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국가 목록 ]
[ 소개 ]
|

| ||||||||||||||||||||||||||||||||||||||||||||||||||||||||||||||||||||||||||||||||||||||||||||||||||||||||||||||||||||||||||||||||||||||||||||||||||||||||||
---|---|---|---|---|---|---|---|---|---|---|---|---|---|---|---|---|---|---|---|---|---|---|---|---|---|---|---|---|---|---|---|---|---|---|---|---|---|---|---|---|---|---|---|---|---|---|---|---|---|---|---|---|---|---|---|---|---|---|---|---|---|---|---|---|---|---|---|---|---|---|---|---|---|---|---|---|---|---|---|---|---|---|---|---|---|---|---|---|---|---|---|---|---|---|---|---|---|---|---|---|---|---|---|---|---|---|---|---|---|---|---|---|---|---|---|---|---|---|---|---|---|---|---|---|---|---|---|---|---|---|---|---|---|---|---|---|---|---|---|---|---|---|---|---|---|---|---|---|---|---|---|---|---|---|
[ 펼치기 · 접기 ]
|
- ↑ 물론 근대화와 열강 등극을 이루어낸 시점에서 절대로 국제적인 약소국으로 취급받은 국력은 아니였지만, 실제로 당시 한국은 말단 열강이었던데다, 우호관계였다지만 또 다른 말단 열강인 일본이 바로 근처에 있다는 특성 상 경계심이 많을 수밖에 없기는 했다.
![]() | |
[ 국가 목록 ]
[ 소개 ]
|
| ||||||||||||||||||||||||||||||||||||||||||||||||||||||||||||||||||||||||||||||||||||||||||||||||||||||||||||||||||||||||||||||||||||||||||||||||||||||||||
---|---|---|---|---|---|---|---|---|---|---|---|---|---|---|---|---|---|---|---|---|---|---|---|---|---|---|---|---|---|---|---|---|---|---|---|---|---|---|---|---|---|---|---|---|---|---|---|---|---|---|---|---|---|---|---|---|---|---|---|---|---|---|---|---|---|---|---|---|---|---|---|---|---|---|---|---|---|---|---|---|---|---|---|---|---|---|---|---|---|---|---|---|---|---|---|---|---|---|---|---|---|---|---|---|---|---|---|---|---|---|---|---|---|---|---|---|---|---|---|---|---|---|---|---|---|---|---|---|---|---|---|---|---|---|---|---|---|---|---|---|---|---|---|---|---|---|---|---|---|---|---|---|---|---|
[ 펼치기 · 접기 ]
|
국토방위를 위한 제국안보전략 (國土防衛를 위한 帝國安保戰略)
제국안보전략은 한러일 전쟁이 끝난 1905년 이후부터 비밀리에 제정됐던 대한제국의 다양한 가상적국에 대한 예비전쟁계획들의 집합체다. 본래는 러시아와 중국 정도와의 충돌을 상정한 계획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한 국가들을 포괄하는 계획으로서 발전했다. 이는 19세기 말과 20세기 극초까지는 아직 한국의 국력에 불안정한 면이 어느정도 있었다는 점[1]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1947년 대한제국 체제가 공식적으로 붕괴하면서 기밀 취급이 폐지됐고, 이후 세간에도 공개됐다.
20세기 기준 군벌들 천지였던 중화민국이 만주까지 집어삼켜 바로 국경을 맞댄 대한제국과 전면전을 벌여 본토에 위협을 가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의화단 운동과 17개조 조약 반발시위 당시 중국에서 한국인들이 피해를 보는 등의 선례가 있었기에 제정된 작전이었다. 기본적으로는 1차 대전기에 산둥반도에 마련한 청도와 위해 조차지의 안전을 확보한 뒤 이를 통해 화북 일대로 단기간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을 트고, 유사시에는 산해관을 돌파해서 북경을 빠르게 점령하는 것이 목적인 작전이었다. 요컨대, 베이징과 화북 지방을 점령하여 중국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면 항복, 혹은 사실상의 패전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구상이었다.
실제로 이후 중국과의 긴장도가 증가함에 따라 칭다오와 웨이하이의 요새화가 진행됐고, 결국 해당 작계에서 명시된 전술은 노구교 사건으로 발발한 제 2차 동아시아 전쟁 당시 한국의 북경 점령, 산둥반도 점령 등 대부분의 상황에서 사용됐다. 다만 이 시점에서 장쭤린이 이끌던 내몽고군벌이 예상 외로 선전하는 변수가 있었으나, 끝내 북경은 개전 몇달만에 점령됐고, 나중에 가면 일본군과 협동하여 난징까지 점령하는 전과의 초과달성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후 한국이 항복을 맞이하면서, 1번작계 홍업에 따라 형성한 전선들 및 그를 통해 확보한 영토 또한 중국에게 반환되는 결말을 맞이하였다.
한국의 전쟁작계들 중 가장 그 크기가 방대한 작계로, 해당 작계는 1차대전 이후 무서운 속도로 부상중이던 신흥 열강인 소비에트 연방을 대상으로 한 전면전쟁에 대한 상정이였다.
1920년대 기준 한국은 대한제국령 만주와 괴뢰국인 러시아 차르국을 수중에 넣은 상황이었고, 상비군의 규모와 질도 세계 3위의 규모를 자랑했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한국이 세운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은 우선적으로 프리모예에 있는 러시아 백군 정부와 연합하여 동부를 타격하고, 북서쪽으로는 할인골로 기습적으로 공격을 감행해 극동군관구의 전력을 두번만에 궤멸시키는 것이 목적이였다. 이후 흑하(블라고베셴스크)와 자유시(스보보드니)를 점거해 동부로 소련군이 물자와 병력을 보낼 길을 차단하고, 네르친스크와 치타를 공격한 뒤 바이칼을 점거하여 소련군이 들어올 길목을 막고, 북서부전선의 기본전략목표를 달성한다.
그 후 동부 방면으로는 러시아 차르국, 경우에 따라선 당시 캄차카를 지배중이던 일본 제국과 연대하여 마가단과 축치를 점거, 동쪽과 서쪽에서 소련의 극동 영토들을 전원 포위한 뒤 최종적으로 치타를 점거하여 극동군관구의 마지막 지역인 사하를 완전히 포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당시 해당 작계를 고안안 한국 군부의 인사들은 소련의 주 전력이 대부분 유럽에 밀집되어있고, 설사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사용한다고 해도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점과 대소전쟁 그 자체로서 가지는 명분 등을 들어 충분히 가능한 전쟁이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당시 겉으로 들어나던 소련의 국력은 냉전기와같은 세계적인 초강대국은 아니였고, 대숙청 이후 군부도 혼란스러웠으니 어느 정도는 맞는 가정이였다.
제 2차 동아시아 전쟁의 시베리아 전선 초기는 경웅작계에서 예상한 바 대부분이 이루어졌다. 이는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이 소련군이 극동으로 몰려오는 시간을 더 늦추어 가능했던것이기도 하지만, 상시로 소련과의 전쟁을 제 1순위로 상정했던 한국의 특성상 신속한 계획진행이 가능했던 면도 있다. 하지만 동서부 전선의 전략목표는 바이칼 호 전투에서의 패배와 겨울 추위의 도래로 불완전하게 달성됐으며, 동북부 전선 또한 별 차이는 없었다. 결국 이렇게 전선이 불완전하게 완성된 사이 1942년에 사하 공세를 감행해서 사하의 남부는 점령에 성공했으나, 이 이후부터는 서부에서 소련군의 발목을 잡던 독일 또한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하면서 한국군 또한 극동으로 몰려오는 소련군들과의 싸움에서 서서히 열세로 접어들었다. 결국 1945년 시점에 들어서는 시베리아는 커녕 만주와 러시아 차르국 바로 코 앞까지 소련군이 들이닥쳤다. 결국 한국이 항복하고, 만주 북부에 소련군정이 들어서면서 2번작계 경웅은 실패로 끝을 맺었다.
조선에 상륙하여 불평등조약을 이루어냈던 프랑스 또한 한국이 고려한 잠재적인 적국이였다. 해당 작계에서는 일차적으로 한국 해안선들의 사방을 군대로 채워넣어 프랑스가 상륙할 틈을 주지 못하게 하고, 그 후 군함들을 이용한 육군 병력 수송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거하는것을 대략적인 최종 목표로 삼았다. 해당 작전은 1905년 이후 프랑스가 러시아를 지지하였음에도 딱히 한국을 적대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대전기 이후에는 관계가 차차 완화되면서 프랑스의 한국 침공 계획은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 판단되어 폐기됐다.
2차 대전기까지는 양국이 친선관계였기에 해당 작전이 그닥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정한론 등의 정보를 보신전쟁 당시 파견됐던 통신사들 덕에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던 광무 정부 이래 대한제국은 일본과의 혹시 모를 대립을 우려해왔다. 그에 따라, 4번 작계는 본래 일본과의 동아시아 내 이권다툼이 심화되어 전쟁으로 번지거나, 일본이 북수남진 정책을 폐기하고 정한론으로 다시 정책을 돌리는 경우를 대비해 만든 전략이었다.
해당 시나리오에서 한국이 우려한 바는 다름아닌 일본의 해군력으로, 육군에 집중한 군사성장을 이룬 대한제국의 특성상 일본이 해군력을 앞세워 동래, 제주도 등을 접거하고 한성으로 곧바로 진격할 시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었다. 해당 시나리오는 제 1차 세계대전기 이전부터 계획된 꽤나 오래된 계획이며, 대응책으로는 쓰시마의 점거와 제주도 및 동래부 수비, 그리고 공군 및 해군전력을 통한 시모노세키, 구레, 히로시마 등 일본 규슈 지방 침공, 혹은 일본이 차지한 중국 식민지들을 빼앗는 등의 전략이 있었다.
하지만 30년대에 들어 방공협정 체결과 제 2차 한일동맹 출범으로 인해 해당 작전은 사실상 소멸하는...줄 알았으나, 1945년 연합국에 편입된 이후 일본과의 전쟁이 몇달 간 이어지면서 실제로 일부 전략이 사용됐다. 다만 저 시기를 기준으로는 일본군이 한국 본토에 상륙할 여력이 되지도 않았고, 더불어 이미 미국이 오키나와에서 북상하여 일본을 압박하고 있던지라 실전에서는 동래부, 제주도 등의 방어와 쓰시마 함락까지만 이루어졌다.
러일전쟁 이후 한국과 독일의 사이가 황화론과 영한동맹 등으로 급격히 안 좋아지면서 초기에 주목받았던 작전으로, 규모 자체는 독일의 동아시아, 태평양 지역 영향력의 범위상 타 작전들에 비해 작은 편이었다.
다만 당시 독일의 군사력이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수준이었던만큼, 확실한 대비는 마련되었다. 주 목표는 당시 독일령이었던 칭다오의 점거 및 기타 독일의 동아시아 식민지 점거였으며, 해당 식민지들은 대부분 한국의 영토 근방에 존재했기에 신속한 확보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한국에게는 큰 이점이였다.
해당 계획은 1차 대전기에 한국이 칭다오와 웨이하이를 점거하면서 이루어졌으며, 이후 독일제국이 베르사유 조약 등으로 사실상 몰락,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폐지되었다.
대한제국 내부에서 반란, 혹은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을 상대로 세웠던 계획이다. 당시 상정된 요주의 세력은 공산주의 성향을 띄던 조선공산당이었으며, 실제로 이들의 위세가 한국 내에서 꽤 강력했던지라 당시 정부로부터 온갖 탄압 및 규제를 받고 있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정작 대한호국회의 한성 진군 당시엔 해당 작전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가 한성 내전때나 되서야 실현되었다는 것. 이후 작전수행 과정에서의 반란세력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공격 계획, 최후의 경우엔 생화학 무기의 사용도 고려했다는 점 등 작계 자체의 비인간성이 지적되면서 폐지됐다.
해당 작전들은 모두 한국의 패전 이후 폐지된데다 그 이후 국제적인 상황이 여러 번 변화를 겪었다보니, 현실적으로는 실현될 가능성이 적은 편이다. 다만, 국내 반란군과의 교전을 염두한 남파작계의 경우 현재 일부 내용은 내분열 대책 매뉴얼에서 재채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