조반정이 발발했고, 광해군은 국왕의 자리에서 폐위되었다. 즉위 후 명을 도와 '전면 파병'을 주장하기 시작한 남인과 인조를 경계한 후금은 결국 함경도를 시작으로 한반도에도 공세를 감행했고, 이를 조선군이 상대하며 본격적으로 후금 정벌전쟁이 절정기에 접어들었다.
- 1622년:치열한 접전 끝에, 칭더 일대의 전투에서 누르하치가 죽음을 맞이했다. 후금은 조선의 '동생의 나라' 로서 사대관계를 취하는 것과, 전보다 엄격해진 조공책봉질서에 속하는 것을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 1623년:만력제가 붕어하였고, 전쟁으로 북경 인근이 황폐화된 명나라의 피폐함은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지도자를 잃은 만주에서는 다시 세 여진족 분파의 권력투쟁이 재개되었다.
- 1627년:폭풍우로 인해 배가 좌초된 네덜란드인 얀 얀서 더벌터브레이가 제주도로 표류하였고, 조선에 잔류하여 서양의 화포 병기에 대한 지식을 전파했다.
- 1628년:황폐화된 명나라에서 오삼계 등의 지방 유지들과 결탁, 또한 지난 10년간 세를 급격히 불린 이자성이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며 이자성의 난이 발발하였다. 조선의 남인 세력은 주기적으로 찾아오던 한족 왕조의 교체인만큼 '관찰'을 택했다.
- 1630년:명나라의 수도 북경에 이자성이 입성하였으나, 북경에서 벌인 수많은 살육으로 민의가 하락세를 보였다. 남, 서인 세력 사이에서 순나라의 차후 행보에 대한 우려가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 1631년:순나라의 조선에 대한 공물 요구, 공비 요구가 급격하게 폭증함과 동시에 충성심에 대한 추궁의 빈도가 잦아졌다. 이는 결과적으로 조정에서 순에 대한 반감을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그 해 조선은 순나라에게 중화제국의 정통성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 1632년:순나라에서 기존 명나라 인사들에 대한 숙청이 감행됨과 동시에, 기존 시스템의 상당수가 기존 당나라의 제도로 회귀하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의 불복종이 북경에 전달된 그 순간부터 이자성의 칙령 아래 조선 정벌을 위한 준비가 서서히 시동이 걸렸다.
- 1633년:한창 조선을 상대로 전쟁을 준비하던 이자성에게, 아침 식사로 독이 든 차가 올라갔다. 이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이자성은 차를 마시고 피를 토한 뒤 즉사하였고, 지도자가 사라진 한반도 정벌 준비는 중지되었다. 황위에는 당시 이자성의 5살 된 아들인 영성제 이희가 올랐다.
- 1634년:이자성의 동생 이자경은 황위를 이어받은 이자성의 아들인 영성제의 황사로서 실질적인 정국을 맡게 되었다. 당시 한참 성나있던 나라의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자경은 조선파병을 취소하는 성과를 노력 끝에 가져왔지만, 힘이 약해진 순 이씨를 노리던 유지들은 한반도 파병 취소와 황사의 권력 독점을 명분으로 정치적인 압박을 가했다. 이러던 와중 기회를 탄 티베트의 선공으로 순나라의 서북 성주가 독립을 선언했고, 뒤이어 오삼계와 기타 유지들이 순나라에 일제히 충성 거부 의사를 표명, 중국의 분열기가 도래했다.
- 1636년:중국으로 도하하여 이득을 취하는 조선 상인들과, 동남 지방 및 발해만에서 약탈을 하는 일본 해적들의 활동량이 급증했다. 분열기가 도래한것을 눈치챈 네덜란드 상인들의 중국 직접 무역 시도가 시작되었다. 인조의 명령을 받은 조선군의 중국과 만주의 지배가 부재한 요동 방면의 지역들과 간도의 본격적인 장악을 시작했다.
- 1644년:건주여진의 실세이자 섭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이 추가적인 요동 공격을 보류, 내부에서 타 여진족 파벌을 치는 것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대외정책의 방향성을 수정했다.
- 1645년:수라를 든 직후 소현세자가 탈에 걸려 죽음을 맞이했다.
- 1650년:조선이 황해 근처에서 악명이 자자하던 중국 해적들을 토벌하던 도중, 중국 군벌과의무역을 끝내고 일본으로 가는 중이었던 네덜란드 함대와 급히 해적들을 격퇴하였다. 이 때 네덜란드와 그 화포들에 대한 세세한 정보가 조선에 처음으로 전해졌으며, 첫 조우 당시 의사소통은 중국어로 이루어졌다. 이후 배에 실린 총에 대한 보고가 올라가자 조선 조정은 차후 만주에서의 치안 관리와 요동 지역 통제를 위한 병기 무역을 할 의사를 표했고, 이에 동방 무역으로 돈을 벌 방법을 찾고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부산에 네덜란드인 거주지인 '화관'이 설치되었다. 일본이 네덜란드에 무역제제를 가해 반발하려 하였으나,중국 무역이 극히 어려워진 상황에 섬나라인 일본이 무역적자를 보는 것이 치명적인 타격이었던 상황에서 결국 일본은 조선의 네덜란드 무역을 허용하였다.
- 1655년:운남 성으로 거점을 옮겨간 오삼계가 주나라를 선포, 스스로 천자를 자칭하며 근처에 있던 또다른 유력 군벌인 조세종의 후송과의 대립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 1670년:약 40년에 가까운 개척과 총기의 개발 끝에 조선의 요동 지배력이 강화되어 가던 중, 순의 요동 지배를 무효화시킬 작정으로 후송이 조선의 요동 지배를 인정한다는 내용의 조서가 반포되었다. 거칠 것이 없어진 조선은 공식적으로 요동도독부를 설치, 차지한 남만주 지역의 지배를 시작했다.

- 1716년:삼대 중국 세력 중 하나인 장씨 왕조의 대서가 신사계층 포섭과 주나라 퇴치를 통한 광동 장악에 성공한 송나라에 의해 멸망하면서, 대순과 대송, 두 개의 왕조가 각각 화북과 동남을 기반으로 중국에 자리잡았다. 양국은 각자 당의 부활, 유학의 국가를 표방했다.
- 1735년:건주 여진의 지도자인 아이신기오로 일족의 주도 하에 여진족이 만주 내에서 일부 지역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남만주에서 조선과의 산발적인 교전이 있었으나 이미 진즉에 요동을 장악하고 있던 조선의 승리로 전투는 끝을 맺었고, 이로 인해 남만주에 대한 여진족의 영향력이 줄기 시작했다.
- 1740년:재수복된 후금은 연해주, 몽골 일대로 진출을 시도하였고, 일부 성공하면서 내몽골 일부와 몽골 동부가 후금에게 복속, 연해주가 편입되었다. 조선과의 강화가 필요하다 여긴 아이신기오로 훙리(건륭제)가 간도 인근에 조선인들과의 교역소인 '고려촌'을 설치했다.
- 1745년:영조의 주도로 증세의 목적을 위해 평시선덕관 제도가 조선 전역에서 유효해졌다. 해당 조치가
지난 중국 분열기와 화관 설치 당시 분 1차 상업 열풍에 이은 2차적인 상업 발전을 불어오면서 서민대상 연극인 창극의 발전에 본격적으로 가속도가 붙었다.
- 1762년:러시아 제국의 극동 탐험대가 후금을 상대로 공격을 감행했다. 치열한 접전 끝에 러시아 군이 강화를 제안하며 만주를 비롯한 후금의 본토는 지켜낼 수 있었으나, 외만주와 연해주 지방은 대가로 러시아 제국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 1788년:네팔 왕국이 티베트를 침공하였고, 이 전쟁을 거치며 일전까지 성장세를 보였던 티베트의 국력이 약회되었다.
- 1797년:정국을 뒤흔들만한 변화를 위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비밀리에 상인 세력에 대한 지원을 통해 영향력을 서서히 확대한 장동 김문의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농민들을 남만주로 보내 자국 내 잉여인구를 분산하는 활동이 더 가속화되었다.

- 1804년:위험요소라고 간주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조선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네덜란드가 이 사태에 대한 대처로 조선 내에서의 선교를 완전히 포기하였고, 주요 서학 지식인들이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방침을 따르면서 서학의 세가 아예 사그라들어버릴 위기를 면했다.
- 1808년:요동도독부의 요동반도 최서단에 중국, 후금, 일본의 물품을 전부 취급하는 거대 상업단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 1812년:함경북도에서 홍경래의 주도 아래 대규모 소요사태가 발생하였다. 장동 김문은 이 사태에 대한 진압을 성공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비효율적인 진압으로 서서히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 1825년:동래의 화관이 대마도 화관의 영향력을 흡수하면서 가뜩이나 약하던 대마도 시장의 가치가 미미해졌다. 순나라의 출판업이 절정을 맞았다.
- 1840년:영국이 순나라와의 교역문제로 제 1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 1843년:이양선의 출몰이 잦아지자, 대비책으로 조선 수군에서 판옥선과 함께 네덜란드의 배를 일부 사용하는것으로 편제가 소규모 변경되었다.
- 1850년:태평천국의 난이 순나라와 송나라 국경 지대에서 발발하였다. 동시에 염군의 난이 발생하면서 또다른 타격을 입혔고, 이로 인해 송, 순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 1851년:개혁을 진행하던 헌종이 정력제 과다복용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다.
- 1853년:쇄국 정책을 지속하던 일본의 에도 막부에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한 흑선내항 사건이 발생하였다.
- 1855년:조선 측에서 조선통신사를 파견, 일본의 상황을 확인하고자 대마도를 거쳐 교토로 이동했다.
- 1856년:2차 아편전쟁이 발발하였고, 이 과정에서 송나라와 전쟁을 벌여 막 동남 지방을 강제로 흡수한 순나라의 국력이 대폭 축소되었다. 송나라에서 농민들 사이로 사교인 '천학' 이 퍼지기 시작했다.
- 1857년:묘 도굴 사건과 러시아 정교를 믿는 해서여진족 일부의 난이 일어나자, 후금에서 본격적으로 쇄국정책이 시작되었다. 고려촌 또한 축소되었다.
- 1858년:흥선군의 부인과 교회를 공유하던 장동 김문 출신 신자에 의해, 장동 김문으로부터 최대한 정체와 목적을 숨기던 흥선군의 정체가 탄로났다.
- 1860년:프랑스가 베트남으로의 원정을 가속화하였고, 불과 2년만에 베트남을 정복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정보까지 받고 난 조선 내부에서 문호를 열어야 한다는 개화파가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 1861년: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가 조선 시중에 퍼지기 시작했다. 아직 세를 유지하던 태평천국이 안경을 점령했다.
- 1862년:철종이 붕어했다. 다만 이미 정치적으로 실체가 탄로난 흥선군이 원래 의도처럼 자신의 혈족을 왕으로 세우는 것은 무리였고, 대신 남연군 계의 장자이자 당시 향렬상 최고위인 경은군보다 연장자인 완림군 이재원이 재위에 올랐다.
- 1865년:비밀리에 동래의 화관에 잠입하여 인삼 밀매를 시도한 프랑스인들이 적발되어 효수되고 몇몇이 탈출하는 일이 벌어졌으며, 살아남은 상인들로부터 조선을 정벌할 것을 요청받은 나폴레옹 3세는 조선에 파병을 실행할것을 지시하였다.
- 1866년:베트남에서의 실전 경험으로 조선을 압도적으로 격파한 프랑스는 조선에게 통상조약을 요구하였고, 이도저도 할 수 없었던 장동 김문은 우선 프랑스라도 끌어들여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조약을 수용하였다. 프랑스는 제물포 개항과 양국의 화친, 최혜국 대우 및 자유무역 등을 요구했고, 급하게 화관을 통해 중국에서 벌어진 조약과 대조해본 조정은 우선 울며 겨자먹기로 조약을 수용했다.
- 1867년:에도막부의 요청에 의해 단절 이후 두번째 조선통신사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일본 내에서 보신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렇게 선발된 통신사가 일본에 고립되는 일이 발생했고, 이 기간동안 통신사는 에도의 에도성에서 안전을 보장받은 상태로 생활해야 했다. 조정 내에서 장동 김문의 목소리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 1868년:개항을 통한 서구 문물이 조선에 서서히 유입되었고, 이 때 조선 최초의 증기기관차, 공장 등의 인프라들도 유입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안동김씨의 세력이 더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이미 프랑스의 조선 내 세력권도 에도막부 지원문제로 인해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 1869년:보신전쟁이 종결되었고 메이지 정부가 들어섰다. 다만, 프랑스에 의해 개항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며 정한론자들의 세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한편, 조선통신사 중 일부의 귀국이 이루어졌으며, 국교 정상화 문서가 일본에서 전달되었으나 조선은 우선 보류하겠다는 답신을 내놓았다.
- 1871년:프랑스가 보불전쟁으로 조선에 대한 관심이 끊어지자, 안동김씨를 몰아내자는 의견이 개화파와 근왕파로부터 대두되었다. 그러는 한편 전임 이조 판서 이항로가 왕의 친정을 부탁하는 지부상소를 올렸다가, 당시 안동김씨 집안의 자제 중 하나에게 처형당했고, 이로 인해 안동김씨 세력은 급격하게 쪼그라들었다. 결국 근왕파 세력의 손을 훗날의 고조인 이현이 들어주면서 임식사화가 발생하였다. 동시에 70년 가까이 권력을 유지한 안동김씨의 권세가 사그라드는 순간이었다. 이후 새롭게 들어선 근왕정부가 차후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한다며 보빙사를 파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흥선군 이하응의 주변 인물을 위시한 전통적인 사대부 세력과 개화파 세력이 각각 선발되어 파견됬다.
- 1872년:송나라와 순나라와의 국교관계의 재개편이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송은 우선 기존 외교관계에서 형제의 국가로 내려오겠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순나라는 사대관계를 계속 요구, 심지어 이항로를 공개적으로 삿된 유학자로 비난함과 동시에 고조의 양위를 요구하면서 마침내 왕의 허가로 세도정치를 척결한 조선 내 반중감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한편, 기존 5군영 체제가 개편되어 조선군이라는 하나의 체제로 운영되게 되었다.
- 1873년:전통적 세력인 사대부들이 서양 문물에 충격을 받았고, 동시에 고조도 이에 동의하면서 조선 내 모든 계층들에게 서양에 대한 정보가 풀리기 시작하였다. 이 정보와 신문물들의 의미를 알게 된 조선 내부에서 일본과 같은 문명개화론이 비상하였다. 동시에 이때부터 헌법 초안 작성을 시작으로'임신대경장'이라 불리는 서구화 정책이 서서히 시행되기 시작되었으며, 농민들이 이미 진출해있던 남만주 지역 일부가 2개의 도로 완전히 합병되었다. 한편, 이 소식이 전해진 일본에서 임진왜란때와 같은 공격 실패를 우려한 여론과 문명개화에 대한 긍정감이 합쳐지면서, 정한론이 사실상 사멸했다.
- 1874년:기초적인 헌법 제정 준비를 위한 논의, 관직 개혁을 위한 과거제 폐지, 은본위제, 학제 개편 등의 근대화 과정 중 일본 메이지정부의 칙서가 도착하였다. 정부 내에서의 논란 끝에 우선 분쟁방지를 위해서 수락하기로 결정한 정부였으나, 이로 인해 조선 내부에서 일본에 뒤쳐졌다는 열등감, 명색이 황제국인 순나라와 송나라의 실정에 대한 정보가 전해지면서 황제국을 향한 열망이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한편, 한성에 최초의 거대 재판소가 완공되었다.
- 1875년:칭제 요구가 빗발쳤으나 회의적인 여론도 많던 상황에서, 우선 조선은 외부 칭호를 대군주로 하고, 내부 칭호는 부황으로 하는 외왕내제 제도를 채택하였다. 그러는 한편, 이 때 일본제국과의 국교가 수립되었으며,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 및 조선의 생존을 위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또한 한성과 개화의 장이라 할 수 있는 제물포를 잇는 경인선이 완공되어 임식개혁 단행의 성과를 알렸다.
- 1876년:조정에서 흥선군 이하응과 박영효를 위시한 유학 변화를 통한 보존론을 가진 이들을 필두로, 새로운 유학 시스템인 국체유학에 대한 논의가 서서히 시작되었다. 한편 일본에선 세이난 전쟁이 발발했고, 한국은 수교한 메이지 정부를 지지하였다.
- 1877년:순나라의 재상 이홍장이 금나라와 밀착관계를 시작하며 조선을 압박하는 정책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조선에서는 기존의 의정 제도가 폐지되고 대신 총리제도가 도입되었으며, 김홍집이 초대 총리대신으로 집권하였다. 이 시기 조선이라는 국호가 자주성을 나타내기 위해 대한국으로 개명되었다. 세이난 전쟁의 종료 후, 일본 내에서 친한 감정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여론을 의식한 정부는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포기 내지 보류, 차선책으로 한국을 동맹으로 삼고 남방에서 더 많은 영토를 취하는 방법을 고려하게 된다.
- 1878년:수많은 논의 끝에 더 이상 시대에 적응하지 않아서는 안된다고 판단한 송나라가 대한국을 승인하였고, 동등한 외교조약을 체결할 의사를 표명했다.
- 1880년:태극기의 디자인이 최종적으로 완흥군 이재황의 디자인으로 발탁되었다.
- 1885년:한국의 통상 요구가 거절당하자, 한국은 남만주 일대에 군을 파병하여 사격하는것으로 대응하였다. 이 과정에서 후금은 저항을 더 할 수 없었고, 결국 북간도 조약으로 후금은 한국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다.
- 1890년:흠정대한국 국헌이 반포되었으며, 한국의 정체성을 황제가 다스리나 승정원과 의정원, 중추원의 협찬을 받아 입법권을 행사하는 입헌군주국이라고 정의하는 동시에 군상대권의 지엄함을 인정했다.
- 1893년:일본의 순나라 남양함대 선제공격을 시작으로 제 1차 동아시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의 결과는 조일동맹의 승리로, 조선은 북간도를 비롯한 추가적인 남만주 지역을, 일본은 대만과 푸젠성 일대의 영토를 얻어냈다. 한편, 일본에게 대마도 조차지를 다시 반환하기로 전후에 합의가 체결되었다.
- 1894년:환구단에서 칭제건원 의식이 진행되었다. 이 직후부터 국호는 대한제국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연호는 광무로 정해졌다. 한편, 제 5대 총리대신으로 부임한 김옥균은 임식개혁의 성과에 쐐기를 박는 갑오경장을 진행, 이 과정에서 선거제도의 일부 개편과 노비의 완전한 해방, 새로운 신분제인 사족제도 확립과 한국어 사전 편찬 등이 이루어졌다.
- 1895년:러시아를 계속 끌어들이던 예허나라 힝전을 경계한 한국이 야밤에 기습을 감행, 후금 일대를 점거하고 심양궁에 불을 질렀다. 혼란을 틈타 덕종 아이신기오로 자이탼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주, 예허나라 힝전은 심양궁 깊숙한곳에 한국에 의해 유폐되었다가,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이 당시 만주에서는 변발에 대한 제한령이나 신분제 폐지 등 한국이 주도하는 개혁이 이루어졌다.
- 1896년:만주로 다시 돌아온 아이신기오로 자이탼이 칭제건원을 감행, 국호를 대청제국(다이칭 구룬)으로 바꾸고 근대적 개혁인 '광서개혁'을 감행하였으나 기존 만주 내 귀족들의 반발에 격렬히 부딛혔다. 한편, 태자의 비가 사산된 황태자에 이어 새로운 적장자인 이영을 출산하였다.
- 1899년:창경궁에서 간병을 받던 광무제 이현의 병세가 악화되어 그가 붕어하였다. 묘호는 고조(高祖)로 정해졌고, 이후 황태자 이훈이 황제로 즉위하였다. 연호는 융희(隆熙). 또한, 의화단의 난에 10개국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참전하였다.

- 1901년: 톈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은 푸젠성과 하이난을 비롯한 중국 해안의 추가적 영토를 할양 및 조차받았고 웨이하이는 한국에게 조차되었으며, 득의양양해진 일본 해군을 시기한 일본 육군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동시기, 한국 또한 북만주의 패권을 언젠가는 독점해야 한다는 인식이 발생하였다.
- 1902년: 제 7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집권했다. 동시에,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하여 각각 육지와 해양을 담당해줄 한국, 일본과 한영일동맹을 체결하였다.
- 1903년:시베리아 철도의 건설이 본격화되자, 비밀리에 러시아와의 전쟁을 각오한 한국과 일본의 합동군사훈련이 시작되었다.
- 1904년:한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 결과 러시아가 남만주에서 육전을 대패, 사할린에서 해전을 대패하자 3국의 제정적 파탄을 방지하기 위해 미국이 '블라디보스토크 조약'을 중재하였다. 전쟁 결과로 한국은 북만주에 대한 영향권을 확보하였으며, 일본은 사할린과 할양받았다. 한일 2개국이 모두 점령한 연해주는 '연해주 공동통치령'으로 한국과 일본 양국이 통치하는 형태로 결정되었다.
- 1905년:제 2차 한만협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으로 대청제국의 외교권과 주권 대부분이 박탈되었으며, 사실상 대한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다. 한편, 한국은 동양철도 주식의 지분을 미국에 일부 넘기는 것을 대가로 사실상 만주를 독식하는것을 인정받았고, 일본에게도 지분을 내어주면서 사실상 거칠 것이 없어졌다.
- 1906년: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되었다. 이 밀약으로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였으며, 동시에 의화단 전쟁 당시와 같이 조계지 내 한족들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명분을 들이세워 일본측의 중국 조계지에 대한 무간섭을 요구하였다. 미국은 이 요구에 대해, 장시성의 지역 일부는 추후 중국에 반환한다는 조건 아래 나머지 조계지의 보존을 묵인하기로 합의했다.
- 1907년:제 2대 청국통감 이완용이 하얼빈에서 저격당해 큰 부상을 입었다. 이 일로 이완용이 중태에 빠지자 박영효 총리는 강경파의 손을 들었고, 1907년 광서제 아이신기오로 자이톈은 페위되었다.
- 1908년:아이신기오로 푸이가 연호를 선통으로 하여 제 2대 대청제국 황제로 즉위했다.
- 1909년:한만병합조약이 체결, 대청제국 황제가 대한제국의 왕공족으로 편입되었다. 대청제국이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 1910년:융희 흑사병 유행이 시작되었다. 박영효 내각이 민권운동에 대해서 강경한 조치를 내릴 것을 발표하였다.
- 1911년:일시적으로 집권에 성공한 일본 육군 파벌의 강력한 주장으로 대만 근방의 중국 조계지들이 완전히 합병되었다.황손 이임이 출생하였다. 송나라에서 신해혁명이 발발했고, 이후 무너진 순나라의 절도사 지도자 원새개와의 대타협을 통해 중화민국이 건국되었다.
- 1912년:메이지 천황이 붕어하고, 요시히토 황태자가 천황으로 즉위하며 일본에서 다이쇼(大正) 시대가 시작되었다.
- 1913년:박영효의 빈약한 방역 대처와 예산 횡령 스캔들로 인해 한국 내에서 호헌운동이 대두되자 결국 반발을 이기지 못한 박영효 내각은 책임을 지고 사퇴, 본격적인 대한제국 민주주의에 꽃이 피기 시작한다.
- 1914년: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가 암살됬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가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를 시작하면서 제 1차 세계대전의 막이 열렸다.
- 1915년: 영한일동맹의 의무를 명분으로 대한제국, 일본제국이 협상국 측으로 참전하였다. 이들은 각각 육상과 해상에서 독일을 점령하였으며, 키아우초우와 독일령 뉴기니 일대를 점령하였다.
- 1918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내전이 시작되었고, 한국은 로마노프 황가에게 황실 명의로 밀서를 전달, 로마노프 황가의 자손들을 구조하는 '금관작전'을 실행했다.
- 1918년:동맹국의 해산으로 제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다. 일본 제국이 캄차카를 완전히 점령했다.
- 1919년: 전후, 미국의 제안으로 국제 연맹이 결성되었다. 같은해 6월 연해주 공동자치령에 백러시아 망명정부가 들어섰고, 로마노프 가의 황손들을 우대하는 공화국임을 명시하였다. 이 때 만주 공화국 임시정부가 결성되었다.
- 1920년:적백내전이 적군의 승리로 종결,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건국되었다. 동시에 백러시아 망명정부는 극동 공화국으로 국호를 교체했다.
- 1921년: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연말에 정식으로 건국되었다. 일본제국이 캄차카에 코리히야마 총독부를 설치했다.
- 1922년:일본이 장시성 문제로 영일동맹을 종료하였다.한편, 만주인들의 보통선거권이 명목상 통과되었다.
- 1923년:한국이 청도 문제로 영한동맹을 종료하였다. 대한백의단이 한국 정치계의 음지에서 창당되었다.
- 1924년:상하이에서 연설하던 대한제국 대신들이 조선공산당이 일으킨 폭탄 사태로 죽거나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대한 대응책을 갈구한다는 명분으로 제국보안법이 새로히 제정됐다.
- 1925년:일본령 후쿠겐(푸젠)에서 명목상 중국인들의 보통선거권이 통과되었다.
- 1926년:대중국 동맹에 의거한 한일동맹이 새로이 체결되었다. 한편, 블라디보스토크 정부청사 앞에서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다가 공산당 인원들과 부딛히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 1928년:검은 목요일로 인한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었으며, 한강 집단 투신사건이 발생하였다.
- 1929년:융희제 이훈이 붕어하였다. 한편, 태자 이연이 새로히 즉위하였으며 연호는 성덕(聖悳)으로 정해졌다.
- 1930년:예정
- 1931년:일본제국군 측이 병사의 실종을 명분으로 일본령 후쿠겐 북부를 기점으로 장시사변을 일으켰다.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여 수많은 화교, 만주인들을 대상으로 한 사적제제가 발생했다.
- 1932년:한국이 공산주의를 제제한다는 명분으로 몽골에 파병을 감행하였다. 일본의 괴뢰국인 대명제국이 건국되었으며, 황제는 명 황실의 후계자인 주자홍으로 선출되었다.
- 1933년:이탈리아에 이어 히틀러의 파시즘 정당인 나치당이 독일에서 정권을 잡았다. 한성부 거리에서 반공 사적폭력조직인 대한백의단에 의해 한성 진군이 발생하여, 주도자인 김창암이 성덕제로부터 '구국자'자리를 인정받았아냈고, 정식 정당인 충정일심회로 이름을 바꾸어 정계로 진입하게 되었다. 또한, 극동 공화국의 국명이 러시아 차르국으로 변경되었다. 한편 한국과 독일,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할것을 선언하였다.
- 1934년:예케 몽골 울루스가 몽골 지역 일부를 기반으로 건국되었다. 충정일심회가 대한제국 내각에서 집권당으로 거듭났다.
- 1935년:김창암이 총리에 임명되었고, 일심 체제가
- 1936년:대한제국이 방공협정에 가입하였다. 러시아 차르국에서 파시즘 서적'유라시아 신 질서와 왕정복고에 대한 논의' 가 출간되었다.
- 1937년:중일전쟁이 발발하였으며, 한국군에 의한 칭더 대학살과 일본군에 의한 난징 대학살이 발생하였다. 고노에 후미마로 일본 내각총리대신과 김창암 대한 내각총리대신이 회담을 가졌다.
- 1938년: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고, 중국에서 국공합작이 시작되었으며, 이르츠쿠르 일대에서 러시아 차르국 선박이 소련 전함에게 격침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 1939년: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면서 본격적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대한제국에서 충정일심회의 주도 아래 한국의 확장정책을 정당화하는 '해동 독트린' 이 발표되었다.
- 1940년:한국령 만주에서 공산주의 확장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계엄령이 공표되었다. 미합중국이 한국에 대한 석유 가격 인상조치를 공표하였다.
- 1941년:미합중국이 한국과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모두 금지하였다. 거리낄 것이 없어진 한국은 3월에 할힌골 사변을 일으켜 독일과 함께 동서로 소련에 대한 압박을 시작하였으며, 일본이 진주만에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하여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해 7월, 한국 공군과 일본 해군항공대가 알래스카에 폭격을 성공시킴으로서, 최초이자 마지막인 미국 본토 폭격이 이루어졌다.
- 1942년:전반적으로 추축국의 전선이 지지부진해지기 시작하였다. 한국은 소련 영토에 대한 분할안이었던 신천지 계획의 달성을 위해 설원속방 작전을 통해 시베리아에서 진격을 계속하였으나 끝내 소련은 바이칼 호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미국은 과달카날 해전에서의 승리로 서서히 전세를 기울였다.
- 1943년: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독일의 패배로 끝이났다. 대한제국에서 학도의병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했다.
- 1944년:김창암 수령이 작위와 직위를 모두 포기한 뒤,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송병조가 차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되었다.
- 1945년:한성대공습을 끝으로 대한제국이 항복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탄 투하로 최후의 추축국인 일본 제국이 항복하였다.
- 1946년:공식적으로 이연이 대황제로서 즉위했고, 연호는 태시(太始)로 정해졌다.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만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 잔당 일부가 공산주의로 전향하여 다시 재기하였다. 황실 직속 정보기관 제국익문사와 상무영이 미 통감청에 의해 폐지됐으며, 대신 그 자리는 내각 휘하의 내각정보사로 개편됬다.
- 1947년:대한국 헌법이 제정되며 대한제국의 새 체제인 대한국이 출범했다. 대만 게릴라 세력을 상대로 다이호쿠 협의가 체결되었다. 탄압을 피해 잠적했던 조선공산당이 한국 원내에서 다시 활동조짐을 보이기 히작했다.
- 1948년:일본국이 수립되었다. 마다가스카르 왕국에서 대규모의 반프랑스 시위가 시작되었다. 한국민주당이 입헌민주당으로 개명됐다. 소련이 베를린 봉쇄를 개시했다. 봉쇄는 이후 약 11개월간 계속된다. 1944년 출범한 신격호 회장의 롯데가 고성장세를 보이다.
- 1949년:대한 국방군의 창설에 대한 논의가 종막으로 달아올랐다. 만주 2개국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대한제국에 부역한 친한파 만주인들을 대상으로 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되었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가 창설되었다.
- 1950년:중국 공산당의 선공으로 중국 내전이 시작되었다. 통감부 철수의 준비를 알리는 첫 단계로 인천부에서 한미상호방호조약이 체결되었다. 대한 국방군이 처음으로 출범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가 출간되었다.
- 1951년:동래부에서의 조약으로 대한국에서 환태평양 통감 체제가 종결되었다. 훗날 유럽 연합의 전신이 되는 기구인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CSC)가 프랑스,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 독일(서독) 6개국에 의해 설립되었다. 한국 자유당이 정치깡패 등용과 국방비 확충 문제, 검계 커넥션으로 반발에 휩싸이다.
- 1952년:샌프란시스코 협정으로 구 추축국들에 대한 적국조항이 폐기되었다. 우남 이승만 내각이 4.19 시위로 내각 총사퇴를 선언하고 물러났으며, 대한국의 자유당 체제가 이로 인해 붕괴했다.
- 1953년:입헌민주당의 안창호가 대한국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됐으며, 한국의 군비 증강 최소화와 경제 발전에 집중하는 국가정책을 천명하는 4.13 선언이 발효되다.
- 1954년:중국 내전이 동남의 중화인민공화국, 화북의 중화민국 간의 휴전으로서 마무리되었다. 동시기, 대만에 타이완민주주의인민공화제국이 건국되었다. 만주에서 북쪽의 만주 인민위원회와 남쪽의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 간의 내전이 시작됐다.
- 1955년:대한국 내에서 여운형과 안창호가 사회당과 입헌당의 합당을 진행하던 도중, 급진 공산주의 쿠데타가 발발하였다. 러시아 차르국과 소련이 이르츠쿠르 일대에서의 영토 문제로 전쟁을 시작했다.
- 1956년:신진민주당이 창당됐다. 만주 전쟁이 남만주의 승리로 종결됐다. 안창호의 뒤를 이어 몽양 여운형이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됐다. 러시아 차르국이 블라디보스토크 방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 1957년:러시아 차르국과 소련의 전쟁이 휴전으로 종결됐다. 소련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의 발사에 성공했으며, 국제원자력기구가 설립되었다.
- 1958년: 미국의 첫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되었다. 대한국 비행기 창랑호가 타이완민주주의 인민공화제국에 하이재킹 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미 항공우주국 NASA가 세워지며 본격적인 우주경쟁시대의 막이 열렸다.
- 1959년:한국 한성신보사가 <한성 저널>을 창간했다. 미국령 알래스카가 주로 승격되어 미국의 49번째 주가 되었다. 함경남도에 소재한 한국적십자사에서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 출신 민족주의자에 의해 폭파 테러 미수사건이 일어났다.
- 1960년:중화민국에서 장제스가 임기를 마치고 퇴임, 천청이 집권했다. 러시아 차르국에서 콘스탄틴 로자예프스키의 주도 아래 군사 쿠데타가 발발, 군사두마 시대가 개막을 올렸다.
- 1961년: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발하였다. 러시아 차르국에서 로자예프스키 두마의 주도에 따라, 일명 '5개년 계획'이라 불리는 대규모 개혁이 시작되었다.
- 1962년:타이완민주주의 인민공화제국에서 대숙청이 거행되어 주석의 권력이 확고해졌다. 대약진 운동이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시작되었다.
- 1963년:학질로 인해 마오쩌둥의 건강이 악화되었고, 그해 8월 숨을 거두었다. 장제스 독트린이 발효되었다.
- 1964년:중국 공산당이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인정하였다. 저우언라이의 지지를 받은 류샤오치가 차기 주석으로서 임명되었다.
- 1965년:일본에서 신칸센이 개통되었다.
- 1967년:애신각라왕 푸이가 비사시의 애신각라씨 저택에서 숨을 거뒀다. 이를 끝으로, 생전 대한제국령 만주의 만왕을 겸임한 애신각라 왕조의 직계혈통은 단절되었다. KTX가 개통되었다.
- 1968년:대한국의 과격 학생운동 조직인 전학협(전국학생협의회)과 운동권 계파들의 활동이 서서히 감소세에 들어갔다.
- 1972년:중화민국 총통 천청이 임기 중 사망했다. 중추원 청사 오물투척사건의 주도자였던 우미관회 검계 지도자 김두한이 고혈합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 1973년:콘스탄틴 로자예프스키가 폭탄테러로 인해 숨을 거두었고, 러시아 차르국에서 신민들의 대규모 시위에서 나온 요구를 차르와 내각이 승낙할 것을 발표하면서 군사정권 시대가 종식되었다.
- 1974년:한국에서 한성올림픽이 개최되었다. 베트남 전쟁이 휴전되었고,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의 점령지를 기준으로 국경이 정해졌다. 장쉐량 제 5대 중화민국 총통이 탄핵되었다.
- 1975년:전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가 노환으로 사망했다.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되었다.
- 1979년:2차 오일쇼크로 인한 석유파동이 발생하였다.
- 1980년:모스크바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한편,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의 보수공사가 시작되었으며, 타이완민주주의인민공화제국에서 특별보안법이 새로 개정되었다.
- 1981년:한국 정부에서 간도의 날이 지정되었다. 또한, 한국에서 서브컬쳐 및 애니메이션에 대한 법률이 개정되었다.
- 1982년: 몽골 민주화 운동이 성공으로 끝을 맺었다.
- 1983년:히로히토 천황이 한국에 방한하여 태시황제 이연과 만남을 가졌다. 이 방한은 한일 역사상 최초로 현직 군주 둘이 한반도에서 만난 사건으로 기념되었다.
- 1985년:플라자 합의가 독일, 한국 일본과 미국 사이에 체결되었다. 만주 공산당이 공식적으로 민주화를 선언, 대금민국으로 국호가 교체되었다.
- 1986년:소련 측에서 홀로도모르 사망자들에 대한 추모식을 거행하였다. 러시아 차르국에서 민주화를 기념하는 9일 기도가 일어났다.
- 1987년:대한국 전 내무대신 박정희가 병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 대금민국에서 최초로 공산당 시대와 무관한 정당이 집권 여당으로 거듭났다.
- 1989년:오랜 기간 제위에 있던 쇼와 천황 히로히토가 붕어하고, 일본에서 헤이세이(平成) 시대가 시작되었다.
- 1990년:소비에트 연방이 러시아 차르국과의 수교를 정식으로 체결하였다. 동시기, 미국과 소련은 각각 '10년계획'을 발표, 2000년이 찾아오기 전까지 냉전을 완전히 끝내자는 합의를 본 뒤, 이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재개된 공사 끝에, 성공리에 한일해저터널이 개통되었다. 신칸센과 KTX가 주요 차량 중 하나로 선정되었고, 이듬해 10월 부터 정식 운행을 시작할 것이 예고되었다.
- 1991년:서중국 충칭시 인민대례당 앞에서 민주화 시위가 시작되었으나, 중국 공산당 당국에 의해 폭력으로 진압되었다. 충칭 외부 지역에는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다.
- 19922년:플라자 합의를 기점으로 일본의 엔화가 급격히 하락, 본격적인 경제 침체가 시작되었다.
- 1993년:엔화 저하 현상에 이어 원화가 저하된 한국의 경제 성장세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 1994년:타이완민주주의 인민공화제국이 사회주의 노선 차이와, 핵무장에 대한 관점 차이를 이유로 소련과의 수교를 단절했다.
- 1995년:주요 유교 인사들과 정치인들간의 많은 논란 끝에, 김영삼 총리대신에 의해 충장서원에 설치되어 몇십년간 자리를 지키던 완은군의 위폐가 현충사로 이장되었다.
- 1996년:인디펜던스 데이 등의 개봉으로 할리우드 영화가 미국에서만 역대 한 해 흥행 수입과 관객 수가 사상 최대를 기록하였다.
- 1998년:대금민국에서 '좋은 남쪽문화 받아들이자'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한국 문화, 일본 문화에 대한 개방정책이 본격화되었다.
- 1999년:러시아 차르국의 제 3대 차르가 섭정 정치를 시작할것을 발표하였다.
- 2000년:크렘린과 백악관에서 새천년 기념 행사가 동시에 개최. 미소 양국 정부, 공식적으로 냉전이 종료됬음을 공표하다. 뉴 밀레니엄 기념행사에서 애플이 아이폰을 공개하면서 전세계적 스마트폰 시대의 서막이 올랐으나, IT 버블의 붕괴가 실리콘 드림을 잠재우다.

- 2001년:극렬 이슬람 근본주의자인 오사마 빈 라덴 일당에 의해 9.11 테러 발생. 이로 인해 쌍둥이빌딩이 붕괴하다. 미국이 보복의 의미로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 러시아 차르국의 IMF 불황 시대 종료. 완용군 이효와 조효은 완원공부인 사이에서 완동군 이호가 출생하다.
- 2002년:한금월드컵이 진행되었다. 대금민국이 월드컵 준우승을 차지하는 기적을 선보이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아라비아와 에리트레아, 이란에 대해서 악의 축이라고 발언하다.
- 2003년:김대중의 국민당 내각이 종료되었다. 신민당 온건파 계열의 정치인인 노무현이 신민당 온건파의 구원투수로서 내각총리대신에 당선되어 노무현 내각이 시작되었다. 하르빈 지하철 4호선 참사가 벌어지다.
- 2004년:일본 인터넷 유저, 한국 인터넷 유저들과 러시아 차르국 인터넷 유저들 사이에서 극동전쟁 당시의 국민감정을 계기로 사이버 극동전쟁이 발발하다. 대한국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대히트를 이루다.
- 2005년:한일 수교 130주년 행사가 개최되었다. 대한국 외무부, 목단강의 날을 제정. 대한국과 대금민국의 외관계가 악화되다. 베네딕토 16세, 차대 교황에 등극.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이 발생하다.
- 2006년:대금민국과 소련의 경제, 병기교류 정책인 불곰정책이 3차를 맞이하다. 반기문 전 외무대신, UN 사무총장에 선출. 대금민국에서 여학생 동시실종사건이 발생해 국내가 떠들석해지다.
- 2007년:러시아 차르국의 정교중동전교회가 아프가니스탄의 극단주의 이슬람 단체에게 납치당하다. 아프가니스탄 인민군, 탈레반 게릴라들과의 교전 및 교섭시도 끝에 인질들 대부분을 구출해 내는 데 성공하다.
- 2008년: 서브 프라임 사태로 세계 금융위기가 발생하다. 만주 봉천궁 방화사건 발생.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러시아 차르국이 선전하다. 미국발 세계금융위기(대침체)가 시작되다.
- 2010년:태시제 이연, 약 65년간의 제위를 끝으로 붕어하다. 묘호는 강조 경황제. 적장자인 이순이 대한국의 황위를 이어 연호를 명화로 하고 제 5대 대황제로 천극하다. 핀란드의 게임회사 슈퍼셀, 클래시 오브 클랜을 출시하여 흥행을 이끌다.
- 2011년:강조의 붕어 이후 1년이 지나 명화(明和)시대가 개막하였다. 중화민국에서 건국 100년 기념 행사를 진행하다. 러시아 차르국에서 발견된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가습기로 인한 파동이 일었으며,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가 폭파되었다.
- 2012년:대한국 황태자 이청, 성년이 되어 정식으로 황태자 작위를 수여받다. 이인제 내각, 도합 임기 3년 달성. 크림반도에서 정체불명의 비행체 추락사건이 발생해 소비에트 연방 사회의 주목을 끌다.
- 2013년: 훈민정음의 날이 다시 한국의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타이완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가 제 3차 핵실험을 감행하였다고 방송에 송출했다. 정친왕 이진, 성년에 이르러 명화제로부터 정친왕 작위를 하사받다.
- 2015년:중화민국발 주가폭락 사태가 발생, 베이징의 신용불량자들이 장강의 낙옆이 되다. 대금민국에서 중동발 메르스가 유행하기 시작하다. 파리에서 최악의 참사로 알려진 파리 테러가 발생하다.
- 2016년:공화당 출신의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17 동계 올림픽의 개최지로 대금민국의 푸라얼지시가 선정.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가 이루어지다. 한성대법원 판사 문재인, 예능 프로그램에 출현.
- 2017년:대금민국, 푸라얼지시에서 2017 푸라얼지 동계올림픽 개최. 유럽에서 극우정당들의 부상이 시작되다. 대한국 김무성 내각 종료, 유승민이 제 53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선출되다. 베네수엘라 정부, 경제불황으로 인한 디폴트 선언. 공인헌친왕 이금이 지병으로 인해 승하하다.
- 2018년:트럼프 대통령, 대일, 대한 자본에 대한 규제와 대소무역 관세부과를 천명하다. 미소 무역분쟁 발발. 아랍 연맹에 가입한 국가들에서 동시다발적인 민간 시위 발발. 대한국에서 암호화폐 규격 논란이 발생하다. 러시아 차르국에서 대대적인 미투운동 발생. 한청기본조약에 대한 해석 차이로 인해 한만무역전쟁이 발발하다.
- 2019년:아키히토 덴노, 생전 퇴위 선언. 나루히토가 덴노로 즉위하며 레이화 시대가 막을 올리다. 우한시에서 미확인 전염병의 조짐이 확인되나 은폐되다. 만화 원작 대한국 애니메이션 '극장판 원예사:육예의 극단편',한국 아카데미상에서 우수 애니메이션상, 최우수 음향상 수상.
- 2020년:중국 중경정부 우한시를 중심으로 신종 질병 코로나19가 발흥하다. 스타워즈:더 파이널의 대흥행을 끝으로 스타워즈 시퀄 트릴로지가 성황리에 완결되었다. 중국 양경정부 후춘화 총통, 총통 임기 시작.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 바이든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다.
- 2021년:유승민 내각 체제 종료. 안철수가 중서원 총선에서 최다 득표를 받으며 안철수 내각이 개막하다. 중화인민공화국, 인도제국주의 확산을 명분으로 티베트 특수군사작전 감행, 토중전쟁 발발. 예브게니 프리고진, 제 33대 러시아 차르국 내각총리로 당선.
- 2022년:소련에서 건국 100주년 기념행사가 진행되었다. 고르바초프 전 칼리닌그라드 특별행정구 콜라수입국 사장, 노환으로 별세. 이탈리아에서 조르자 멜로니가 로마 진군이 일어난지 100주년이 되는 해에 이탈리아의 정권을 잡다. 노회찬 신진민주당 당원 살인미수 사건 발생. 독일 극우 왕당파의 쿠데타 시도가 발각되다.
- 2023년:중국 양경정부, 중국 중경정부 측에서 날려보낸 정찰풍선을 격주시켜 정찰풍선 파동을 일으키다. 세계 민간기업 최초로 무인기기를 이용한 미국 테슬라 그룹의 달 착륙이 성공하였다. 러시아 차르국 정부, 제 25회 잼버리 대회를 북유크크라이 지방에서 유치. 애니메이션 "잔잔한 내일로부터"의 시즌 2의 방영이 시작되어 모 뱁새가 크게 기뻐하다.
- 2024년:예브게니 프리고진 총리의 당선 과정에서 있던 여론조작 스캔이 벌어지다. 무함마드 가지 알잘랄리 시리아 총리, 헬기에서 추락사. 안철수 내각의 지지도가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다. 대금민국에서 개고기 금지법이 제정되다. 현재 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