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제 (아침해의 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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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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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제 49·50대 내각총리대신
이인제
李仁濟| Lee In-je
출생 1948년 12월 11일 (75세)
충청남도 논산군 논산면 부창리
국적 대한국
본관 전주 이씨
소속 신진민주당
재임 기간 제 49대 대한국 내각총리대신
2010년 2월 7일 ~ 2011년 7월 24일
제 50대 대한국 내각총리대신
2011년 7월 25일 ~ 2014년 6월 13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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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안영모 친모 박귀남
배우자 김은숙
자녀 장녀 이명주, 차녀 이진화
학력 논산백석국민학교(졸업)
논산중학교 (졸업)
경복고등학교 (졸업)
한성대학교 법과대학(법학/학사)
병역 없음
종교 없음
신체 163cm, 68kg, B형
의원 선수 10
의원 대수 42, 43, 44, 45, 46, 47, 48, 49, 50, 52
용재(龍在)
소속 정당 신진민주당
소속 당파 안봉파(회장)
약칭 IJ, 仁濟, 濟

개요

대한국의 정치인이자 제 49,50대 내각총리대신. 한국 정치사에서 첫번째로 2연임을 달성한 전후 출신 세대 총리 이기도 하며, 태시 시대의 마지막 총리이자 명화 시대의 첫 총리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오늘날 신민당이 사족민주당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울 정도로 보수화되는 것에 기여하기도 해서, 당시 당 내의 리버럴 계열에서는 '국민당 스파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2009년 4월 23일 김종인의 뒤를 이어 내각총리대신직에 임명되었다. 이전부터 사민당 온건계인 이회창, 노무현과 대립하며 간간히 총리직을 노려왔던 만큼 김종인이 이루어낸 시민당 내 보수계의 승리의 혜택을 입었고, 뒤이어 일전 총선에서의 압도적인 화력을 눈여겨 본 김종인의 도움과 총선에서의 약진이 합쳐져총리가 되는 데 성공하면서 정치적 업적을 달성했다.(제1차 이인제 내각). 비록 첫 내각인데다가 대황제의 붕어라는 대사건이 겹치면서 1년 반정도로 내각을 유지했지만 첫 당선 2년 뒤인 2011년 7월 25일에 기어히 정권을 연장하는 데 성공했고, 전후세대 중 최초의 연임 총리라는 명예를 누렸다.

정치적으로는 신진민주당의 신보수계를 거대 파벌로 안정화시키는데 기여했으며, 여기에는 정책들의 성공을 통해 이인제가 확보해낸 탄탄한 지지율이 한몫했다. 덕분에 신민당은 김대중 내각 시절처럼 국민당에게 다시 자리를 내주는것을 면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기존 신민당의 경제정책의 성격과 새로운 시스템을 결합시킨 불사조 정책이라는 이름의 양적완화정책을 실시해 대한국 경제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는 데 성공했다.

외교적으로는 미국과 서방 진영에게,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의 갈등을 조율하기 위한 주요 조력자로 인식되었다. 비교적 지역패권주의적인 성향이 다분했던 인제 독트린이나 불사조 정책이 국제 사회에서 별 잡음없이 통과된 데에는 이같은 배경이 깔려있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대금민국과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이인제의 그릇된 역사관과 그에 기반한 행위 및 발언을 이유로 들어 대한관계 악화의 원인으로 비판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2013년에는 과거 동시베리아 전쟁에서 파시즘 혐의가 무혐의처리된 A급 전범들이 제현된 한성 충장서원 참배를 강행해서 미국과 유럽연합 등 서방 진영에게 경고를 받기도 했으나, 이후에도 전임 내각 시절보다 더 노골적으로 충장서원에 폐백을 공납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며 주변국의 반발을 불렀다. 여담으로 인제는 대한국의 유명 극우 단체인 한나라회의 회원이었다.

군사적으로는 동아시아 질서 유지를 위한 국방군의 군비 증강과 전력 확대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당연히 신냉전 구도의 당사자 중 하나인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를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을 악화시키는 행동이라 주장하고 있으며, 대금도 이를 대한의 군국주의 망령이 부활하려는 전조 증상이라며 비판에 가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인제는 G7 서방국가들의 ‘옹호’와 신보수계를 지지하는 대한국 내 우익 세력의 '옹호'에 응하여 진행했다.

2014년 6월 14일, 장장 5년에 가까운 총리직 연임을 끝으로 정책의 대부분을 완수한건지 장기적 활동으로 인한 건강 문제를 구실로 정계에서 물러났다. 현재까지도 김종인과 더불어 신민당 내의 보이지 않는 손들 중 하나로 활동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며, 후임 총리인 김무성과 2021년에 안철수가 당선되게 만든 데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알려져 있다.

생애

이력

기타

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