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의 마트료시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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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제국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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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제국 империја Југославија Empire of Yugoslavij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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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 | |||||||||||||||||||||||||||||
цар, јединство, слога 황제, 단결, 조화 | ||||||||||||||||||||||||||||||
상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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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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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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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LD | ||||||||||||||||||||||||||||||
.yu | ||||||||||||||||||||||||||||||
국가 코드 | ||||||||||||||||||||||||||||||
688, YU, YUG | ||||||||||||||||||||||||||||||
국제전화코드 | ||||||||||||||||||||||||||||||
+38 | ||||||||||||||||||||||||||||||
위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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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유고슬라비아 제국(империја Југославија), 약칭 유고(Југо)는 남유럽 발칸 반도와 동유럽에 위치한 제국이다.
상세
초대 황제 브레네토르 1세가 세운 독립전선을 실질적 모체로 삼아 건국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립전선과 소련의 지원을 받던 파르티잔 간의 갈등으로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발발하였다. 그 과정에서 당시 독립전선을 이끌던 브레네토르 1세는 국민과 부하들의 지지를 얻어 황제로 옹립되며 유고슬라비아 제국을 세웠다. 내전 이후, 브레네토르 1세는 전권을 장악해 국가를 이끌었고, 발칸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 성장을 이끌어내며 1990년대 이후에는 선진국 대열에 성공적으로 합류하였다.
파스크로비치(Fascrović) 황가와 그 수장이자 국가 원수인 황제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전제군주제 국가이다. 표면적으로는 유고슬라비아 헌법에 따라 삼권 분립이 실현된 입헌군주국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상은 야당 활동과 다양한 사상이 강력하게 금지되어 있다. 또한, 황제에 의해 임명된 황실 장관이 총리와 주요 권력 기관의 요인을 쉽게 교체할 수 있어 헌법은 사실상 유명무실하다는 이야기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황실 내부의 권력 쟁탈전이 매우 치열하며, 2020년에는 황제에 의해 섭정이 사형당하는 섭정 위기가 일어나는 등 최근에도 이와 같은 상황은 계속되고 있다.
인구는 6천만명 가량이며, 약 세계 10위 수준의 경제력을 가지고있다. 반면 전체 GDP의 약 5%인 가량을 꾸준히 국방비에 투자하고, 1970년대에 개발에 성공한 핵무기로 인해 국방에서는 전통적인 열강들에 비해 꿇리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외교정책과 신냉전에서 대놓고 중국과 러시아를 지지하며 제2세계에 합류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미국을 중심으로한 서방에서는 유고슬라비아를 잠재적인 위협이자 가상 적국으로 판단하는 경우 역시 많아지고 있다.
두개의 왕국, 세개의 대공국, 네개의 공국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연합국이지만 파스크로비치 황가에서 모든 작위를 차지하고 각 민족의 민족성을 사실상 세르비아 민족이 중심이되는 유고슬라비아인으로 묶은 뒤 유고슬라비아 중앙정부의 단위와 언어, 법 등에서 완전히 종속시킨 까닭에 단일국가에 더욱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상징
국호
언어별 정식 명칭 및 약칭 | ||
유고어 | империја Југославија | Југославија, Југо, иЈ |
한국어 | 유고슬라비아 제국 | 유고, 유고제국 |
영어 | Empire of Yugoslavija | Yugoslavija, Yugo, EY |
중국어 | 南斯拉夫帝國 | 南斯國 |
일본어 | ユーゴスラビア帝国 | ユーゴ, ユーゴ帝国 |
공식적인 국호는 유고슬라비아 제국(империја Југославија)이다. 건국 초기에는 로마 제국을 이었다는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황제국임에도 제국을 자칭하지 않고 단순히 유고슬라비아(Југославија)로 칭했지만, 1970년대 고속성장을 이룩하고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여 국제적 위상이 올라가자 이에 로마 제국의 국력과 정통성을 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이유로 1977년 브레네토르 1세가 공식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제국을 선포했다.[1]
국가

Хеј, Словени (슬라브족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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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슬라브족이여(Хеј Словени)이다. 슬로바키아의 시인인 사무엘 토마시크(Samuel Tomášik, 1813~1887)가 폴란드의 국가인 폴란드는 아직 죽지 않았다에서 영감받아 곡을 개사하여 만들어졌으며, 이후 슬라브인들로부터 인기를 얻게되며 건국 직후 국가로 지정되었다. 현재 슬라브족이여는 단순히 유고슬라비아의 국가를 넘어 범슬라브주의를 상징하는 노래로 불려지고 있다. 때문에 유고슬라비아 구성국의 언어뿐만 아닌 이 노래의 원본급으로 평가되는 폴란드, 이 노래가 만들어진 슬로바키아 뿐만이 아닌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 여러 버전이 있다.
국장
제국 국장 Национални амблем Царств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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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 1973년 6월 5일 |
국가 | |
지위 | 공식 국장 |
근거법령 | 황제령 30278호 「제국 국장 규정」[2] |
사용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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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은 제국 국장으로 불린다. 디자인 자체는 세르비아 왕국 시절부터 대대로 쓰던것으로, 유고슬라비아 왕국 시절에도 세세한 디자인을 제외하고는 바뀌지 않았으며 유고슬라비아 제국을 선포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바뀌지 않고 꾸준히 쓰이고 있다.
1973년에는 황제령을 통해 공식국장으로 승격되었다. 이후에는 주요문서들이나 여권 표지, 재외 공관의 건물들과 일부 총리급 훈장 등에서 사용되고 있다. 가끔씩은 국장 대형버전이 아닌 소형버전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소형버전을 사용하는 쪽은 대부분 급이 약간 낮거나 너무 작아서 국장 대형버전이 온전히 디자인을 유지하기 어려울 때 삽입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국기
제국 국기 империја застав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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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시기 | 1848년 |
제정 | 1948년 2월 4일[3] |
국가 | |
지위 | 공식 국기 |
근거법령 | 「제국 국기 규정」[4] |
유고슬라비아의 국기인 제국 국기는 국장과 마찬가지로 전신이라고 할수있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에서 사용하던 국기를 이어서 사용하고 있다. 국기의 디자인은 1848년 프라하에서 열린 범슬라브 회의에서 채택된 범슬라브기와 완전히 동일하며, 이외에 별다른 요소가 삽입되어 있지는 않다. 과거 유고슬라비아 왕국 시절에는 제국 국기가 시민기로 사용되고 국장이 개별로 삽입된 정부기가 따로 존재했는데 제국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빠지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황실의 권위를 위해서 과거처럼 정부기와 시민기를 분리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하나 극한의 실용주의 사회인 유고슬라비아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뿐더러, 마치 자국에서 무능하다고 비난하는 구 왕조를 잇는것처럼 보여질 수 있기때문에 그냥 가끔씩 한번 나오는 소리에 불과한 취급을 받고 있다.
역사
세르비아 왕국 이전
세르비아 왕국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건국과 2차 대전
독립전선의 활약
유고슬라비아가 순식간에 몰락함에 따라 파르티잔과 체트니크와 같은 저항조직들이 일제히 봉기하기 시작했다. 독립전선도 그 중 하나로, 청년장교에 불과했던 브레네토르 파스크로비치가 항복을 거부하고 자신을 따르는 병사와 일부 자원병들을 모아 설립한 작은 의병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후 파스크로비치의 설득에 일부 장교들과 정규군이 합류하고, 압도적인 전술 아래 추축국을 상대로 모든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이어가면서 점차 세를 불리기 시작한다. 더불어 공산주의를 기반으로 했던 파르티잔, 조직력이 부실하고 툭하면 뒤통수나 치는 체트니크와는 다르게 독립전선은 확고한 반공주의적 철학을 가졌으면서도 민족을 가려서 받지않고 오히려 유고인이라는 가치 아래 다민족 자원병들을 적극적으로 대우해주는 등의 파격적인 스텐스는 위 단체들과는 다른 독립전선의 확고한 강점을 만들어주었다.
더불어 독립전선은 확고한 반공주의적 철학에도 불구하고 파르티잔과 같은 반나치, 반추축국 세력과는 언제든지 손을 잡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독립전선에게 가장 중요한것은 체트니크와 같이 파르티잔을 비롯한 공산주의 세력을 때려잡는 것이 아니라 유고슬라비아의 해방을 가장 우선순위로 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독립전선은 파르티잔과 손을 잡는 일이 빈번했고, 둘의 사이가 최고조에 이르렀을때는 전쟁 중을 한정하여 임시적으로 통합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기도 했다. 물론 근본적으로 독립전선과 파르티잔의 성향 차이가 워낙 컸던탓에 이는 무산되었지만, 양측은 여전히 우호적이고 협력적인 관계를 이어나갔다.
이 시기 독립전선의 군은 거의 30만명에 달했으며, 이러한 대군을 앞세우고 불가리아와 알바니아를 향해 역으로 진격한 후 점령해 전후 유고슬라비아의 영토로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는 등 거의 정규군과 다름없는 전투능력을 보여주어 연합군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덕분에 독립전선의 인기는 나날이 치솟았고, 독립전선 최고의장이자 총사령관을 자처했던 브레네토르 파스크로비치는 현대의 아이돌을 방불케하는 엄청난 인기를 구사하며 전후 유고슬라비아의 가장 유력한 정치 지도자로 떠올랐다. 한편으로 소련을 제외한 연합국에서도 그의 확고한 성향과 전쟁에서의 공을 보며 그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내전과 제국의 성립
전쟁이 끝나감에 따라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독립전선과 파르티잔의 지도자인 파스크로비치와 티토는 각각 공동정부 성립과 통일 유고슬라비아국 건국을 위해 베오그라드에서 회담을 진행했다. 연합국측 일부 인사도 참석한 이 회담에서 양측은 공동정부 설립이라는 목표에는 일치된 입장을 보였으나, 이외 모든 입장이 충돌하면서 결국 회담을 결렬되고 만다. 특히 회담의 마지막날이였던 1945년 2월 14일은 거의 회담이 파탄난 수준이였다고 하는데, 독립전선 측에서 회담 중단을 일방적으로 통보하면서 분노한 파르티잔측에 의해 회담장은 난장판이 됐고 파르티잔측 간부가 독립전선측 간부에게 불이 다꺼지지도 않은 담배꽁초를 던지는 바람에 독립전선측 간부의 옷이 그을리고 부상을 입는 등 양측의 감정의 골이 굉장히 깊어져 돌아올수 없는 수준에 이르고 만다.
결국 독일이 완전한 항복을 선언한 1945년 5월 9일, 파르티잔측에서 독립전선이 점령하고있던 노비사드를 공격하면서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발발한다. 초기에는 소련측의 지원을 받은 파르티잔측이 독립전선에게 우세를 점했으나, 전후 소련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던 연합국이 독립전선을 지원하면서 승기는 독립전선에게 기울게된다. 이외에도 티토를 제외한 파르티잔 지도부의 삽질[5]과 파스크로비치의 전술이 합쳐지면서 파르티잔은 패전을 거듭했고, 이로인해 사기 역시 점차 내려갔다. 결국 파르티잔은 페치와 사라예보를 빼앗긴 뒤 대부분의 지도부가 항복했고, 최후의 거점지였던 체트니에가 1946년 7월 14일 독립전선에게 넘어가고 티토가 함락 직전 자결하며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독립전선의 승리로 끝나게된다.
한편 위에서 언급된 파르티잔 지도부의 삽질과 파르티잔 점령지와는 비교할수 없을정도로 안정적인 독립전선 점령지의 모습이 대비되면서 파스크로비치의 인기는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가히 탑이라고 불러도 될정도가 됐으며, 티토의 이미지가 부하들에 의해 훼손됨에 따라 파스크로비치 이외의 인물이 지도자가 된다는것을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 되었다. 그렇기에 내전 초반부터 파스크로비치의 의견은 듣지않고 그를 황제로 옹립하자는 의견이 진지하게 대두되기 시작했으며, 내전이 중반을 향해가며 이 의견은 대다수 부하들이 찬성할 정도로 다수의 의견이 되어있었다.
파스크로비치 본인은 본인이 황제로 오르기보다는 대통령 직위에 올라 명목상 민주공화국의 수장으로 군림할 계획이였으나, 대다수의 의견이 본인의 황제 옹립으로 흘러가자 방향을 바꾸어 본인을 황제로 하는 유고슬라비아 제국을 건국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이를 위해 그는 우선 구 왕가가 될 페타르 2세를 비롯한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의 귀국을 영구불허했으며, 이은 1946년 2월 4일 본인을 브레네토르 1세 황제로 하는 유고슬라비아국을 건국한다. 당연히 파르티잔이 주축이 되어 1943년 건국을 선포한 유고슬라비아 민주 연방은 파스크로비치를 미치광이라고 비난하며 불출석 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했으며, 국제사회에 그의 칭제가 불법임을 호소했으나 이미 전세마저 기울어진 판국에 대다수 유고인들과 서방은 이를 무시했다. 결국 전쟁과 혼란의 시대가 가고 황제가 주도하는 기적의 시대가 오고 있었다.
브레네토르 1세와 기적으로 불리는 시대
브레네토르 1세가 황제로 즉위하고 내전이 종식되었으나 2번의 전쟁을 겪은 까닭에 국토는 황폐화가 되었으며 민족간의 화합 역시 요원했다. 이에 일부 국민들과 서방에서는 브레네토르 1세가 군사적인 재능과는 별개로 정치적인 능력에서 하자가 있을 가능성을 제시하며 유고슬라비아의 발전 가능성을 낮게보는 등 여전히 혼란이 멈추지 않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브레네토르 1세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브레네토르 1세는 가장 먼저 민족 통합을 위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오직 철저한 능력주의를 바탕으로만 관료들을 선발했고, 민족 차별을 없애기 위해 사회 구조 전반을 개혁하는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동슬라브에 속한 불가리아인, 애초에 슬라브인과는 거리가 있는 알바니아인들도 유고인으로 포용하여 차별을 금지하였다. 반면에 이외에 다른 민족은 참정권 박탈은 물론 경제·사회·문화적으로 철저히 탄압하여 내부의 공통된 적을 만들었다. 특히 루마니아와 그리스는 각각 트라키아, 도브루자를 두고 영유권 갈등까지 벌이는 등 유고인의 통합을 위해서는 어떤 정책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으로는 경제발전과 문맹퇴치에도 집중했다. 2차 대전이 끝나면서 철의 장막이 형성되고 유고슬라비아는 자연스럽게 서방권에 편입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 및 서방권에게 마셜플랜을 비롯한 경제적 원조를 받게된다. 유고슬라비아는 이전까지 민족문제와 정치적 문제로 경제에 투자할 시간이 별로 없었는데 민족적 문제 해결을 위해 내·외부의 적을 만드는 강수를 두고, 정치적으로는 황제를 중심으로 단결한 이 상황만큼 경제 발전에 투자할 제격의 시기는 없었다. 이에 브레네토르 1세의 지시 아래 경공업을 비롯한 대다수 산업들에서 경제계획을 설립, 실행하면서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유고슬라비아의 경제는 빠르게 회복 및 성장하기 시작한다. 이어서 의무교육이라는 개념조차 희박하던 시기 중학교까지의 파격적인 의무교육제도를 시행하였으며, 성인무료강습소 등 문맹퇴치에도 각별히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인다. 이에 60%에 달하던 문맹률은 1950년대 초-중반에 이르러 5% 미만으로 감소하였고 이러한 교육의 확산 덕분에 향후 고도성장에 대응할 인재풀을 형성할수있게 된다.
그러나 1960년대에 접어들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브레네토르 1세 황제에 대하여 서방의 비판과 압력이 점점 거세지기 시작한다.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원조를 아끼지 않았던 미국 또한 점차 외교적으로 유고슬라비아를 압박해오고 있었고, 유고슬라비아 내부에서도 독립전선에서 공을 세운 장교출신 귀족들을 중심으로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허나 유고슬라비아 내 여론은 여전히 황제에게 우호적이였고, 브레네토르 1세 역시 이를 잘 알고있었기에 이런 여론을 묵살할수있었다. 되려 브레네토르 1세는 이러한 외교적 상황을 계기로 하여금 동방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기 시작하였고, 1963년에는 소련과의 국교를 정상화한 뒤 마침내 고대하던 UN 가입에 성공하는 등 외교적으로도 성공적인 성과를 거둔다. 이를 통해 유고슬라비아는 점차 서방에서 멀어져 제3세계 중립외교를 주도하는 국가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서방과 내부 귀족들의 소망과는 반대로 브레네토르 1세의 권력은 점점 강력해져만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후반부터 경공업과 농업에 기반한 경제성장이 지체되고 프랑스를 비롯한 서방권을 중심으로 68혁명이 발생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여론도 약간의 개혁이 필요한 점에서는 공감이 형성되게 된다. 이쯤되자 브레네토르 1세도 어느정도 양보하여 여성참정권의 허용과 자유주의 성향의 야당 허용, 주지사 직선제 등 민간에 권력을 이양하며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내부적으로도 개혁에 대부분 만족하는 분위기였고, 이러한 개혁 덕분에 얼어붙었던 서방권과의 관계도 어느정도 회복되었으나 이러한 개혁에 만족하지 못한 대학생과 극소수 시민들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초기에는 시위에 공감하는 여론이 비교적 강했으나 개혁이 진행됨에도 시위가 끊이질 않자 여론도 시위대에 염증을 느끼고, 초기에는 여론에 귀기울이고 소통하던 브레네토르 1세도 지쳐가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염증은 결국 1970년 폭발한다. 당시 대학생 지하조직은 대표적으로 3계파가 존재했는데 각각 온건파인 민족동맹[6], 중간파인 대학생연합[7], 초강경파인 민중해방동맹[8]이였다. 이 중 민중해방동맹 소속의 다니엘 부코마노비치[9]가 1970년 5월 9일 나치독일 패망 25주년 기념 행사에 참여한 로즈날로스티 옵슈티네비치 총리와 당시 황태자였던 아르비스 대공을 저격하면서 총리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황태자는 어깨에 중상을 입은것이다. 이 사건으로 시위대에 대한 여론은 최악으로 떨어졌으며, 소식을 듣고 격노한 브레네토르 1세는 다음날인 5월 10일 개혁 중단과 더불어 개혁에서 실행된 사안의 일부 철회, 그리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내용을 담은 5월 선언을 발표하며 5월 사건을 일으킨다. 결국 유고슬라비아 개혁의 꿈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으며, 이후로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은 브레네토르 1세가 승하하고 아르비스 1세가 즉위하는 1994년까지 철저히 탄압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를 역행하는 황제의 행동에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황제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를 거두지 않았는데, 이러한 지지는 언제나 황제가 아니였다면 이룩할수없었던 경제적 성과에 기반했다. 그렇기에 5월 사건 이후 브레네토르 1세는 다시 국내 경제와 복지정책에 보다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덕분에 강철, 기계, 조선업 등 중진국들의 도박으로 불리는 중공업 분야에 단호히 도전해 성공하여 초기에 비해 저성장에 시달리던 유고슬라비아 경제를 다시 고도성장으로 이끌게된다. 이러한 경제성장에서 발생하는 노동권 문제에 대해서도 대기업들을 압박해 임기체불 문제를 해결하고 최저임금을 인상, 정부에 협조하는 노동조합이라면 기꺼이 노조간부와 직접 대면하는 등 노동자에게도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지하에서 조금씩 확산하고 있던 사회주의의 바람을 조기에 차단할수있었다.
한편 유고슬라비아가 강대국으로 인정받고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것 역시 이 시기였다. 1975년에는 핵실험에 성공함에 따라 6번째 핵보유국이 되었고, 국내안정과 외부적 혼란을 이유로 하여금 군사력을 대폭 증강하여 군사력에서도 전통적인 열강에 비해 꿇리지 않는 군사력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10] 외교적으로도 경제적으로 혼란에 빠진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하였으며, 이러한 노력 덕분에 국제사회에서도 긍정적인 인식을 가질수있었다. 여전히 전제군주라는 딱지로 인해 서방권과 동구권의 인식이 마냥 곱지는 않았지만, 대다수가 기대를 걸지않았던 유고슬라비아의 민족통합을 이루어내고 경제 통합을 이루어낸것은 순전히 브레네토르 1세의 힘이라는 시각이 우세함과 더불어 대다수 국민들이 황제를 지지하고 있던 까닭에 외교적으로 크게 간섭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렇게 왕성히 활동해온 브레네토르 1세의 역시 조금씩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다. 이미 핵실험이 성공한 1975년에는 69세라는 고령의 나이였으며, 1인당 명목상 GDP가 경제성장정책의 최종 목표였던 5천달러에 달성한 1980년에는 74세로 당시 기준 유고슬라비아 남성의 평균수명을 훌쩍 넘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후반 동구권이 붕괴하자 80대가 넘은 몸으로 동구권 순방에 나섰으며, 1991년 소련이 해체된 뒤 러시아와의 대대적인 관계개선에 나서기 위해 사망 1년 전인 1993년에는 직접 러시아를 방문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이어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몸과 마음이 굉장히 지친 상태였기에 국내의 대부분 업무는 이미 황태자였던 아르비스 대공이 대리하는 상황이였고, 결국 1994년 4월 3일 베오그라드 내 산업단지 문제에 대하여 내각과 회의하던 도중 쓰러져 88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아르비스 1세와 민주주의, 민족통합의 끝
브레네토르 2세가 부른 민정의 혼란
아기 국왕과 독재 섭정 알틴
청년 국왕 브레네토르 3세와 현재
지리환경
인문환경
행정구역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창작물에서
관련 문서
- ↑ 하지만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여전히 개발이 진행중인 개발도상국이였고, 선진국 내지 강대국으로 보기에는 꽤 부족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는 조롱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다만 어느정도 브레네토르 1세와 통하는 부분이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1978년 브레네토르 1세의 방한 당시 제국의 황제 폐하라고 부르며 조롱하지 않고 오히려 극진히 대접했다.
- ↑ Царски указ бр. 30278 「Правилник о царском грбу」
- ↑ 칭제 2주년 기념으로 관습상의 국기 지위에서 벗어나 공식 국기로 지정되었다.
- ↑ 「прописи о царској застави」
- ↑ 민족화합을 내세웠으면서 교묘히 자기 부대를 특정 민족으로 편성한 뒤 타민족을 학살하는 일도 빈번히 일어났으며, 2차 대전 중만해도 어느정도 잘 이루어지던 보급을 빼돌리는 이가 늘어나는 등 같은 군대라고 보기에 민망할정도로 파르티잔의 모습은 바뀌어 있었다.
- ↑ Народни савез
- ↑ Униони студента
- ↑ Народни ослободилачки савез
- ↑ 크로아티아 출신으로 당시23살의 나이로 사라예보 황립외국어대학에 재학중이였다.
- ↑ 하지만 이 군사력은 브레네토르 2세 시기 황권을 이양받은 신민원과 내각에 의해 대대적으로 감축되었고, 다시 군사력이 복구된 시점은 신냉전이 시작될 즈음인 2010년대 초반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