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 내전

유고슬라비아 내전
Yugoslav Civil War
기간
1941년 4월 6일 ~ 1943년 11월 29일
장소
유고슬라비아
원인
페타르 2세 사후 왕위 계승 분쟁
유고슬라비아 정치 위기
교전 세력
유고슬라비아 체트니크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지휘관
병력
870,000명 650,000명
피해
200,000명 120,000명
결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승리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공화국 수립
영향
동유럽 공산혁명 도미노 현상 발생
유고슬라비아 내전 지도

개요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유고슬라비아의 주도권을 잡기위한 내전. 왕당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의 내전으로 공산주의자가 승리하여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발단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왕 페타르 2세가 사망하며 왕실 내부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한다. 페타르 2세의 급사로 인해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은 것이 분쟁의 이유였다. 유고슬라비아의 왕관을 가질 자를 정해야 했던 상황에서 페타르 2세의 자식들은 물론 친척들까지 왕위 계승 분쟁에 뛰어들며 점점 혼란에 빠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오랜 기간 유고슬라비아의 왕좌는 비어있게 된다.

유고슬라비아 왕위 계승 분쟁은 유고슬라비아 정치권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오랜 기간 빈 왕좌로 인해 왕실의 무능이 도마에 오른 것이다. 마침 총선이 다가오고 있던 상황에서 일부 급진적인 정당들이 왕실의 무능을 집중조명하며 왕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급진적이었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유고스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이 왕정 폐지를 외치며 세를 불려나간다.

티토의 왕정 폐지 요구는 당연히 극형에 처해야할 사항이었으나, 왕실의 혼란과 정치 갈등으로 인해 용인되었다. 티토는 승승장구하며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소련의 영향으로 유럽 전지역에서 공산주의 정당이 성장하고 있었는데,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이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혼란 속에 1941년 총선에서 그 어떤 정당도 과반을 얻지 못하자 유고 여기저기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서로 자신의 이념과 다른 이들을 집단 린치하거나 인민 재판으로 처형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어제까지 서로 밝은 얼굴로 인사하던 이웃이 서로를 총으로 겨누고 있었다.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재기능을 하지 못하고 사실상 해체 당하기에 이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리에서 총소리마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정부가 무너진 틈을 타 민병대들이 구성되어 약탈을 시작했다.

이러한 민병대들은 조직화되어 최종적으로 두 세력으로 갈라지는데, 바로 왕당주의자의 체트니크와 공산주의자의 파르티잔이다. 체트니크는 왕당주의자가 주를 이루며, 민족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일부가 동조했다. 파르티잔은 공산주의자를 주축으로 사회민주주의자, 반군주주의자 등의 군주제 폐지론자들이 합류했다. 그렇게 1941년 4월 6일, 베오그라드에서의 총성과 함께 내전이 시작되었다.

전개

초기 내전은 서부의 파르티잔과 동부의 체트니크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파르티잔의 경우, 티토의 고향이 크로아티아이기에 그에게 동조한 크로아티아인이 대거 합류하였고, 알바니아인들은 다른 민족보다 상대적으로 낙후되어있던 상황으로 그에 반발해 공산주의 사상에 감회되어 파르티잔이 된 경우가 많았다. 이들의 결속력은 끈끈했다. 서로의 이해 관계에 상반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공산주의의 평등은 민족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을 뭉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체트니크는 세르비아인과 불가리아인을 중심으로 세력이 형성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왕조는 세르비아인이며 그 뿌리가 세르비아에 있다고 생각한 세르비아인이 체트니크에 동조했다. 불가리아인은 이참에 세르비아인이 아닌 불가리아인이 중심이 되는 왕조가 유고슬라비아를 지배하는 것을 꿈꾸며 체트니크가 되었다. 그들은 파르티잔과 다르게 개인의 목적이 너무나 확고했다. 그리고 상충됐다. 서로 자신만을 중심으로 세력이 형성되었으면 하는 집단이었다. 이는 내전에서의 우위를 확실하게 가르게 된다.

초반에는 체트니크가 베오그라드에서 사바 강을 도하해 파르티잔을 완전히 몰아내며 장악한다. 이때 헝가리에서 지원 폭격이 날아와 파르티잔을 박살냈다. 외교적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헝가리는 국경 안정화를 명분으로 공격했다. 헝가리의 이 조치는 헝가리 내 공산주의 세력의 평정을 위한 것이었다.[1] 헝가리의 파르티잔 폭격 조치로 본거지인 자그레브가 불길에 휩쌓이며 파르티잔이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다. 헝가리는 이에 반격을 받으면 헝가리가 소유하던 크로아티아 영토를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파르티잔이 반격하지 않으며 이는 무산되었다.

체트니크는 헝가리의 도움으로 북부 전선에서는 병력을 휘몰아치며 진격한다. 1941년 말, 한때 슬라보니아 전역을 지배하며 자그레브를 압박했다. 하지만 헝가리의 공격이 거의 없는 남부에서는 전선이 교착되거나 파르티잔이 승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몬테네그로 티바트를 장악한 파르티잔으로 인해 체트니크는 아드리아 해를 통한 항구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체트니크가 자그레브에 근접하자 모두가 체트니크의 승리를 예측했다. 아드리아 해가 아니더라도 그리스가 보스포로스 해협 통행권을 허용해주어 흑해를 통해 물자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 그러나 주변국이 헝가리에게 더이상의 폭격을 멈추라고 압박하자 헝가리는 폭격을 포기한다.

1942년, 헝가리의 폭격이 중지되고 파르티잔이 다시 세력을 규합해 반격을 시작했다. 자그레브 코 앞까지 밀려났던 파르티잔이 역으로 사바 강을 도하하여 체트니크의 주력을 시사크에서 포위섬멸한 것이다. 그렇게 반 년 뒤에 다시 베오그라드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 해 9월 베오그라드가 파르티잔의 손에 떨어지며 완전히 주도권을 잡았다.

1943년 1월, 체트니크의 임시수도 크라구예바츠가 공격받기 시작했다. 1년 전 티바트 탈환에 실패해 체트니크는 디나르알프스 산맥 너머로 밀려났다. 이로인해 크라구예바츠 측면 방어가 부실했다. 결국 크라구예바츠 남쪽으로 돌아온 몬테네그로 방면 파르티잔이 베오그라드 방면 파르티잔과 야고디나에서 합류했다. 크라구예바츠가 포위된 것이다. 체트니크는 크라구예바츠 포위를 풀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전부 포위섬멸당한다.

  1. 결과적으로 헝가리는 공산화되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