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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시대는 "만약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면?"을 바탕으로 제작된 시즌제 대체역사물입니다.
모든 설정은 공식이자 허구임을 밝히며, 자세한 정보는 각 링크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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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국회의원 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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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3월 24일 14대 총선 |
→ | 1996년 4월 11일 15대 총선 |
→ | 2000년 4월 13일 16대 총선 | |||||||||||||||||||||||||||||||||||||||||||||
투표율: 63.9% (▼ 8%p) | |||||||||||||||||||||||||||||||||||||||||||||||||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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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96년 4월 11일에 실시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율은 지난 총선보다 8%p 낮은 63.9%을 기록했고, 20세기에 치러진 대한민국의 마지막 선거이다. 의원 정수는 지난 총선과 동일한 299명으로 지역구는 16석 늘어난 253석, 전국구는 16명 줄어든 46석으로 조정되었다. 이번 총선에서는 1인 1표제를 통해 지역구를 선출하되, 지역구에서 각 정당이 득표한 수의 합산을 통해 전국구를 배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음으로, 지역구 의석수를 얻기 힘든 소수 정당의 원내 입성이 조금 유리해지게 되었다.
이 선거에서는 신한국당, 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통합민주당, 변화당, 무당파국민연합 등이 참여했고, 각 당의 목표 의석는 신한국당의 원내 제1당 수성 및 150석 이상 확보, 새정치국민회의는 개헌저지선(100석) 이상 확보, 자유민주연합은 60석 이상 확보, 통합민주당과 변화당은 원내교섭단체 구성 의석(20석 이상) 확보였다.
과정
김대중의 정계 복귀
1992년 14대 대선 낙선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에 있던 김대중 아태재단(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이 1995년 첫 지방선거로 실력을 과시한 뒤, 그 해 7월에 정계복귀를 선언한다. 하지만 그가 속했던 민주당 내부에서 그의 복귀에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자, 아예 당을 떠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민주당 의원의 2/3 가량이 국민회의로 넘어가게 된다. 이로써 야권은 크게 개편 및 분열되는데, 국민회의의 대선을 노린 안정, 보수적 행보에 통합민주당은 진보, 시민사회계 인사[1]를 영입하며 경쟁을 벌이게 된다.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 창당
총선과 대선을 거쳐 대통령이 된 김영삼이 대대적인 개혁 정책으로 국민적 인기를 얻은 사이, 민주계는 이를 바탕으로 당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이 때 민주계의 젊은 인사들이 김종필 대표의원을 "개혁 정권에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 인사"로 간주하여 사퇴를 압박했고, 김영삼조차도 김종필을 냉담하게 대하는 등 갈등이 표면화된다. 결국 김종필은 공화계 인사들과 함께 1995년 1월 탈당했고, 이른바 '핫바지론', '원조보수론'을 내걸면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이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충청권·강원도 광역단체장, 충청남도 기초단체장을 석권함으로써, 신민주공화당에 이은 충남권의 맹주로 자리잡아 15대 총선에서의 '녹색 돌풍'을 예고했다.
변화당의 부상(浮上)
변화당에서는 두 차례 정당 해산을 받은 김정식 대표가 1994년에 사임하면서, 후임으로 취임한 주영민 대표를 중심으로 새로운 당론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1994년은 문민정부가 서서히 추락한 시기인 만큼 변화당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해였지만, 다음 해인 1995년에 삼풍백화점 A동이 붕괴하는 대형 사고와 검찰의 5.18 공소권 없음 결정으로 더욱 굳어졌다.
변화당은 끝내 문민정부의 실책을 비판하며 국가 난제 극복과 국가 개혁을 촉구하자는 연설을 열기로 결정하고, 1995년 8월 1일, 태평로(세종대로)에서 3,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주영민 대표를 필두로 대중 연설을 진행한다. 당시 현장에는 기자들과 시민단체 인사들이 와 있었는데, 이 때 찍은 모습이 전국 방송사와 언론에 집중적으로 보도된다. 연설 이후, 주영민은 변화당을 '국민을 위한 개혁정당'으로 만들 것이라며 공식적으로 총선 완주 의사를 밝혔다.
당시 정치권은 정당의 총재(대표)가 연설을 하겠다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김대중도 원론적인 답변만 낸 것에 그쳤는데, 이 연설이 주목을 받자 정치권은 개혁을 강조하며 총선판에 뛰어들기 시작한다. 문민정부도 이를 의식한듯 조선총독부 철거, 5.18·12.12 재수사 및 특별법 제정, 노사문제 해결에 속도를 내면서 개혁 의지를 보여주었고, 당대 중량감 있는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모아 인재 영입에 주력했다. 변화당도 젊은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공을 들였지만, X세대와 서민층, 노동자를 겨냥한 정당 이미지로 유권자 결집을 시도한다.
한편 개혁신당과 통합한 통합민주당은 변화당이 예상치 못한 인기를 얻으면서 야권 표가 분열될 것이란 우려를 보였는데, 이기택 대표는 총선 전 주영민과 만나 반삼김이라는 공통 의견에 따라 언제든지 함께할 수 있다고 밝혀 총선 연대를 제안해 최종적으로 후보 단일화를 하는 조건에서 지역 단위의 연대에 합의한다. 그러나 일부 당원들은 개혁세력의 세대 교체를 목적으로 통합민주당을 탈당했고, 소속 국회의원인 원혜영도 주영민을 돕겠다는 목적으로 변화당에 입당해 잠시 원내정당이 된 적이 있었다.
개표 결과
지역구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지역구 의석 현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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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신한국당 | 새정치국민회의 | 자유민주연합 | 통합민주당 | 변화당 | 무소속 | 합계 |
서울 | 24 | 18 | 0 | 1 | 3 | 1 | 47 |
부산 | 21 | 0 | 0 | 0 | 0 | 0 | 21 |
대구 | 2 | 0 | 8 | 0 | 0 | 3 | 13 |
인천 | 9 | 2 | 0 | 0 | 0 | 0 | 11 |
광주 | 0 | 6 | 0 | 0 | 0 | 0 | 6 |
대전 | 0 | 0 | 7 | 0 | 0 | 0 | 7 |
경기 | 17 | 9 | 5 | 2 | 3 | 2 | 38 |
강원 | 9 | 0 | 2 | 2 | 0 | 0 | 13 |
충북 | 2 | 0 | 5 | 0 | 0 | 1 | 8 |
충남 | 1 | 0 | 12 | 0 | 0 | 0 | 13 |
전북 | 1 | 13 | 0 | 0 | 0 | 0 | 14 |
전남 | 0 | 17 | 0 | 0 | 0 | 0 | 17 |
경북 | 11 | 0 | 2 | 1 | 0 | 5 | 19 |
경남 | 17 | 0 | 0 | 2 | 0 | 4 | 23 |
제주 | 3 | 0 | 0 | 0 | 0 | 0 | 3 |
전국 | 117 | 65 | 45 | 8 | 6 | 16 | 253 |
전국구
당선인
평가 및 분석
제15대 국회 구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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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계 92석 | 제3지대 11석 | 보수정당 196석 | ||
새정치국민회의 | 통합민주당 | 변화당 | 신한국당 | 자유민주연합 |
78 | 14 | 11 | 144 | 52 |
※ 무소속 당선자의 원대복귀가 모두 이루어졌다고 가정했을 때의 의회 구도 |
15대 총선의 결과는 새정치국민회의의 부진, 신한국당의 선전, 변화당과 자유민주연합의 돌풍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여당인 신한국당은 문민정부의 지지율 하락에도 불구하고,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 민중당 출신 이재오, 김문수 등 당대 정치 신인들이 대거 당선되었고, 북한과 밀접해 있는 경기도 북부 지역에서의 북풍 효과, 야권 분열에 대한 반사이익으로 예상보다 선전한 134석을 확보하였다. 특히 서울 지역에서는 47석 중 24석을 확보하며 지역 여대야소를 만들어냈고, 전북 군산 을의 김현욱, 충남 흥성군의 이완구가 당선해 교두보를 마련하는 등 괄목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대구 지역에서 자민련·무소속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면서 크게 부진했고, 경북과 경남에서의 1당 확보에도 원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해 영남권에서 부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새정치국민회의는 개헌저지선 100석 확보와 제1당 등극을 노렸으나, 예상보다 크게 부진하는 성적을 남겼다. 서울 지역에서는 1985년 이후 줄곧 우위를 점하던 서울 지역에서 18석을 얻는 데 그친데다, 이 지역에 지역구를 두고 있던 중진급 정치인들이 대거 낙선해 큰 피해를 입었다. 이는 통합민주당/변화당 후보의 존재로 인해 민주당계 지지층의 표가 분산되었고, 훗날 통합민주당과 변화당이 무당층과 양당 지지층을 잠식하는 제3당 효과를 보였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야권 분열이 부진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또 전국구에서도 12석 확보에 그쳐 13번의 김종배와 14번의 김대중이 낙선해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자유민주연합은 충청권에서 28석 중 24석, 대구광역시에서 13석 중 8석을 확보하였고, 경기도에서도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당선자를 배출하는 등 총 50석을 확보하였다. 특히 충청권과 대구에서의 전체 석권은 아니었어도, 전체적으로는 제3당 돌풍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역대 총선과 비교하면 충청남도의 맹주 자리를 지키던 신민주공화당에 비해 매우 넓어진 것을 볼 수 있으며, 13대 총선의 통일민주당을 제외하면 제3당으로는 최대 의석을 확보한 셈이 되었다.
변화당은 지역구 6석, 전국구 5석으로 창당 8년 만에 원내 진출에 성공했다. 그간 변화당은 원내 진입의 실패로 두 번의 정당 취소를 받았지만, 주영민 대표를 필두로 태평로 연설을 통한 중도 유권자들과 무당층의 결집, 통합민주당과의 단일화 연대 효과를 받아 자민련 다음으로 제3지대 돌풍을 일으켰다. 이 선거 결과에 따라 비록 원내교섭단체 지위에 실패했더라도, 향후 '반삼김 개혁 세력'으로서의 입지를 굳힐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통합민주당은 영남에서 3석을 확보하는 등 약진이 있었지만, 서울에서 이부영만이 당선되고 부산에서는 이기택 대표를 비롯한 전원이 낙선한 결과, 30석에서 12석으로 줄어들어 단숨에 원내교섭단체에서 군소정당으로 전락했다. 또 경기 여주의 이규택, 강원 강릉 을의 최욱철이 당선 직후 신한국당에 입당하고, 이기택계와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계열이 분열로 인해 사실상의 분당 수순을 맞이하는 등 내분이 빚어졌다. 이와는 별개로 통합민주당과 변화당의 선거연대는 변화당의 원내 진출에 큰 역할을 한 만큼 의외로 좋은 성과를 보였다. 무소속 인사들은 대부분 신한국당의 공천 탈락자들로서, 당선 이후 대부분 신한국당에 복당했다.
여담
각주
- ↑ 이들이 중심이 된 개혁신당이라는 당과 통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