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단일화)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
전두환
全斗煥 | Chun Doo-hwan
출생 1931년 1월 18일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現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2길 14)
사망 2011년 11월 23일 (향년 80세)
서울특별시 송파구 가락본동 송이로 국립경찰병원
재임기간 제11대 대통령
1980년 8월 27일 ~ 1981년 2월 24일
제12대 대통령
1981년 2월 25일 ~ 1988년 2월 24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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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완산 전씨
부모 아버지 전상우, 어머니 김점문
형제자매 형 전열환, 전규곤, 전기환
누나 전홍렬, 전명렬, 전선학
남동생 전석환, 전경환
여동생 전학렬, 전점학
배우자 이순자
자녀 아들 전재국, 전재용, 전재만
딸 전효선
학력 삼신국민우급학교 (전학)
희도소학교 (졸업)
대구공립공업중학교 (졸업 / 24회)
육군대학 (졸업)
종교 불교
신체 171cm, 66kg, B형
소속 정당
약칭 全, DH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11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55년 ~ 1980년
최종 계급 대장 (대한민국 육군)
주요 보직 제9보병사단
제29보병연대장
제1공수특전여단장
제1보병사단장
국군보안사령관
병과 보병
참전 6.25 전쟁
베트남 전쟁

개요

대한민국의 제11·12대 대통령[1].

생애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11기로 입학했다. 5.16 군사정변 당시 친구들과 함께 쿠데타를 지지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것이 박정희의 눈에 띄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 자리에 올랐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이후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해 승승장구하였다. 이후 국군보안사령관에 임명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게되었고,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합동수사본부장을 겸임하게되었다. 전두환은 국내의 혼란상황을 이용해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을 비롯한 장군들을 체포하고 정권을 장악하였으며(12.12사태), 이듬해 1980년 5.17 내란을 일으켜 군사독재 정권을 재개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 과정에서 광주의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당하는(5.18 광주민주화운동) 결과를 낳기도 했다.

최규하 대통령의 사임 이후,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선거를 통해 제11대 대통령직에 취임한다. 취임 직후, 전두환은 새 헌법을 통과시켜 제5공화국의 서막을 열고 1981년 2월 25일 대통령 선거인단을 통한 간접선거로 또다시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전두환은 독재정치를 일으키면서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였다. 이러한 억압은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등의 만행으로 비화되었다. 전두환은 이 사건들에 대한 반발을 4.13 호헌조치등으로 찍어내렸으며, 이로 인해 이한열 열사라는 젊은 영혼이 또다시 희생되었다.

결국 전두환 독재정권은 6월 항쟁과 6.29 선언으로 막을 내린다. 전두환의 친구 노태우는 무너져가는 독재정권 대신 민중의 뜻을 따르기로 하였고 전두환은 대통령직에서 내려온뒤 백담사로 칩거한다.

칩거해있던 전두환을 다시 대중들 앞에 끌어올린건 바로 '역사바로세우기'를 주장한 13대 대통령 김영삼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군부 정권 지도층들을 반란수괴등 혐의로 체포한다. 전두환은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그동안 그들에게 준 치욕을 그대로 돌려받으며 안양교도소에 수감되고 전직 대통령 예우 역시 박탈된다. 친구 노태우가 진심어린 사죄를 하며 사면받을동안, 전두환은 단식을 벌이고 꾀병을 부리며 교도소와 병원을 오고간다. 결국 이 작자는 마침내 2011년 11월 23일 혈액암으로 사망하며 그동안 죽인 영혼들에 대한 죗값을 치루게된다.

평가

전두환 대통령 시기는 철권과 공포의 독재정으로 기억되면서도 또한 3저호황을 비롯한 경제발전을 누리며 대한민국의 전성기로도 기억된다. 하지만 전두환의 만행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치욕이고 범죄이다. 몇몇 군부독재 옹호자들이나 민정계 출신들은 그를 경제 대통령이라고 치켜세워주지만 국민들의 시선은 그저 냉담할 뿐이다.

  1. 1989년 반란수괴 외 12가지 죄목으로 체포되면서 전직 대통령 예우 박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