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대경장 (아침해의 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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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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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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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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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융
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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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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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요동군 · 현도군
동연
서진 읍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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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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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동위
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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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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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요
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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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요동 군벌 우량카이 삼위
여진족
17~18세기 후금
조선
요동도독부
삼위시대
후금 네르친스크 조약
19세기 대한제국 대청제국 러시아 제국
20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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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대금민국 임시정부 연해주 공동통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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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란스아무르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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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 북간 7도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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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몽골의 역사 (아침해의 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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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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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지역 명칭 통치기관
만주 만주(满洲) 만주총독부
동몽골 몽고번(夢姑邦) 몽고도독부
프리모리예 숙신도호부(肃慎都護府) 숙신도호부
해당지역 명칭 기관
칭다오 청도 -
웨이하이 위해 -
* 숙신도호부는 1923년 나선통감부로 업무 이전
* 몽고번은 1942년 몽고목(蒙古牧)으로 편입
괴뢰국 · 군정청

틀:식민제국 (아침해의 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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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지도자
유럽 나치 독일 | 아돌프 히틀러 · 헤르만 괴링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에리히 레더 · 빌헬름 카이텔 · 하인리히 힘러

이탈리아 왕국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 베니토 무솔리니 · 피에트로 바돌리오
살로 공화국 | 베니토 무솔리니
헝가리 왕국 | 호르티 미클로시
헝가리 국민단결정부 | 살러시 페렌츠
루마니아 왕국 | 미하이 1세 · 이온 안토네스쿠
불가리아 왕국 | 보리스 3세 · 시메온 2세
슬로바키아 제 1 공화국 | 요제프 티소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 에밀 하하
크로아티아 독립국 | 안테 파벨리치 · 토미슬라브 2세
노르웨이 크비슬링 정권 | 비드쿤 크비슬링
비시 프랑스 | 필리프 페탱
모나코 공국 | 루이 2세
세르비아 구국정부 | 밀란 네디치
바르다르 마케도니아 | 이반 미하일로프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 | 안드레이 블라소프
로고트 자치국 |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
벨라루스 중앙 라다 | 라다슬로 아스트로스키


핀란드|그리스국 |알바니아 왕국 |핀도스 공국|류블랴나 주|덴마크 보호령
아시아 일본 제국 | 쇼와 덴노 · 고노에 후미마로 (전쟁 이전) · 도조 히데키 · 우가키 마토메 · 스즈키 간타로

대한제국 | 선종 현황제 · 김창암 · 송병조 · 이동녕
러시아 차르국 | 타티야나 1세 · 그레고리 세묘노프
대명제국 | 함화제 주자홍 · 인루겅
베트남 제국 | 바오다이 황제
캄보디아 왕국 | 노로돔 시아누크
자유 인도 임시정부 | 찬드라 보스
버마국 | 바 우
필리핀 제 2 공화국 | 호세 라우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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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케 몽골 울루스 | 선종 현황제 · 데므치그돈로브 · 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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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제아번 | 선종 현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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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파시즘 (아침해의 원유관)


임신대경장 단행 초기(1870년대 초)에 찍힌 한성 거리 사진

개요

임신대경장(壬申大更張,Imshin reformace of Korea)은 1873년부터 대한제국, 당시의 구 조선에서 단행된 개혁으로, 세도 정치의 종료 이후 격변을 거친 조선 정부가 체제 변화를 시도, 정치·경제·문화 전 분야에 걸쳐 한국의 근대화를 성공시킨 일련의 개혁을 말한다. 이를 통해 한국은 세도 정치 시기의 문제점과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배를 피할 수 있었고, 오히려 동아시아의 열강으로서 거듭날 수 있었다.

역사학에서 분류한 시기는 사화 이후 보빙사를 파견한 뒤 전등을 설치할 것이 명령된 1873년으로 간주되며, 학계에서는 종종 임신대경장 이나 임신경장이라고도 부른다.

배경

변혁의 조짐

16세기 임진왜란의 조기 진압, 사르후 전투 파병과 여진정벌, 요동의 농지 개간권 획득 그리고 분열로 인한 중국의 개입 약화 등으로 조선은 다사다난한 세기들을 보내야만 했었다. 자연스레 민간에서는 처음엔 조선이 천명을 이었다고 인정하지 않던 순나라와의 밀무역 활성화를 시작으로 상업이 대규모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이후 중국 무역의 손해를 메꾸기 위한 주변국들, 심지어 장거리에서 중국과 무역하던 국가들까지 외교적으로 조선에 손을 뻗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이전보다 더 정확한 해외 정보를 입수하고, 효종 시기에 요동정벌로 얻은 농민 차출지인 요동 지방과 외교 활성화와 밀무역에 따른 민간의 해외 무역 활성화도 서서히 시작되면서[1]본격적으로 자본이 쌓이기 시작했다. 중원에서 군벌이 난립하여 확고한 천자국도 불확실한 마당에 흔들리는 성리학관만으로는 파멸적인 국가 부도를 피할 수 없다는 두려움에 빠진 집권층은 적어도 경제적 부문에선 상업의 확대를 용인은 하기로 결정했고, 그 결과 조선은 변화한 사회에 기반한 문화의 발달과 상공업의 발전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적 문제점들과 서서히 드러난 안동김씨 일가의 무능은 다른 계층들의 불만을 사기 시작했고, 능력있는 이들은 관직에 오르지 못해 현 정국에 대해 분개했다.

여기에 기존 성리학에도 유의미한 변화가 찾아왔는데, 티베트와 몽골이 얽히며 200년이 지나도록 비록 국가가 2개로 축소되기는 했으나 중국이 완벽히 통일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명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송과의 거리 문제, 그리고 조선 당국이 정통성이 없는 중화라 보고 있던 순나라와의 분쟁과 화관을 통한 서학의 유입으로 기존 세계관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 무렵에는 조선에게 확장을 통한 천조질서를 이어야 하는 의무가 갔다고 주장하는 유학세력들도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조선이 단순히 번국이 아니라는 정서의 형성은 유학의 새로운 길을 트기 시작했는데, 이 사상의 분파가 당시 세도정치로 인해 민간에 돌던 근왕주의와 합쳐지면서 일명 왕도파라는 학파가 음지에서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점차 약화되어가던 세도가에게 결정타를 준것은 대원군 세력의 우세화와, 병인양요로 인한 강제적인 개항이었다. 베트남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로 기고만장해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자국의 상인들이 인삼 밀매를 시도했다가 피해를 봤다는 소식이 조선에서 들려오자 프랑스의 국위를 정점에 달하게 하는 겸 자유로운 시장 경제를 보장하지 않는 중세 동양국가를 문명화시켜야겠다고 판단, 압도적인 병력으로 조선군을 박살내고, 겁에 질린 안동김씨 일가와 지금 개항을 하지 않는다면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우려한 국왕으로부터, 끝내 조선의 개항을 집행시켰다.

한편 안동김씨 세도가는 개항으로 인해 본인들에 대한 여론이 좋아지지 않고 있다는것을 간파했고, 급한대로 여러 인재들의 등용에 대한 건을 통과시키거나 서양 문물을 유입시켜 기술발전을 꾀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으나 결과적으로 시스템 자체에 변화가 없던데다 오히려 서민들의 삶은 저렴하고 질 좋은 외국산 물건들의 유입으로 서서히 빈곤해지기 시작한지라 민심이 더 악화되기만 했다.

또한 조정의 새 정책을 통해 유입된 개화파와 왕도파, 위정척사파들은 '세도정치 척결'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안동김씨 일가를 맹비난하기 시작했고, 이후 이향로가 지부상소 도중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기회를 잡은 흥선군 이하응은 안동김씨 세도가 국왕에게 진심어린 충언을 하는 충신도 죽이는 역적이라고 매도하기 시작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고조가 이들의 손을 들어주며 안동 김씨는 3당파의 연대와 이미 치밀한 정치공작으로 넘어간 5군영의 통제권에 힘없이 무너져내렸고, 마침내 1871년 조정의 권력구도가 다시 한 번 정상화되었다.

이후 국내의 안정화가 이루어지자, 조선 정부는 외세로부터의 생존과 사회 문제 혁파, 그리고 부국강병을 위한 길을 찾고하 했다. 이에 따라 격변한 천하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아 제일의 방식을 택하자는 입장이 집권층으로부터 도출되었고 이에 따라 파견된것이 유럽의 보빙사, 중국의 영선사 그리고 상황이 비슷했던 일본의 통신사였다. 약 2년간의 순방을 끝내고 1873년 모인 이들이 종합하여 내린 결론은 같은 동양국가인 일본의 선례를 보아 구미 열강을 따르는 것이 현재 가장 적합한 방식이라는 판단을 내렸고, 잉데 따라 조선 정부는 주로 구미 열강 국을 따라 잡기 위해, 개혁을 모색하였다.

그러는 한편, 왕도파보다 수구적인 위정척사파를 위시한 강경 보수파는 흥선군 이하응의 설득과 유럽과 중국 순방에 대한 충격, 바뀌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는 정부의 변화로 인해 기존 위정척사들은 노선에서 양이를 위해 양이를 알아본다는 방식으로 노선을 선회하였다. 또한 이들은 조선 고유의 전통을 지키는 방식을 근대적인 제도에 일부 첨가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드러내곤 했고, 유럽의 경우에는 본인들의 기준 정당한 제도라고 판단한 독일 제국에 대한 연구를 주로 하는 방식으로 성장했다.

여러 방면에서의 개혁

안동 김씨가 개항장을 통해 점차 들여온 물산들을 시작으로, 1870년대부터 진행된 본격적인 서구화는 조선 사회에 여러 변화를 몰고 왔다. 고조의 경우 부국강병과 정치적인 수단으로서 입헌군주제를 도입시키기로 결정했고, 위에서부터 주도한 근대화는 헌법 제정, 궁중 개혁과 이념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가능케 했다.

정치적인 면모에서도 변모가 있었다. 한국사 최초의 근대적인 정치 시스템과 법률들이 도입되었으며, 서양식 군대의 본격적인 양성을 통한 부국강병 정책 또한 독일식 교육을 본따 이루어졌다.

또한 근대국가의 사민평등적인 사상을 도입하여, 기존 사농공상의 구별을 폐지하고 직업을 자유화시키는 한편, 국가적으로 농민을 주로 양성했던 성리학에도 변화를 주어 국가 정책에 부흥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새로이 변모시켰고, 이는 훗날 국체유학으로 거듭나 단순한 사농공상 폐지의 정당화와 왕도사상 그 이상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는 한편, 공신 및 친정부적이었던 기득권에 대한 배상은 칭제건원 이후 새로운 귀족 제도인 사족제도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이를 넓어진 강토와 높아진 국위에 따른 공신임명의 변화라며 정당화했다.

같은 시기에 민간에서는 신문물에 대한 충격으로 피어나긴 시작한 문명 개화의 움직임, 육식 보급과 철도 개통 등과 함께 본격적인 국민의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금융제도에서도 통화단위로 '원'이 1876년부터 도입되었고, 국립은행 조례에 의한 국립은행의 설립에 이어 한국의 통화 발행권을 독점하는 중앙은행으로써, 한국 은행 또한 1884년에 설립되었고, 이를 통해 근대국가에 꼭 필요한 자본주의적 금융제도의 정비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자본 활동에는 재산 축적을 원한 공신들과 기회를 꿈꾸는 부농, 혹은 상인들의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외교적으로의 최종 목표는 구미 열강과의 동등한 관계였음으로, 불평등 조약 폐지를 위해 위의 개혁과 같은 국가적 차원에서의 노력을 다하고, 만국공법을 수용하는 한편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공격들을 금지시켰다. 다만, 여전히 한국을 근대국가로 보지 않았던 열강들의 조치로 인해 불평등 조약의 폐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마침내 한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서야 육상에서의 활약을 통해 열강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정ㅊ

대동아시아 정책의 경우 먼저 몇 년 앞서 개항한 일본과는 역량적인 차이가 나긴 했지만 일본의 역량 또한 미숙했기에 대등한 관계에서 친선관계를 펼칠 수 있었다. 훗날 개혁 극후반부에 들어서는 각각 만주와 사할린에서 러시아와의 갈등이 일어나고 있던지라 당시 절정을 향해 달려가던 그레이트게임에서 육상, 해상을 통해 러시아를 완전히 포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영국이 한국의 대청제국 식민화를 용인하는 결과 또한 가져왔다. 한편 중원 2개국과의 관계는 전통적인 송을 가급적 더 높게 치는 정책에서 이어진 친송, 반순으로 요약할 수 있었으며, 후금의 경우 한국 내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용도와 후금의 지속적인 통상 거부, 그리고 러시아와의 대립 문제로 인해 대한제국 내에서 '정만론'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1. 이 시기에 비슷한, 아니, 오히려 중국의 부재로 인해 선진문물 도입이 힘들어진 상황이었던 일본과의 무역지수도 이전과는 비교가 안될 수준으로 비대하게 변모했다. 그 탓인지, 조선 중후기와 후기에 들어서는 왜구 문제의 발생 빈도가 미미할 수준으로 낮아졌던 것으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