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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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
무신양요 이전
1847: 조선국왕 이환(실제 역사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가 건강한 세자를 출산.
- 이환은 어의의 조언대로 정력제 복용을 중단하였으며, 이로 인해 건강의 악화가 멈춘 한편 정력제 과다복용으로 인한 죽음이 취소되었음. 한편, 의지를 다시 되찾은 이환은 정력적으로 장동의 세도가를 칠 준비를 시작함. 이 무렵, 비변사가 혁파되며 조짐이 생김.
당시 조선에 숨어있던 페레올 대주교의 서신이 인도차이나 및 남중국해 인근에서 항해중이던 프랑스 함대에 닿는 데 성공. 이롷 인해 조선으로의 출항에서 사용될 예정인 영국의 해도가 잘못되어있을 수도 있다는 현지의 정보가 전해지며 출항 시간이 늦춰졌으며, 이후 몇 번의 준비를 더 거친 라피에르 제독의 함대는 다른 항로를 통해 최대한 안전한 항로를 새로 몰색하기로 함. 그리고 예상대로, 4월 27일 경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에서 출항하여 기존 항로로 가자 함대의 훼손이 시작되며 기존 노선이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한 함대는 함선 수리+해도가 재검토를 위해 다시 상하이로 회항.
상하이로 회항한 함대는 해류의 위혐성을 실감한 탓에 본국의 추가적인 인력 요청을 고려하기로 하였으며, 이 작업의 첫 번째 작업으로 홍콩 내에 있는 조선의 교단들을 통한 조선해 인근의 수운에 대한 상세한 정보 파악 작업이 이루어졌음.
흑선 입항
1848년: 조사를 이어가던 라피에르 제독은 당시 홍콩에서 머무르고 있던 최양업 신부로부터 조선에 대해 들으면서, 한강 수운에 대해 알게 됨. 또한, 한강의 환경 등에 들으면서 한번에 한강을 틀어막고, 이를 통해 물자를 차단하여 조선 조정의 항복을 최대한 빠르게 받아낼 전략을 구상. 이를 위한 본국의 지원대 도착과 정보 파악을 준비하며 때를 기다린 라피에르 함대가 이내 1848년 1월 2일 상하이를 떠나 재차 조선으로 출항, 결국 강화도에서 교전이 벌어짐(무신양요).
사전에 기획한 대로 프랑스 함대는 한강 수운을 봉쇄하여 사실상 조선군의 보급로 및 수운을 차단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정족산성에 대한 포격과 당시 최고의 해안 요새였던 강화도 남부에 상륙하여 압박을 진행함. 아직 세도가의 철폐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던 탓에 군사적인 대비가 미비했던 조정은 패닉에 빠졌으며, 여기에 기세를 얻은 프랑스군이 서서히 강화도 전역을 차지하려는 조짐을 보인 한편, 통제된 물길을 타고 올라온 협상단이 한성 인근까지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등의 사태가 벌어지자[1] 서서히 전쟁을 계속할 경우 사직의 보전을 당부할 수 없다는 여론이 조정 내에 확산됨.
장동 김문은 권력의 유지를 위해 강화도를 수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군사력의 심각한 유출 및 되화 탓에 동원 가능한 인력에 한계가 명확했음. 결국 몇몇 개화파는 화친을 하여 와신상담하자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고[2], 이에 이환은 슬그머니 장동 김문이 지지를 한 것처럼 조서를 반포한 한편, 박규수를 접견관으로 파견하여 개항을 받아들임.
강화도에서 개항 협상이 진행되는 와중, 뒤늦게 프랑스 함대 측에 2월 혁명 소식이 들려옴. 본국으로 귀항하기로 결정한 프랑스 함대는 떠나기 전 간단한 약식 조약(조불화친조약)을 체결하고 돌아갔으며, 이 사태를 계기로 조정 내부에서 혼란이 일자 이환은 세도가에게 외교 참사와 패배의 책임을 물어 1차적으로 중앙 정계에서 과도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장동 김문 세도가 세력을 상대로 숙청을 단행한 뒤 개혁을 시작함(무신환국).[3]
- 조불화친조약 (2월 31일)
조선측 전권:접대관 박규수, 통역가 최양업 프랑스측 전권:조선원정함대 사령관 라피에르 제독 - 영구친선 한양-빠리 - 제물포와 원산이 개항되었으며, 개항장에서는 신아의 자유가 인정되는 한편 프랑스 함대에게 조선 측이 물자를 관료들이 결정한 가격에 따라 보급할 의무가 생김. - 거래 허가와 간단한 물물교의 합법화 - 프랑스에 대한 편무적(片務的)인 최혜국 대우 - 프라읏의 조난자 및 시민은 타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조선에선 어느 정도 수준의 법률을 따를 필요가 있음 - 기타 등등
- 한편 사태에 상하이와 홍콩에 있던 조선인들이 연류되었다는 정보를 조약 당시 입수한 이환은 암행어사(조사시찰단)들에게 홍콩에서 서양인들의 동향에 대해 샅샅이 파악하라는 밀령을 내렸으며, 이들은 서양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한 원정에 나섰음.
1849년: 조선이 프랑스에게 개항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광둥의 미국 동인도 함대장 가이징거 제독이 일본으로의 진출을 위한 중간거처 및 태평양 영향력 확대를 위해 조선의 개항 계획을 수립함.[4] 한편 조정 내에서는 척화파들의 목소리가 보수적인 유림과 장동 김문을 중심으로 커질 조짐이 보였으나, 은근히 주화론을 지지하는 한편 서양의 병기와 기술에 큰 경각심을 느끼고 있던 이환의 태도와 무력을 통해 입증된 실질적인 증거 탓에 어느정도는 목소리를 내는 것에 한계가 있었음. 때문에 척화파는 기술과 정보는 들여오되 오로지 복수를 위해 사용해야 할 것이며, 교류는 이전처럼 하지 말자는 입장으로 선회하게 됨.[5]. 한편, 민간에서는 흑선에 대한 갖가지 괴담이 확산.[6]
한편 상해로 파견나갔던 조사시찰단이 정보와 함께 1849년 9월 16일 경 귀국하였으며. 제 1차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심하게 수탈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환의 지시에 따라 서양과의 연결을 위한 단체인 교린사가 설립됨.[7] 교린사는 조사시찰단의 정보, 최양업 등 가톨릭 인맥, 선교사, 외교관들의 도움을 받으며 서양에 대해 지식을 정리하고 저서를 발행함.[8]
이후 척화파들의 불만도 달랠 겸 명목상 국방 강화를 위해 이환은 강화도의 방비를 다시 다졌으며[9], 한편 프랑스의 영향력이 애매하게 변한 조선에는 미국, 영국, 독일 등 기타 서구 열강 세력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함. 한편, 이 시기 헌종은 박규수와 흥선군을 중앙 정계로 포섭하여 세도가를 쓸어버릴 준비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풍양 조문을 정치적 이득과 아들과의 정략혼을 담보로 주화론 진영으로 끌어들여 세력견제를 이루어내는 계획에 착수했음.
1850년: 청나라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한 사이, 청나라의 시선이 조선에 끌리지 않은 동안 속전속결로 일을 끝내야겠다고 판단한 가이징거 제독이 이끄는 미국 동인도 함대가1850년 6월 25일, 강화도 앞 해역에 찾아와 통상을 요구함. 이에 잠시간 더 이상의 침공이 계속되지 않으면서 조용했던 조정 내에선 다시 '주화파 or 주전파'로 의견이 갈리기 시작하였음. 지난 해 동안 주화파로 대거의 개화파가 유입되면서 주화파에는 개화파 및 국왕의 친위 세력, 풍양 조문 세력이, 주전파에는 장동 김문 및 척화파, 유림이 몰리게 됨.
흥선군, 박규수 등 실학파와 풍양 홍씨는 주화를, 이항로 등 위정척사파와 잔존 안동 김씨는 항전을 주장함. 이환은 애매한 태도로 주화파의 편을 들며 주화론이 우세를 점하는 듯 하였으나, 유림들로부터 지난 무신환국의 명분이 '존왕양이'아니였냐는 지적이 들어온 탓에 명분론적인 타격을 입음.결국 최종적으로, 미군에 대한 조치는 척화가 결정되었고, 이에 조선군이 강화도로 다시 출병하여 미국 함대와 전투를 벌임. 강화도의 방비를 다진 덕에 2년 전보단 잘 맞섰으나 중과부적인 전선의 유지로 인해 타개가 힘들었으며, 결국 본국에 지원을 요청한 가이징거 제독의 조치로 추가 함선으로 함대가 불어나자 항복. 7월 15일,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 한편 조선국왕 이환은 위정척사파에게 책임을 물어 요직에서 대거 해임하였으며, 국왕과 결탁한 세도가를 제외하면 사실상 장동 김문의 영향력이 거세됨. 이 결과 주화파가 조정 내 파벌싸움에서 승리하며 개화파들이 대거 요직에 앉게 되었으며, 한편으론 환국 이후 개화파를 등용하고도 여전히 조정에 남은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개혁의 일환으로서 인재들의 대규모 편입이 이루어짐.(경술경장). 이 시기, 충청도에서 지방 관원 생활을 하던 이필제가 중앙 조정으로 올라오는 것에 성공하였음.
한편 은결을 색출하여 농민들으이 생활을 안정시키는 작업이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의 설치를 통한 개혁과 함께 진행되며, 삼정의 문란에 왕실의 손이 닿기 시작함. 또한, 조세의 금납화가 이루어지면서 쌀이 아닌 금속으로 조세가 치러지게 되었음.
1851년: 프랑스와의 접촉 이후 약 3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 2월 17일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설립되며[10] 군제와 정치에 대한 대규모 개혁이 감행, 조선의 본격적인 개화와 근대화 추진. 양전의 실시가 은결의 색출에 이어져 진행되었으며, 서구의 세금제를 참고하여 국가재정 확보를 위해 조세 개편이 이루어졌음. 한편, 일본에 조선이 양이에게 개국당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였으며, 서서히 대정봉환에 대한 건의가 올라오기 시작함.
1852년: 프랑스 제2제국이 건국되며 조불관계가 다시 재개됨. 조선은 공화국이 아닌 재정이 들어선 프랑스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으며[11], 이에 국가적 위신을 채울 기회라 파난한 나폴레옹 3세는 조선을 상대로 서양식 무기의 수출과 군사고문단 파견을 건의함. 그러나 아직까지 남아있던 척사여론 탓에 이 요청은 지연되었으며, 대신 유학생의 파견과 서양어 교육을 위한 인력이 제공됨. 이때, 조정으로 막 올라왔거나 미처 올라가지 못한 중인과 서얼 계층들이 크게 활약하고, 일부는 유학에 동참하며 점점 위상이 오르기 시작했음. 한편, 이 시기 개화의 물결에 동참한 양반들과 그렇지 않은 양반들을 기점으로 서서히 빈부와 출세의 격차가 갈리기 시작함.
그러던 중 조선이 프랑스, 미국과 개항한 소식을 알게 된 영국이 조선에 개항을 요구하였고, 당시 정세를 시찰하고자 청나라로 파견가있던 은정사가 영국이 어떠한 나라인지에 대한 대략적인 무력의 정보를 전달함. 이에 속전속결로 조영수호통상조약이 체결, 비록 후발주자였지만 영국도 한반도에서 조약을 통한 이권을 보장받기 시작하였고, 거문도에 영국을 위한 별도의 개항장이 설치됨.
이후 통리기무아문이 서양식 무기 수입과 중앙군 개혁, 프랑스와 영국, 미국 등의 지원을 받아 한양 병기참의 설치, 화폐 개혁 등 시책들이 추진되면서 일전의 개혁과 함께 민새으이 회복, 국가의 발전이 증진되기 시작함. 한편 민간에서는 서양 상인들과의 개항장 무역이 활성화되며 돈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하였으며, 조세제도의 개편과 경기 부흥을 통해 조정은 개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음.
- 다만 이러고도 장기적으로는 채무가 상당해질 것이 예상되었던 탓에, 기존에는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던 서북 지역에서의 광산개발이 흥선군의 주도 하에 이루어짐. 이 때 일부 광산은 채권을 위해 미국, 프랑스 등에게 판매되었음.
1853년: 내부 상황이 안정된 프랑스가 재차 조선에 접근하였고, 이에 따라 조불수호통상조약 체결. 미국과 영국에 이어, 프랑스도 수호통상조약을 통한 이권 확보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음. 프랑스, 조선에 본격적으로 군사고문단의 파견을 개시.한편 기존의 5군영이 왕실의 시위를 담당하는 무위영(武衛營)과 한양의 경비를 맡는 장어영(壯禦營)으로 개편이 완료되었으며, 교련국에서 교련병대(敎鍊兵隊)를 창설, 프랑스식 군사교육이 진행됨. 당연히 척화파와 유림 세력의 분노는 극에 달했으나, 장동 김문이 거세된 와중에 양란을 구실로 군제의 개편이 조정에서 주요 담론이 되면서 함부로 반박하는 것이 불가능했음. 일이 틀어지자 위정척사파는 노선을 변경, 전면 근대화를 지연시키고 자신들의 입지를 키울 목적으로 북벌론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함.
조선 영국 총영사관 설립. 영국과의 외교가 본격화되는 한편, 당시 대조선외교를 담당하게 된 해리 S. 파크스는 조선 조정에 영국식의 급진적인 근대화 및 서구적인 개혁을 할 것을 제안함. 한편, 청나라 내부에서는 소속방토(所屬邦土)인 조선이 침공당해 완전히 식민화되는 게 아닌 이상 당장은 방기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어지러운 내부 사정에 집중하게 됨. 이북과 이변, 유배 해제.
한편 청나라에선 태평천국군이 난징을 함락시키고 화북으로 북벌을 시작함. 페리 함대, 3월 31일 경 조선에서 출항하여 일본과 일미화친조약 체결, 뒤이어 영국군, 프랑스군도 출병하여 화친조약을 맺으면서, 잇달아 화친조약을 세 개나 체결한 막부의 권위가 흔들리기 시작했음.
1854년: 유학생과 개혁만으로는 아직 서구화가 부족하다고 느낀 조선에서 조약 개정을 겸할 겸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수교를 맺은 국가들로 젊은 왕족인 경평군 이인용을 필두로 유홍기, 오경석 등으로 구성된 보빙사를 1월 15일 경 파견함. 한편 조정에선 청나라, 서양의 동향과 앞으로의 국가적 방향을 두고 크게 경장과 북벌을 중심으로 한 ‘경북논쟁’이 시작됨. [12]
- 경장파(급진 개화파): “서양의 기계 수입과 제한적 제도 수립뿐만 아니라 제도적 개혁, 방향성을 정하고 전면적으로 시행해야”
- 북벌파(위정척사파 다수, 수구적 온건 개화파, 이필제): “지금까지의 정보들을 보아 청나라는 이미 망조에 들었는데, 지금 당장 북벌을 추진하여 국위를 선양해야”(속내: 전면 근대화 지연 목적)
팽팽한 주장으로 인해 결론이 나지 않던 중, 당론으로 조정이 과열될 것을 우려한 헌종의 중재를 통해 보빙사 귀환 후 결론을 내리기로 함. 한편 이를 통해 차후 명분로에서경장파를 열세에 밀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개혁을 완수하는 대로 북벌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헌종은 군의 육성과 부국강병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됨. 한편, 일본에선 미일수호통상조약이 1년 일찍 체결되면서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역사의 변곡점이 생기기 시작했음.
- 1854년 오페르트 살인 사건: 1854년 조선으로 온 22세의 젊은 상인 오페르트가 척사파 유림에게 살해당함. 이에 따라 독일 측에서 희생자에 대한 배상 등을 조정에 요구하며 강화도 앞바다에 함대를 끌고 나타났으며, 이는 같은해 조독수호통상조약 체결로 이어짐.
1855년: 프랑스에서 1855년 파리 박람회 개최되었고, 보빙사 역시 이를 방문하여 관람함. 이때 경평군과 보빙사의 나머지 인원들은 서양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전면적인 서구화만이 조선을 살릴 길이라는 생각을 품게 됨. (이후 경평군은 왕실의 근대화를 추진, 유홍기와 오경석은 지식인 양성, 관료들의 개화사상에 기여) 한편, 정치적으로 승자의 위치에 섰지만 완벽한 위세는 점하지 못한 풍양 조문이 해운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음.
1856년: 서양으로 갔던 보빙사가 돌아오면서 경북논쟁이 재개됨. 처음에는 이인용의 주장으로 인해 문명개화론이 우위를 점하는 듯 하였으나, 애로호 사건으로 2차 아편전쟁이 시작되자 지금의 군사력이면 정예암흘 고려할 때 아무리 근대화가 완료되지 않았더라도 요동을 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지 않느냐는 여론이 득세하면서 ‘문명개화’에 우세하던 여론이 반반이 됨. 도저히 의견이 좁혀지지 않자, 이환은 지난 병자호란때와 같이 관전무관단을 파견하고 사오항을 지켜본 뒤, 정말 기회가 난다면 직접 출병하여 요동을 어낼 것을 선언.
이에 따라 2차 아편전쟁에서 영,불, 미 등의 서양 함대에 문무관전단(관전사) 파견되었으며, 청은 정보를 파악하지 못한 탓에 조선에 경계령을 내렸을 뿐 큰 조치를 취하지 않는 방향성을 보임. 유홍기, 서양의 정세 및 개화사상을 담은 "불란일기"를 집필. 한편 위정척사파 등이 만인소를 단체로 올리는 등 반경장 행보를 보였으나, 이환이 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발표하며 만인소를 통한 개화에 대한 반대 움직임은 사실상 사문화되게 됨.
1858년: 중도에 텐진 조약 체결되는 동안 전쟁의 양상을 지켜보던 관전사가 귀환함. 이에 따라 청의 망조가 든 것이 확실해지며 이환의 명분론을 예고받은 개화파 또한 전면적 제도 개혁에 대한 생각이 확고해지는 한편 전면적 북벌론을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민중들 사이에선 청나라가 망조에 들었으니 북벌을 하잔 여론이 증가함. 한편 소수 개화파들 사이에서는 북벌 이후엔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막대한 인구수와 농토를 가진 일본을 쳐야한다는 주장이 올라왔으나, 당시엔 북벌론이 주류였던 탓에 주류 여론으로 자리잡지는 못했음.
1859년: 2차 대고포대 전투가 벌어지며 2차 아편전쟁 재개되었고, 이에 따라 조정 내에선 영국과 프랑스에 입조하여 만주의 고토를 되찾아오자는 북벌 여론이 우세가 됨. 개화파는 시간을 더 가진 뒤에 최대한 빨리 출병하자는 의견을 표력했으나, 함경도의 "조선-청나라 국경" 일대에서 상인들간의 압송문제를 두고 퍼진 말싸움이 팔기군과 조선군의 분쟁으로 번지게 됨. 이는 최대한 빨리 위신을 올릴 생각이였던 북벌파의 자작극이였으나, 이미 조정의 흐름 자체가 북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탓에 결국 이환이 직접 재가를 선언하면서 북벌 결정.
기미 북벌(己未北伐): 조선 신군과 양계 지역 포수들이 선전포고 없이 북진하여 청나라군을 격파한 뒤(이 과정에서 삼전비가 산산조각났고, 그 잔해를 주춧돌 삼아 훗날 조약문이 작성됨), 성벽에 오물을 발라 방비를 시도한 팔기군을 단숨에 북간도 및 동간도(연변, 용정 일대)를 점령. 본래 북벌파는 남만주의 핵심부인 요동에도 쳐들어가고자 하였으나, 전선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한 이환의 만류로 속전속결로 간도의 확보와 요령성 서부로의 진출만을 마무리하기로 함.
1860년: 1860년 10월 18일 베이징 조약 체결, 러시아가 강력하게 이권을 주장하며 연해주를 차지함. 한편 그 해 11월 13일 심양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약에서 조선은 “사대관계 폐지 및 동등한 외교권(대조선국, 대군주, 개국 기년 사용 등), 간도의 점진적 할양 및 요령 동부의 조차, 청나라의 배상금, 서양이 개항시킨 항구에 조선 상인 진출 허용(인삼), 서양과의 자율적인 외교 허용(자주국 용어 사용 가능)” 등의 이권을 얻어냄. 이 내용은 삼전도비 비석의 잔해를 다시 조립하여 요령통감부 일대에 새로 세워졌음.
북간도(연변 등)에 '변계경무청'을 설치하고, 이항로의 문인이자 북벌파 무관으로서 적극적으로 전투를 지휘한 양헌수를 '북변간도관리사', 한성근을 부관리사로 파견. 장차 영토를 조선의 것으로 편입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서 간도로 조선인 진출 활성화. 요령 동부에는 요령통감부가 설치, 명목상 청과 조선의 공치가 이루어지는 지역으로 규정됨.
심양 조약의 체결에 따라, 북벌파는 경장 이래 일시적으로 조정 내에서 승리. 그러나 북벌이 실현된 탓에 명분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진 북벌파는 여전히 근대화의 점진적 중단을 주장하는 보수파에게서 작게 두 파벌이 갈라져 나왔으며, 각각 정일론과 보수파로 불리게 된 이 파벌은 후방의 일본까지 쳐서 안정을 도모하자는 극단적인 주장과, 개화정책에 편승하여 최대한 의견을 반영하는 식으로 권력에 영향을 끼치자는 주장을 펼치게 되었음.
한편, 최제우의 신내림 해석이 달리 이루어짐. 신내림의 신화가 나라를 도우라는 입장이 나라의 팽창을 지지하라는 의미로 변질되었으며, '서학이 아닌 동학의 교리로서 동양 평화를 이룩'을 주장하는 방식의 사상으로 이어지게 됨. 이 과정에서 기술에는 수용적인 태도를 보임.
1861년: 북간도 일대의 합병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자는 북벌파의 주장에 따라 북간도독부의 설치가 이루어지던 중, 녹둔도와 북간도-연해주 간 국경선을 두고 3월 7일 “조러 국경 분쟁” 발발하면서 러시아에서 조선에 대한 적대적인 시각이 성장한 와중에 러시아인 살해 사건이 녹둔도 근해에서 벌어짐. 직후 브릴료프 함장의 러시아 군함 파사드닉 호가 무력 시위를 시작하면서 조정 내에선 영국과의 대립관계에 있는 러시아와의 전쟁 및 안보 위협에 대한 ‘공러증’이 돌게 되었으며, 한편 해리에 의해 친영파가 상당한 확산을 이루었던 경장파가 영국과의 친선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이 영국과 관계를 가까이하고자 함. 이 조치의 일환으로서 그 해 3월 11일 이환의 주도로 영국 총영사관이 공사관으로 승격되었으며, 얼마 뒤인 19일 경 영국의 중재 의사가 나오면서 호프 중장의 영국 동양 함대가 와서 대응한 덕에 국경분쟁이 해결됨. 한편,분쟁이 해결된 이후 북간도는 북간도 도독부로서 개편.(이후 대한제국의 본토인 용천도, 통강도 등으로 편입.)
한편 청나라에서는 신유정변을 통해 “공친왕-태후” 삼두정치 집권, 조선에게 국치를 당할 정도로 약해진 국위를 회복하자는 취지에서 양무운동 시작됨. 이에 대처할 겸 북벌파의 기세를 꺾어놓을 생각이였던 경장파는 “청나라가 개혁을 통해 강해지면, 조선에 복수하러 올 것이다”라는 내용의 보복론을 유포, 현재 확보한 간도독부의 점차적인 편입과 요령통감부에 집중하기로 함.[13]
결과적으로 1861년 기준, 북벌론이 사실상 승리를 거둔 가운데 ‘공러증’과 ‘보복론’으로 인해 조선 내 불안이 고조되었고, 이에 따라 북벌파의 파벌도 여러 갈래로 갈리기 시작하며 제도개편과 개화에 뜻을 뜬 이환에 대한 지지를 중심으로 단합한 경장파가 ‘경북논쟁’에서 최종 승리, 이후 정부체제가 개편됨에 따라 경장파가 북벌파를 대신하여 요직을 차지하였으며, ‘전면적인 제도적 근대화’를 위한 단계를 밟기 시작함.
- 신유개혁
기존의 6조를 6아문으로 개편하는 과도기적인 편성이였으며, 이 과정에서 기존의 예조, 호조, 병조, 이조, 공조, 형조가 통리기무아문을 필두로 한 내무아문, 외무아분, 병무아문, 탁지아문, 법무아문, 학무아문, 농상아문, 경무아문 등으로 완벽하게 개편됨. 삼정승 체제 또한 이에 맞추어 개편되면서 국내상(기존의 영의정을 대체)인 이 통리기무아문과 내무아문을 지휘하게 됨. 이유원이 국내상에 임명된 사이 실권자는 나머지 두 의정이 맡게 되었으며, 좌의정인 박규수는 탁지 및 군무아문을, 우의정인 경평군은 법무, 학무, 농상아문 등의 정책을 맡게 되었음.
한편 형조와 이조가 담당하던 치안과 종실에 관한 업무는 각각 양 포도청의 병합을 통한 경무아문의 신설로 이어졌으며(당시 지방에서 종종 일어나던 반개화 민란을 관리하고, 바뀐 행정체제에 쉽게 적응하기 위함), 이조는 직후 비서아문으로 개편되어 궁내부로 변환되기 전 일종의 과도기적 단계를 거치게 되었음. 또한 한성부의 호구조사 업무와 보건, 환경미화 업무 등을 담당하며 한성부의 행정업무가 수행되기 시작함.
1862년: 조선통신사, 정식으로 부활하여 혼란스러운 일본에 서구식 옷차림을 한 채 파견. 열렬한 환호 막부의 동요 및 조선을 근거로 하루빨리 서구의 마수를 피하기 위한 유신을 주장하는 존황파들의 부상이 시작됨. 통신사는 이번 출항을 기점으로 일본에 대한 직접적인 조사를 통해 향후 해양 방면에서의 정책을 결정하고자 하였으며, 한편으론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정일론이 잠시 힘을 얻기 시작함.[14]
대조선국 조정, 서양의 '제도와 학문' 등 국가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배우고자 김홍집, 박정양, 이변, 이욱등으로 인사가 구성된 사절단 '견서사'를 서양에 파견. 1862년 런던 박람회 방문, 후쿠자와 유키치 등이 포함되어 일본과 서구가 체결한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고자 했던 일본 분큐 사절단과 조우. 한편, 청나라에서는 상승군이 태평천국을 진압하는 데에 성공하면서 반격의 기회가 열림.
한편 사법제도를 개편하기 위해 법무아문 산하에 재판소가 설치된 한편 한성에는 근대적인 재판관의 양성소가 들어섰으며, 크게 진위재판소[15] 및 종심재판소[16], 조차재판소[17] 등이 설치되게 됨. 한편 신식군의 설치에 따라 일부 구식 군인들의 불만이 생기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시험을 통해 합격하지 못한 이들 및 영남 출신으로서 일부 차별을 당한 계층들이 보수파에 기대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함.
1863년: 경장이 본격화되면서 조정에서의 입지가 급격히 약해지기 시작한 척화파 세력들의 반발이 다시 올라가기 시작함. 다만 명분론적으로 부족했던 이들은 결국 폭력적인 수단인 지방에서의 암살 및 은밀한 활동을 통해 경장을 늦추고자 하였으며, 일부는 지방의 유림들을 통해 몇몇 백성들을 선동하여 반경장, 반개화 성향의 민란을 일으키기도 함. 초기엔 위정척사파가 주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보수파와 그 중심인 이융성(이필제)에게로 권력이 집중됐음.[18]
한편 과거제가 혁파됨에 따라 새로운 인재를 등용할 관청인 문관전고소(文官銓考所)가 설치되어 시험에 합격할 시 문관임용령(文官任用令)에 따른 새로운 인재들의 편입이 이루어지는 시스템이 확립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재임용에 실패하여 낙향한 잔반들의 불만이 심화되기 시작함. 이들은 이후 북벌파 등과 연대하여 세력을 기르는 방식으로 지역에서의 민란을 꾀하기도 했음.
- 최양업 살인 사건: 1848년 조선의 통상 당시 통역을 맡고 조정 내에서 일하던 최양업이 1863년 살해당함.[19]
그 해 7월 경, 견선사의 마지막 일정인 미국 시찰 작업이 진행됨. 태평양에서의 동향 및 유럽에 밀려 잘 드러나지 않던 미국의 광활함을 체험. 한편, 당시 하와이의 왕가 측에서 조선에 국혼 의사를 표명하였으나 미국과의 마찰을 원하지 않던 견선사의 거부로 인해 국혼은 불발.
파견을 마친 조선 통신사가 돌아와 조정에 새로운 일본에 관한 정보를 전달, 막부의 권위가 바닥날 지경에 이르렀으며, 그를 대비하여 몇 명의 밀정을 일본에 심어두고 왔음을 알림. 이에 조정은 차후 존황파와 이일본에 개입할 여지를 남겨두었으나, 이후 보신전쟁 시기 일본의 반외세 정책과 조선 내부에서의 혼란으로 인해 일본에 준비한 개입은 보신전쟁 시기의 정보 확인으로만 끝나게 됨.
1864년:공친왕이 미국 함대를 구매하려 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조선 내의 북벌론이 재확산됨.
1865년:견선사가 서양에서 탐문을 마치고 귀환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신진 관료층과 양반들, 종친들 사이에도 개화사상이 완벽하게 뿌리내리는 대에 성공함. 한편 수학원 등 왕립 교육기관을 설치한 이환이 과로로 인해 쓰러지면서 정국의 전환이 오게 되었으며, 섭정으로 나서게 된 왕태자 이문이 연소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섬정의 뜻에 따라 홍문관을 홍문원으로 개편, 중신들의 자문을 통한 이문과의 군신공치가 처음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서 이환의 전제적인 권력구조에 작은 변천이 생기게 됨.[20]
한편, 과거제 폐지의 여파로 불만이 생긴 선비들의 불만이 이환의 생사가 위태로워지며 정점에 달함. 이 시기 정일론까지 통신사의 주장으로 좌절되자 이필제는 고향인 충청도로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하였으며, 사람을 불러모아 조선을 폐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뒤, 북벌과 정일론을 모두 달성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내세워 민란을 서서히 회책하게 됨.
1866년: 과로로 인해 몸에 무리가 온 이환이 7월 25일 ,향년 39세의 나이로 승하. 묘호는 문조로서 정해지고 시신은 경릉에 안치되었으며, 뒤이어 그의 장자였던 이문이 개국 475년 대조선국의 25대 대군주로서 즉위. 박규수, 흥선군, 김병국, 이유원 등 중신들의 자문을 바탕으로 개혁적 정치를 추진하기 시작함.
- 이는 향후 홍문원을 중심으로 원훈들이 정치를 휘어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전제권력이 신하들과의 공존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원인이 됨. 또한, 조정의 급격한 서구화가 이루어지게 되며, 조정이 아닌 정부가 필요하다는 이론이 제기되기 시작했음.
한편 유홍기의 영향을 받아 계몽주의가 조선에 전파된 한편, 김홍집 등 신흥 관료들 일부가 민권 확대, 의회 개설 및 프랑스의 사례를 따른 성문화된 헌법의 제정에 호감을 보이면서 민권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함. 주로 한성에서 이루어졌으며, 세금의 축소와 표현의 자유 보장 및 형평운동을 통한 백정에 대한 차별 철폐 요구가 나타나기 시작함. 또한, 최익현 등 정학과 개화사상의 조화를 추구하는 인물들이 이 운동에 가담하여, 개화당에 이어 민생당이라는 이름의 과도적인 정당을 만들기도 하였음.
1867년: 이필제가 난을 일으키기 위한 군사들을 지방에서 비밀리에 모집하기 시작하였으며, 9아문의 재개편이 시작되며 조정 내에서 북벌파와 경장파의 대립이 절정에 이르게 되었으며, 정한파를 흡수한 북벌론자들은 외부를 평정하여 내부의 안정을 도모하자는 의미에서 군사를 일으켜 북경까지 당도하고, 일본에도 개입할 것을 주장.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북벌론자들이 정계에서 사실상 제거되는 수준의 조치가 취해지는 결과를 낳음.
- 한편 비공식적인 정당인 경강상인과 보부상, 타 지역의 상인들이 모여서 만든 팔도중앙총상회, 개화파들의 정당인 개화당과 온건 북벌론자들의 정당인 자강당, 민권론자들의 민생당과 근황 세력들이 만들어낸 조직인 황국협회 등 다양한 조직들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함.
개혁의 일환으로서 정부 직제가 다시 한 번 개편되어, 기존의 아문들 및 통리기무아문이 궁내부, 탁지부, 경부, 외부, 내부, 농상공부, 학부, 법부, 경부, 의정부 등으로 개편되며 10부 체제가 마련되게 됨. 기존의 삼정승 체제는 다시 개편되어 좌의정과 우의정이 폐지되었으며, 대신 국내상, 즉 국내대신이 의정부를 담당하고, 각부의 대신들이 경각부처들의 공무를 맡는 방식으로 개혁이 이루어짐.
또한 황제의 자문기관들이 변경되어 비서아문이 궁내부로 변경되는 등 근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승정원은 왕명의 출납기구로서 잔류, 홍문관은 홍문원으로 승격되어 원훈이라고 불리는 중신들을 필두로 대군주의 자문을 담당하게 됨.
1868년: 정부 직제의 개편, 대군주의 교체와 정무의 이원화, 과거제 폐지 등으로 혼란스러운 당장의 시국이 적기라고 판단한 이융성의 주도로 충청도 지방에서 병사가 일어나, 조선 최후의 북벌파에 의한 반란인 이융성의 난(K-세이난 전쟁)이 벌어짐. 결국 3월 27일부터 조정군이 진압을 위해 투입되면서 내란으로 확대.
막 개편을 거치고 전쟁이 시작된데다 예상치 못한 내란을 맞은 조선 조정은 처음에는 민란의 수습에 시간을 끌었으나, 점차 봉기군의 실력에 한계가 오면서 다시 조정의 군대가 우위를 점하기 시작함. 결국 12월 3일 이융성이 스스로 용작두를 준비한 뒤 자결하면서 이융성의 난을 끝을 맺었으나, 충청도의 재건 및 피해 복구에 시간을 쏟느라 일본에 개입하려던 조정의 계획은 무산됨.
- 이 시기 일본으로 파견된 조선의 밀정들은 에도성이 무혈개성된것을 본국에 보고하였으며, 결국 때를 놓친 조선 조정을 일전 통신사가 만나 간을 보았던 막부와 존황파 중 존황파의 손을 들어주기로 결정함.
1869년: 전쟁 종료 3달 전, 조정에서 신정부군을 지원하는 방안을 어전회의에서 결의. 이 때 박규수는 신정부군에게 은혜를 입히면 차후 일본과의 화친이 유리할 것이라는 주장을 에도 막부에게 불리한 시국을 예시로 들며 제안했으며, 이를 설득력 있는 외교론이라 받아들인 군주인 이문이 수락. 직후 영국의 방침을 따라 메이지 신정부에 대한 지원을 시작, 000을 필두로 한 가고시마 특사를 파견하여 정식으로 존황양이 세력에 지지의사를 표명함. 이로 인해 존황파는 외교적인 의미에서 조선과 친선관계로서 물꼬를 트게 되었으며, 당시 문민 지도자였던 오쿠보 도시미치와 접선해 조선의 '토막원황'을 제안하였음.
<1860년대 후반~1870년대 초반 조선 정치> 9부 개편 이후 대조선국 정치구도 의정부:국내상이 수장 -탁지부탁지상이 수장 -법부:법무상이 수장 -외부:외무상이 수장 궁내부:궁내상이 수장 학부:학무상이 수장 경부:경무상이 수장 군부 군무상이 수장 내부:내무상이 수장
대군주 대권 구조 -침해받지 않는 군상대권, 그러나 이 시기부터 공치의 원칙이 적용됨 -승정원을 통해 직접적인 권력 행사, 홍문원을 통해 원훈들과의 중재 및 자문
원시적 당파 구조 북벌파경장파 대립 종료. 본격적인 원시적 정당의 형성. 경장파 계열:개화파,경장파-개화당 중도 및 군민공치론 계열:헌정회-헌정당,민생당 상식적 보수정당:자강당,황국협회 특수정당:팔도중앙총상회
정치 개혁은 전제적 시스템을 벗어나 서양을 모델로 국정을 개혁하면서, 많은 영향을 준 영국과 초기 참고 모델인 프랑스, 그리고 당시 부상중인 독일이 신규 모델로 추가됩니다
1870년: 일본에서 조선의 영향으로 개혁 속도가 더 빨라지기 시작하였음. 이에 따라 여러 유학생들이 가까이에 있는 조선과 멀리 있는 유럽 등으로 유학행렬에 오르는 중에 이와쿠라 사절단 파견되었으며, 10년 내론 조선과 동등하게 올라서고 그 후엔 유럽 열강들과 동등하게 올라선다는 각오 하에 유신정부의 주로도 각종 개혁들이 이루어짐.
한편,동양 국가 간 최초의 근대적 평등 조약인 조일수호조약이 체결됨. 이로서 조선은 유사시에 일본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청나라에 대한 군사적인 견제조약을 비밀리에 마련하여 후방을 안정화시키는 데 성공함.
1871년: 헌법 제정을 코앞에 두게 됨에 따라 조선 조정에서 영국식, 혹은 프랑스식 헌법을 모델로 할것인지를 두고 영불논쟁이 벌어짐. 그러나 양측 헌법 모두 군주의 권위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문제가 있어 여러차례 의견이 달랐고, 논의 결과 조선적인 측면을 중화제로 사용하되 양국의 의회 제도를 모두 본딴 개혁의 추진을 결정. 이에 따라, 개혁의 상징이 될 헌법의 내용이 적힌 국제대요(헌법 초안)가 이해 3월경부터 작성을 시작함. 청나라, 조선과의 동아시아 외교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목적의 일환으로서 동양 국가 간 두 번째 근대적 평등 조약인 청일수호조규 체결.
- 12월경, 대만에서 미야코섬 조난 사건 발생. 러시아, 청나라의 일리 지방을 점령하여 일리 사건을 일으킴.
1872년: 조선의 인구가 약 2244만명(실제 역사 1855년 추정인구 1685만명. 실제 역사 근대화 당시 일본과 비슷한 연 1.7% 증가율로 늘어날 경우 1866년 2천만 돌파)으로 증가하였으며, 이에 따라 인구 밀도가 늘어나면서 조선인의 간도 지역 확장이 계속 됨. 청국통감부에서 빗발치는 청나라인과의 마찰 증가(일부 청나라인들은 유사 쿨리로서 노예로 팔리거나, 노골적으로 차별을 당하기도 했음.). 한편, 조선에서는 김홍집과 최익현 등을 위시한 자유민권운동이 가속화되기 시작함.
일본에선 약 2년간의 여정을 거치고 이와쿠라 사절단 귀환하였으며, 때마침 ‘미야코섬 조난 사건’을 계기로 ‘정벌론 논쟁’이 발발하게 됨.
- 정벌론자: “류큐 제도를 확실히 복속시키고, 대만을 일본이 점령해야.” 조선 경북논쟁 당시 북벌파와 비슷한 세력. 급진 개혁 저지를 위해 대외 팽창을 주장함. 정한론을 주장하는 세력 역시 존재하지만, 과거 “1862년 통신사, 분큐 사절단, 1869~1870년 조약 체결” 등으로 인해 실제 역사보다 소수이며, 대신 그만큼 조선 외 다른 지역을 정벌하자고 주장하는 식으로 흘러감. 사이고는 내부 불만을 빼는 차원에서 “1859년 조선의 간도 출병”을 사례로 들어 이를 지지함.
-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등 반대파는 “청나라와 전쟁은 시기상조”이라며 반대. 그러나 미국인 외교고문 르장드르가 대만 침공의 가능성을 어필하자, 정벌론자가 승리.
사이고 쥬도를 지휘관으로 대만 출병을 감행하며 모란사 사건이 발발함. 기겁한 청나라는 이전에 있던 ‘조선 군사분쟁(기미북벌)’의 선례를 반복하지 않겠다며, 원정군의 배로(실제 역사에선 2배) 회군 정예병을 보내고, 때마침 풍토병이 출병군을 덮침. 이에 따라 일본군이 철수, 청일 양국의 호환조결이 실제 역사의 배상금을 대신하여 책정됨.
- "청나라는 특정 개항장에서 일본 상인에게 쌀 무역 특권(저렴한 구매 등)을 부여."
- "청나라는 제한적 조건(연간 일정 한도, 상황에 따라 방곡령 선포 가능, 특정 개항장 한정) 하에 일본에게 쌀 무관세 수출"
- "해당 규정은 5년 단위로 재협상 후 갱신."
해당 사건 이후, 일본은 남방 진출을 가속화할 목적으로 류큐를 번으로 강등시킴(1차 류큐 처분). 한편 메이지 5년, 대만 출병이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나자 사이고 등 정벌론자들은 오쿠보 도시미치 등 유지론자들로부터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실각함. 또한 사츠마 출신 인사드르이 1년 이른 낙향 탓에 실제 역사보다 지조개정이 일찍 이루어졌으며, 이때문에 일본 농민들의 불만이 증가함.
1873년: 1862년 반란을 일으킨 청나라의 야굽벡이 에미르로 등극하였으며, 같은해에 시작된 둥간 혁명의 진압되는 기미를 보임. 조선에서 경복궁 재건에 대한 논의 시작되였으며, 내각제 및 양원제로 제도가 결정되면서 영불논쟁은 사실상 종료. 또한, 근대화 과정에서 기득권과 척화파들이 갈라치기 당하고 신흥 계층들이 형성되었으며, '위아래가 있어야 정치가 돌아간다'는 보수적인 영국 고문들의 주장, 마지막으로 흥선군의 주장에 따른 공훈들의 책봉 논의가 이루어지며 차후 근대적인 귀족 계층의 형성이 이루어질 단계에 5등작에 따른 봉작이 예고됨. 같은해 7월, 관선을 통해 박규수 전 국내상이 초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됨.
한편 일본애선 국민개병을 통해 징병제가 시행되기 시작했으며, 아카츠키의 난이 벌어지며 향촌의 불만이 급진적인 근대화와 더불어 심화됨.
<경복궁 중건> 조선 5대 궁궐:
- 경복궁: 임진왜란 이후 사라진 걸, 다시 1873년부터 "동서양제"식으로 복원.
- 창덕궁: 그동안 내부 시설이 신식 개조가 되고 일부 양식 건물이 세워짐. 전반적으로 "조선의 전통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한 궁궐"로 유명함.
- 경희궁, 창경궁: 파괴가 되지 않은 원형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함.
- 경운궁: 즉조당, 석어당 건물 두 채만 존재한다.
- 영류전과 주변 거리
-기존의 오위총독부, 동궁 자리에 아카사카 이궁 같은 "석조전과 서양식 정원"을 만듬(경복궁 영류전. 景福宮 留榮殿). 전반적으로 네오 바로크 양식이나 오얏꽃 문양과 조선풍 기와 등 조선 양식도 혼재. -하늘에서 볼 경우 "광화문-흥례문-근정문-근정전-사정전-강녕전"과 "서양식 기다란 정원, 서양식 궁전"이 좌우로 나란히 있는 구조. -광화문 왼편엔 원수부 건물이 들어선다. -경복궁 앞에 사직로가 존재하지 않음. '육조거리'가 근대식 관청들이 들어서서 관청지구로 기능함. -현대엔, 주번에 고도 제한을 걸어서 정부서울청사나 고층빌딩 등이 없음. 육조거리 전체에 너무 높지 않은 다층 관청단지가 형성(K-카스미가세키) -현 세종대로 사거리를 중심으로 도로망이 갈라지는 구성. 율곡로, 사직로는 광화문 앞을 안 지나고, 효자로/삼청로가 '대로'로서 새문안로까지 이어진다.
1874년: 대조선국 대군주 이문의 뜻에 따라 외왕내제가 사용되기로 하면서 봉작 방식이 결정됨. 장자는 작위를 습작하되, 그 외 후손은 3대 내로 공훈을 세워 따로 작위를 받거나 양자로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면 평민으로 강하. 임명의 조건은 경장 도중 세운 공훈으로. 한편, 청에서 조선의 동태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함. 1869년 청나라로 와 해관 말단직을 떠돌던 러시아의 뮐렌도르프가 조선으로 오게 됨.
일본, 폐도령 시행으로 인해 신푸렌의 난 발발. 정치적인 혼란이 가속화됨.
1875년: 이융성의 난과 같은 사태가 지방 권력자들의 영향력이 큰 일본에서 더 크게 벌어질 것을 염려한 메이지 정부가 사이고 다카모리, 에토 신페이 등의 낙향 인사들을 과도하게 감시하게 됨->이로 인해 사이고와 에토가 불만이 극에 달한 무사들의 호응에 동조함. 야마구치 현의 마에바라 잇세이의 주선으로 사이고, 에토가 밀담을 함. 결국 불만이 쌓인 사족들은 ‘오쿠보 등 수권세력’을 “일본의 아래인 조선과 대등한 외교를 맺고, 대만 출병 등에 제대로 호응하지 않은 반역자들”이라고 주장함. 사가 현, 사쓰마 현, 야마구치 현에서 동시에 반란. 세이난 전쟁(실제 역사 사가의 난+하기의 난+세이난 전쟁)->여력이 부족했던 메이지 정부는 "정살원일(征薩援日)"을 요청.
한펴, 조선에선 일본의 정한론이 알려지며, 세이난 반군이 “조선을 정벌하려는 세력들”로 인식이 잡히고, 이에 조선정부는 지원을 요청, 이를 수락한 1만 5천여명의 조선군이 사쓰마로 원병함(구주원정. 九州遠征). 이후 조선 정부가 세이난 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군사적 저력이 일본에 제대로 알려짐. 동시기간도에서 통감부 내에서의 알력싸움과 조선인-청나라인 간 마찰로 인해 분쟁이 발생->전쟁을 꺼리던 청나라와, 구주 원정 중이던 조선은 서로 갈등을 무마함.
보신전쟁이 이어지던 중러시아에서는 일본의 반란 소식을 듣고, 이를 틈타 사할린과 류큐 제도를 모두 복속시키겠다며 무단으로 점령함(가라후토 사건). 일본은 겨우 영국의 중재로 ‘상트페테부르크 조약’(“사할린은 러시아에게 복속되고, 류큐 제도 남단은 여전히 일본이 소유한다,”)을 맺음. 그러나 사실상 사할린 섬을 무력하게 러시아에 넘긴 거였고, 일본에선 공러증이 심화됨. 그러던 중 조선의 정살원일, 심화된 공로증으로 인해 일본 내에선 정계와 대다수의 민중을 막론하고 정한론이 완전히 뿌리뽑히고, “조선과의 우호적 동맹”이 주류가 됨. 이 흐름을 타고, 조선에선 이후 결산 과정에서 공수동맹을 체결함.
- '조일의정서' 내용:
"조선이 타국(겉으론 러시아가 대상인 듯 보이나, 실제론 청나라 겨냥)과 전면전을 할 경우, 일본은 즉시 군사 지원을 한다. 이 조약은 조약 체결 3년 뒤부터 발효된다." -조약 체결 3년 뒤부터는 조선이 타국을 상대로 방어전 형태의 전면전을 할 경우, 일본은 즉시 참전 이외의 형태로 조선이 원하는 물자들을 지원한다. -조약 체결 5년 뒤부터는 조선이 타국을 상대로 어떠한 형태든 전면전을 할 경우, 일본은 즉시 참전한다." (조일의정서는 조청일전쟁을 치르고 개정, 이후 한영일 동맹으로 계승됨.)
1876년: 좌종당의 청군, 신강 원정을 개시함. 이롭넹서 증가한 인구로 인해 인구압이 심해지자 일부는 홋카이도, 대조선국, 미국 등지로 이주를 시작하게 됨. 이 시기 조선을 향해 이주한 일본인들이 조선에 가졌던 환상을 조선몽(朝鮮夢)이라 부름.
1877년: -청일호환조관 5년차->재협상(갱신) -조선: 초대 내각총리대신 박규수, (실제 역사와 같은 연도에) 사망. -청나라: 야굽 벡이 뇌졸중으로 급사. -세이난 전쟁과 가라후토 사건, 조선의 군사개입으로 귄위가 실추된 일본 정부가 류큐 번을 폐지하고 쇼타이 왕을 도쿄로 압송함(2차 류큐 처분)->이를 보고받은 미국의 그랜트 대통령이 이를 저지하라 명하고 이에 따라 미국-청나라-일본 간 협상이 시작됨. 일본은 조선을 중재 역으로 끌어들여 균형을 맞추면서 4자 회담이 개최됨. -최익현 등 민권론자: "유구국은 조선이 오랫동안 교린 외교를 한 오랜 인연이 있는 나라. 그런 유구국을 배신할 순 없다."
<청나라-일본-미국-조선 류큐 4자 회담> 그랜트: "류큐를 살리고 청일이 3분할한다. 아마미 군도는 일본이, 서남부는 청나라가, 중부 오키나와 섬은 청일 공동관리(그동안 권위가 실추됐으니, 여기서 물러서려 하지 않을 겁니다. )" 이토: “류큐를 멸망시키고, 서남부는 청나라가 복속, 중부와 아마미 군도는 일본이 복속.” 조선: “명목상이라도 류큐 왕국을 존치시키거나, 못해도 쇼 왕가의 왕작만큼은 유지해야 한다. 아마미 군도의 일본 합병. 나머지 류큐 영토는 청일 공동 관리. 도쿄로 압송된 쇼씨 왕가는 류큐 왕으로 돌아오고, 다시 청나라가 '중산왕' 책봉.”
조선의 제안은 전반적으로 그랜트의 제안과 유사함. 대신 "서남부를 청나라에게 넘겨 청나라가 베타적 이권을 가지는" 그랜트의 제안과 달리, 일본은 서남부를 청과 공동 통치령으로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류큐 전체에 영향력 행사 가능함. 또 청나라는 명목상 류큐 영토를 1도 못 받지만, 조공 책봉 체제를 유지하니 명목상으론 여전히 문제 없으며, 여전히 류큐 중서남부를 공동통치령으로서 일본과 공유함.
->회담 성립: 류큐 왕국 부활 및 류큐 국왕 쇼타이 ‘중산왕’ 책봉. 중재국들인 조선인들의 상업활동 및 정치적 이권을 보장. (후일 청나라와 전쟁 이후엔, 청나라치 지분을 조선이 2/3, 일본이 1/3으로 나누어가질 예정. 이럴 경우 일본은 "이마미 제외 류큐"에 대해 2/3 지분을, 조선은 1/3 지분을 가짐. 이는 훗날 2차 대전 시 한일전쟁 개전 사유로 작용할 수 있음.
-“강압적인 급진 개혁, 자유민권론자 탄압, 사족들 반란과 농민 봉기 진압, 모란사 사건/조선의 일본 원정, 가라후토 사건 등 굴욕적인 외교”로 오쿠보는 일본 내부의 공공의 적이 된 상태. 협상 결과가 알려지자 강경파는 “이번에도 오쿠보는 외교를 망쳤다. 5년전 번으로 삼았던 류큐마저 다시 놓쳤다.”며 반발. 결국 이토가 일본으로 돌아오고 조약이 알려진 직후, 오쿠보는 암살당함(기오이자카의 변. 紀尾井坂の変)
1878년: (실제 역사) 신강 무슬림 봉기 종료.
1879년: -개화 원로 오경석, (실제 역사와 같은 연도에) 사망. -은퇴 후 해외 여행 중인 그랜트가 조선에 방문함.
1880년: -(실제 역사) 좌종당이 베이징으로 개선. 좌종당은 '조선의 성장'을 경계하며 이홍장의 "조선/일본 외교"와 "류큐 분할"을 비판함. 좌종당은 조선과의 종번체제를 확실하게 재정립하고, 조선이 조차해간 간도 지역을 반환받아야 한다고 주장함.
1881년: -(실제 역사) 2월 24일 일리조약 체결. -간도에서 조선인-청나라인 간 갈등이 발생->청나라 조정은 "오장경, 위안스카이(실제 역사 임오군란 당시 출병 인물들)"를 분쟁 해결을 위해 요동으로 파견->오장경은 "조선이 조약에 명시된 곳보다 더 진출을 했다" 주장하고, 위안스카이의 청나라인 통제 실패로 결국 갈등이 분쟁으로 격화됨. -분쟁 수습 과정에서 위안스카이는 처벌을 피하고 관심을 돌리고자 간도에서 수집한 정보를 부풀림. 조선의 '헌법 제정'을 논하며, "조선이 칭제건원을 하려한다." 주장함->청나라 조정에서 강경파가 대외 주도권을 확고히 잡음. ->분쟁 협상 과정에 청나라 조정은 "조선의 대조선국 칭호, 개국 기년" 등을 다시 교정하고, 조선이 조차해간 간도 지역을 반납하라 요구하며 갈등을 빚음. ->조선 내에선 반청 감정 격화. 내각이 교체되고, 반청 인사가 총리로 집권함->유사시를 대비하여 "청나라를 상대로 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함. -조선 정부는 일본에 "1875년 체결된 조일의정서"가 1878년부터 효력을 발휘했다며 유사시 이행할 것을 요구->일본 내에선 주화파가 재정위기(이거 때문에 실제 역사에서 개화파 차관 거절) 탓에 이를 만류하며 일본 내에서 정치적 논쟁 발생.
1882년:
-(실제 역사) 일본 정부 연간 예산 4천만엔.
-청일호환조관 10년차. 두번째 재협상->갱신 X. 일본 내에서 반청 감정 격화.
-일본: 조선과 공조하여 대만을 얻자는 강경파가 승리하여 내무경이 교체되고 반청 공수동맹에 따라 전쟁을 대비하기 시작.
-(실제 역사) 4월 프랑스 라비에르 함대가 하노이 점령. 통킹 원정 시작: 프랑스는 "5년전 류큐 분할"과 같이 베트남 분할을 제시하나(실제 역사), 강경해진 청나라 조정은 이를 거절.
-베트남 분쟁으로 간도 분쟁이 잠시 일단락됨. 이후 다시 차분해진 분위기에서 간도 협상을 재개->그러나 반청 선비가 협상을 위해 조선을 방문한 좌종당을 권총으로 암살함.(K-고야마 도요타로, 쓰다 산조.)
(실제 역사에서 좌종당은 1885년 청불전쟁에 관해 흠차대신으로 지명되어 복건으로 가다 지병으로 사망했음.)
->결국 간도 협상은 결렬되고, 조청 갈등은 더욱 심화됨. 청나라는 "조선을 침공하겠다."며 협박함. 청 조정에선 베트남 위기가 끝나면 조선을 침공하잔 주장이 공공연히 나옴.
-조선 내에선 "베트남 위기가 끝나면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한다."라는 소문이 돌게 됨->조선 정부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임. 반청 강경파 총리는 "방어전보단 선제적인 침공"을 주장함.
1883년 -조청 양국, 선제적 전쟁을 준비. -(실제 역사)베트남 항복, 후에 조약 체결->베트남 내에선 여전히 프랑스-흑기군 간 전투가 지속되며 베트남을 둔 청불 간 분쟁이 지속됨. -조일, 프랑스 외무부와 접촉->조선-프랑스-일본 삼국 밀약. -청나라에서 이홍장 등 청불분쟁 비둘기파는 '조선과의 분쟁'을 언급하며 프랑스와 분쟁을 빨리 끝내자고 주장함.
1884년: -1월 프랑스의 원정 중지->프랑스의 휴전 제안->청불 협상 시작. -청불 협상과 동시에, 조선은 전쟁을 위한 도발 목적으로 흠정헌법 '대한제국 국제'를 선포하고, 대한제국으로 칭제건원함. ->조선 칭제건원으로 청 조정 정치 분쟁->공친왕이 책임을 지고 실각->프랑스와 협상이 잠시 중단되고, 청나라 조정은 조선에 칭제건원을 규탄하는 선언을 함. -(폴란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처럼) 대한제국, 일본은 류큐와 간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작을 시도: 청나라인들이 "조선 칭제건원"에 분노해서 간도와 류큐의 조선인 및 일본인들을 먼저 공격한것처럼 꾸미기. -한일 양국 요동 반도/텐진에서 청나라를 기습공격->반청 전쟁(조선독립전쟁. 1차 동아시아 전쟁?) 발발
- 조일, "청나라의 조선 규탄선언=청나라의 선전포고문, (자작극) 간도/류큐 분쟁=청나라의 선제공격"이라 주장.
-청나라 4개 함대: 북양 함대(텐진), 남양 함대(상하이), 복건 함대(푸저우), 광동 함대(광저우). 이 중 북양 함대 뺀 나머지 함대는 푸저우 마미조선소에서 제작함.
-조선은 요동 반도로 진격, 일본은 "복건/남양/북양 함대"와 전투. -프랑스는 그 틈에 원정을 재개.
1885년:
청나라-조선-일본-프랑스 종전 조약 체결.
-청나라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칭제건원을 인정하고, 요동과 남만주를 할양한다. 심양은 대한이 가지되, "심양고궁과 청나라 황제 무덤"은 청나라 황실이 소유(중화민국 청나라 소조정처럼) .
또한 류큐 왕국 통감부에서 청나라의 지분 2/3을 한국에 넘긴다. 한국에 배상금을 지불한다.
-청나라는 일본에 대만과 펑후 제도, 푸저우, 하이난 섬의 하이커우 항을 할양하고, 류큐 왕국 통감부에서 청나라의 지분 1/3을 넘긴다.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한다.
-청나라는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화를 인정한다.
그 외: 중국 함대(북양, 남양, 복건) 등 나누어가지기. 이 시점이면 정원급 철갑함 두척은 진수만 되고, 아직 취역은 안 한 상태.
- 러시아의 개입?
"만저우리-치치하얼-하얼빈-삼강평야" 라인으로 철도를 지으려는 러시아에 의해 '삼강평야'를 두고 분쟁 발생. (단, 삼국간섭은 안 일어남)
- 청나라
-반근대화 보수파의 정치적 공세와 승리->양무운동 실패. -서태후: 숨은 승자. 베트남 분쟁과 조청일전쟁의 책임 논쟁에서 반대파를 쳐내며 절대 권력 획득. 이후 이화원 재건.
-일본에서 내각제도 실시.
<추가 궁금증>
1.배상금은? 실제 역사에서 일본은 은화 3억냥을 요구하나(1억 냥은 1895년 청나라 세수의 1년, 일본 세수의 2.5년분). 시모노세키에서 고마다가 이홍장 암살 미수를 벌여서 2억냥으로 깎임. 이후 삼국간섭 때 요동을 포기하며 3천만냥을 받음. 여기서 조선/일본이 가지는 배상금 양은? 실제 역사보다 10년 전인데. 이홍장 암살사건이 실제 역사처럼 일어난단 보장이 없음.
2.조약 체결 장소는? -조선은 제물포를, 일본은 시모노세키를 체결장소로 주장하면 어디가 될까?(청나라는 제 1 조공국이던 조선 제물포보단, 차라리 시모노세키에서 하길 선호할 수도?) 프랑스도 조약 대상국인데 조약 체결 장소는, 프랑스의 중국 조계지? 조약 체결 장소가 달라진다면, 이홍장 암살미수 사건은?
3.프랑스 정계 변화? 청불전쟁 대신 조청일전쟁->통킹 사건(L'Affaire Tonkin) 발생 X->쥘 페리 실각 X->1880년대 프랑스의 식민지 확장 지체 X?
1887년:
-(실제 역사) 황하 대홍수, 미국의 진주만 조차.
-조선과 일본을 경계하는 청나라가 러시아에게 접근->러청 밀약
1888년: -러시아, 동청철도 개발 시작. -빌헬름 2세 즉위->빌헬름 2세는 '세계 정책(Weltpolitik)'을 추진하기에 앞서 중국에서 해군기지로 쓸 만한 곳을 찾고자 탐사를 진행함. (실제 역사에선 티르피츠 제독이 1896~1897년에 탐사,) -조청일전쟁으로 중국 지식인들의 청조에 대한 실망감 극대화->혁명조직 '흥중회'가 실제 역사보다 7년 더 일찍 결성됨. -다케다 한시 등 일본인들이 "필리핀과 남방 진출"을 추진하는 여송회 결성(흑룡회 포지션)
1889년: 대일본제국 헌법 반포.
1890년: -비스마르크 해임 -독일의 칭다오 점령->중국-독일 교오조계조약(中德膠澳租界條約)->이로 인해 청조 내부에서도 캉유웨이 등의 변화의 목소리 대두.
<앞으로의 계획>
- 조청 국경분쟁
-간도 이권의 보장 및 할양: 토문강을 경계로 그 이동 영토는 조선인이 조차, 차후 병합하는 것을 허용한다. -요녕 서부에는 통감부를 설치, 청과 조선의 공치를 실행하여 선린우호와 동등한 관계를 추진한다. 청국 황제는 황제의 자격으로서, 조선 대군주는 심왕의 자격으로 군림한다. -이후 확장이 진행된 이후: "청나라: 토문강 이동 영토는 연변 일대에 한정됨", "조선: 토문강 이동 영토는 송화강 이남 삼강평야까지 포함하는 것" -통감부 내에서의 알력싸움과 조선인들의 수탈 -1881년 청나라가 일리조약을 체결한 이후: "조선으로부터 간도를 돌려받고, 감히 만주족의 성지에 설치된 통감부도 뿌리뽑아야 한다."라는 주장이 대두됨. ->이러한 것은 1885년 '조청전쟁(조일청 전쟁)'을 유발할 수 있다.
- 추가적으로, 조청전쟁 이후 삼강평야를 영토로 편입하려 할 경우, "만저우리-치치하얼-하얼빈-쑤이핀허" 라인으로 동청철도(시베리아 횡단철도 지선)을 만들려는 러시아와 충돌하게 됨 -> 삼강평야와 항구적 요충지인 요동 최동단을 두고 러시아의 조청전쟁 전후협상 개입이 이루어질 수 있다(삼국간섭 포지션)
반남대부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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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초대 내각총리대신 문충공(文忠公) 박규수 朴珪壽|Bak Gyusu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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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07년 10월 27일 (음력 1807년, 순조 7년 9월 27일) | ||
(現 | |||
사망 | 1885년 7월 21일 (향년 78세) | ||
재임 기간 | 대조선국 영의정 | ||
1946년 1월 14일~1947년 11월 14일 | |||
초대 내각총리대신 | |||
1947년 11월 15일~1949년 8월 14일 | |||
홍문원 참의 | |||
1949년 8월 14일~1952년 2월 2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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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청년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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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12·15·?대 내각총리대신 김옥균 金玉均|Kim Ok-kyu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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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51년 (문조 16년) 2월 23일 | ||
(現 | |||
사망 | 1936년 11월 21일 (향년 85세) | ||
재임 기간 | 제 5대 홍문원 총사 | ||
????년 ?월 ??일~????년 ?월 ??일 | |||
제 12대 내각총리대신 | |||
????년 ?월 ??일~????년 ?월 ??일 | |||
제 15대 내각총리대신 | |||
????년 ?월 ??일~????년 ?월 ??일 | |||
제 ?대 내각총리대신 | |||
????년 ?월 ??일~????년 ?월 ??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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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장동 김씨의 종문(宗門)인 금동서문(東金書紋) 문장. |
대한제국의 제12, 15, ?대 내각총리대신.
마지막 원훈 인사로 꼽힌다. 그가 사망하면서 한국 근대사의 큰 비중을 차지하던 원훈들의 존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황제
조선 제24대 국왕 문조| 高祖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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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국 초대 대군주 | 추존 황제 문조 열황제| 高祖 烈皇帝 | ||||||
조선 초대 심왕 열왕| 烈王 | ||||||
출생 | 1827년 9월 8일 (음력 순조 27년 7월 18일) | |||||
(現 황경한성도 관가방 창경궁로 185) | ||||||
즉위 | 1834년 12월 18일 (7세) (음력 순조 34년 11월 18일) | |||||
(現 황경한성도 관가방 새문안로 45) | ||||||
사망 | 1866년 7월 25일 (39세) | |||||
(現 황경한성도 관가방 동십자로 99) | ||||||
능묘 | 경릉(景陵) | |||||
재위 | 조선 왕세자 | |||||
1830년 10월 31일 ~ 1834년 12월 18일 (음력 순조 30년 9월 15일 ~ 순조 34년 11월 18일) | ||||||
조선 제24대 국왕 | ||||||
1834년 12월 18일 ~ 1860년 12월 5일 (음력 문조 원년 11월 18일 ~ 문조 26년 12월 5일) | ||||||
초대 대조선국 대군주 | ||||||
1860년 12월 5일 ~ 1866년 7월 25일 (음력 건양 원년 12월 5일 ~ 건양 6년 12월 5일) | ||||||
초대 조선 심왕 | ||||||
1860년 12월 5일 ~ 1866년 7월 25일 (음력 건양 원년 12월 5일 ~ 건양 6년 12월 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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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영(御真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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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만세! 만세!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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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大韓帝國 | Empire of Kore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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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 | |||||||||||||||||||||||||||||||||||||||||||||||||||||
광명천지 光明天地 | ||||||||||||||||||||||||||||||||||||||||||||||||||||||
상징 | ||||||||||||||||||||||||||||||||||||||||||||||||||||||
애국가 | ||||||||||||||||||||||||||||||||||||||||||||||||||||||
무궁화,오얏꽃 | ||||||||||||||||||||||||||||||||||||||||||||||||||||||
참매 | ||||||||||||||||||||||||||||||||||||||||||||||||||||||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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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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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환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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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LD | ||||||||||||||||||||||||||||||||||||||||||||||||||||||
.kr, .대한 | ||||||||||||||||||||||||||||||||||||||||||||||||||||||
국가코드 | ||||||||||||||||||||||||||||||||||||||||||||||||||||||
408, KOR | ||||||||||||||||||||||||||||||||||||||||||||||||||||||
국제전화 코드 | ||||||||||||||||||||||||||||||||||||||||||||||||||||||
+82 f7c85fff | ||||||||||||||||||||||||||||||||||||||||||||||||||||||
개요
대한제국(大韓帝國), 통칭 대한(大韓), 한국(韓國)은 동아시아의 대한반도, 만주 및 그 부속도서에 위치한 입헌군주국이다.
보아라 동쪽 바다의 하늘 밝으며, 아침해가 떠오르면 천지의 정기가 발랄하게도 희망이 춤추도다 오오야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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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민주공화국 日本民主共和国 | Democratic Republic of Jap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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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 | |||||||||||||||||||||||||||||||||||||||||||||||||||||
사도공화 四島共和 | ||||||||||||||||||||||||||||||||||||||||||||||||||||||
상징 | ||||||||||||||||||||||||||||||||||||||||||||||||||||||
애국행진곡 | ||||||||||||||||||||||||||||||||||||||||||||||||||||||
벚꽃 | ||||||||||||||||||||||||||||||||||||||||||||||||||||||
꿩 | ||||||||||||||||||||||||||||||||||||||||||||||||||||||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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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대사관·총영사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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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LD | ||||||||||||||||||||||||||||||||||||||||||||||||||||||
.jp, .일본 | ||||||||||||||||||||||||||||||||||||||||||||||||||||||
국가코드 | ||||||||||||||||||||||||||||||||||||||||||||||||||||||
408, JPR, JP | ||||||||||||||||||||||||||||||||||||||||||||||||||||||
국제전화 코드 | ||||||||||||||||||||||||||||||||||||||||||||||||||||||
+82 | ||||||||||||||||||||||||||||||||||||||||||||||||||||||
개요
일본민주공화국(日本民主共和国), 통칭 일본(日本)은 동아시아의 일본열도및 그 부속도서에 위치한 민주 공화국이다.
- ↑ 해당 협상을 통해 조정은 프랑스의 목적을 확인하였고, 거부 시 한양까지 프랑스 해군이 올라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음.
- ↑ 당시 북학파 및 서양 사정을 알고 있던 관료 집단들이 주도하였음.
- ↑ 다만 장동 김문을 완벽하게 축출하진 못하였으며, 책임을 물어 정계에서의 영향력을 극도로 축소시키는 방향에 가까웠음. 이 탓에 잔존한 세력은 이후 척화파를 내세워 조정과의 대립구도를 이루게 됨.
- ↑ 가이징거 제독[1]
- ↑ 다만 이 시기까진 기술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는 파벌도 존재한 탓에, 척화파 내의 파벌균형이 이루어진 형태라 볼 수 있음.
- ↑ 괴물같은 배가 입항했다거나, 포성 한번에 강화도 인근이 전부 불바다가 되어 염라국인나 다를 게 없었다는 등의 내용.
- ↑ 교린사 용어 유래[2]
- ↑ 다만 아직까지 서양의 제도를 전면 도입하자는 정도는 아니였으며, 정보를 확보하여 대응을 준비하는 것에 가까웠음.
- ↑ 양란 이후 기술과 재정이 부족했던 만큼 주로 일부 서양식 무기의 도입, 재례기술의 재정비 정도로 조치가 이루어짐.
- ↑ 수장은 해당 기관의 총재관인 영의정이 담당하며, 좌의정과 우의정이 그를 보좌하며 사실상의 실권을 쥐는 역할.
- ↑ 난신적자들의 공화정이 폐지되고 제정이 바로 세워지면서 국가의 환란이 종식되었다는 입장
- ↑ 읻르의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는 말이였기에 헌종도 한부로 논쟁을 중단시키는 것이 불가능했으며, 당시 두 번의 환국 이후 국왕에 대한 공포가 신하들 사이에 퍼지고, 일부는 경외감을 보인지라 이 논쟁을 힘으로 멈출 시 상당한 파장이 예상되는 상황이였음.
- ↑ 이 시기 요령통감부는 말이 청나라와의 공치지역이지 사실상 조선의 영토였으며, 하물며 만주족의 고토인 요동반도로의 인구유출까지 벌어지기 시갇하면서 조청관계는 주기적으로 험악해지고 있었음.
- ↑ 이 파견으로 인해 에도 막부는 조선이 양이에게 입조한 와중에도 중국이 아닌 우리와의 우호를 강화시키려 왔다며 내부에서 선전여론을 주도하였으나, 이에 질세라 존황양이파도 조선처럼 빠르게 개화하지 않으면 국체를 온전히 보존할 수 없다고 주장함.
- ↑ 지방에서의 재판을 담당
- ↑ 종친들의 범죄를 담당
- ↑ 개항장에서의 재판을 담당
- ↑ 척화파는 한편으론 정일론과 북벌론을 내세워 한시라도 빨리 대외팽창을 해야 한다는 논지를 내세웠으며, 이 탓에 몇몇 지역에선 백성들의 지지를 받기도 함. 다만 이것을 제외하면 논리적 기반이 상당히 약하고, 이환의 정통성에 미치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었음.
- ↑ 이는 척화파가 벌인 짓으로, 실질적인 복수를 노렸다기 보단 분풀이형 복수에 가까운 양상을 띄었음
- ↑ 다만 이문의 정통성과 교육도 잘 이루어졌던만큼 왕권이 약화된 것은 아니였으나, 근대화 시기에 왕태자로서 자란 이문은 서양 문물에 더 익숙했던 탓에 이러한 구조에 큰 불만을 보이지 않았음.
- ↑ 2025년 기준
- ↑ 영어로는 House (of) Y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