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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회원국 | |
크라스나야 대공국 | 카스캐디아 |
크라스나야 대공국 Великое Княжество Красна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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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휘장 | ||||||||||||||||||||||||||||||||||||||||||||||||||||
위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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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
루스도시동맹 1290년 9월 11일 사할린 공화국/쿠이 법국 1385년 10월 23일 크라스나야 공국 1856년 2월 24일 크라스나야 대공국 1860년 11월 16일 벨라비온 선언(주권선언) 1917년 12월 25일[1] | |||||||||||||||||||||||||||||||||||||||||||||||||||||
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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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환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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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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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스나야 대공국(영어:Grand Dukedom of Krasnaya [2], Grand Knyazate of Krasnaya[3]/노어:Великое Княжество Красная Velikoye Knyazhestvo Krasnaya)은 동북아시아에 위치하고 있는 입헌군주국이다. 유즈노 크라스나야 제도를 비롯하여 오딘제도, 사할린 섬, 쿠릴 열도, 스더니츠키 제도, 프리모르스키 지방 및 속령인 세베로 크라스나야 제도, 아이리스 제도, 달니아(다롄)를 점유하고 있으며, 국토의 대다수가 오호츠크해에 있어, 러시아 연방에 둘러쌓여 있는 형태이다. 서쪽으로는 아무르강을 경계로 러시아와 육로로 맞다아 있다. 마찬가지로 아무르강의 지류인 우수리강을 경계로 중화인민공화국과 마주보고 있으며,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남부에 있는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남쪽으로는 소야해협과 네무로 해협을 기준으로 일본과 마주보고 있으며, 동쪽은 태평양과 마주하고 있다. 수도는 유즈노 크라스나야 제도에 위치하고 있는 '크라스크'(Краск, Krask)이며, 사할린섬의 중부에 위치한 '아프릴리우스'(Aprilius)가 행정수도로써 역활을 수행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극동아시아에 속해 있으나, 문화, 정치, 사회적으로는 유럽과 훨씬 가까워서 아시아의 유럽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크라스나야는 1930년대 후반부터 경제학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케인스키 학파의 본고장으로서 현대 주류 경제학의 중심지이자 거시경제학의 시발점이라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크라스나야는 케인스키의 경제학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미국의 자유방임 시장경제와 소련의 중앙계획 공산경제에 맞서는 혼합자본주의 체제를 현대적으로 개발한 국가이기도 하다.
케인스키에 따르면 자유시장체제에서 소비의 과잉 도는 과소가 요동을 치고 그것이 경기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하여 시장의 결점을 보완해야 한다. 즉 국민의 과소 소비는 공장 자동화 등에 의한 기업의 대량생산물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생산 부분의 고용 및 투자부진이 경제 전반에 큰 타격을 준다는 것이다. 이 같은 진단에 따라 케인스키와 크라스나야 정부는 생산과 소비, 화폐, 고용, 금융 등을 동시에 고려하는 거시경제적 해결책을 모색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경제개발을 주도하는 혼합자본주의 체제에 힘입어 크라스나야는 극동의 변방소국에서 20세기 경제 혁명의 중심지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개발된 국가중 하나가 되었다.
지리


크라스나야는 국토의 절대다수가 오호츠크해와 그 인근에 위치해 있으며, 러시아 연방에 둘러쌓여 있는 형태이다. 서쪽으로는 아무르강을 경계로 러시아 연방과 육지에서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아무르강의 지류인 우수리강을 경계로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남쪽으로는 소야 해협과 네무로 해협을 경계로 일본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쿠릴열도와 스더니츠키 제도의 동안은 태평양과 마주보고 있는 형태이다.
국토의 절대 다수는 신생대 제3기 마이오세기에 현재와 비슷한 모습이 되었으며, 빙하기 당시의 유즈노 크라스나야 제도등의 오호츠크의 섬은 육지와 육로로 연결되어 있었으다. 홀로세기의 시작시기인 약 1만년 전, 마지막 빙기가 끝나고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대다수의 국토가 산악지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부 평야를 제외한 국토의 절대다수가 산악지형이다. 대륙부인 프리모르스키 지방에는 1,300km 길이의 시호테알린 산맥이 있으며, 절대다수의 평야는 해안가와 아무르강 인근 지역에 펼처저 있으며. 해양부 중에서 가장 큰 섬인 사할린 섬에는 서(西)사할린 산맥과 동(東)사할린 산맥이 섬의 양쪽으로 펼처저 있으며, 그 사이에 거대한 평야가 자리를 잡고 있는 지형을 가지고 있다.
하천의 유량은 1년내내 일정한 편이며, 가장 큰 강으로는 대륙부에 속해있는 아무르강과 그 강의 지류인 우수리강이 있다. 해양부에서 가장 큰 강은 사할린 섬의 포로나이 강과 팀 강(Tym River, Sakhalin)이 있다. 하천은 정비가 잘 되어있기는 하지만 겨울에는 결빙으로 인하여서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크라스나야는 일부 속령을 제외한 영토의 대다수가 북위 42도~북위 56, 동경 130도~ 동경 155도 사이에 넓게 분포되어 있으며, 대륙부는 시베리아 기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냉대 동계 소우 기후(Dwc, 동계 한랭 건조, 선선한 여름)이며, 해양부는 오호츠크 기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냉대 습윤 기후(Dfb, 동계 한랭, 따뜻한 여름, 건조기 없음)를 띈다. 연간 강수량은 약 500~1000mm 사이이며, 1년내내 강우량/강설량이 일정한 편이다.
기원

이 지역에 루스인이 정착한 것은 13세기 전후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땅에 최초로 성립된 국가는 크라스나야 도시동맹/루스 도시동맹이다. 허나 도시동맹은 고대 그리스와 비슷한 느슨한 연합의 체제였지, 중앙집권의 국가가 아니기에 결국 내분으로 망하였고 실질적으로 이 땅에 최초로 들어선 중앙집권 국가는 사할린 공화국/쿠이 법국이라고 불리우는 국가이다.
명나라의 '고이서기'(苦夷書記)에서는 사할린 공화국/쿠이 법국과 조선을 비교하여, '조선은 순종적인데 반하여 고이는 반항적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청나라의 '고엽서기'(庫葉書記)에서는 사할린 공화국을 '새로운 질서에 반발한 어리석은 놈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특히 명이 적은 고이서기와 다르게 청이 작성한 고엽서기에서는 수 많은 마찰로 청나라가 수차례의 무력을 행사하였고, 청과의 마찰로 하여금 사할린 공화국이 급격하게 쇠퇴한 상황에서 제정 러시아의 장군인 '렌코비치 크라스나야'(Lenkovichi Krasnaya Ленковичи Красная)가 군을 이끌고 공격을 해오면서 이 땅의 국가의 명맥이 끊기게 된다.
근대 크라스나야의 뿌리는 제정 러시아라고 봐도 무방하다. 1854년에 성립된 크라스나야 공국으로 시작하여 1890년에 크라스나야 공작이 대공작이 되면서 성립된 크라스나야 대공국으로 이어지는 이 땅의 국가의 역사는 사실상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제정 러시아 역사의 일부분이었으며, 10월 혁명으로 하여금 러시아라는 국가가 실질적으로 존폐의 위기에 놓이게 되고, 크라스나야 대공국이 주권선언을 함으로써 자주국가로써의 시대의 막을 열게 되었다.
역사

루스도시동맹(1295~1435)
현대 크라스나야 대공국이 통치하는 크라스나야 제도, 사할린, 연해주 지역에서 루스인(Rus')이 주류 민족으로 자리 잡은 것은 13세기 전후의 일이다. 이 과정은 당시 유럽의 강대국이었던 킵차크 칸국(Kipchak Khanate)이 원나라에 조공의 성격으로 바친 루스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원나라 조정은 이 지역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루스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이에 따라 루스인들은 처음으로 이 땅에서 주류 민족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1290년, 루스인 중심의 도시동맹(Rus' Grad Alliance/Gorod Souyz, 1290~1385)이 결성되었다. 이 동맹은 고대 그리스의 참주정(tyranny) 체제를 기반으로 한 민주적 운영 방식을 도입하였으며, 초창기에는 공정한 통치를 바탕으로 국가 운영이 이루어졌다.
크라스크 섬(현실의 볼쇼이 샨타르 섬)을 포함한 크라스나야 제도는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으나, 혹한에서도 생육 가능한 밀(아시아 밀 + 드네프르 밀의 교배종)이 성공적으로 정착하면서 크라스크의 경제적 기반이 형성되었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계절에 따라 농경과 수렵·어로 활동을 병행하는 생활 방식을 정착시켰다. 여름과 가을에는 혹한지에서도 재배 가능한 밀, 보리, 호밀 등을 경작하고, 겨울에는 순록, 사슴, 해양 포유류(바다표범, 해달 등)를 사냥하며 식량과 가죽, 유지(기름) 등을 확보했다. 또한, 바다와 강에서 얼음낚시와 훈제 생선 가공을 통해 저장 식량을 마련하며 혹독한 겨울을 대비했다. 이러한 계절별 경제 활동을 바탕으로, 크라스크는 샨타르 해협과 인근 강 유역을 활용한 해상·강변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면서 도시동맹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특히, 겨울철 사냥으로 얻은 모피, 가죽, 유지(기름) 등은 주변 도시 및 유목민들과의 주요 교역품이 되었으며, 여름철 생산된 곡물과 채소는 사할린 및 연해주 지역과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크라스크(Krask)가 참주(tyrant) 자리를 독점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다. 1320년, 이러한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결집하여 동부동맹(Eastern Grad Alliance, 1320~1385)을 결성하고 독립을 선언하면서 동서분규(Grad Crisis)가 발생했다. 이후 동부동맹과 서부동맹(Western Grad Alliance) 간의 전쟁이 발발하였으며, 최종적으로 1385년 동부동맹이 패배하면서 크라스크가 참주 자리를 독점하는 크라스크 일극체제(Krask Era/Krask Grad Alliance, 1385~1420)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크라스크의 독점 체제는 장기적으로 유지되지 못했다. 1420년, 같은 서부동맹 소속이자 크라스크의 주요 파트너였던 톰스크(Tomsk)에서 반란이 일어나 해백전쟁(海白戰爭, Krask-Tomsk Civil War, 1420~1425)으로 이어졌다. 이 내전으로 인해 도시동맹은 국력을 소모하며 쇠퇴하기 시작했다. 결국, 약 10년 뒤인 1435년, 도시동맹은 사할린 공화국(Republic of Sakhalin)/쿠이 법국(Kui Theocracy, 1435~1720)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고, 그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사할린 공화국/쿠이법국(1435~1720)
사할린 공화국/쿠이 법국(Republic of Sakhalin/Kui Theocracy, 1435~1720)은 좁게 보면 동부동맹의 패잔세력이 중심이었으며, 넓게 보면 원나라 시기부터 이루어진 루스인 이주 정책을 통해 사할린에 정착한 루스인, 토착민족인 아이누족, 그리고 일부 만주의 유목 세력들이 통합되어 성립한 독창적인 공화제 국가이자 정교회 국가였다. 이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사례였으며, 동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이자, 세계 역사상 유일하게 공화제에서 신정제로 전환된 사례였다. 쿠이 법국은 최초로 크라스나야 제도와 그 부속도서, 프리모르스키 크라이(외만주), 알단 고원, 캄차카 반도, 아이누 모시르(현 홋카이도), 스더니츠키 제도 등 현재 크라스나야의 강역과 거의 유사한 영토를 차지한 국가였다. 또한, 명나라, 조선, 일본 등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유교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이를 정교회 신앙과 융합하여 극동 정교회(Far East Orthodox)라는 독특한 전통을 형성하였다.
사할린 공화국 성립 이전, 사할린과 그 주변에는 루스인과 토착민들이 공존하는 도시들이 존재했다. 원나라의 루스인 이주 정책과 함께, 사할린과 연해주 일대에는 루스인 정착지가 형성되었고, 이들은 점차 토착 아이누족, 만주계 유목 세력과 융합하며 독자적인 도시국가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각각 독립된 도시국가들이었으나, 경제적·군사적 협력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점진적으로 하나의 연합체를 형성하였다. 그중에서도 아프릴리우스(Aprilius)는 종교적 중심지이자 정치·경제적 거점으로 떠올랐다. 결국, 아프릴리우스를 중심으로 도시들이 하나의 정치 체계로 통합되며 사할린 공화국이 성립하였다. 이는 단순한 동부동맹 패잔세력의 결집이 아니라, 원나라의 이주 정책, 지역 내 다양한 민족의 융합, 도시 간 연합과 통합 과정을 거쳐 탄생한 국가였다.
동서분규에서 패배한 동부동맹의 패잔세력은 사할린으로 도주하여 아프릴리우스에 정착했다. 그들은 기존 사할린 지역의 루스인·아이누족·만주계 도시국가들과 융합하며 점진적으로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1435년, 동부동맹 출신 지도자들과 기존 도시 지도자들이 협력하여 사할린 공화국을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다. 이 국가는 원래 도시연합적 성격을 띠었으나, 동부동맹의 전통이 섞이면서 중앙집권적 요소가 강해졌고, 대참주(Grand Tyrant)가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사할린 공화국의 정치 체제는 동부동맹 출신 귀족과 기존 사할린 도시국가 출신 세력 간의 갈등으로 인해 지속적인 긴장 상태에 놓였다.
사할린 공화국은 대참주(Grand Tyrant), 원로원(Senate), 민의원(People’s Assembly)의 3권 체계를 갖춘 정치 구조를 운영했다. 그러나 이 체제는 단순한 민주적 공화국이 아니라, 동부동맹 패잔세력의 군사적·귀족적 전통이 강하게 반영된 참주정(僭主制, Tyranny) 기반의 공화국이었다.
원로원은 동부동맹 출신 귀족과 군사 지도자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국가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기구였다. 이들은 동서 분규에서 패배하고 망명한 뒤에도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며 사할린 공화국의 정점에 자리잡았다. 대참주를 선출하고, 국가 운영의 전반적인 정책을 결정하며, 군사 및 외교권을 행사하는 핵심 기구였다.
사할린 공화국의 상업과 농업을 담당했던 민간 세력은 민의원을 통해 정치적 발언권을 가지려 했으나, 원로원의 강한 견제 속에서 제한적인 역할만 수행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누족과 만주계 출신의 도시 지도자, 루스인 상인 계층이 결집하면서 민의원의 세력이 확대되었다. 민의원은 원로원의 독점적 권력에 맞서 조세 감면, 군사 동원의 완화, 외국과의 자유 무역 확대 등을 요구하며 갈등이 심화되었다. 원로원과 민의원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정교회의 주교회의(Holy Synod)가 정치적 중재자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대참주는 종교적 권위를 빌어 자신의 통치 정당성을 강화하려 했고, 이는 주교회의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로 이어졌다. 주교회의는 민의원을 지지하면서 원로원과 대참주의 권력을 견제하기 시작했으며, 점차 신정국가로의 변화가 가속화되었다. 16세기 초, 주교회의(Holy Synod)의 권력이 점차 강화되면서 참주제(僭主制)는 붕괴하고, 대주교(The High Patriarch)가 국가 원수의 지위를 계승하면서 신정국가로 변모하였다. 이 과정에서 극동 정교회(Far East Orthodox)가 국교로 자리 잡고, 정치와 종교가 결합된 새로운 통치 체제가 성립되었다.
신성제 체제 전환 이래, 쿠이 법국은 극동 정교회의 영향력을 확장하며, 만주와 내륙 지역까지 포교 활동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이를 쿠이 법국의 세력 확대로 간주하며 위협을 느꼈고, 강압적인 조치를 시행했다. 명 조정은 극동 정교회의 포교 활동을 강제로 중단시키고, 일부 성당을 파괴하며, 정교회 사제들을 추방하는 등 탄압을 가했다. 이에 대해 쿠이 법국은 이를 신앙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며 종교적 대의명분을 앞세워 명나라와의 전쟁을 개시하게 되었다. 이를 동방 십자군(The Eastern Crusades)이라고 부른다.
쿠이 법국은 신의 뜻을 실현한다는 명분 아래 성전을 선포하고, 정교회의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명나라 북방으로 진출하였다. 만주 지역에서 후연(後燕)과 정안(靖安)이라는 괴뢰국을 수립하며 명나라와의 충돌이 본격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쿠이 법국의 군대는 몽골식 기병대의 기동력, 그리스식 창병대의 강력한 방어력, 그리고 명나라식 화포대의 압도적인 화력을 조합하여 요동과 쑹화강 유역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북로남왜(北虜南倭)의 혼란 속에서도 반격을 시도하며 요동 지역에서 대규모 공방전이 벌어졌고, 결국 전쟁은 정체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쿠이 법국의 기록에서는 이 전쟁을 단순히 "성전(聖戰, Holy War)" 또는 "신의 전쟁(Battle of God)" 정도로 불렀다. 이는 신정국가로서의 쿠이 법국이 극동 정교회의 신앙을 수호하고, 정교회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것을 전쟁의 정당성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대 크라스나야 사학계는 이 전쟁을 유럽의 십자군 원정과 유사한 종교적 대의명분을 가진 대규모 전쟁으로 평가하며, "동방 십자군(The Eastern Crusades, Vostochnyy krestovyy pokhod)"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이 명칭은 쿠이 법국이 성전을 명분으로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고, 종교적·군사적·정치적 확장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유럽의 십자군과 유사한 구조를 지녔다는 점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동방 십자군"이라는 표현은 역사적으로 당시 사용된 공식 명칭이 아니라, 후대 역사학적 해석에서 정립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명과의 전쟁 이후 군부의 권력과 영향력이 급격하게 확대되면서, 장군들의 시대(The Age of Generals)가 개막되었다. 강력한 군사 귀족과 지휘관들이 정국을 주도하며, 국가 운영이 점차 군사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추가적인 명나라 원정이 강행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원정을 지원하며, 동아시아 전역에서 쿠이 법국의 군사 개입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확장 정책은 결국 국력을 급감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장기적인 전쟁으로 인해 경제력이 약화되고, 군사 부담이 과중해지면서 내부 정치 불안이 심화되었다. 특히, 명과의 전쟁으로 약화된 북방 지역에서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면서, 쿠이 법국의 대륙부 영토가 새로운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후금이 명나라와의 전쟁을 본격적으로 개시하자, 쿠이 법국은 더 이상 만주 지역을 방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군사력이 점점 약화된 상황에서 후금과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결국 대륙부의 주요 거점들을 상실하게 되었다. 후금의 세력 확장과 함께 쿠이 법국의 영향력은 급속히 쇠퇴하였으며, 한때 동방에서 강력한 신정국가로 군림했던 쿠이 법국은 내부 혼란과 외부 압력 속에서 점차 약해져 갔다.
특히, 후금이 국호를 청(淸)으로 바꾼 이후,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는 쿠이 법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국정을 여진족(만주족) 중심으로 재편하며, 과거 금나라(女真 金朝)의 영광을 재현하려 하였다. 청 조정은 쿠이 법국이 신정국가(神政國家) 체제를 유지하며 정교회(Orthodox Church) 중심으로 운영된다는 점을 강하게 거부했고, 이를 만주 중심 질서의 확립을 위한 걸림돌로 간주하였다. 이에 따라, 청은 정교회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하고, 전통적인 여진족-만주족 중심의 군정 체제로 전환하였다. 1636년, 청이 국호를 변경한 이후, 명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한 후방 안정화 조치로 쿠이 법국에 대한 공격을 본격화하였다. 청군은 기존 쿠이 법국의 신정 체제를 제거하고, 정교회의 정치적 영향력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1636년부터 수차례의 ‘쿠이 원정(Kui Campaigns)’이 진행되었으며, 청은 이를 통해 쿠이 법국의 주요 거점과 행정 조직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청의 공격과 내부 혼란 속에서 쿠이 법국은 더 이상 기존의 체제를 유지할 수 없었으며, 급속히 붕괴하였다.
대륙부 영토를 상실한 쿠이 법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지며, 점차 중앙집권 체제가 붕괴되고 지역국가로 축소되었다. 연해주와 사할린을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했으나, 지속적인 내전과 지방 세력 간의 갈등으로 국력은 더욱 쇠퇴해갔다. 1698년, 제정 러시아의 장군 렌코비치 크라스나야(Graf Lenkovich Krasnaya/Graf Lenkovich Rozniki, 1639~1701)가 코사크 기병대를 이끌고 수도 아프릴리우스(Aprilius)에 무혈입성하였다. 오랜 전쟁과 내전으로 인해 국력은 소진되었으며, 국가 기능은 사실상 마비된 상태였다. 일부 신정주의자들이 저항을 주장했으나, 조직적인 방어는 불가능하였고, 결국 러시아군은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받았다. 그러나 일부 정교회 세력과 쿠이 법국의 잔존군은 산악지대와 사할린, 연해주 등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며 저항을 이어갔다. 제정 러시아군은 수십 년간 이들과 교전하며 반란을 진압하였고, 1720년 마지막 거점을 점령하면서 쿠이 법국은 공식적으로 멸망하였다.
이후, 러시아 차르는 전쟁에서 활약한 렌코비치 크라스나야 장군을 기리며, 그의 가문의 시조 블라디미르 로즈니키(Vladimir Rozniki)가 이반 뇌제에게 하사받았던 가문의 성(姓)을 따서, 당시 이름 없던 루스인의 섬을 ‘크라스나야 제도(현대의 유즈노 크라스나야 제도, Yuzhno-Krasnaya Islands)’라고 명명하였다.
제정 러시아 통치시기(1697~1865)
제정 러시아 통치 시기(Ruling Time of the Russian Empire / Before the Dukedom of Krasnaya, 1697~1856)는 크라스나야 제도와 사할린 지역의 루스인들에게 있어 과도기적인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에 러시아인의 일부 유입이 이루어지면서, 기존의 루스인과 토착민들이 융합되었고, 이에 따라 러시아인과 지역 토착민, 그리고 기존 루스인을 구분하는 개념인 '사할린 민족(Kuirish/Sakhalin Ethnic)'이 형성되었다.
렌코비치 크라스나야의 정복 이후, 크라스나야 제도와 사할린 섬은 사실상 무주공산(無主空山, Terra Nullius)이 되었다. 그의 사후, 아들 유리 크라스나야(Yuri Krasnaya/Yuri Rozniki, 1661~1748)는 해당 지역을 직접 통치하기보다는, 기존 쿠이 법국의 행정 체계였던 '주교회의(Holy Synod)'의 통치권을 최대한 인정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급격한 러시아화보다는 기존의 행정 시스템을 유지하며 점진적으로 러시아에 흡수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 시기, 극동 정교회(Far East Orthodox)는 크라스나야 제도와 사할린 지역의 토착 교회로 자리 잡았으나, 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 Church)와의 알력 다툼이 심화되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극동 정교회를 이단(異端)으로 규정하고 탄압을 시작했으며, 제정 러시아 역시 주교회의의 통치권을 회수하려는 일련의 조치를 추진하였다. 이에 반발한 주교회의는 만주, 연해주, 사할린 등지에서 '동방 십자군(The Eastern Crusades / Order of Saint Basileus, 1721~1727)'을 소집하며 저항에 나섰다. 그러나 러시아의 강력한 개입과 군사적 대응으로 인해, 주교회의는 결국 모스크바에서 열린 자치 공의회(Autonomous Synod)에서 협상을 통해 극동 정교회의 독립성을 일부 인정받게 되었다. 이 결과, 극동 정교회는 총대주교좌(Patriarchate) 산하의 독립 교구(Autonomous Diocese)로 공식 인정받았으며, 동시에 주교회의는 제정 러시아로부터 일정 수준의 지역 통치권을 위임받아 다시금 행정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사할린과 크라스나야 제도는 다시 한 번 법국 시절과 유사한 통치 체제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지역적인 자치권이 보장된 상태에서 러시아의 영향권 아래편입되었다. 결과적으로, 제정 러시아의 통치 시기는 단순한 정복이 아닌, 장군들의 시대(The Age of Generals) 이전 쿠이 법국의 부활과도 같은 시기였으며, 비교적 평화와 번영이 지속된 안정적인 시기로 평가된다.
크라스나야 공국(1856~1860)
현대 크라스나야 지역을 통치하고 있는 크라스나야 가문(Krasnaya Family)/로즈니키 가문(Rozniki Family)은 처음부터 이 지역의 영주였던 것이 아니다. 이 가문의 기원은 키예프 루스(Kievan Rus', 882~1240)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크라스나야 가문의 선조들은 원래 노브고로드 공화국(Novgorod Republic, 1136~1478) 출신의 유력한 보야르(Boyar) 가문으로, 슬라브계와 발트계 혈통이 혼합된 상류 귀족층이었다. 그러나 13세기 몽골의 침공과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쇠퇴 속에서 생존을 모색하며, 이들은 블라디미르 대공국(Vladimir-Suzdal)과 모스크바 대공국(Velikove Knyazhestvo Moskoyskoye, 1238~1547)으로 점진적으로 이동하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14세기경, 로즈니키 가문은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특히,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인 블라디미르 로즈니키(Vladimir Rozniki, 1472~1555)는 이반 3세(Ivan III), 바실리 3세(Vasily III), 이반 뇌제(Ivan IV) 등 러시아 군주들의 심복으로 활동하며 국정 운영과 군사 전략에 기여하면서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였다. 이반 3세가 몽골의 속박에서 벗어나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선포하는 과정에서, 로즈니키 가문은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반 4세(이반 뇌제)의 치세에서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중앙집권화와 대귀족 세력 견제에 협력하며 가문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했다. 그의 공로를 인정한 이반 뇌제는 로즈니키 가문에 "크라스나야(Krasnaya)"라는 성(姓)을 하사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가문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핵심 귀족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대동란(Time of Troubles, 1598~1613) 시기, 크라스나야 가문의 가주였던 미하일 크라스나야(Mikhail Krasnaya/Mikhail Rozniki, 1568~1632)는 러시아 내부의 정치적 혼란과 외세의 침략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1598년, 표도르 1세(Fyodor I) 사망 후, 류리크 왕조가 단절되면서 러시아는 극심한 내전과 귀족 간의 권력 투쟁에 빠졌다. 1605년 가짜 드미트리 1세(False Dmitry I)가 등장하고,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모스크바를 점령(1610~1612)하면서 러시아의 통치 구조가 붕괴되었다. 미하일 크라스나야는 1611년, 니즈니 노브고로드(Nizhny Novgorod)에서 반(反)폴란드 민병대를 조직하여 저항 운동을 이끌었으며, 후에 쿠즈마 미닌(Kuzma Minin) 및 드미트리 포자르스키(Dmitry Pozharsky)와 연합하여 폴란드군을 몰아내는 데 기여했다. 그는 단순한 군사 지도자가 아니라, 정치적 협상력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1613년 로마노프 왕조가 출범할 당시, 미하일 크라스나야는 보야르 두마(Boyar Duma)의 핵심 일원으로 참여했으며, 미하일 로마노프(Mikhail I Romanov)의 즉위를 적극 지지하였다.
그의 공로로 인해, 크라스나야 가문은 이후에도 러시아 정치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로마노프 왕조 초기 극동 및 시베리아 확장 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미하일 크라스나야는 러시아의 동방 확장을 위한 정책에도 깊이 개입했으며, 크라스나야 가문이 사할린과 크라스나야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역사적 기반을 다졌다. 17세기 후반, 크라스나야 가문은 제정 러시아의 극동 개척에 참여하였으며, 러시아 코사크 기병대를 이끌고 사할린과 크라스나야 제도를 탐사하고 방어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크라스나야 가문은 군사적·행정적 책임을 부여받으며, 해당 지역에서 점진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미하일 크라스나야의 아들, 야로슬라프 크라스나야(Yaroslav Krasnaya/Yaroslav Rozniki, 1610~1670)는 크라스나야 가문의 후계자로서, 코사크 기병대의 동방 원정 및 탐사를 후원하며 제정 러시아의 극동 개척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는 1630년대부터 코사크 개척자들에게 재정적·군사적 지원을 제공하였으며, 1640년대부터 쿠이 법국과의 외교적 접촉을 시도하면서 크라스나야 가문이 극동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야로슬라프 크라스나야는 러시아 정교회와의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극동 정교회(Far East Orthodox)와의 관계도 고려하며 균형을 맞추는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 그의 노력 덕분에, 크라스나야 가문은 1650년대부터 사할린과 크라스나야 제도의 경제적 가치를 인식하고, 러시아의 극동 개척 과정에서 중요한 후원자로 자리 잡았다.
야로슬라프의 아들 렌코비치 크라스나야(Graf Lenkovich Krasnaya, 1639~1701)는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코사크 기병대를 이끌고 직접 동방 원정을 수행하였으며, 1698년 아프릴리우스(Aprilius)에 무혈입성하여 쿠이 법국을 붕괴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야로슬라프 크라스나야는 1670년 사망하며, 크라스나야 가문의 극동 정책을 렌코비치 크라스나야에게 계승하였다.
야로슬라프의 아들이자, 렌코비치의 동생 로마리크 크라스나야(Romarik Krasnaya/Romarik Rozniki, 1645~1715)는 러시아 제국의 행정가이자 정치가로, 표트르 대제(1672~1725)의 개혁을 보좌한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서유럽의 선진 행정 및 군사 제도를 러시아에 도입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1703~1712) 과정에서 도시 설계 및 행정 기구 조직을 담당했다. 또한, 표트르 대제와 함께 러시아 해군 창설을 지원하고, 스웨덴과의 대북방 전쟁(1700~1721)에서 전략적 조언을 제공하며, 러시아가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형인 렌코비치 크라스나야(Graf Lenkovich Krasnaya, 1639~1701)가 코사크 기병대를 이끌고 동방 원정을 수행하며 러시아의 극동 개척을 담당했다면, 로마리크 크라스나야는 제국의 중심부에서 행정·정치·해군 개혁을 통해 러시아의 발전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1715년, 로마리크 크라스나야가 병으로 사망하자, 표트르 대제는 그를 "러시아 개혁의 숨은 조력자"라 칭하며 애도하였다.
특히 크림 전쟁(Krymskaya Voina / Vostochnaya Voina, 1853~1856) 당시, 크라스나야 가문의 가주였던 오스트라 파벨리크 크라스나야(Velikiy Knyaz' Ostra Pavelik Krasnaya/Ostra Pavelik Rozniki, 1820~1883)(크림전쟁 시기에는 백작, 전쟁 이후 공작이 되었다가 베이징 조약으로 대공작의 작위를 수여 받음.)는 지휘관으로 참전하여 러시아의 불리한 전세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스트라는 당시 러시아군을 구원한 군사적 영웅이자, 외교적 협상가였다. 1854년~1855년, 영국-프랑스-오스만 제국 연합군이 세바스토폴을 포위하자, 그는 코사크 기병대와 극동 정예 부대를 조직하여 크림 반도에 파병하였다. 1855년 초, 세바스토폴 전투에서 연합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선을 차단하며, 포위된 러시아군과 협력하여 일부 포위망을 붕괴시킴으로써 세바스토폴 방어를 지원했다. 결국 러시아군이 패배하기 전, 철수를 성공적으로 유도하며 전쟁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공로를 인정한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크라스나야 가문에게 크라스나야 제도와 극동 영토를 하사하였으며, 이에 따라 크라스나야 공국(Dukedom of Krasnaya, 1856~1860)이 탄생하였다.
특히, 영지 수여 과정에서 크라스나야 공국(Dukedom of Krasnaya, 1856~1860)이라는 러시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준독립 상태의 공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는 실질적으로 현대 크라스나야 국가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후 크라스나야 가문은 독자적인 정치·군사적 기반을 확립해 나갔다. 이 시점까지 크라스나야 지역은 주교회의(Holy Synod)를 중심으로 한 신정 통치가 유지되고 있었으나, 크라스나야 공국의 성립과 함께 세속 권력이 점차 강화되었다. 오스트라 파벨리크 크라스나야는 러시아 제정의 지원을 받아 주교회의의 행정·군사적 권한을 회수하고, 이를 세속 귀족 및 크라스나야 가문이 임명한 관료들에게 이양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교회의는 종교적 권위를 유지하였으나, 국가 운영의 실질적 권한을 상실하면서 통치 구조가 근대적인 세속 군주제 형태로 전환되었다.
크라스나야 대공국(1860~)
벨라비온 선언 이전(1860~1917)
1860년, 크라스나야 가문이 베이징 조약(Convention of Peking)의 협상을 주도하면서 러시아의 숙원이었던 부동항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공로로 인해, 크라스나야 가문은 왕족이 아닌 귀족 가문으로서는 전례 없이 '대공(Velikiy Knyaz')'의 작위를 부여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크라스나야 대공국(Grand Dukedom of Krasnaya, 1860~)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독립 이전 크라스나야(Before Bellavion Speech, 1860~1917)는 준독립적인 지위를 인정받았으며, 러시아 제정으로부터 독자적인 군대를 보유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대공국 성립 초기, 크라스나야 대공(Grand Duke/Velikiy Knyaz' Krasnaya)은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에 상주하며, 크라스나야의 실질적인 관리는 사할린 변경백(Margrave of Sakhalin)과 가신들이 담당하는 체제로 운영되었다. 이는 크라스나야 공국이 독자적인 행정과 군사 조직을 갖추면서도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구조적 특징을 반영한 것이었다.
대공국 성립 초기, 극동에서의 영향력 확장 및 청나라에서의 이권 확보를 목표로, 오스트라 크라스나야의 아들 미하일 오스트라비치 크라스나야(Mikhail Ostravich Krasnaya, 1840~1901)가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주도하였다. 그는 청나라 내 철도 부설권 및 금융권 확보, 은행 개설, 그리고 만주 지역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크라스나야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였다. 또한, 연해주 및 크라스나야 제도의 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며, 이를 위한 광업·제련·조선·해운업 등의 산업을 육성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크라스나야의 극동 지역 경제 자립과 해상 무역 기반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와 함께, 미하일 크라스나야는 당시 혼란스러웠던 청나라와 조선에서 대거 유입된 이주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동화시키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를 기반으로 한 극동 정교회의 교세 확장과 함께, 이주민들에게 크라스나야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농업 정착 지원과 교육 기회를 제공하였다. 특히 조선인, 만주인, 한족, 몽골인 등 다양한 민족을 대상으로 정착촌을 건설하고 토지 개혁을 추진하여, 크라스나야 내에서 새로운 노동력과 경제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를 통해, 크라스나야 대공국은 다민족 사회를 안정적으로 통합하면서 극동 지역에서 독자적인 경제·군사적 기반을 갖춘 강력한 지역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향후 크라스나야가 독립적인 국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오스트라의 손자이자 미하일의 아들인 알렉산드르 크라스나야(Alexander Krasnaya/Alexander Rozniki, 1868~1932)가 태어나자, 당시 체사레비치(Tsesarevich)였던 알렉산드르 3세(Alexander III)는 크라스나야 가문에 정략결혼을 제안하였다. 이로 인하여서 후일 자신의 딸이자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인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Maria Alexandrovna, 1874~1949)와 알렉산드르 크라스나야의 정략결혼이 성립하게 된다. 알렉산드르 3세는 극동에서 크라스나야 가문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를 러시아 제국의 국익과 연계하기 위해 왕실과의 혼맥을 추진하였다. 크라스나야 대공국이 극동 무역과 외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에, 왕실과의 결혼을 통해 크라스나야 가문을 완전히 러시아 체제 내로 포섭하려는 전략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알렉산드르 3세는 차르가 된 이후에도 알렉산드르 크라스나야의 계승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특혜적으로 '체사레비치(Tsesarevich)'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는 명목상의 계승권을 부여한 것이었지만, 크라스나야 가문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는 조치였다. 당시 크라스나야 가문은 이미 러시아 내부에서 명문 대귀족 가문으로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으며, 러시아-튀르크 전쟁(1877~1878)에서 크라스나야 군대가 주요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우는 등 군사적으로도 차르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
또한, 크라스나야 대공국은 러시아 극동 지역의 경제적 중심지로 성장하며 무역과 산업 발전에 기여하였고, 이로 인해 차르의 신임을 더욱 굳힐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로 인해, 크라스나야 가문은 자연스럽게 로마노프 왕가 다음으로 강한 영향력을 가진 가문으로 인식되었으며, 이는 훗날 크라스나야의 정치적 독립을 위한 기반이 되었다. 또한, 크라스나야 출신 귀족들은 황실 내각 및 군부 요직을 차지하며 러시아 제국의 정책 수립 과정에도 깊숙이 개입하였고, 이러한 영향력의 확장은 결국 알렉산드르 3세가 크라스나야 가문에게 체사레비치 칭호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크라스나야 가문이 왕실과 러시아 귀족 사회 내부에서도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 1904~1905)에서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전쟁을 주도적으로 지휘했던 알렉산드르 대공(Velikiy Knyaz' Alexander Krasnaya)의 입지는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특히, 니콜라이 2세(Nicholas II)는 크라스나야 가문을 강력한 정치적 위협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크라스나야 대공을 견제하려 했던 일부 귀족 세력과 그리고리 라스푸틴(Grigori Yefimovich Rasputin, 1869~1916)이 크라스나야 대공이 역성혁명을 계획하고 있다는 루머를 퍼뜨렸다. 이 소문은 급속도로 퍼졌고, 결국 제정 러시아 정부는 오흐라나(Okhrana, 비밀경찰)와 경찰을 동원하여 크라스나야 대공을 조사하였다. 결과적으로, 1910년 크라스나야 대공은 중앙 정계에서 사실상 추방(Exile from Saint-Petersburg, 1910)당하며, 크라스나야 대공국으로 돌아갈 것을 강요받았다. 이로 인해 크라스나야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은 급격히 축소되었으나, 동시에 대공국 내에서 독립적인 기반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1st World War : 1914~1918)의 발발 이후, 알렉산드르 대공은 러시아군의 위기 속에서 즉각적으로 중앙 정계와 군부에 복귀했다. 전쟁 초기, 러시아군은 동부전선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압박에 고전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니콜라이 2세는 숙련된 군 지휘관이자 정치적 중량감을 가진 알렉산드르 대공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는 총사령부(STVKA)에서 러시아군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거나, 극동군 및 해군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러시아군의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지속적인 패전과 전쟁 피로도 누적으로 러시아 내부의 불만이 폭발했다.
1917년 2월 혁명(Fevral'skaya Revolyutsiya, 1917)으로 인해 니콜라이 2세는 군부와 귀족층의 지지를 잃고 퇴위해야 했다. 러시아가 혼란에 빠진 상황 속에서, 알렉산드르 대공은 중요한 선택의 순간을 맞이했다. 니콜라이 2세는 처음에 부인 알렉산드라 황후(Alexandra Feodorovna, 1872~1918)와 자녀들만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탈출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알렉산드라 황후는 황제와 함께 남겠다는 결정을 내렸고, 결국 니콜라이 2세는 자녀들만이라도 보호하기 위해 탈출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알렉산드르 대공은 자신의 정예 근위대 바랑기아 그바르지야(Varangiya Gvardiya)와 특수작전부대 로카제프(Rokazev)를 동원하여, 황제의 자녀들을 비밀리에 페트로그라드에서 탈출시키는 작전을 수행했다. 혼란 속에서도 황실의 일부 구성원들은 극비리에 안전한 장소로 이동할 수 있었고, 이후 그들의 행방에 대한 여러 추측이 남겨지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러시아 임시정부는 알렉산드르 대공을 ‘전 러시아의 차르’로 추대하려는 계획을 제안했지만, 그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알렉산드르 대공은 러시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자신의 즉위가 새로운 내전과 갈등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는 러시아의 운명을 책임지기보다, 크라스나야 대공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영지를 지키는 것이 더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보았다.
2월 혁명 이후, 알렉산드르 대공은 크라스나야 대공국으로 복귀하여 행정 체제를 재정비하고 군사력을 확충하며, 러시아의 혼란이 크라스나야로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여전히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혼란 속에 있었으며, 크라스나야 대공은 정세를 면밀히 주시하고 있었다. 결국, 1917년 10월 혁명(Oktyabr'skaya Revolyutsiya, 1917)이 발발하면서 임시정부는 붕괴하고,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로써, 제정 러시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크라스나야 대공국은 러시아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제 러시아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고, 크라스나야 대공국은 혁명과 내전 속에서 독립을 향한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제정 러시아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과정에서 알렉산드르 대공은 니콜라이 2세와 황후가 볼셰비키에 의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충격과 분노를 느꼈다. 비록 그와 니콜라이 2세는 정치적으로 갈등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 그는 마지막 황제의 친구이자 충직한 봉신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알렉산드르 대공은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없었다. 크라스나야 대공국은 지리적으로 러시아 본토와 떨어져 있었으며, 볼셰비키와의 전면전을 감당할 만한 병력과 경제적 여력이 부족했다. 또한, 러시아 내전이 장기화되면서 서구 열강조차 백군을 제한적으로 지원하는 상황이었고, 크라스나야가 개입한다고 해도 승리를 보장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알렉산드르 대공은 러시아의 혁명적 혼란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1917년, 그는 '주권 선언/독립 선언(Thus Spoke The Imperisky / Bellavion Speech, 1917)'을 발표하며 크라스나야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벨라비온 선언과 제1차 크라스나야 일본전쟁(1918~1922)
강력한 권력을 가진 대공(이하 ‘차르’) 알렉산드르는 크라스나야를 서구 열강 수준의 입헌주의 국가로 발전시키기를 원했다. 그는 보좌진과 참모들의 도움을 받아 ‘대헌법(Velikaya Konstitutsiya, 1918)’을 발의하였으며, 이는 현대 크라스나야 대헌법의 기초가 되었다. 대헌법은 입헌군주제와 민주주의적 원칙을 기반으로 한 체제를 구축하였으며, 국가 원수로서의 차르와 선출된 정부 수반(총리)의 역할을 분리하는 등 선진적인 정치 체계를 마련했다. 그러나 크라스나야의 독립은 쉽게 인정되지 않았다.
서구 열강은 크라스나야가 주권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크라스나야를 제정 러시아의 일부로 간주했으며, 이로 인해 일본 제국의 시베리아 출병(Japanese Intervention in Siberia, 1918~1922)이 이루어졌다. 일본은 시베리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노리며 크라스나야를 침공하였고, 크라스나야는 제1차 크라스나야-일본 전쟁(第一次赤日戰爭, 1st Krish-Japanese War, 1918~1922)을 치르며 일본의 군사적 압박을 견뎌야만 했다. 일본군은 사할린과 연해주, 크라스나야 제도 일대에서 공세를 퍼부었고, 크라스나야군은 필사적인 방어전을 벌이며 독립을 사수했다. 전쟁은 극심한 전투 끝에 크라스나야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으며, 일본의 주권 침탈 야욕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전후 조약에서 크라스나야는 남사할린을 반환받았으며, 이는 크라스나야가 국제적으로 독립 국가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전간기(1922~1939)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CCCP, Soyuz Sovetskikh Sotsialisticheskikh Respublik : 1922~1991)의 성립과 함께, 크라스나야의 독립은 새로운 위기에 직면했다. 러시아 내전(Grazhdanskaya Voyna v Rossii : 1917~1923)에서 볼셰비키가 승리하며 소련이 등장했고, 크라스나야를 소련의 영향권 아래 두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소련은 크라스나야를 전러시아(Vserossiyskiy)의 일부로 간주하며, 크라스나야를 소련의 괴뢰국으로 만들거나 완전히 흡수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1923년부터 소련군은 크라스나야 국경 인근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크라스나야 내부의 친소(親蘇) 세력을 활용한 정치 공작을 전개했다.
크라스나야 정부는 이러한 움직임을 사전에 감지하고 즉각적인 대응에 나섰다. 군사적으로는 크라스나야군은 전면전에 대비해 국경 방어선을 강화하고, 전시 동원 체계를 정비했다. 그러나, 소련과의 직접적인 충돌은 크라스나야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외교적으로는 크라스나야 정부는 전쟁 대신 외교적 타협을 통해 독립을 지키는 것이 현실적 선택임을 인식했다. 이에 따라, 1924년 크라스나야는 소련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전략적 양보를 포함한 ‘크라스나야-소비에트 동맹(Krish-Soviet Alliance : 1924~1991)’을 제안했다.
이 협정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블라디보스토크 및 일부 연해주 항구에 대한 사용권을 소련에 제공, 크라스나야 내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제한적인 정치적 자유 허용, 크라스나야의 외교·군사적 자율권 보장 및 독립 국가로서의 지위 인정. 소련은 크라스나야의 전략적 가치와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여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기적적으로 협정이 성립됨으로써 전면전의 위기는 일단락되었다.
전간기(Interwar Period : 1918~1939), 크라스나야는 제1차 크라스나야-일본 전쟁(第一次赤日戰爭, 1st Krish-Japanese War, 1918~1922)의 여파로 인한 국내 혼란을 신속히 정리하며, 국가 재건과 경제 성장 전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은 크라스크 대학(Krask University)의 경제학 교수이자, 현대 혼합자본주의의 대부라 불리는 이반 M. 케인스키(Ivan M. Keynesky, 1883~1946)였다.
1923년, 알렉산드르 차르의 강력한 요청으로 케인스키가 재무부 장관으로 취임하면서, 크라스나야의 경제 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국가경제재건 4개년 계획(Four-Year Plans for National Economy Reconstruction, 1923~1955)을 수립하여, 크라스나야 경제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방향을 추진하였다. 이 계획의 주요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1. 전후 복구와 경제 기반 구축: 전쟁으로 피폐해진 산업을 복구하고, 기초 인프라(철도, 항만, 도로, 전력망)를 확충. 2. 혼합 경제 모델 도입: 시장 경제와 국가 주도의 경제 계획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경제 성장과 사회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 3. 산업 및 군사 경제의 균형 발전: 민간 산업과 군수 산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이중 구조를 통해 일본과의 장기적 경쟁력 확보. 4. 내수 시장 강화 및 자급자족 체제 구축: 외부 경제 충격에 강한 구조를 만들기 위해 수출 의존도를 낮추고, 국내 생산 기반을 강화.
이와 함께, 군부가 주장하던 군사 개혁(Krasnaya Military Reform : 1927)도 시행되어, 크라스나야의 방위력을 근본적으로 강화하는 정책이 동반되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Mukden Incident, 1931)을 일으키며 본격적인 군국주의적 확장을 시작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크라스나야는 일본의 급작스러운 군사적 행동에 대비하기 위해 해상전대 재건계획(Korolevskaya Krasnaya Flot Rebuilding Plan : 1934)을 수립하여 실행에 나섰다.
그러나 이러한 격변의 시대 속에서, 크라스나야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1932년, 크라스나야의 초대 대공/차르이자 독립의 기틀을 마련한 알렉산드르 차르이 서거하였으며, 그의 장남 블라디미르 크라스나야(Vladimir Krasnaya/Vladimir Rozniki : 1910~1975)가 즉위하였다. 블라디미르 대공은 아버지와는 달리, 차르 중심의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국정을 직접 운영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블라디미르의 즉위와 함께, 왕당파와 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전시내각(Kabinet Voyennogo Vremeni : 1937~1945)이 성립되었으며, 국가의 총력전을 준비하는 체제로 개편되었다. 블라디미르 차르의 가정교사이자 귀족 출신 정치인이었던 야코프 스밀노프(Jákov Smirnov : 1882~1959)가 수상으로 임명되었으며, 그는 왕당파와 군부를 결집하여 전시 내각의 핵심적인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유리 발렌코프(Yuri Valrenkov, 1898~1977)의 강경한 군사 정책과 발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내각은 전시 체제 하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며 국가 총동원 체제를 확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크라스나야 해군전대(KKF, Korolevskaya Krasnaya Flot)는 해군력 증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일본 제국 해군(Imperial Japanese Navy, IJN)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대규모 건함 계획(Korolevskaya Krasnaya Flot Rebuilding Plan, 1934~1941)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전력 증강은 국가 경제력에 비해 과도한 부담이었으나, 크라스나야는 이를 감당하면서도 일본과의 해전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특히, 차르 니콜라이 2세의 비자금과 해외 자금 조달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국가 경제력 이상의 건함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크라스나야 해군은 1941년까지 총 115척 이상의 군함을 취역시키며 역사상 유례없는 해군력 증강을 완수했고, 이는 이후 일본과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전면적으로 침공하며 중일전쟁(2nd Sino-Japanese War, 1937~1945)이 발발했고, 이어 유럽에서는 독일이 폴란드 침공(Invasion of Poland : 1939)을 감행하면서 본격적인 제2차 세계대전(2nd World War, 1939~1945)이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크라스나야 전시내각은 국가 방위력을 더욱 강화하며, 다가오는 전쟁에 대비한 본격적인 전략을 수립하게 된다.
1941년, 독일이 바로바로사 작전(Unternehmen Barbarossa)을 개시하면서, 본격적인 독일-소련 전쟁(Velikaya Otechestvennaya Voyna, 1941~1945)이 시작되었다. 크라스나야는 소비에트 연방의 요청에 따라 즉각적으로 동원령을 선포하고 독일과의 전쟁 수행을 결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파시스트 성향의 세력은 독일과 협력하여 소련을 공격해야 한다는 내용의 작전계획 666(Operatsiya 666)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묵살되었다. 크라스나야는 소련과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1941년 7월 20일 공식적으로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동부전선에 병력을 파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크라스나야군이 동부전선에 개입하면서, 기존에 일본을 포위하는 데 집중되었던 크라스나야군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느슨해졌고, 일본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 공습(Attack on Pearl Harbor, 1941.12.07)을 감행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고, 일본은 이에 더해 남방 침공과 동시에 가라후토 탈환전이라는 명목 아래 12월 10일 코르사코프 공습(Attack on Korsakov, 1941.12.10)을 단행하며 크라스나야와의 전쟁을 본격적으로 개시(第二次赤日戰爭, 2nd Krish-Japanese War, 1941~1945)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라스나야는 독소전쟁 기간 동안 동부전선에 대규모 병력을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전투를 수행하였다. 이는 크라스나야와 일본의 전쟁 양상이 기형적으로 사할린 전선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주의 일본 관동군과 프리모르스키의 크라스나야군은 주로 방어 작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며, 전투 양상은 참호전과 포격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소련 역시 독일과의 전투로 인해 만주 지역에서 적극적인 작전을 수행할 여력이 부족했다. 이로 인해 만주에서의 전투는 전반적으로 산발적이고 국소적인 교전 형태를 띠었으며, 크라스나야와 일본의 주된 전투 지역은 사할린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형태를 유지하였다.
사할린에서의 일본군과 크라스나야군 간의 전투는 알렉산드롭스크-사할린스키 전투(Battle of Alexandrovsk-Sakhalinsky, 1942.11~1943.01)를 기점으로 중요한 분기점을 맞이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사실상 더 이상의 공세를 지속할 여력을 상실하였으며, 크라스나야군은 유클리나 제독(Admiral Flota Velikoye Knyazhestvo Krasnaya, Aleksey Petrovich Euclina, 1902~1978)의 제안하에 쿠로팟킨 작전(Operatsiya Kuropatkin)을 통해 일본이 점령 중인 남사할린 탈환을 위한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하였다.
쿠로팟킨 작전에서 크라스나야군은 기동전을 강행하며 일본군을 압박하였고, 일본군은 7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후퇴를 강요당했다. 이 과정에서, 크라스나야 해상항공대(Krasnaya Naval Aviation Corps)의 유리 보디비히 소령(Yuri Lauravich Bodewig : 1907~1983)이 제안한 제공권 탈환 작전이 진행되었으며, 남사할린 항공전(Battle of Yuzhnyy Sakhalin, 1943.01–1943.07)을 통해 일본군은 800기 이상의 항공기를 손실하였다. 이로써 크라스나야군은 남사할린 지역의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며 안정적인 지상 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쿠로팟킨 작전 이후, 일본군은 사할린에서의 단계적 철수를 결정하고, 크라스나야에 대한 해상 봉쇄 전략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사할린을 완전히 탈환한 크라스나야군은 곧이어 쿠릴 열도, 스더니츠키 제도, 그리고 아이누 모시르(홋카이도) 점령을 목표로 하는 로제스트벤스키 작전(Operatsiya Rozhestvensky)을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이 작전을 통해 크라스나야군은 쿠릴 열도, 스더니츠키 제도, 아이리스 제도 등에 성공적으로 상륙하여 점령하였으며, 홋카이도 상륙을 위한 공습을 강행하는 등 일본 본토 침공을 위한 전초전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홋카이도 본격 상륙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크라스나야군은 확보한 도서 지역을 전략 거점으로 활용하며 일본군과의 지속적인 충돌을 이어갔다. 유럽의 대독전선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Stalingradskaya bitva, 1942.08~1943.02) 이후, 소련군과 크라스나야군은 본격적으로 독일군에 대한 반격 작전을 전개하였다.
먼저, 쿠르스크 전투(Kurskaya bitva, 1943.07~1943.08)에서 독일군의 시타델 작전(Unternehmen Zitadelle)을 저지하고, 대규모 반격에 성공하면서 전선 주도권을 완전히 탈환하였다. 이어서, 스몰렌스크 공세(Smolenskaya operatsiya, 1943.08~10)를 통해 벨라루스 방면으로 진격하였으며, 드네프르 강 공세(Bitva za Dnepr, 1943.09~12)를 통해 키예프를 해방하고 서부 우크라이나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리보프-산도미에시 공세(L'vovsko-Sandomirskaya operatsiya, 1944.07~08)를 통해 폴란드 국경을 돌파하며, 동유럽 해방 작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최종적으로, 바그라티온 작전(Operatsiya Bagration, 1944.06~08)으로 독일군이 사실상 와해되었으며, 베를린 공방전(Berlinskaya nastupatel'naya operatsiya)으로 베를린이 함락되면서 1945년 5월 9일 독일이 항복을 선언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본격적으로 대일전선에 합류하면서, 크라스나야군 역시 만주 전략공세작전(Manchzhurskaya Strategicheskaya Nastupatelnaya Operatsiya)을 개시하였다. 일본은 본토에서 '일억총옥쇄(一億総玉砕)'를 외치며 결사항전을 결의하였으나 소련군과 크라스나야군의 압도적인 공세로 인해 만주 및 조선 북부의 일본군 방어선이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일본군의 최후 보루였던 관동군은 단 10일 만에 전투력을 상실하였으며, 소련군과 크라스나야군은 사할린을 거쳐 홋카이도 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미합중국의 두 차례 핵공격(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과, 소련군 및 크라스나야군의 만주 공세로 인해, 일본 지도부는 소련군과 크라스나야군이 일본 본토를 점령할 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했으며, 공산주의 세력의 점령을 막기 위해 미국과의 협상을 서둘렀다. 결국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어, 1945년 9월 2일, 일본은 전함 USS 미주리(USS Missouri) 함상에서 항복 문서에 공식 서명하였다. 그러나 이와 별도로, 일본 제국 정부는 소련과 크라스나야에 대한 항복을 개별적으로 확정하기 위해, 크라스나야 전함 'RKN Olga Romanova' 함상에서 추가적인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다. 이 서명식에는 소련군 대표단과 크라스나야군 대표단이 각각 참석하였으며, 크라스나야 측에서는 해군총사령관이었던 유클리나 제독과, 육군을 대표하는 전략사령부 관계자들이 서명식에 참여하였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으며, 일본은 소련과 크라스나야에 대한 개별적인 항복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 미군과 크라스나야군은 일본 본토에 상륙하여 일본군의 무장 해제 작업을 수행하였다. 미군은 일본의 주요 도시 및 남부 지역(도쿄, 오사카, 교토 등)의 무장 해제를 담당하였으며, 크라스나야군은 홋카이도를 비롯한 일본 북부 지역의 무장 해제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내 일부 강경파는 항복을 거부하고 게릴라전을 시도하였으며, 이에 따라 크라스나야군과 미군은 공동 작전을 수행하여 잔존 일본군을 완전히 소탕하는 도호쿠 평정작전(Tōhoku Pacification Operation)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으며, 일본은 소련과 크라스나야에 대한 개별적인 항복을 인정하고, 연합국의 군사적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다.
크라스나야의 역대 내각
주권 선언 이후, 크라스나야의 입헌군주제와 의회민주주의 제도는 황실평의회(Senate)와 최고평의회(Ecclesia)로 구성된 상원, 그리고 크라스나야 국가두마(Krasnaya Duma)로 구성된 하원이 입법부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체제로 정착되었다. 행정부는 민의에 의해 직선제로 선출된 수상(Prime Minister)을 중심으로 내각이 구성되며, 내각은 차르로부터 통치권을 위임받아 국정을 운영하는 형태로 자리 잡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부터 냉전의 종결까지의 크라스나야의 역사는 크게 네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전후과도내각(Poslevoyennoye Vremennyy Kabinet, 1945~1958) (전시내각(Kabinet Voyennogo Vremeni, 1937~1945)의 연장선)
2. 샤토프 내각(Shatov Kabinet, 1958~1970)(사회당/좌익연맹)
3. 아나스타샤 내각(Anastasia Kabinet, 1970~1979)(자유당/우익연합)
4. 아르샤빈 내각(Arshavin Kabinet, 1979~1994)(사회당)
아르샤빈 내각은 수상이었던 아르샤빈의 암살을 기점으로 종료되었다는 견해와, 이후 사실상 아르샤빈 내각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되는 아가샤 내각(Agatha Kabinet, 1994~2000)(자유민주당)까지를 하나의 연장선으로 보는 견해가 공존한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와 냉전의 종식 이후,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크라스나야는 무소속의 마오-나타샤 내각(Mao-Natasha Kabinet, 2000~2003)(무소속)과 그 연장선상인 국민당의 류-나타샤 내각(Liu-Natasha Kabinet, 2003~2009)(국민당), 그리고 자유당과 국민당의 연립 내각이었던 아가샤-리 내각(Agatha-Lee Kabinet / 2nd Agatha Kabinet, 2010~2012)(자유민주당+국민당 연정)을 거쳐 현재의 큐니르 내각(Quenir Kabinet, 2012~현재)(사회당)으로 이어지며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전후과도내각(1945~1958)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크라스나야는 자연스럽게 냉전(Cold War, 1945~1991)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철의 장막(Iron Curtain)으로 인해 서구 자본주의 사회와 동구 공산주의 사회가 서로의 체제 우월성을 증명하려는 경쟁에 돌입한 이 시기는, 크라스나야에게도 매우 역동적인 변혁기였다.
전쟁을 통해 급격히 팽창한 소련은 독소전쟁 승리를 발판으로 동유럽에 공산 정권을 수립하며 위성국들을 형성하였고, 크라스나야 역시 잠재적인 공산화 대상국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함께, 소련 지도부는 크라스나야를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공산 정권을 수립하려는 붉은 연꽃 작전(Operatsiya Krasnyy Lotos)을 계획하였다. 크라스나야의 정보당국은 소련의 침공 계획을 사전에 포착하고, 즉각 대응 전략을 수립했다. 일본에 주둔 중인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와 접촉하여 유사시 아이누 모시르(홋카이도) 지역을 조차받아 망명정부를 수립하는 계획(Operatsiya 1946-15/Northern Grand Duke Plan/Shogun Operation)을 마련하였다. 이 계획은 크라스나야가 본토에서 패퇴할 경우를 대비한 최후의 수단이었으며, 실제로 실행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 전후과도내각(Poslevoyennoye Vremennyy Kabinet)은 트루먼 행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 하에서 유럽부흥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Marshall Plan)의 일부 자금을 지원받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의 경제적·기술적 원조를 바탕으로 크라스나야는 빠르게 전후 복구와 경제 재건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크라스나야는 적극적인 반공 노선을 취하지 않았다.
대신 크라스나야는 현실적인 방어 전략을 수립하였다. 만약 소련이 침공할 경우 철저한 지연전(Delaying Battle)을 수행하여 소련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가능하다면 미국을 전쟁에 개입시켜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었다. 크라스나야 정부는 이 같은 군사·외교 전략을 통해 자국의 독립을 유지하려 했으며, 이는 이후 냉전 기간 동안 크라스나야의 핵심적인 안보 기조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전후과도내각(Poslevoyennoye Vremennyy Kabinet)은 냉전이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미국과 소련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크라스나야의 중립적 지위를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Korean War, 1950~1953)이 발발하자, 크라스나야는 공산권과 서방 진영의 요청을 모두 수용하는 실용주의적 대응을 펼쳤다. 크라스나야는 소련과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군사 장비와 전쟁 물자를 유상차관(有償借款) 형식으로 제공하였으며, 이는 이후 소련을 거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전달되었다. 또한, 개전 이후 소련군 소속의 의용군(Volunteer Corps) 형태로 일부 크라스나야 공군 조종사가 북한군을 지원하며 참전하였고, 의료 지원 인력이 파견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공식적인 참전은 아니었지만, 실질적으로 북한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반면, 미국과의 관계도 고려하여, 트루먼 행정부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크라스나야는 대한민국에도 제한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황실특임대(Rokazev) 소속 특수전 병력과 의료지원 인력이 한국에 파병되었으며, 이는 주로 후방에서 정보·특수작전을 수행하거나 전선에서의 의료 지원을 담당하는 방식이었다. 크라스나야의 이러한 행보는 공산권과 서방 어느 한쪽에도 과도하게 치우치지 않으려는 균형 외교 전략의 일환이었다.
1951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Treaty of San Francisco, 1951)에서 크라스나야는 쿠릴 열도(Kuril Islands), 스더니츠키 제도(Sternitsky Islands), 그리고 아이리스 제도(Iris Islands)의 실질적인 영유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이는 크라스나야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으로부터 확보한 영토를 공식적으로 자국령으로 편입하는 중요한 외교적 성과였다. 그러나 크라스나야는 아이누 모시르(홋카이도)에 대한 영유권도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나, 미국과 서방 진영의 반대로 이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미국은 전후 일본을 동북아에서 서방 진영의 핵심 동맹국으로 육성하려 했으며, 홋카이도가 크라스나야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은 미국의 전략적 이익과 배치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크라스나야의 홋카이도 영유권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최종적으로 홋카이도는 일본 영토로 남게 되었다.
비록 크라스나야는 홋카이도를 확보하지 못했지만, 이미 점령하고 있던 쿠릴 열도, 스더니츠키 제도, 그리고 아이리스 제도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이를 통해 크라스나야는 태평양 연안에서의 해상 방어선을 더욱 공고히 하였으며, 일본과의 전후 외교에서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49년, 미국을 중심으로 북대서양 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가 창설되었다. NATO는 공식적으로는 회원국 간 상호 방위를 목적으로 하는 군사 동맹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소련과 공산권의 확장을 견제하기 위한 서방 진영의 군사적 대응책이었다. 그러나 창설 초기에는 이러한 성격이 명확히 규정되지 않았으며, NATO가 본격적인 반공 군사동맹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55년 이후였다.
1955년, 서독이 재무장을 완료하고 NATO 가입을 승인받자,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은 이를 심각한 군사적 위협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소련은 동유럽 위성국들을 결집시켜 바르샤바 조약기구(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 Warsaw Treaty Organization, Warsaw Pact, Dogovor o druzhbe, sotrudnichestve i vzaimnoy pomoshchi, 1955~1991)를 창설하였다. 이로써 냉전 구도는 더욱 명확해졌으며, 동·서 진영 간의 군사적 대립은 한층 심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 지도부는 크라스나야를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시키기 위해 강력한 압박을 가했다. 특히, 당시 소련 최고 지도자였던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 1894~1971)는 크라스나야의 가입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며 군사·경제적 지원을 대가로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크라스나야의 전후과도내각(Poslevoyennoye Vremennyy Kabinet)은 크라스나야가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전략적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국가 생존에 필수적이라고 판단하였다. 크라스나야 정부는 중립국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 양국의 합의 아래에서 '영세중립국(Perpetual Neutrality)'으로 공식 인정받고 '아시아의 핀란드'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에 따라, 크라스나야 정부는 흐루쇼프의 바르샤바 조약기구 가입 요청을 공식적으로 거절하였으며, 대신 중립적인 외교 정책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노선을 견지하였다.
이 시기 크라스나야는 소련과의 외교에서 상당히 협력적이고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이러한 기조 아래, 양국은 다양한 분야에서 긴밀한 협력을 추진하였으며, 특히 과학 및 기술 분야에서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1957년, 소련의 과학자 세르게이 코롤료프(Sergey Korolov, 1906~1966)와 크라스나야의 과학자 그리고리 나우모프(Grigori Naumov, 1916~1986)가 협력하여 R-7 로켓을 이용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Sputnik 1)’를 성공적으로 우주로 발사하였다. 이는 본격적인 우주 개발 시대의 서막을 열었으며, 동시에 미국과 소련의 ‘우주 경쟁(Space Race, 1957~1975)’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크라스나야와 소련의 우주 협력은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며, 코롤료프 사후인 1974년, 양국은 N-1 로켓을 이용한 유인 달 착륙을 단 한 차례 성공(Soviet-Krish Lunar Landing 1974/Zarya-K Lunnaya Ekspeditsiya 1974)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소련과 크라스나야가 협력하여 미국에 맞선 중요한 우주 탐사 성과로 평가받는다.
샤토프 내각(1958~1970)
전후과도내각(Poslevoyennoye Vremennyy Kabinet)은 야코프 스밀노프 수상의 건강 악화와 국민들의 강력한 정치 개혁 요구에 따라 해체되었다. 블라디미르 차르는 이를 공식적으로 수용하며, 전후과도내각 해체와 함께 총선 및 수상 선거를 실시할 것을 발표하였다. 이 과정에서 우익 연합(자유당, 통합민주당, 민주당)과 좌익 연맹(사회당, 노동당, 공산당)이 치열하게 대립하였으며, 양측이 비슷한 의석 수를 확보하면서 팽팽한 경쟁 구도가 형성되었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곳곳에서 우익과 좌익 지지자들 간의 충돌이 발생하는 등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었으나, 정권 교체를 바라는 대중 여론이 급격히 좌익 쪽으로 기울면서 사회당의 후보인 세르게이 샤토프(Sergey Shatov, 1917~1997)가 수상으로 당선되었다. 샤토프는 전후과도내각 해체를 꾸준히 주장해왔으며, 카리스마 있는 지도력과 청렴한 이미지 덕분에 국민의 신뢰를 얻었다. 그의 당선으로 인해 크라스나야의 정치체제는 군부 중심의 전후 복구 체제에서 민간 정부 중심의 민주주의 체제로 본격적으로 전환되었다.
세르게이 샤토프(Sergey Shatov, 1917~1997)는 노동운동과 여성 인권 문제를 비롯한 사회 개혁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노동조합 활동과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사회민주주의적 정치 철학을 확립하였고, 크라스나야 정치계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대부로 불리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장교로 복무한 경험 또한 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요소가 되었다. 그는 전쟁을 통해 현실 정치의 냉혹함을 직접 경험하며, 강력한 국방력과 현실적인 외교 정책이 국가 존속에 필수적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 덕분에, 샤토프는 단순한 이상주의자가 아닌 현실주의적 사고를 겸비한 실용적 정치인으로 평가받았으며, 사회 개혁과 안보를 조화롭게 추진하는 균형 감각을 갖춘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또한, 샤토프는 타협과 연정을 중시하는 정치 스타일을 보여주었으며, 급진적인 변화보다는 점진적 개혁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혼합 경제 체제를 지지하며, 국가 주도의 산업 개발과 사회복지 확충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웠다. 외교적으로는 실용주의(Realpolitik) 접근을 강조하며, 국가의 생존과 안정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러한 정책 기조 덕분에 샤토프는 좌우를 아우르는 온건한 개혁가이자 실용주의적 지도자로서 크라스나야 현대 정치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샤토프 내각이 출범하자마자 가장 먼저 추진한 정책은 전후과도내각이 유지해왔던 중립 외교정책을 공식적으로 폐기하는 것이었다. 샤토프는 미·소 양국 사이에서 애매한 균형을 유지하는 전략이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했으며, 크라스나야가 명확한 입장을 정하지 않을 경우 소련의 불신과 반감을 초래하여 결국 무력 개입의 빌미를 제공할 위험이 높아진다고 보았다. 1956년 헝가리 혁명(Hungarian Revolution of 1956)의 강경 진압 과정은 이러한 판단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소련이 헝가리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너지 임레(Nagy Imre) 정권을 단호히 제거한 것은, 크라스나야에게 강력한 경고였다. 소련 수뇌부가 크라스나야의 중립 정책을 의심한다면, 이는 침공과 강제적인 정권 교체로 이어질 수 있으며, 심지어 차르 체제를 폐지하고 크라스나야를 소련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시도까지 나올 가능성이 존재했다. 이에 따라, 샤토프 내각은 소련과의 전략적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크라스나야의 국가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1960년 소련과의 동맹 조약 갱신 과정에서 크라스나야의 바르샤바 조약기구(Warsaw Pact) 가입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으로 인해, 크라스나야는 명실상부한 동구권 국가로 자리 잡으며, 소련과의 협력 관계를 최우선으로 하는 외교 노선을 확립하였다. 이는 단순한 군사 동맹 가입을 넘어, 소련과의 정치·경제·군사적 결속을 강화하는 체제로 전환하는 것이었으며, 크라스나야가 공식적으로 서방과의 외교적 거리 두기를 선택한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크라스나야가 1960년 바르샤바 조약기구(Warsaw Pact)에 공식 가입하자, 미국 정부는 이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미 국무부(State Department)는 크라스나야의 결정이 주권적 선택임을 존중하며, 미국과 크라스나야 간의 기존 경제·외교 관계를 유지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미국 정치권 내부에서는 즉각적인 반발이 일어났다. 특히, 일부 상·하원 의원들과 외교·국방 전문가들은 크라스나야가 과거 미국의 경제적 지원(마셜 플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소련과의 동맹을 선택한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미 의회에서는 "미국이 지원한 경제적 원조가 결과적으로 소련의 동맹 강화를 돕는 데 사용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마셜 플랜(Marshall Plan)의 지원 내역을 포함한 일부 외교 문서가 공개되었다.
공개된 문서에는 1946년~1953년 동안 크라스나야가 유럽부흥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의 일환으로 미국으로부터 직접적·간접적인 경제 지원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산업과 사회 기반 시설을 확충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일부 정치인들은 냉전 상황에서 미국의 경제 지원 정책이 전략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특히, 반공 성향이 강한 의원들과 외교 관료들은 크라스나야의 정책 변화를 "미국의 전략적 실패"로 규정하며, 향후 대소(對蘇) 전략을 보다 강경하게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극우 성향의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크라스나야가 미국의 지원을 받고도 공산권에 편입된 것은 배신 행위에 가깝다"며, 경제 제재 혹은 외교적 압박이 필요하다는 강경론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이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며, 크라스나야에 대한 직접적인 제재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국무부는 크라스나야가 완전한 공산화 국가가 아닌 입헌군주제를 유지하는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갖춘 점을 감안하였으며, 크라스나야를 소련과 동일시하기보다는 "완전히 적대적인 국가로 간주하지 않는 선에서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결과적으로, 크라스나야의 바르샤바 조약기구 가입은 미·소 간의 냉전 구도를 더욱 명확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미국 내에서는 냉전 정책과 경제 지원 전략에 대한 내부적 논쟁이 심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크라스나야는 냉전 시기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모두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 국가였다. 소련의 입장에서는 크라스나야가 극동 지역의 전략적 방파제이자 태평양 진출을 위한 핵심 교두보로 기능했으며, 동시에 자유진영과의 외교·경제적 접촉 창구 역할을 수행했다. 동구권과 서방을 연결하는 중립적 다리로서, 크라스나야의 존재는 소련이 서방과의 제한적 교류를 유지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자유진영의 입장에서도 크라스나야는 공산주의 국가가 아닌, 독립적이면서도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속한 특수한 존재였다. 혼합자본주의 시스템을 유지하면서도 소련 및 동구권과 긴밀히 협력하는 국가였기에, 크라스나야는 냉전 구도 속에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을 연결하는 중요한 외교적·경제적 완충지대로 기능했다. 특히, 크라스나야는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한 이후에도 소련으로부터 체제적·경제적 자율성을 보장받았으며, 이를 통해 동구권 내에서도 독자적인 노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크라스나야가 단순한 소련의 위성국이 아니라, 독립적인 외교·경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동구권 내에서도 특수한 지위를 차지하는 요인이 되었다.
1960년대 중소 결렬(Sino-Soviet Split) 이후,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PRC, 1949~)(이하 ‘중국’)의 마오쩌둥(毛泽东/MáoZédōng, 1893~1976)은 중국 내 크라스나야 왕실과 크라스나야계 기업이 소유한 자산의 반환을 요구하며 크라스나야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 정부는 인민해방군과 전투경찰을 동원해 베이징 주재 크라스나야 대사관을 포위하는 강경 조치(Beijing Embassy Blockade, 1961)를 단행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소련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고, 소련은 중국의 행동을 비난하며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결국 중국은 소련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한발 물러섰으며, 대사관 포위 사태는 단기간 내에 종결되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크라스나야와 중국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긴장 상태를 유지했으며, 양국 간의 갈등은 크라스나야-중국 전쟁(赤中戰爭)으로 이어지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1962년 카리브해 위기(Karibskiy krizis, 1962)의 여파와 동구권의 경제 침체가 겹치면서 크라스나야는 일시적인 경기 침체를 경험했다. 그러나 샤토프 내각은 신속하고 효과적인 정책을 통해 이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며 큰 경제적 타격 없이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선방에도 불구하고, 좌익연맹의 정치적 입지는 약화되었다. 좌익연맹을 구성하는 정당들 중에서 사회당은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유지하며 일정 수준의 대중적 지지를 받았지만, 노동당과 공산당은 국민적 신뢰를 얻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노동당은 유럽공산주의(Eurocommunism) 노선을 따르기는 했으나, 여전히 급진적 사회주의 정당으로 인식되었다. 공산당은 사실상 소련 공산당(Kommunisticheskaya Partiya Sovetskogo Soyuza, CPSU)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소련식 사회주의 정당이었기 때문에 국민적 지지가 낮았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들로 인해 좌익연맹의 인기가 점차 하락하였으며, 결국 의회의 다수 의석을 우익연합이 장악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65년, 차르 블라디미르(Vladimir Krasnaya)는 소련의 지속적인 정치적 압박, 국정 운영의 부담, 그리고 건강 악화로 인해 공식적으로 일선에서 물러날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그는 즉각적인 퇴위를 선택하지 않고, 장남 클레오비치 크라스나야(Cleovichi Krasnaya/Cleovichi Rozniki, 1949~)가 충분히 성장할 때까지 ‘상왕(上王, Senior Tsar)’의 역할을 수행하며 후계자의 통치를 보조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는 크라스나야 왕가의 연속성을 유지하고, 동시에 젊은 차르가 안정적으로 통치를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후 클레오비치는 공식적인 대관식을 거쳐 제3대 크라스나야 차르로 즉위하였으며, 그의 즉위는 크라스나야 정치체제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을 의미했다. 클레오비치는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왕실을 모델로 삼아, 군주가 직접 국정을 운영하기보다는 내각 중심의 정치체제를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방향을 지향했다. 이는 크라스나야 왕권의 성격을 절대적 통치에서 입헌군주제적 모델로 전환하려는 시도였다. 특히, 즉위 당시 16세의 나이였던 클레오비치는 실질적인 국정 운영을 경험할 시간이 필요했으며, 이에 따라 블라디미르 상왕과 보좌진들의 지도 아래 점진적으로 군주의 역할을 수행해 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상왕-차르 공동 통치 체제'는 크라스나야 정치사에서 전례 없는 사례였으며, 이후 크라스나야의 입헌군주제적 발전과 민주적 정체성 확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블라디미르 상왕의 보좌 아래 클레오비치는 차츰 군주의 역할을 익혀갔으며, 그의 통치 스타일은 보다 실용적이고 균형적인 군주제로 평가받게 되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Československá socialistická republika, 1960~1990)에서 알렉산데르 둡체크(Alexander Dubček, 1921~1992)가 집권하면서, 그는 개혁 정책의 일환으로 크라스나야에 경제 자문단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샤토프 내각은 이를 수락하고, 크라스나야의 경제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단을 체코슬로바키아에 파견하였다. 크라스나야 경제 자문단의 지도 아래, 체코슬로바키아는 경제 부문에서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하는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Socialismus s lidskou tváří)’라는 개혁 노선을 공식 발표하였다. 소련은 이러한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 움직임을 좌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1956년 헝가리 혁명을 진압할 당시와 달리, 이번에는 무력 개입이 동유럽 사회주의권 내에서 심각한 반발을 초래할 가능성을 우려하였다. 이에 따라 소련 지도부는 체코슬로바키아를 무력으로 제압하되,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는 전략을 채택하였다. 결국,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군을 동원하여 다뉴브 작전(Operatsiya Dunay)을 감행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샤토프 내각은 이에 대해 어떠한 공식적인 입장도 내놓지 않았다.
이에 대해 크라스나야 내부에서도 논란이 일었다. 일부 보수 우파 세력은 소련이 크라스나야의 경제 자문단을 받아들였던 체코슬로바키아를 일방적으로 침공한 것을 강하게 비판하며, 크라스나야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탈퇴하고 소련과의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샤토프 내각은 실리적인 외교적 판단을 유지하며, 소련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공개적인 비판을 삼갔다. 흥미로운 점은, 소련이 크라스나야가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을 지원한 것에 대해 직접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국들 내부의 자율적인 개혁 시도조차 강경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유지했으나, 크라스나야에 대해서만큼은 예외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는 크라스나야가 단순한 바르샤바 조약국이 아니라, 극동에서 소련의 전략적 완충지이자 자유진영과의 중요한 접촉 창구로 기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소련은 크라스나야를 단순한 위성국이 아닌 일종의 ‘형제국가(Bratskaya Strana)’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는 크라스나야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과 함께 피를 흘린 혈맹이었기 때문이다. 크라스나야는 공산주의 체제를 채택하지 않은 채 독자적인 정치·경제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동유럽 위성국들과는 차별화된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 바르샤바 조약기구 가입 이후에도 크라스나야는 소련으로부터 체제적·경제적 자율성을 보장받았으며, 동유럽의 다른 공산권 국가들처럼 소련의 일방적인 지시에 종속되지 않았다.
특히, 소련 지도부는 크라스나야를 극동에서 미국과 일본을 견제하는 전략적 방파제로 인식했으며, 이 때문에 크라스나야의 자율성을 일정 부분 인정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크라스나야는 혼합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동구권과의 경제적 협력을 지속했기 때문에, 서방과 공산권을 연결하는 중요한 경제적·외교적 완충지대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크라스나야가 체코슬로바키아 개혁을 지원한 것은 소련의 입장에서 불편한 일이었지만, 크라스나야를 직접적으로 압박하거나 제재하는 것은 소련의 전략적 이익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크라스나야가 단순한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위성국이 아니라 소련과 상호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독립적 국가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소련은 크라스나야의 개혁 지원에 대해 직접적인 개입을 시도하지 않았다.
1969년, 아무르 강의 지류인 우수리 강 유역에서 발생한 홍수로 인해 다만스키 섬(Damansky Island) 일대의 국경선이 불명확해지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크라스나야와 중국 간의 국경 분쟁이 급격히 격화되었고, 결국 무력 충돌로 이어지며 크라스나야-중국 전쟁(赤中戰爭, Krish-Chinese War / Warsaw Pact Invasion on PRC, 1969.09.15~1970.09.10)이 발발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국)은 중소 결렬 이전부터 크라스나야에 대해 고압적인 외교적 태도를 유지해 왔으며, 결렬 이후에는 관계가 사실상 적대적 수준으로 악화되었다. 크라스나야 입장에서도 중국과의 관계는 지속적인 외교적 난제였으며, 국경 충돌이 격화됨에 따라 양국은 준전시 상태에 돌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샤토프 내각은 중국과의 전면전을 결심하였으며, 당시 젊은 차르 클레오비치 크라스나야(Cleovichi Krasnaya)가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크라스나야는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크라스나야는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기구(Warsaw Pact)의 개입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따라 크라스나야군 120만, 소련군 50만, 바르샤바 조약군 25만으로 구성된 다국적군이 조직되었다.
전쟁은 단 30일 만에 300만에 달하는 중국 인민해방군을 완전히 분쇄하며 크라스나야 및 동맹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핵무기 사용을 검토하였으나, 당시 중국은 모스크바를 타격할 수 있는 중·장거리 탄도미사일을 보유하지 못했으며, 소련의 강력한 핵보복 가능성을 우려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소련 역시 확전을 원하지 않았으며, 크라스나야를 포함한 바르샤바 조약국들도 전쟁이 더 장기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결국 중국이 전후 협상에 응하면서 전쟁은 조기 종결되었다.
전쟁 이후, 크라스나야, 소련, 중국은 전후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이 협정은 크라스나야의 외교사에서 가장 강력한 조약 중 하나로 평가된다. '달니아 조약(Dàlián Treaty, 1970)'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국경조정
중국은 향후 모든 국경 조약에서 아무르 강을 포함한 양국 국경 지대를 크라스나야가 관리하는 것을 공식 인정한다.
2. 경제적 우선권 부여
크라스나야는 중국 내에서 99년 동안 경제적 우선권을 가지며, 경제 관련 사항에 대해 크라스나야 법을 적용할 권리를 부여 받는다.
3. 다롄(달니아) 할양
중국은 다롄(달니아)을 99년간 크라스나야에 할양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이에 따라 크라스나야령 달니아(Krasnaya Territory Dàlián, 1969~)가 성립되었다.
4. 칭다오 조차
중국은 칭다오(青岛, Qingdao)를 소련에 99년간 조차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소련은 해당 지역에 해군 기지를 구축할 권리를 부여 받았다.
중국은 소련 및 바르샤바 조약군의 철수를 원했으며, 더 이상의 군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 조건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달니아 조약은 사실상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이 맺은 불평등 조약과 유사한 성격을 띠었으며, 이는 중국에게 외교적으로 심각한 굴욕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말 중국의 경제·군사적 상황을 고려할 때, 전쟁 배상금이 포함되지 않은 점은 크라스나야와 소련이 내린 현실적인 조치로 평가된다. 이 조약의 결과, 크라스나야는 극동 지역에서 더욱 강력한 경제적·군사적 입지를 확보하였으며, 중국과의 관계는 이후 장기간 냉각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샤토프 내각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1970년, 리겔코프 게이트(Ligelkov Gate) 사건이 발생하면서 내각은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당시 수상의 정무수석이었던 유리 리겔코프(Yuri Ligelkov, 1931~1999)가 소련의 스파이였음이 밝혀졌고, 이에 따라 우익연합은 내각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같은 시기, 교토에서 유학 중이던 클레오비치 차르가 급거 귀국하여 내각 불신임을 공식 발표하였으며, 이에 따라 세르게이 샤토프 수상은 사임을 표명하였다. 이 사건은 크라스나야 정치 역사상 최초로 '수상 직선제'로 당선된 수상이 차르에 의해 불신임된 초유의 사태로 기록되었다. 결국 자유당의 아나스타샤 파트리체프(Anastasia Patrichev, 1935~)가 새롭게 수상으로 당선되었으며, 아나스타샤 내각이 구성되면서 우익연합은 샤토프 내각 출범 이후 12년 만에 정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아나스타샤 내각(1970~1979)
아나스타샤 내각은 출범 이후 연이은 행운과 경제적 호황을 맞이했다. 1973년과 1978년, 두 차례의 오일쇼크(Oil Crisis, 1973/1978)가 발생하면서 크라스나야는 사상 유례없는 경제 성장기를 경험하게 되었으며, 이 시기 크라스나야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서구 선진국과 동등한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 아나스타샤 내각은 경제 성장을 더욱 가속화하기 위해 전후과도내각 시기부터 시작된 갈키노 계획(Galkino Proyekt, 1956~1984)을 계승하였으며, 이를 통해 크라스나야의 산업 및 에너지 정책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1956년, 소련의 헝가리 혁명 진압 이후 전후과도내각은 ‘평화적 목적의 원자력 사용’이라는 명목 하에 대규모 원자력 발전소 단지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이 계획의 핵심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1. 고농축 우라늄을 활용하는 원자로 개발
2. 우라늄 농축시설 및 핵연료 재처리시설 확보
3. 연해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원자력 산업단지 조성
이후,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이 국제 정세에 대한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크라스나야의 핵에너지 개발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에 따라 원자력 기술 개발과 함께 핵무기 보유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으며, 크라스나야는 독자적인 핵개발 역량 확보를 목표로 하였다. 1972년, 아나스타샤 내각은 독자적인 핵개발 노선에서 벗어나 이스라엘 및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협력하여 ‘3개국 공동 핵개발 컨소시엄’을 구성하였다. 이후 중화민국(대만)과 대한민국이 추가로 합류하면서, 컨소시엄은 5개국 체제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협력은 서방과 소련 어느 쪽에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은 비공식적인 핵기술 협력으로 진행되었으며, 참가국들은 핵기술 개발 및 원자력 에너지 활용에 대한 정보를 교류하면서 핵 확산을 막기 위한 국제적 감시를 우회하는 전략을 채택하였다.
이 시기 크라스나야는 공식적으로 핵무기 보유 여부에 대해 ‘확인도, 부정도 하지 않는(NCND, Neither Confirm Nor Deny)’ 전략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979년 벨라 사건(Vela Incident)이 발생하면서, 이스라엘·남아프리카 공화국·크라스나야가 공동으로 핵실험을 진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크라스나야 정부는 이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았으나, 일부 국제 정보 기관과 학계에서는 크라스나야가 이 시기 실질적으로 핵 보유국 지위를 획득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크라스나야는 1992년 극동함대 및 주(駐) 크라스나야 소비에트 연방 전략 로켓군의 망명 이전까지, 핵무기 개발 및 보유 여부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한 이후, 크라스나야는 냉전 시기 핵개발 프로그램의 존재를 일부 인정하였으며, 이전까지 유지했던 NCND 정책을 점진적으로 해제하는 방향으로 핵정책을 전환하였다. 그러나 크라스나야 정부는 핵무기 보유 여부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은 여전히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으며, 크라스나야의 핵개발과 관련된 구체적인 정보는 오늘날까지도 비밀에 부쳐져 있다.
1971년, 미국과 중국 간의 관계 개선을 위한 신호탄이었던 핑퐁 외교(Ping-Pong Diplomacy)가 시작되면서,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다. 크라스나야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에 대한 특별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지만,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상승함에 따라 미묘한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1969년 크라스나야-중국 전쟁(赤中戰爭, Krish-Chinese War)에서 승리하고 달니아 조약(Dàlián Treaty)을 통해 다롄을 할양받은 이후, 크라스나야와 중국 간의 관계는 여전히 냉각된 상태였다.
흥미로운 점은, 핑퐁 외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미국과 중국 실무진 간의 사전 협상 회담이 크라스나야령 달니아(Krasnaya Territory Dàlián, 1969~)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당시, 크라스나야는 중국과의 직접적인 외교 교섭을 최소화하려 했지만, 달니아 지역이 미·중 양국 간 비공식 회담의 중립지로 선택되면서 자연스럽게 실무 회담이 진행되는 것을 용인해야 했다. 크라스나야 외교부는 공식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지만, 크라스나야령 달니아가 미·중 관계 개선의 초기 단계에서 중요한 조정 역할을 수행한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는 점은 크라스나야 정부에게도 의미 있는 외교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핑퐁 외교 이후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입지를 다지면서, 크라스나야는 이러한 변화가 향후 중국과의 관계에서 또 다른 갈등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특히, 중국이 유엔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1971년 유엔 총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중화민국(대만)을 대체하는 결의안(UNGA Resolution 2758)이 통과되면서 크라스나야 내에서도 중국의 국제적 부상을 예의주시해야 한다는 의견이 점차 강해졌다.
결과적으로, 크라스나야는 핑퐁 외교에 대해 공식적인 찬성이나 반대 입장을 내지 않았지만, 중국이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국제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과정을 불편하게 바라보았으며, 향후 크라스나야의 외교·안보 전략에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욤키푸르 전쟁, Yom Kippur War)이 발발하면서, OPEC은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리비아 아랍 공화국, 이라크, 이란 제국, 시리아, 튀니지 등과 함께 석유 감산 조치를 단행하고 원유 가격을 대폭 인상하였다. 이에 베네수엘라, 인도네시아, 나이지리아, 소련 역시 OPEC의 감산 정책에 동참하며 글로벌 유가 상승을 더욱 부추겼다. 크라스나야 역시 이러한 고유가 시대에 편승하여 막대한 원유 수익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사회 인프라 확충과 미래 전략·산업 개발을 위한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하였다. 특히, 황실이 추구해온 보편적 사회보장제도가 본격적으로 정착되었으며, 기존의 교육 및 복지 정책 또한 자연스럽게 확대·개선되면서 크라스나야는 명실상부한 복지국가로 자리매김하였다.
1975년, 크라스나야 정부와 소련은 동아시아 지역의 에너지 수출망을 확충하기 위한 공동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이는 소련과 크라스나야의 천연가스를 중국 만주와 일본으로 공급하기 위한 대규모 파이프라인 건설 계획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소련 국영 가스공사(Gazprom의 전신)와 크라스나야의 국영가스공사(Krasnaya State Gas Corporation, KSGC), 그리고 크라스나야의 민간 에너지 기업 브라노벨(Branobel), 슬로반(Slovan) 등의 대기업들이 참여하는 컨소시엄 형태로 진행되었다. 크라스나야는 오호츠크해 및 연해주 지역의 해상 가스전 개발을 본격화하고 있었으며, 소련 역시 사할린 및 시베리아 동부 지역의 가스 자원을 동아시아 시장으로 공급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양국은 천연가스를 동아시아로 공급하기 위한 전략적 파트너십을 구축하였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크라스나야와 소련이 공동으로 개발한 천연가스를 만주 및 일본으로 수출하는 파이프라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크라스나야와 소련은 만주 및 일본 시장에 대한 가스 공급망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중국과 일본은 안정적인 천연가스 공급처를 확보하게 되었다. 특히, 이 시기 일본은 오일쇼크로 인해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원이 절실했으며, 중국 역시 경제 성장과 산업화를 위해 에너지원 확보가 필요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크라스나야는 동아시아 에너지 시장의 핵심 플레이어로 부상할 수 있었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毛泽东)의 사망은 중국 정치의 중대한 전환점을 의미했다. 마오의 죽음 이후, 중국 내부에서는 그의 후계 구도를 둘러싼 권력 투쟁이 벌어졌으며, 사인방(四人帮)과 개혁파 사이의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크라스나야는 중국 내 정세를 면밀히 주시하면서도 직접적인 개입은 피하는 신중한 외교 노선을 유지하였다. 마오쩌둥의 장례식은 중국의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국제사회에서도 큰 관심을 끌었다. 크라스나야 정부는 공식적인 조문단을 파견하였으며, 외무장관 세르게이 볼코프(Sergey Volkov, 1932~2013)와 경제부 관료들이 포함된 대표단이 베이징을 방문하였다.
장례식 후 진행된 비공식 접견에서, 당시 정치적으로 부활을 준비하던 덩샤오핑(鄧小平/Deng Xiaoping, 1904~1997)은 크라스나야 조문단과 비공식 대화를 나누었다. 덩샤오핑은 마오 사후 중국이 겪고 있는 경제난과 국제적 고립에 대해 언급하며, 크라스나야와의 경제 협력을 재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크라스나야-중국 전쟁(1969~1970) 이후 냉각된 외교 관계를 해빙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시사하면서, 향후 경제 협력의 가능성을 논의했다. 덩샤오핑은 당시 공식적으로는 실권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으나, 이미 개혁개방을 염두에 둔 실용주의적 경제 노선을 계획하고 있었다.
1977년, 덩샤오핑은 당 중앙위원회 주석단 상무위원으로 복귀하면서 중국 정치의 중심으로 다시 올라섰다. 이후 그는 개혁개방(改革开放) 정책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으며, 국제사회와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했다. 1977년 덩샤오핑은 크라스나야 측에 비공식 채널을 통해 경제 협력 의사를 전달했다. 크라스나야는 이에 대해 소극적이지만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크라스나야 내부에서는 여전히 중국에 대한 불신이 남아 있었으나, 덩샤오핑의 실용주의적 정책 방향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접근하였다. 양국은 경제 및 무역 협력을 위한 실무 그룹을 구성하기로 합의하였으며, 1978년부터 공식적인 논의가 진행되었다. 특히, 크라스나야가 추진 중이던 동아시아 천연가스 파이프라인과 관련하여 중국에 대한 에너지 수출 가능성이 검토되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은 크라스나야의 민간기업과 경제 교류를 확대하는 방안을 모색하며, 향후 중국의 개방정책에 크라스나야 기업이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하였다. 크라스나야 정부는 덩샤오핑이 실권을 완전히 장악할 경우, 중국과의 경제 협력이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중국이 다시 크라스나야의 경제적 영향력을 견제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소련과 협의하여 신중하게 접근하였다. 1978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공식 선언하자, 크라스나야는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1978년, 제2차 오일쇼크(Oil Crisis)로 인해 세계 경제가 또 한 번 충격을 맞이하였으며, 크라스나야 역시 고유가로 인한 인플레이션 압박에 직면했다. 그러나, 정부와 황실은 축적된 자본을 활용하여 산업 구조를 다변화하고, 미래 전략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대규모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반도체 산업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 산업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가 차원의 연구개발(R&D) 투자 및 기업 지원 정책을 본격화하였다. 정부의 주도로 반도체 제조시설 및 연구단지가 연해주 및 주요 경제특구에 건설되었으며, 해외 기술 협력과 인재 양성을 위한 정책이 시행되면서 크라스나야의 반도체 산업은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80년대부터 크라스나야는 반도체 생산 및 설계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첨단기술 강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970년대 크라스나야 경제의 호황은 국가 역사상 유례없는 성장기를 가져왔다. 경제 규모만 놓고 본다면,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Deng Xiaoping’s Reform and Opening-up), 일본의 버블 경제(Bubble Economy), 그리고 탈냉전 이후의 고속 성장기가 더 큰 규모의 성장을 기록했다. 그러나 1970년대의 의미는 단순한 경제 성장에 그치지 않았다. 이 시기는 보편적 복지의 실현과 개인 삶의 질 향상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한 시대였다. 고도 성장 속에서 크라스나야의 사회보장제도와 복지정책이 정착되었으며, 국민들의 생활 수준이 현저히 향상되었다. 그러나 급격한 경제 성장의 이면에는 필연적으로 부패와 비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슬로반 게이트(Slovan Gate, 1979)였다. 슬로반 게이트는 크라스나야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정치자금 스캔들로 기록되었으며, 세계적으로도 이처럼 대규모의 부패 사건이 직접적으로 밝혀진 사례는 드물었다. 사건의 중심에는 슬로반 그룹(Slovan Group)이 있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단순한 석유화학 중심의 에너지 기업이었던 슬로반 그룹은, 사업 확장 과정에서 대규모 로비를 통해 원유 채굴권을 독점적으로 획득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다. 이후, 문어발식 M&A(기업 인수·합병) 전략을 통해 사업 영역을 빠르게 확장하며 크라스나야를 대표하는 대기업 중 하나로 성장했다. 특히, 이러한 성장 과정에서 우익연합(자유당·통합민주당·민주당 등) 중심의 정치권이 강력한 보호막 역할을 수행하며, 정경 유착이 심화되었다. 결국 거대한 부패 스캔들로 폭발하고 말았다.
이 정치자금 스캔들의 전말을 세상에 알린 인물은 세르게이 막시모프(Sergey Maximov, 1941~)였다. 슬로반 에너지(Slovan Energy)의 CEO이자 핵심 로비스트였던 그는, 슬로반의 사업 확장 과정에서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정치자금이 로비 및 뇌물로 사용된 사실을 폭로하며 관련된 정치인들의 명단과 거래 내역을 공개하였다.
1979년, 크라스나야 역사상 최대의 정치 스캔들인 슬로반 게이트(Slovan Gate)가 터지면서 자유당 정권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스캔들의 이면에는 단순한 부패 폭로를 넘어선 사랑과 배신, 복수의 드라마가 숨겨져 있었다.
그 중심에는 세르게이 막시모프(Sergey Maximov) 슬로반 에너지(Slovan Energy)의 CEO이자 핵심 로비스트, 그리고 그의 연인 타카야마 안나(Takayama Anna, 1950~)가 있었다. 안나는 슬로반 그룹의 회장이자 크라스나야 정·재계를 좌우하는 타카야마 로만(Takayama Roman, 1918~2003)의 외동딸이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곧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타카야마 로만은 딸이 평범한 집안 출신의 세르게이 막시모프와 연인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극도로 보수적인 귀족적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자신의 딸이 하층민 출신과 관계를 맺는 것을 모욕으로 여겼다. "감히 천한 태생이 내 딸과 연애를 하다니!" 로만은 분노했고, 막시모프를 슬로반 에너지에서 즉각 해고했다. 동시에 그는 크라스나야 정·재계를 장악한 슬로반 그룹의 영향력을 이용해 막시모프가 다른 기업에서도 일하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막시모프는 하루아침에 사회적으로 매장될 위기에 처했다.
그의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안나는 결국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서, 충격적인 결심을 내리게 된다. 타카야마 안나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서재에 드나들며 그의 비밀스러운 서류들을 보아왔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정부 관료들과 은밀한 거래를 하고, 정치인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로비하며 기업을 키워왔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증거를 손에 넣은 적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녀는 아버지가 해외 출장을 떠난 기회를 이용해 그의 서재로 몰래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로비 장부와 차명 계좌 거래 내역이 담긴 문서들을 발견했다.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정치자금이 정부 관료, 에클레시아 의원, 주요 인사들에게 뿌려졌다는 사실이 상세히 기록된 증거였다. 안나는 그 문서들을 몰래 빼내어 막시모프에게 전달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버지를 배신하는 선택을 했다.
막시모프는 이 자료들을 언론과 검찰에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자회견장에서 크라스나야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정치 스캔들이 공개되었다. 막시모프가 공개한 장부에는 자유당 소속 정치인들과 에클레시아(Ecclesia) 의원들, 정부 고위 관료들, 재계 및 국영기업 관계자들이 언제, 얼마의 금액을 로비로 받았는지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차명 계좌를 통한 돈세탁 내역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 문서들이 철저하게 정리된 진본임이 확인되면서 조작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가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슬로반 그룹은 1970년부터 1979년까지 현재 가치로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정치자금을 로비에 사용했으며, 그 대가로 동(東)시베리아 및 사할린 연안 해양 유전, 오호츠크 연안 해양 유전의 채굴권을 확보하여 막대한 이익을 챙긴 사실이 밝혀졌다. 즉, 오일쇼크로 벌어들인 천문학적인 자금을 바탕으로 무분별한 사업 확장을 단행했으며, 공격적인 M&A 전략을 통해 크라스나야의 대표적 대기업인 차르 인더스트리(Tsar Industries)에 버금가는 거대 복합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었다.
이 스캔들은 단순한 경제 비리가 아니었다. 한 여성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버지를 배신한 이야기, 그리고 한 남성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진실을 폭로한 이야기였다. 그 결과, 크라스나야 정치권은 격변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자유당 정권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슬로반 그룹은 폭로 이후 거대한 이미지 타격을 입었으며, 국민들의 반감 속에서 불매운동이 확산되었다. 국민들은 부패와 정경유착의 상징이 된 슬로반을 강하게 비판하며, 기업 해체를 요구하는 목소리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슬로반 그룹의 회장 타카야마 로만(Takayama Roman)은 대국민 사과를 단행하며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그는 "비리를 통해 벌어들인 돈을 사회에 환원하고,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반성하며 더 많은 사회적 공헌을 실천하겠다."라고 발표했다.
이는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이어졌다. 슬로반 그룹은 사회 환원 프로젝트를 통해 수십억 달러 규모의 장학금·기부금·공공사업 투자를 진행하였으며, 투명 경영을 위한 내부 개혁을 단행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변화와 책임지는 태도 속에서, 국민들의 분노는 점차 가라앉았으며, 슬로반에 대한 반감 역시 서서히 약화되었다. 결국 슬로반 그룹은 강도 높은 쇄신과 이미지 개선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이후 크라스나야 경제의 중심 기업으로 다시 자리 잡게 되었다.
거대한 정치자금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아나스타샤 내각은 1982년 선거까지 지지율을 회복하여 정권을 연장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차르 클레오비치의 선거 실시 권고로 인해 사실상 무산되었다. 1979년 총선에서 모두의 예상을 깨고 사회당이 대약진을 이루었으며, 이에 따라 니키타 아르샤빈(Nikita Arshavin, 1945~1994)이 새롭게 수상으로 선출되면서 아르샤빈 내각이 출범하였다. 결국, 1970년대 크라스나야의 경제 호황과 고도 성장을 주도했던 아나스타샤 내각은, 슬로반 게이트라는 거대한 부패 스캔들과 함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아르샤빈 내각(1979~1994)
리겔코프 게이트 이후, 사회당은 군소 정당으로 전락하였고, 공산당 및 노동당과의 연정을 통해 간신히 존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 수상 세르게이 샤토프의 제자로 알려진 젊은 정치인 니키타 아르샤빈이 사회당 총수에 오르면서 당내 개혁을 주도했다. 그는 공산당 및 노동당과의 연정을 공식적으로 파기하고, 독자 노선을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사회당의 지지율은 급상승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시 회복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슬로반 게이트가 터지면서 자유당과 아나스타샤 내각이 거대한 부패 스캔들에 휩싸였고, 이에 대한 국민적 반발이 커지면서 조기 총선이 실시되었다. 총선 결과, 사회당은 전체 의석의 47%를 확보하며 원내 1당으로 부상하였으며, 이어진 수상 선거에서 아르샤빈이 56%의 지지를 얻어 수상으로 당선되었다. 이로써 1970년 리겔코프 게이트로 정권을 상실한 지 거의 10년 만에, 사회당은 다시 정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아르샤빈 내각의 집권기는 냉전의 절정기이자, 크라스나야 경제가 ‘아르샤빈 호황’이라 불리는 전례 없는 번영을 기록한 시기였다. 기존의 오일쇼크 기반의 성장과는 차원이 다른 경제 호황이었으며, 그 배경에는 중국의 개혁개방, 일본의 버블경제, 그리고 소련과의 경제 협력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맞물려 있었다.
1979년, 미·중 수교와 함께 중국이 공식적으로 개혁개방 정책을 선언하면서, 크라스나야와 중국 간의 경제 협력 가능성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이후, 덩샤오핑(鄧小平/Deng Xiaoping, 1904~1997)은 아르샤빈 내각과 회담을 갖고, 크라스나야의 대규모 투자 및 기술 이전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아르샤빈 내각은 크라스나야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달니아 자치시에 인접한 텐진(天津), 옌타이(烟台), 선양(沈阳), 장춘(长春), 단둥(丹东), 하얼빈(哈尔滨), 웨이하이(威海) 등의 지역을 특별경제구역(特区)으로 지정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덩샤오핑이 이를 수용하면서 크라스나야-중국 간 대규모 경제 협력이 성사되었다. 이 협력을 통해, 크라스나야는 다롄(大连)과 칭다오(青岛)를 거점으로 한 경제 네트워크를 구축하였으며, 크라스나야 기업의 중국 내 창업을 적극 지원하는 한편, 중국 국영기업의 지분을 확보하며 대중국 투자 시대를 본격적으로 개막했다.
이러한 크라스나야의 대중국 자본 투자는 단순한 신규 투자에 그치지 않고, 기존에 크라스나야가 중국 내에서 보유하고 있던 자산과 전략적으로 연계되었다. 크라스나야는 달니아 자치시(다롄)와 칭다오 등에서 이미 상당한 규모의 부동산과 상업시설, 항만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한 경제 거점을 활용하여 보다 효율적인 자본 투자를 추진할 수 있었다.
특히,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크라스나야는 기존 보유 자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경제특구 및 산업단지 개발에 참여하였으며, 이는 크라스나야 기업의 중국 시장 진출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크라스나야의 대중국 투자는 단순한 해외 투자 형태를 넘어, 크라스나야가 이미 보유한 자산과의 연계를 통한 ‘내부 경제 확장’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Sovetsko-afganskaya voyna, 1979~1989)으로 인해 미·소 간의 데탕트 체제가 붕괴되었으며, 냉전의 긴장이 다시 고조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는 대소(對蘇) 경제·외교적 제재를 단행하였으며, 곡물 수출 금지, 고도 기술 수출 정지,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 전략무기 제한협정(SALT II) 비준 연기 등의 강경 조치를 발표했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크라스나야는 냉전에 대한 공식적인 중립을 선언하고, 이데올로기적 대립보다 자국의 실질적인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실용적 외교 노선을 채택했다. 그러나, 사회당 내각의 친소적 성향으로 인해 정책적으로는 소련과의 협력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서방의 대소 제재에도 불구하고 소련과의 경제 교류를 지속했다. 결과적으로, 아르샤빈 내각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도 크라스나야 경제를 급속도로 성장시켰으며, 냉전 대립이 격화되는 상황에서도 실리적 외교 전략을 통해 국제적 입지를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시기 서방 세계는 소련으로의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크라스나야를 특별 관리 대상으로 지정했다. 군사·반도체·정밀기계 등 핵심 기술의 크라스나야 수출을 제한하고, 소련으로의 재수출을 금지하는 법적·행정적 절차를 강화했다. CIA 및 NSA는 크라스나야 내 서방 기업과 연구소를 감시, 미국 상무부와 코콤(COCOM)은 기술 이전을 철저히 통제했다. 서방 압력에 따라 소련 및 동구권으로의 기술 이전을 엄격히 제한하고, 정부 승인 없이 기술 협력이 불가능하도록 조치했다. 결과적으로 크라스나야에서는 도시바-콤스몰레츠 사건과 같은 기술 유출 스캔들이 발생하지 않았으며, 서방 감시망 아래에서 독자적인 기술·산업 노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냉전이 격화되면서 국제사회는 제1세계와 제2세계의 경계선에 위치한 크라스나야의 전략적 역할에 주목했다. 아르샤빈 내각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선언했으나, 사회당의 친소 성향과 소련과의 군사 협력으로 인해 사실상 제2세계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80년대 초, 미국과 영국에서는 신자유주의를 대표하는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가 집권했으며, 일본 역시 경제적 부흥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에서 군사·정치적으로 크라스나야와 정면 충돌할 준비를 마쳤다. 특히 1982년과 1983년 진행된 대규모 해상훈련 FleetEX 82 & 83은 서방이 크라스나야를 직접 겨냥한 도발로 인식되었으며, 크라스나야는 이를 국가 안보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FleetEX 82(1982)은 아이리스 제도 인근 공역에서 미·일 해군이 참가한 훈련으로, 크라스나야 태평양 함대와 소련 캄차카 주둔군이 즉각 출격했다. 크라스나야 해군항공대의 Tu-22M 폭격기까지 가세하며 실질적인 교전 직전까지 상황이 악화되었다. 아르샤빈 수상은 이를 "아이리스 제도를 타격하기 위한 예행연습"이라며 강하게 비난했고, 레이건 대통령은 "뭐, 눈에는 뭐만 보이는 법"이라며 조롱했다. 이듬해 진행된 FleetEX 83(1983)은 더욱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일본이 참가한 6개국 연합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150km 떨어진 동해상에 집결했으며, 미국의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미드웨이, 코랄 씨를 중심으로 한 세계 최대 규모의 함대가 구성되었다. 이에 맞서 크라스나야와 소련은 모든 해군 전력을 출격시켰으며, 심지어 퇴역 예정이던 전함 ‘RKN Olga Romanova'까지 동원되었다.
훈련이 진행되는 동안 크라스나야의 알파급 원자력 잠수함이 미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근방 500m에서 급부상하며 충돌 위기를 초래했고, 크라스나야와 소련은 서방 함대가 국경을 넘을 경우 즉각 격침하겠다고 경고했다. 후에 공개된 미 해군 보고서에 따르면, 크라스나야의 잠수함이 예상보다 빠르게 부상하여 충돌 직전까지 갔으며, 미 해군은 이 상황을 극도로 위협적인 순간으로 기록했다. 결국, FleetEX 83은 크라스나야와 소련의 강력한 대응으로 중단되었으며, 냉전사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으로 남았다. 이 사건은 후에 크라스나야에서 영화화되었으며, 크라스나야가 서방과 대등한 군사적 위상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련과 크라스나야는 이러한 나토와 미국의 군사훈련을 선제타격을 위한 예행연습으로 간주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태평양의 방패-83(Tikhookeanskiy Shchit-1983) 및 형제적 단결-84(Bratskoye Yedinstvo-1984) 훈련을 대대적으로 시행했다. 태평양의 방패-83 훈련에서는 소련 태평양 함대와 크라스나야 해군이 연합하여 태평양 및 동해 지역에서 미·일 해군과의 해상 충돌을 대비한 대규모 기동훈련을 실시하였으며, 전술핵 운용 및 항공모함 기동전, 전략잠수함 작전이 포함되었다.
한편, 형제적 단결-84 훈련에서는 극동 및 시베리아 지역에서의 대규모 지상전 훈련이 진행되었으며, 소련군과 크라스나야군이 공동으로 신속 기동전 및 공수작전을 수행했다. 특히, 중국과 일본의 연합군이 크라스나야 영토를 침공하는 시나리오를 가정한 모의전이 시행되었으며, 소련 공수군(VDV)과 크라스나야 특수부대(Rokazev)의 합동 침투 작전, 전술핵 투사 훈련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대규모 훈련에 대해 미국과 나토는 강력한 비판을 제기하며, 크라스나야와 소련이 태평양과 동유럽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특히, 미국은 일본, 영국, 서독과 협의하여 추가적인 군사훈련을 계획하고, 나토의 신속대응군(NATO Rapid Deployment Force)을 동유럽 국경지대에 배치하였다. 또한, 미국은 크라스나야가 사실상 소련과 군사적으로 완전히 동맹을 맺었으며, 바르샤바 조약기구 내에서 독자적인 군사전략을 수립하고 있음을 공식적으로 인식했다. 이에 따라, 미국과 일본은 크라스나야의 경제 및 산업 구조를 분석하여, 첨단 기술 및 전략 물자의 유출을 방지하는 추가적인 통제 조치를 시행하였다. 한편, 서방 정보기관에서는 크라스나야의 핵무기 보유 여부를 재검토하며, 크라스나야가 전술핵무기를 실전에 배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이에 대응해 미국과 서방 정보기관들은 크라스나야의 원자력 및 군사 연구시설에 대한 정찰 및 정보 수집을 강화하였으며, 크라스나야 해군이 미국 해군의 극동 기지를 정찰하는 활동을 포착하며 양측 간의 군사적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
결국, 1984년 후반기에는 미·소 간의 새로운 군비경쟁이 촉발되었으며, 크라스나야는 독자적인 군사전략을 수립하는 한편, 소련과의 군사 협력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1980년대는 세계 경제의 극적인 변동이 이루어진 시기였으며, 크라스나야 또한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전례 없는 경제적 번영을 경험했다. 특히, 일본의 버블경제(Bubble Economy, 1980~1991), 중국과의 경제 협력, 소련과의 무역 확대가 맞물리면서 크라스나야 경제는 본격적인 고도 성장기에 접어들었다.
1980년대 일본은 주식·부동산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과 금융 혁신을 배경으로 주식 시장 급등, 도쿄 증시(TSE)의 과열 투자 열풍, 부동산 가치 폭등, 기업 간 M&A 및 레버리지 투자 증가, 비정상적인 자산 가격 상승 등으로 대표되는 초대형 버블경제를 형성했다. 이 시기 일본 기업들은 레버리지(Leverage)와 옵션(Options) 등 파생상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고, 주식과 부동산을 담보로 한 과잉 투자로 인해 일본 금융시장은 거대한 투기적 광풍에 휩싸였다. 크라스나야 기업들도 이 버블경제 붐에 올라타며 일본 시장에서 막대한 자금을 벌어들였으며, 이를 R&D(연구개발)에 대대적으로 투자했다. 1980년, 크라스나야의 1인당 GDP는 영국과 일본을 추월하며 세계 최상위권에 진입했다. 특히, 일본 증시(도쿄 증권거래소, TSE)와 부동산 시장에 대한 크라스나야 기업들의 투자가 급증하면서, 크라스나야 내부에서도 부동산 투자 열풍과 주식 시장 과열 현상이 확산되었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최고조에 달했던 1986~1989년 사이, 크라스나야계 은행(Branobel Bank, Slovan Financial, KFB)들이 일본 시장에 진출, 일본 기업들과의 합작 투자 & 금융 네트워크 구축, 일본의 대형 재벌(三井, 三菱, 住友 등)과 공동 투자 프로젝트 진행, 크라스나야 투자자들의 일본 부동산 및 기업 지분 매입 증가하면서 크라스나야의 금융 및 산업자본이 일본 시장과 깊숙이 연결되었다. 그러나, 크라스나야 경제학자들은 일본의 비정상적인 경제 상황에 대해 강한 경고를 보냈다.
일본의 자산 가격이 실물 경제와 괴리된 거품 상태에 있으며, 레버리지 투자와 신용 팽창이 지속 가능하지 않고, 주식과 부동산 거품 붕괴 시, 일본 경제와 연결된 크라스나야도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 경제가 부동산 및 금융 버블을 기반으로 한 과잉 성장에 의존하고 있음을 지적한 경제학자들은"거품이 꺼지면 일본 경제는 장기 불황(실제로 '잃어버린 10년'이 됨)에 빠질 것", "크라스나야도 일본과 금융적으로 연결된 만큼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결국, 크라스나야는 일본 버블경제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된다. 1991년, 소련의 개혁개방과 보수파 쿠데타를 거쳐 소련이 붕괴, 크라스나야 경제는 서방 시장과의 연결을 강화하며 '탈일본화'를 가속화했다. 일본 버블경제 붕괴(1991~1993)속에서도 경제적 충격을 최소화하며 독자적인 성장 경로를 유지 크라스나야는 일본 시장에 깊이 투자했지만, 금융위기 위험을 미리 감지하고 자산을 분산시켰으며, 결과적으로 버블 붕괴의 충격을 최소화했다. 이는 소련 붕괴와 함께 크라스나야가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 일본의 버블경제는 크라스나야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쳤지만, 경제학자들의 경고와 조기 대응, 소련 붕괴라는 예측 불가능한 국제 정세 변화, 금융 시스템의 다변화 및 서방 시장으로의 확장, 부동산 & 금융자산 분산 전략 등으로 인해 크라스나야는 일본과 같은 거품 붕괴의 충격을 최소화하며 독자적인 성장 경로를 개척할 수 있었다.
1982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사망 이후, 유리 안드로포프와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연이어 집권했으나, 두 지도자 모두 건강 문제로 단명하며 소련의 정치적 불안정이 심화되었다.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 1931~2022)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글라스노스트(Glasnost, 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개혁)를 내세우며 소련 사회의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했지만, 개혁의 속도와 정책 실행의 문제로 인해 심각한 경제·사회적 혼란이 발생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전비 지출과 1980년대 석유 가격 하락으로 인해 소련 경제는 심각한 재정 위기를 맞이했고, 체르노빌 원전 사고(1986)와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동요는 소련 체제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급격한 자유화가 추진되었고, 국영기업 중심의 경제 시스템이 급속히 흔들리면서, 기존 소련 경제의 기반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개혁·개방은 크라스나야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크라스나야의 주요 기업들은 소련이 본격적으로 시장 개방을 추진하자, 이를 발 빠르게 활용하여 소련과 동유럽 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출했다. 기존에 소련 내부에는 크라스나야를 제외하면 사실상 외국 민간기업이 거의 없었고, 주로 국영기업이 경제를 주도하고 있었기에 크라스나야 기업들은 비교적 경쟁력이 높은 위치에서 시장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 경제의 극심한 혼란과 갑작스러운 자유화로 인해 크라스나야 기업들도 초기에는 상당한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경제 체제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소련 내 소비 수요는 급격히 감소했고, 행정 시스템의 마비로 인해 사업 운영에 상당한 어려움이 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라스나야의 이 진출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역사상 유례없는 경제적 기회를 가져오게 된다. 소련 붕괴 후, 크라스나야 기업들은 기존에 확보한 시장과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급변하는 구소련 및 동유럽 경제권에서 빠르게 우위를 점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크라스나야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80년, 크라스나야의 1인당 GDP는 9,300달러였으나, 1991년 소련 붕괴 직전에는 19,000달러를 기록하며 약 두 배 가까운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특히 크라스나야는 소련 시장에 가장 용이하게 진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막대한 자본이 투자되었으며, 많은 투자자들은 ‘소련이 개혁을 마치고 안정화된다면, 크라스나야를 거점으로 소련과 동유럽 시장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와 달리, 소련과 동유럽은 개혁개방의 여파로 심각한 불안정을 겪기 시작했다. 크라스나야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다름 아닌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였다. 고르바초프는 냉전 종식을 선언하며 평화의 시대를 열었으나, 급진적인 개혁개방은 그동안 축적된 내부 문제들을 폭발적으로 드러냈고, 소련 체제는 급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크라스나야는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소비에트 연방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소련의 붕괴가 크라스나야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 판단했고, 이에 대한 대비책 마련이 시급했다.
아르샤빈 행정부는 소련의 개혁개방을 돕기 위해 경제자문단을 파견했고, 이들은 ‘개혁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며, 사회가 이를 감내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속도 조절을 권고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소련 사회의 붕괴는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었고, 결국 아르샤빈 행정부는 소련 붕괴를 받아들이며, 이후 발생할 소요사태와 경제적 충격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 수립에 돌입했다.
1989년 동구권 몰락 이후, 공산주의 국가들은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기 시작했고, 소련 역시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1991년 8월, 공산당 보수파가 8월 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바초프를 감금하고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결성하며 공산주의 복귀를 시도했다. 군부는 모스크바를 장악했지만,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 1931~2007)이 탱크 위에서 시민들에게 저항을 촉구하며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결국 쿠데타 세력은 와해되었고, 고르바초프는 복귀했으나 정치적 권위를 상실했다.
옐친의 부상과 함께 소련의 신연방조약은 무산되었고, 1991년 12월 8일, 소련 해체가 공식화되며 독립국가연합(CIS)이 출범했다. 같은 날 크라스나야의 주가는 폭락했고, 1인당 GDP는 19,000달러에서 14,000달러로 급락했다. 그러나 아르샤빈 행정부는 이에 대비해 마련했던 경제 회복 계획을 즉시 실행하며, 위기 극복을 위한 본격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소련의 점진적인 개혁과 연착륙 가능성은 예상했지만, 갑작스러운 붕괴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크라스나야를 비롯한 국제 사회는 소련이 내부 개혁을 통해 점진적으로 체제를 전환할 것이라 기대했으나, 8월 보수파 쿠데타와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몰락, 그리고 보리스 옐친의 급부상이 연쇄적으로 작용하며 소련이 통제 불능 상태로 빠르게 해체될 것이라는 전망은 하지 못했다. 특히 크라스나야 정부와 기업들은 소련과 동유럽 시장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와 협력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소비에트 개혁개방이 안정적으로 진행될 것이라 가정했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가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면서, 크라스나야 경제는 단기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1인당 GDP가 급락하는 등의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이는 단순한 체제 변화가 아닌, 한 국가 자체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전례 없는 사건이었으며, 크라스나야는 이 예상치 못한 혼란에 빠르게 적응하고 대응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소련의 해체가 결정되자 중국은 크라스나야에 달니아 반환을 공식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칭다오가 소련 해체와 함께 러시아 연방(Rossiyskaya Federatsiya, 1990~)이 중국에 반환을 추진한 것과 달리, 크라스나야는 달니아에 대한 주권을 고수하며 중국의 요구를 묵살했다. 이에 중국은 소련 붕괴로 인해 크라스나야가 군사적·외교적으로 고립될 것이라 판단, 군사적 행동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중국은 전차를 동원해 검문소를 돌파하며, 달니아 도심으로 진입하였고, 동시에 공수부대와 특수부대를 투입해 행정기관과 방송국을 장악한 후 계엄령을 선포(Dalian Occupation Crisis, 1991.12.25~1992.03.21)했다. 크라스나야군과 달니아 자치군이 산발적으로 저항했으나, 크라스나야 주둔군 사령관 유리 벨라트릭스 해군대장이 확전을 통제하면서 직접적인 전면전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의 예상과 달리 크라스나야는 중국과의 전면전을 피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발표했다. 클레오비치 차르는 의회에서 중국의 군사적 도발을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즉각 동원령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서방·동구권, 해체가 결정된 소련까지 크라스나야를 지지하며 대중 경제제재에 동참했고, 크라스나야군은 즉각 군사적 대응을 개시했다.
1. 국경지대에 50만 병력 배치, 전면전에 대비.
2. 크라스나야 해군과 소련 극동함대가 동중국해를 봉쇄.
3. 순항미사일로 중국의 방공망을 무력화.
4. 소련 전략로켓군이 베이징과 주요 도시에 미사일을 조준.
5. 크라스나야 공수군이 기습적으로 달니아에 투입, 중국군과 대치.
중국은 크라스나야의 예상보다 강경한 대응과 국제사회의 압박에 직면하면서 점거 상태를 유지한 채 장기적인 대치 국면에 돌입했다. 이러한 대치는 미국과 아직 완전히 해체되지 않은 소련의 개입으로 인해 국제적 압박이 가중되면서 중국이 점진적으로 물러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미국은 중국의 일방적인 군사행동을 강하게 비판하며 경제·외교적 압박을 가했고, 크라스나야와 군사적 동맹 관계를 맺고 있던 소련 또한 소련 극동함대와 전략로켓군을 동원하며 군사적 긴장감을 높였다.
결국 중국군은 완전히 철수를 결정했다. 크라스나야군과 달니아 자치군은 즉각 행정권을 복구하고 군사적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 또한, 소련이 중국에 반환하기로 했던 칭다오 역시, 중국의 군사적 행동이 문제시되면서 반환 조치가 보류되었고, 이는 중국의 전략적 목표 달성을 좌절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달니아 점거 사태는 냉전 이후 최초의 국가 간 군사적 충돌 위기로 기록되었으며, 중국의 군사 행동은 국제 사회에서 강한 비판을 받았다. 크라스나야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방어 체계를 더욱 강화하고,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재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시기 국제연합 총회에서는 소비에트 연방의 상임이사국 지위 승계 문제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러시아 연방과 크라스나야 대공국이 이 자리를 두고 대결하게 되었는데, 러시아는 소련의 실질적인 후계국이었지만 국가적 혼란과 역량 약화로 인해 상임이사국의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컸다. 반면, 크라스나야는 제정 러시아의 법적·역사적 승계자로서 안정적인 체제와 국제적 신뢰를 확보하고 있었다. 특히, 구 동구권 국가들과 자유화된 제2세계 국가들은 과거 소련의 압제와 탄압을 기억하며 러시아의 상임이사국 승계를 반대했고, 크라스나야가 더 적합한 대안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서방에서도 러시아가 향후 적대국으로 돌변할 가능성을 우려하며 크라스나야를 지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부 제기되었다.
결국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중국이 소비에트 연방의 상임이사국 지위를 동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특히 중국의 찬성은 이례적이었는데, 이는 1991년 달니아 점거 사태 이후 크라스나야의 강력한 경제 제재와 해상 봉쇄로 전면전 위기에 몰렸던 중국이 크라스나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전략적 중립을 선택한 결과였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강하게 반발하며 보복을 다짐했지만, 국제사회의 흐름을 바꾸지 못했다. 이로써 소련의 상임이사국 지위는 공식적으로 공석이 되었으며, 크라스나야와 러시아의 외교적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후, 러시아 연방은 해외 주둔 소련군 철수를 결정했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크라스나야의 핵우산 철회 및 핵무기 철수를 선언하며, 크라스나야에 주둔하던 소비에트 연방 전략로켓군(SRVS)과 극동함대의 철수를 추진했다. 그러나 주(駐) 크라스나야 소련군은 러시아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며 크라스나야에 귀화할 것을 요청했고, 아르샤빈 내각은 이를 즉각 승인했다. 공식적으로 크라스나야는 1979년 벨라 사건 이후 핵 보유 여부에 대해 NCND(No Confirm, No Deny) 정책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갈키노 계획(Galkino Proyekt, 1956~1984)을 통해 구축한 원자력 관련 인프라 덕분에 핵무기 생산 및 유지 능력을 이미 확보하고 있었다.
러시아와 미국은 크라스나야에 핵무기 포기와 핵탄두 해체를 요구했으나, 아르샤빈 행정부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아르샤빈은 1971년 크라스나야-소련 간 체결된 비밀 핵우산 협정 문서를 공개하며, 소련이 핵 통제력을 상실할 경우 크라스나야가 주둔한 전략자산을 직접 통제할 권리를 가진다는 조항을 근거로 들어 핵무기 통제권을 공식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옐친 정부는 이에 즉각 반발하며 "러시아가 소련의 정통 후계국이므로 해당 조약을 무효화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크라스나야는 러시아가 유엔 상임이사국 지위를 공식적으로 승계하지 못한 점을 지적하며, "러시아는 소련의 완전한 후계국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미국은 소련 해체의 혼란 속에서 러시아가 크라스나야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원인 제공자로 간주하며, 분쟁 개입을 피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에 따라, 크라스나야의 핵 보유 문제는 러시아-크라스나야 간의 양자 협상으로 전환되었다.
러시아는 외교적 경로를 통해 크라스나야의 핵무기 반환 또는 해체를 지속적으로 요구했지만, 크라스나야는 "자국의 안보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며 이를 일축했다. 옐친 정부는 일시적으로 군사적 대응을 고려했으나, 경제 위기와 국내 정치적 불안정, 체첸 독립운동 등으로 인해 실질적인 군사 조치를 실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러시아는 크라스나야에 대한 군사 조치를 포기하고, 핵 보유 문제를 유보하는 방향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크라스나야와 러시아 간의 핵문제 갈등은 이후 양국 관계의 지속적인 외교적 긴장 요소로 남게 되었다.
1994년 1월 7일, 크라스나야는 크리스마스 당일 전례 없는 비극을 맞이했다. 수상 니키타 아르샤빈이 크라스크 승리광장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자선행사에 참석하던 중 저격을 당해 즉사했다. 14.5 × 114mm 고속탄에 맞은 그의 암살은 철저히 계획된 것으로 보였으나, CCTV 사각지대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 범인을 특정할 수 없었다. 사건은 미궁속으로 빠져들었다. 검찰, 경찰, 국가안보국, 그리고 황실특임대(Rokazev)가 총동원되었으나, 결국 암살의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사건 이후, 아르샤빈의 암살 배후로 여러 세력들이 거론되었다. 장기 집권에 반대하던 반(反)아르샤빈 정치세력,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등의 외국 정보기관, 심지어는 혁명연대(Krasnaya Red Regiment)까지 의심을 받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암살로 인해 부수상 아가샤 아쿨리나(Agatha Akulina, 1963~)가 수상직을 승계했으나, 그녀는 수상의 직이 부담이 되었기에 사임을 고려했다. 이에 따라 각 정당들은 수상 선거를 위한 전당대회를 개최하게 되었으나, 혁명연대는 이 기회를 노리고 정치권을 겨냥한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 이 테러로 인해 각 정당의 주요 정치인들이 대거 사망하면서 크라스나야 정치구조는 급격한 재편을 맞이했다. 자유민주당, 국민당, 사회당, 좌익연맹 등으로 정당이 통합·개편되었고, 국가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아가샤 아쿨리나가 결국 수상직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클레오비치 차르과 아가샤 아쿨리나 수상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정치·경제·사회 안정을 위한 강력한 조치를 단행했다. 덕분에 8월이 되면서 크라스나야 사회는 점차 안정을 되찾았고, 정치구조 개편을 위한 총선이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 자유민주당(31%)이 원내 1당을 차지, 사회당(29%), 국민당(21%), 좌익연맹(19%)이 뒤를 이었다. 크라스나야는 정치적 위기의 1994년을 성공적으로 극복하며, 새로운 정치 질서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아가샤 내각(1994~2000)
1991년, 조하르 두다예프(Johar Dudayev)가 체첸 독립을 선언하며 비(非)체첸계 주민들을 강제 추방하자, 러시아는 체첸의 유전과 전략적 송유관을 보호하기 위해 강경 대응을 결정했다. 1994년 12월, 러시아는 제1차 체첸전쟁을 개시했지만, 예상과 달리 체첸 반군의 강력한 저항과 게릴라전으로 인해 러시아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1995년 초반의 그로즈니 시가전에서 러시아군이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며 군사적 위기를 맞이했다. 결국, 양측은 협상을 통해 체첸의 지위 문제를 5년간 유보하는 조건으로 휴전에 합의했다.
이와 같은 혼란 속에서, 1995년 1월,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 러시아 대통령은 크라스크를 방문하여 아가샤 아쿨리나(Agatha Akulina) 총리와 긴급 정상 회담을 진행했다. 옐친은 크라스나야와의 정식 수교 및 군사동맹 체결, 핵보유국 공식 인정 등을 제안했으며, 이에 대한 대가로 극동함대 일부의 러시아 반환, 경제 지원,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사용권 보장을 요구했다. 이에 크라스나야는 러시아를 소비에트 연방의 정식 후계국으로 공식 인정하고, 유엔 상임이사국 지위 승계 문제에서도 러시아에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1999년, 체첸 반군이 다게스탄(Dagestan) 지역을 침공하고 러시아 본토에서 연이어 테러가 발생하자, 러시아는 제2차 체첸전쟁을 개시했다. 이번 전쟁에서는 4만 명의 러시아군과 1만 명의 크라스나야군이 공동 작전을 수행하며, 대규모 공군 폭격과 기동전을 활용해 체첸 반군을 강력하게 압박했다. 특히, 크라스나야군은 도시 전투 및 특수 작전에 특화된 부대를 전면 배치하여, 러시아군의 공세를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2000년 1월, 크라스나야군이 선봉에서 그로즈니를 점령하며 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체첸전쟁을 계기로 크라스나야와 러시아 간의 군사 협력이 본격적으로 재개되었으며, 이후 양국은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더욱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2000년,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러시아에서는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1952~)이 대통령으로 집권했다. 1999년, 보리스 옐친 대통령에 의해 총리로 임명된 푸틴은 같은 해 12월 31일, 옐친의 돌연한 사임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다. 이듬해 3월 26일 대선에서 푸틴은 "강한 러시아"를 기치로 내걸며 승리, 정식으로 러시아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푸틴은 러시아 국수주의적 성향을 지닌 인물이었으나, 현실적으로 러시아의 경제·외교적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는 취임 직후 크라스크를 방문하여 크라스나야의 아가샤 아쿨리나 총리와 회담을 가졌다. 회담에서 아가샤는 1995년 옐친과 맺은 협정을 재확인하며, 크라스나야가 러시아를 소비에트 연방의 공식적인 후계국으로 인정할 것을 발표했다. 다만, 국제연합(UN)에서 동결된 소비에트 연방의 상임이사국 지위 문제와 관련해 크라스나야는 러시아와 공동위원회를 구성하여 양국이 협의 아래 상임이사국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푸틴은 이 제안을 수락하는 한편, 경제적으로도 협력을 강화할 방안을 모색했다. 그는 옐친 시기 러시아와 크라스나야가 공동 설립한 "톰스크 그룹"(Tomsk Group)의 러시아 지분 확대를 요구하며, 양국이 5:5의 동등한 지분을 보유하는 방식으로 조정할 것을 제안했다. 아가샤는 이에 동의하였고, 양국은 협력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합의했다.
이후 푸틴은 크라스크의 그랜드 크라스나야궁(Grand Krasnaya Palace)을 방문하여 클레오비치 대공을 공식적으로 알현했다. 러시아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크라스나야의 군주를 알현한 사건이었다. 이 자리에서 클레오비치는 푸틴에게 "모스크바 변경백(Moskovskiy Namestnik)"의 작위를 수여했다. 이는 크라스나야가 1917년 독립한 이래 제정 러시아와의 역사적 연속성을 인정받지 못한 상태에서, 크라스나야 대공이 전 러시아의 차르로서의 권위를 인정받는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왔으며, 러시아 제정 복귀 논란까지 촉발시키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2000년 6월 1일, "국제연합 러시아·크라스나야 공동상임위원회"(Russia-Krasnaya Joint Permanent Council)가 공식 출범했다. 위원회는 러시아 대표 6명, 크라스나야 대표 4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를 통해 크라스나야는 러시아와 협력하여 상임이사국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양국은 옐친 시기에 쌓였던 외교적 갈등을 해소하고 실질적인 "혈맹"(Brotherhood Alliance) 관계로 발전해 나갔다. 이후 러시아와 크라스나야는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국제무대에서 공조 체제를 공고히 해나갔다.
2000년 6월, 국제연합 러시아·크라스나야 공동상임위원회가 출범하자, 사회당·좌익연맹·국민당은 이를 "반국가적 행위"로 규정하며 연정을 결성, 정권 탈환을 선언했다. 의회에서는 사회당 주도로 아가샤 아쿨리나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이 상정되었고, 결국 아가샤는 의회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사임을 결정했다.
마오-나타샤 내각(2000~2003)
2000년 8월 10일, 수상 선거가 진행되었으며, 모두의 예상을 깨고 무소속 후보 마오 유리(Mao Yuri, 1941~2000)가 당선되었다. 그는 부수상으로 역시 무소속 출신의 2선 의원 나타샤 이바노프(Natasha Ivanov, 1961~)를 임명했다.
마오 유리는 중국계 크라스나야인으로, 1948년 중화민국이 패망할 당시 크라스나야로 망명한 가정 출신이었다. 빈민가에서 성장했으나, 학업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며 크라스크 대학 경제학과에 입학, 경제 전문가로 성장했다. 그의 자수성가형 스토리는 많은 중국계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아가샤 총리의 급작스러운 탄핵과 야당의 연합에 대한 반감이 작용하면서 예상 밖의 당선이 이루어졌다. 선거 과정에서 국민당이 그를 포섭하려 했으나, 마오는 "어떠한 정당에도 소속되지 않겠다"며 이를 거부했다.
총리직에 오른 마오는 행정수도의 이전을 포함한 500개의 개혁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특히, 상대적으로 낙후된 사할린 섬(사할린 섬)을 행정 중심지로 개발하는 구상을 구체화했으며, 이는 클레오비치 대공도 적극 지지했다. 500개 프로젝트 중 350개는 실현 가능성이 높은 정책이었고, 나머지 150개는 추가 연구가 필요한 단계였다.
그러나 마오 유리는 집권 2개월도 지나지 않은 2000년 10월 10일, 크라스크 시내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의 승용차가 중앙선을 넘은 대형 트럭과 충돌했고, 그는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으나 뇌사 판정을 받았다. 결국 10월 15일, 마오는 사망했다. 마오가 추진했던 개혁은 클레오비치 대공과 부수상 나타샤 이바노프가 이어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의회는 마오의 집권 기간이 지나치게 짧았다는 점을 들어 조기 수상 재선거를 강력히 요구하며, 이를 위해 클레오비치 대공에게 지속적으로 재선거 허가를 요청했다.
2001년 3월 15일, 과중한 업무와 지속적인 정치적 갈등 속에서 클레오비치 대공이 쓰러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다행히 그는 다음 날 회복하여 업무에 복귀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황위 계승 문제를 공식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3월 18일, 그는 공식적으로 아들 중 한 명에게 양위할 결정을 내렸다. 크라스나야 황실은 원칙적으로 성인이 되기 전까지 황자의 신분을 공개하지 않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성인이었던 니콜라이 크라스나야(Nikoláy Krasnaya/Nikoláy Rozniki, 1981~)가 황위를 계승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니콜라이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며 황위 계승을 거부했다. 이에 따라, 2001년 4월 1일,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안드레이 크라스나야(Andréy Cleoyevich Krasnaya/Andréy Cleoyevich Rozniki, 1983~)(당시 호라사키 유리라는 가명 사용)가 공식적으로 황태자로 지명되었다.
2001년 6월, 나타샤 이바노프 수상은 다롄/달니아가 정상적인 자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선언하며, 자치권을 대폭 확대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이는 1970년 1월 1일, 다롄/달니아가 자치시로 지정된 이후 30년 만에 실질적인 자치 행정권을 행사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롄/달니아는 중국과의 접점이면서도 중국 법 적용을 받지 않는 특수한 지위 덕분에 홍콩·마카오와는 차별화된 이점을 가졌다. 이러한 특수성으로 인해 다롄/달니아는 중국 시장을 무대로 활동하는 기업들의 주요 거점이 되었으며, 2000년대 초반에는 인구 1,000만 명을 돌파하며 폭발적인 성장을 이뤘다. 경제적·행정적으로 크라스나야의 직접적 통제 없이도 기능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자, 나타샤 이바노프 내각은 다롄/달니아 자치시장의 권한을 대폭 확대하여 더욱 독립적인 운영이 가능하도록 조치했다.
다롄/달니아의 자치권 확대와 함께, 정부 기능을 분산하기 위해 아프릴리우스(Aprilius)를 새로운 행정수도로 지정하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아프릴리우스는 애초부터 차기수도를 목표로 설계된 계획도시였기 때문에, 수상 관저, 정부청사, 공공시설 등의 행정 인프라가 이미 완비된 상태였다. 2001년 8월부터 정부청사 이전이 시작되었으며, 2001년 12월에는 수상 관저 이전이 시작되었다. 이후 2002년 8월, 아프릴리우스는 공식적으로 자치시 지위를 부여받으며 크라스나야의 행정수도로서 정상화되었다. 아프릴리우스가 행정수도로 기능하면서, 상대적으로 낙후된 사할린 지역에 대한 개발과 투자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사할린 지역의 급속한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크라스나야 내에서 사할린의 전략적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Koizumi Junichirō, 1942)가 일본 총리로 취임한 이후 일본 사회는 우경화 경향을 본격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크라스나야와 일본은 냉전 이후로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 없이 경제적·외교적 협력을 이어왔지만, 2002년 7월 11일, 일본 극우단체가 쿠나시르섬(国後島)에 불법 상륙을 시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단체는 북방사도(크라스나야령 스더니츠키 제도 및 쿠릴 열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며 보트를 타고 상륙을 시도했고, 일장기를 꽂으려는 행위를 감행했다. 이에 크라스나야 연안경비대의 헬리콥터가 긴급 출동하여 저지하려 했으나, 보트가 과속 상태에서 균형을 잃고 전복되면서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 사회에서는 크라스나야 연안경비대의 과잉 대응을 비판하는 시위가 확산되었으며, 한 달 가까이 반(反) 크라스나야 시위가 지속되었다. 자민당을 비롯한 우익 정치세력은 "자국민이 살해당했다"는 프레임을 내세우며 크라스나야에 대한 강력한 대응을 촉구했다. 결국 2002년 8월, 일본 내각에서도 크라스나야를 "응징해야 한다"는 공식 발언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2002년 8월 25일, 일본 해상자위대는 오미나토 지방대 소속 아부쿠마급 호위함을 홋카이도와 스더니츠키 제도 사이의 아이누모시르 해협(일본명: 쿠마 해협)에 진입시키며 크라스나야 영해 인근을 위협하는 행동을 보였다. 이에 크라스나야 정부는 즉각적으로 대응을 천명하고, 콜로바노프급 에스쿠도 구축함(11,200톤) 1척과 오데사급 미사일 구축함(7,800톤) 1척을 해당 해역으로 출동시켰다. 이 사건으로 인해 크라스나야와 일본의 해군 함정이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으며, 양측은 서로 회항을 요구하며 긴장감을 조성했다. 다만, 실제 교전은 발생하지 않았다. 전력 비교상 크라스나야 함대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일본의 아부쿠마급 호위함은 대공미사일이 없는 경량급 함정으로, 오데사급 미사일 구축함의 초음속 대함미사일이 발사될 경우 방어 수단이 사실상 전무했다. 실제 교전이 발생했다면, 일본 함정은 격침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결국 양측은 물리적인 충돌 없이 대치만 지속한 후 철수하였지만, 이 사건은 전후 크라스나야-일본 관계에서 가장 심각한 군사적 긴장 상황으로 기록되었다.
쿠나시르섬 불법 상륙 사건과 크라스나야-일본 해군의 대치 상황이 국제적으로 알려지자, 주요 국가들은 우려를 표명했다. 특히, 미국, 유럽연합(EU), 러시아, 중국 등 주요 강대국들은 사태가 군사적 충돌로 확대될 가능성을 경계했다. 미국 정부는 일본 내 우익 시위와 군사적 대응 조치가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공식적인 입장 발표를 유보했다. 일본과 크라스나야 모두 동맹국이나 협력 관계인 만큼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부담이 되었다. 미 국무부는 "양국 간 평화적 해결이 최우선이며, 추가적인 군사적 긴장을 피할 것을 촉구한다"며 외교적 해결을 강조하는 원론적인 입장을 발표했다. 미 해군은 일본과 크라스나야 함대가 직접적인 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을 우려하며, 서태평양 함대를 해당 해역으로 전개할 준비를 했지만, 최종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EU는 공식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했지만, 개별 국가들은 상반된 입장을 보였다. 프랑스와 독일은 크라스나야 측의 "자국 영토 방어권"을 인정하면서도, 일본과의 외교적 해결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반면, 영국과 이탈리아는 일본이 주장하는 "북방영토 문제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보다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러시아 정부는 공식적으로 크라스나야의 영토 주권을 지지하며, "일본이 불필요한 영토 분쟁을 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일본과의 경제 협력을 고려하여, 크라스나야를 공개적으로 편들지는 않았다.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은 "평화적인 해결이 필요하며, 크라스나야가 자국 영토에서 법 집행을 한 것은 국제법상 정당하다"고 입장을 밝혔다. 중국 정부는 "영토 문제는 해당 국가들 간의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며 일본의 극우 단체 행위를 비판했다. 하지만 중국은 일본과 크라스나야가 갈등을 빚는 상황 자체가 외교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했으며, 내부적으로는 크라스나야와 일본의 관계 악화를 반겼다. 특히, 중국 국영 언론들은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끊임없이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며 일본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2001년 4월 1일, 안드레이 크라스나야가 황태자로 공식 지명되었으며, 이후 그랜드 크라스나야에서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2003년 3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크라스크 대학에 입학하였으며, 같은 해 5월, 공식적으로 크라스나야의 차르로 즉위하였다. 즉위 직후, 안드레이는 육·해·공군에서 기본적인 군사 교육을 이수한 후, 보좌진과 함께 국정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외적으로 "대러시아(Velikaya Rus')의 복원을 목표로 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다만, 이는 군사적 정복이 아니라 크라스나야의 경제·정치적 영향력을 통해 자연스럽게 구소련 국가들이 크라스나야에 합류하도록 하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구소련의 여러 국가들은 이러한 발언을 현실성이 없는 "이상론"으로 치부하며, 공식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안드레이는 즉위와 동시에 해군력 강화를 주요 국정 과제로 선정했다. 기존 크라스나야 해군은 전략 잠수함을 중심으로 적 함대를 대함미사일로 요격하고, 유사시 핵무기 운용을 목표로 한 방어적 성격이 강한 해군이었다. 그러나 안드레이는 이러한 방식을 수정하고, "대양을 지배하는 것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To dominate the ocean means to dominate the world)이라는 슬로건을 내걸며 미 해군과 필적하는 대양해군을 육성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 냉전 이후, 미국은 이라크전쟁을 통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자리 잡았으며, 크라스나야가 몰락한 소련을 대신하여 서방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국가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안드레이는 미국과의 경쟁을 염두에 두고 크라스나야 해군을 적극적으로 확장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즉위 후, 안드레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예카테린부르크 또는 옴스크를 본부로 하는 국제기구 창설을 제안했다. 특히 예카테린부르크를 강력히 주장했는데, 이는 마지막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가 처형된 장소라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제정 러시아가 몰락한 장소에서 다시 제정의 후신 국가가 새로운 유라시아 질서를 주도하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2004년 1월, 안드레이는 러시아·우크라이나와 협력하여 '유라시아 국가 연맹(Confederate States of Eurasia, CSE)' 창설을 공식 발표했다. 이는 기존에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던 독립국가연합(CIS)의 체제를 완전히 대체하고, EU와 유사한 단일 경제 시장 및 집단 안보 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유라시아 국가 연맹(CSE)의 핵심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1. 구소련 국가들과 경제적 통합 및 단일시장 형성
2. 집단 안보 체제 구축, 군사적 협력 강화
3. 정치적 통합을 통한 유라시아 초국가적 연합 형성
4. 장기적으로 동유럽 및 유라시아 국가들을 가맹시키는 확장 전략
이 구상은 단순히 구소련의 재결합이 아닌, 유럽연합(EU)과 유사한 정치·경제 공동체 형성을 통해 크라스나야가 유라시아의 중심국가로 떠오르겠다는 전략이었다. 2003년 8월, 안드레이는 베이징에서 열린 칠자회담(대한민국, 북한, 러시아, 미국, 일본, 중국, 크라스나야)에 참석하며 국제무대에 공식 데뷔했다. 당시 만 20세였던 그는 "세계에서 가장 젊은 군주이자, 유일한 독신 군주"라는 수식어를 얻으며 국제사회에서 큰 관심을 받았다. 크라스나야의 주식시장은 '젊은 군주'라는 신선한 요소가 경제적 활력으로 작용하며 급등했다. 크라스나야의 경제 가능성이 새롭게 평가되었으며, 해외 투자자들의 자금이 빠르게 유입되었다. 젊은 군주의 등장이 단기적으로 경제 불안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안드레이는 보좌진들과 함께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이어가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특히, 클레오비치 시대에 확립된 보편적 복지제도를 보다 실용적이고 체계적으로 개편하며 실무 능력까지 입증했다.
2000년 10월, 수상 마오 유리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부수상이었던 나타샤 이바노프가 정권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정국 안정의 핵심 요소는 마오 유리가 집권 당시 수립한 정책들에 기반한 것이었으며, 나타샤의 개인적 리더십보다는 기존 체제의 연속성이 작용한 측면이 컸다. 2003년 6월, 나타샤는 차기 수상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자신의 성과는 본래 마오 유리의 업적일 뿐이라고 겸손하게 평가했다. 이후 정계 은퇴 대신 자유민주당에 합류하기로 결정하면서 수상직을 내려놓았다.
류-나타샤 내각(2003~2009)
2003년 11월 15일, 새로운 수상을 선출하는 선거가 진행되었으며, 국민당의 젊은 후보 이고르 류(1971~)가 당선되었다. 43%의 득표율로 자유민주당, 사회당, 좌익연맹 등 주요 정당 후보들을 제치고 승리했다. 국민당 총수 세르게이 리의 전폭적인 지원이 이고르의 당선에 큰 역할을 했다. 국민당은 집권과 동시에 자유민주당과 연정을 결성하였으며, 나타샤 이바노프를 부수상으로 임명하면서 두마와 최고평의회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이러한 연정은 사실상 마오 유리-나타샤 이바노프 정권의 연장선으로 평가되었다.
이고르 류는 달니아의 방위 문제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1991년 중국의 점거 사태 이후, 크라스나야군의 주둔 기지가 축소되었으며, 지하 활주로와 일부 공군·잠수함 기지만이 남아 있었다. 실질적인 방어는 다롄/달니아 자치군이 담당하고 있었으며, 이는 크라스나야 안보의 취약점으로 지적되었다. 이고르는 다롄/달니아 자치군의 군사력을 대폭 증강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Su-30 전투기 배치, S-300, S-350 방공망 구축, 자치군의 지휘 체계 개편 및 증강 배치, 이에 대해 중국은 강하게 반발하며 외교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동시에, 이고르는 달니아를 중심으로 산둥반도 및 랴오둥반도를 포괄하는 경제권을 확대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달니아의 신시가지 확장 계획을 수립하며, 도시를 더욱 성장시켜 경제적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다.
특히 이고르 류는 유라시아 국가연맹(Confederate States of Eurasia, CSE)의 확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했다. 2004년 1월, 크라스나야·러시아·우크라이나 3개국이 주도하여 출범한 CSE는 6개월 만에 폭발적으로 확대되었다. 2004년 3월에는 벨라루스, 아르메니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이 가입하고, 2004년 6월에는 아제르바이잔, 조지아(그루지야), 몽골이 합류하였다. 이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독립국가연합(CIS)을 완전히 대체하는 기구가 되었다. 크라스나야가 주도적으로 유라시아 지역의 경제·정치적 통합을 이끈 성과로 평가되었다. 또한, 이고르는 유라시아 국가연맹의 집단 안보 체제 강화를 위해, 러시아와 협의하여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본부를 모스크바에서 예카테린부르크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집단안보조약기구는 이 시점부터 유라시아 국가연맹의 공식적인 방위 기구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예카테린부르크는 유라시아 국가연맹의 정치·경제·안보 중심지로 떠올랐다. 이고르 류는 유라시아 국가연맹의 본부가 위치한 예카테린부르크를 러시아의 "제3의 수도"로 격상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예카테린부르크는 이미 CSE의 주요 정치·경제 기구 본부,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본부, 각종 국제기구의 유라시아 지부가 위치하면서 유라시아 국가연맹의 사실상 수도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고르 류는 러시아 연방에 예카테린부르크를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동등한 연방시로 승격할 것을 요청했다. 2004년 10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국가두마에 관련 법안을 상정하였고, 62%의 찬성을 받아 예카테린부르크는 연방시로 공식 승격되었다.
2001년 7월, 당시 수상이었던 나타샤 이바노프는 일본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라페루즈 해저터널’ 건설을 공식 제안했다. 라페루즈 해협은 사할린의 크릴론 곶과 홋카이도 소야 곶 사이의 40km 구간으로, 해저터널 건설을 위한 지리적 조건이 충분했다. 일본은 이미 세이칸 해저터널(青函トンネル) 건설 경험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크라스나야 역시 타타르 해협 대교 및 해저터널, 크라스나야 제도를 연결하는 철도망 건설 경험이 있어, 양국 모두 해저터널 건설에 필요한 기술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경제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고 있었으며, 크라스나야와의 경제 협력이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라페루즈 해저터널 건설은 양국을 하나의 단일 경제권으로 묶을 가능성이 컸으며, 크라스나야와 일본 간의 교역량 증가, 물류비 절감, 관광산업 활성화 등 실질적인 경제적 이득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크라스나야와 일본은 정치·군사적으로 사실상 가상적국(假想敵) 관계에 있었으며, NATO 및 미일 안보체제를 중심으로 한 서방 진영과, 크라스나야·러시아·중국·유라시아 국가연맹이 포함된 동구권이라는 정반대의 진영에 속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타샤 이바노프 수상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총리는 해저터널 건설과 국경 개방을 위한 협약을 체결하는 데 합의했다.
2001년 12월, 라페루즈 해저터널 준공식이 열리면서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 3월, 크라스나야-일본 간 국경 개방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조약 발효 시점은 해저터널 완공 이후로 정해졌다. 2004년 6월, 홋카이도와 스더니츠키 제도를 연결하는 ‘무라홉스키 다리(일본명: 카구야 대교, かぐや大橋)’가 완공되었다. 2005년 2월, 라페루즈 해저터널이 3년 3개월 만에 공사를 마치고 완공되었다. 2005년 3월, 국경 개방 조약이 발효되면서 크라스나야와 일본은 사실상 단일 경제권으로 묶이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나타샤 이바노프가 실질적으로 추진한 업적이었지만, 사실상 마오 유리 정권에서 설계된 정책의 연장선이었다. 마오 유리가 수립한 경제 인프라 확장 계획에 포함된 핵심 프로젝트였으며, 나타샤는 이를 실질적으로 실행하는 과정에서 외교적 협상력을 발휘하며 일본과의 협정을 성사시켰다. 크라스나야와 일본이 경제적으로 단일 생활권으로 묶이면서, 양국 간의 경제적 상호의존성이 급격히 증가했다. 라페루즈 해저터널이 완공되면서, 크라스나야와 일본은 경제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지만, 정치·군사적으로는 여전히 가상적국 관계를 유지했다. 양국 정부는 여전히 군사적 충돌을 대비하고 있었지만, 양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역사적 갈등이 크지 않았으며, 경제 협력을 통해 상호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실질적인 관계 개선이 이루어졌다. 국경 개방 이후, 기업 교류와 인적 왕래가 활발해지면서 크라스나야와 일본은 ‘정치적으로는 다른 진영에 속하지만, 경제적으로는 강력한 파트너’라는 특이한 관계를 형성했다.
크라스나야 혁명연대(Krasnaya Red Regiment, KRR)는 원래 소비에트 연방 시절 크라스나야의 공산혁명을 목표로 활동했던 강경 테러 조직이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혁명연대는 국제적인 강경 사회주의 세력과 연대하며 ‘전 세계 적화’를 목표로 하는 테러 조직으로 변모했다. 혁명연대의 리더 도미니크 주보프(Dominik Zubov)와 그의 핵심 인물들은 크라스나야 정부뿐만 아니라 서방 정보기관, 러시아 연방까지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크라스나야는 수십 년간 혁명연대 소탕을 위해 국제 공조를 추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주보프는 계속해서 도망쳤다. 1991년 베를린에서 주보프 체포 작전이 진행되었으나, 로카제프(Rokazev) 요원 3명이 사망하며 작전은 실패했다.
2005년, 크라스나야 로카제프 및 통합안보기획국(National Security Planning Agency, NSPB)은 혁명연대가 프랑스 파리에서 대규모 테러를 계획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특히 주보프의 오른팔인 용병 ‘안드레이 마르코프(Andrey Markov)’가 테러에 직접 개입한다는 정보가 확보되었다. 크라스나야는 즉각 프랑스 정부와 공조를 결정했고, 미국, 영국, 러시아 정보기관도 작전에 합류하며 국제적인 대테러 작전이 전개되었다. 3월부터 대대적인 공조 수사가 진행되었으며, 혁명연대 조직원들이 체포되거나 사살되면서 테러가 저지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4월부터 크라스나야 로카제프 요원 및 공조 중이던 각국 정보기관 요원들이 하나둘 연락이 두절되었고, 일부 요원들은 사살된 채 발견되었다. 결국, 크라스나야 정보기관은 파리에서 테러가 실행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결론지었다.
2005년, 6월 12일 오후 2시, 파리 동쪽 30km 상공에서 혁명연대가 운용하는 Su-30 전투기가 갑자기 출현했다. Su-30 전투기들은 파리 인근 공군기지를 레이저 유도 폭탄으로 초토화, 프랑스 공군의 즉각 대응을 차단하였고, 동시에 파리 시내에서는 동시다발적 폭탄 테러 발생, 폭탄이 실린 트럭이 도심 곳곳에서 폭발했다. 프랑스 정부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으나,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조차 안전을 위해 지하벙커로 대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혁명연대의 Su-30 전투기 1대가 에펠탑을 향해 공대지 미사일을 발사하였고, 미사일 직격 후 3분 만에 에펠탑 붕괴되었다. 프랑스군과 NATO 대응부대가 긴급 출동했으나, 혁명연대 전투기들은 즉시 이탈했고, 프랑스 공군은 격추된 2대를 제외한 나머지 기체를 놓쳤다. 격추된 Su-30의 잔해를 조사했지만, 일련번호 및 기체 출처를 추적할 수 없도록 조작된 상태였다.
프랑스는 혁명연대의 대담한 테러에 분노하며 즉각 대테러 작전을 강화했다. 차르 안드레이와 수상 이고르 류는 ‘향후 20년 안에 혁명연대를 완전히 소탕하겠다’고 선언하였다. 크라스나야는 혁명연대 소탕을 최우선 안보 과제로 설정하고, 대대적인 작전을 전개했다. 기존의 추적 방식에서 벗어나, 안드레이는 새로운 접근법을 지시했다. 혁명연대의 자금 루트를 추적하여 근본적인 운영망을 붕괴하는 전략 추진했다. 크라스나야 로카제프, 통합안보기획국(NSPB), 군 정보국이 공조하여 약 5,000명 규모의 병력을 동원해 혁명연대의 점조직을 차례로 격파하였고,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중동, 아프리카에 퍼져 있는 혁명연대 거점들이 집중 타격을 받아 무너졌다. 특히, 혁명연대가 이란에 핵기술을 제공하려던 중견 간부 ‘니키타 가즈마노프(Nikita Gazmanov)’ 체포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니키타 가즈마노프는 체포 후,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고, 이에 차르 안드레이는 ‘필요한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라도 동원하라’고 지시하며, 고문을 허용했다. 로카제프 요원들은 비인도적 방식(고문, 약물투여 등)을 통해 정보를 추출했다. 그 결과, 혁명연대의 중견 간부들을 추가로 체포하는 데 성공하였다. 혁명연대는 큰 타격을 입었지만, 도미니크 주보프와 안드레이 마르코프는 여전히 활동 중인 상태이다. 2005년 이후에도 혁명연대의 점조직은 여전히 국제사회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완전한 소탕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크라스나야는 혁명연대를 영구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국제사회와 지속적인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격추된 Su-30 전투기의 기체 일련번호와 제조 기록을 조사한 결과, 이 기체들이 공식적인 국가군 소속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추가적인 정보 분석 결과, 혁명연대가 사용한 Su-30 전투기들은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러시아계 용병 집단으로부터 비밀리에 구매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용병 집단은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군 출신 장교들이 조직한 ‘그림자 군대(Shadow Legion)’로 알려져 있으며,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무기 밀거래 및 PMC(Private Military Company) 활동을 수행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불법적인 무기 거래망을 통해 여러 국가 및 조직과 연계되어 있으며, 혁명연대에 Su-30 전투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군사 장비를 제공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특히, 이 용병 집단은 과거 러시아 및 크라스나야 군사 계약을 통해 훈련받은 인원들이 대거 포함된 것으로 밝혀져, 크라스나야 정보 당국은 향후 이들 조직에 대한 추가 조사를 결정했다. 혁명연대가 단순한 테러 조직이 아닌, 국제 무기 밀거래망과 연결된 준군사 조직이라는 점이 확인되면서, 크라스나야 정부는 기존의 대테러 전략을 수정하기로 결정했다. 차르 안드레이와 수상 이고르 류는 혁명연대를 단순히 테러조직으로 단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무기 공급선을 차단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크라스나야 정보국, 군사 정보기관, 로카제프 특수부대는 불법 무기 거래망을 추적하기 위한 새로운 작전을 개시했다. 특히, 혁명연대가 무기를 조달한 ‘그림자 군대’에 대한 공조 수사가 미국 CIA, 러시아 FSB, 프랑스 DGSE(대외안보총국)와 함께 진행되었다.
이고르 류 내각 하에서 크라스나야는 일본과의 경제 협력을 심화하며 아시아 평화와 안보 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적 역할을 강화했다. 산둥반도와 랴오둥반도를 잇는 해저터널 건설 및 아시아 천연가스 컨소시엄 확대에 집중했으며, 특히 북한의 불참으로 무산되었던 대한민국까지 연결되는 가스관 건설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경제적으로 중국과 맞먹는 아시아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며, 칠자회담(남한·북한·미국·중국·일본·러시아·크라스나야)의 일원으로 한반도 비핵화를 적극 지지했다.
2006년 10월 3일, 북한이 국영 방송을 통해 핵실험을 예고했다. 10월 9일, 함경북도 화대군 지역에서 진도 3.58~3.7 규모의 인공지진파 감지하였다. 크라스나야는 이를 분석하였고 0.8kt~1.0kt급 핵폭발(사실상 실패작)으로 판단했다. 2006년 10월 1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UNSC) 대북 제재 결의 1718호 만장일치 통과. 하지만 크라스나야는 북한의 핵실험을 심각한 안보 위협으로 간주, 극동함대를 동해에 전개하고 총참모부는 '작전계획 8231-30'(Operatsiya 1946-15/북한 선제타격 계획) 발동 요청하였다.
크라스나야 총참모부는 선제타격 승인 요청, 황실 자문위원단 역시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내각은 신중한 입장을 견지, 두 가지 이유로 작전 승인을 유보하였다. 북한의 핵실험이 전면전으로 이어질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 아니며, 중국이 북한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상황에서 전면전은 부담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각의 강경파와 황실의 자문위원단은 선제타격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고, 차르 안드레이는 5시간 만에 작전계획 승인하였다. 크라스나야 극동함대와 공군이 동해에 배치, 폭격기 출격 준비 완료하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대한민국의 강경한 반응으로 역풍이 불었다. 주 서울 크라스나야 대사관을 통해 ‘북폭 자제 요청’, 한국 정부는 북한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중국은 즉각 크라스나야에 북한 문제 해결을 맡길 것을 요청, 사실상 중국이 북한을 직접 관리하겠다는 의사 표명했다. 크라스나야는 동아시아 각국의 외교적 요청을 받아들여 작전계획 8231-30을 전면 중단했다. 만약 작전이 실행되었다면, 북한은 수백 기의 순항미사일과 수천 톤의 폭탄 세례를 맞고 초토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크라스나야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북한에 대한 강경 대응 기조를 유지할 것을 천명했으며, 향후 북한이 추가 도발을 감행할 경우 선제타격을 포함한 군사 개입을 배제하지 않겠다고 발표하였다. 이후, 북한은 크라스나야의 강경 대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추가적인 핵실험을 자제했으며, 중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군사적 개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2003년, 미국에서는 서브프라임(Subprime) 계층을 대상으로 한 대출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당시 은행들은 대출 규정을 점차 완화하며, 고객이 자신의 금융재산을 직접 증명할 필요 없이 신용을 기반으로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처음에는 소득·자산 증빙(Verified Income, Verified Assets)이 필요했으나, 점차 소득 선언·자산 증빙(Stated Income, Verified Assets)으로 변경되었고, 결국 소득·자산 모두 선언(Stated Income, Stated Assets)으로 대폭 완화되었다. 이로 인해 대출 신청자는 자신의 재산과 소득을 증빙할 필요 없이, 단순히 ‘수입이 있다’고 기재하는 것만으로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 서브프라임 대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중국과 신흥국가에서도 이 대출을 기반으로 한 금융상품(CDO, 부채담보부증권)에 대규모 자금이 유입되었다. 하지만 더 많은 모기지(주택담보대출)가 필요해지자, 은행들은 NINA(No Income, No Asset) 대출을 도입했다. NINA 대출은 소득과 자산을 전혀 확인하지 않고도 대출을 승인하는 방식으로, 말 그대로 고객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대출을 실행하는 위험한 상품이었다.
이 시기 미국 정부는 '한 가구 한 주택' 정책을 추진하며, 연방준비제도(Fed)가 기준금리를 낮게 유지했다. 낮은 금리로 인해 은행들은 저금리를 유지하며 대출을 확대했고, 주택 수요가 급증하면서 부동산 시장에 거품이 형성되었다. 주택 가격이 계속 상승하자, 대출자들은 설령 대출을 갚을 수 없더라도 집값이 오르면 되팔아 빚을 청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2006년, 미국 부동산 시장의 거품은 최고조에 달했다. 거품 규모는 약 2조 달러로 추산되며,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주택 가격이 과도하게 상승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결국, 거품이 붕괴되면서 주택 가격이 하락했고, 다수의 서브프라임 대출자들은 더 이상 주택을 팔아 대출을 상환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서브프라임 계층의 대출자들이 대거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선언했으며,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한 금융기관들은 손실을 입기 시작했다. 경기 침체가 본격화되면서 실업률이 상승했고,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집을 구입한 사람들은 파산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이렇게 미국 경제의 중심이 흔들리면서, 세계 금융위기의 전조가 시작되었다.
21세기 들어 고유가를 배경으로 경제적 부활을 이룬 러시아와 이에 대응하는 미국·유럽연합(EU) 간의 긴장 관계가 지속되었다. 특히 소련 붕괴 이후 조지아(그루지야)의 자치 지역이었던 남오세티야가 분리독립을 선언하면서, 이를 저지하려는 조지아 정부와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1991~1992년 남오세티야 전쟁 이후, 러시아가 개입하여 츠힌발리 공동관리 체제가 도입되었으나, 남오세티야와 러시아 간의 밀월관계가 형성되면서 조지아의 반러 감정은 더욱 심화되었다. 조지아는 소련 최후의 외무상이었던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대통령 시기부터 서방과의 관계를 강화하며, 미국과 EU로부터 경제 및 군사 원조를 받았다. 서방은 카스피해 및 중앙아시아로부터 유럽으로 원유·천연가스를 공급하는 주요 경로인 BTC 송유관을 건설하며 조지아를 러시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하려 했다.
2003년 장미혁명을 통해 미하일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가 집권하면서, 조지아의 친서방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사카슈빌리는 조지아의 NATO 가입을 추진하고 미국으로부터 대규모 군사 원조를 유치했다. 2006년 남오세티야에서 독립 찬반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독립파의 승리로 귀결되었으나, 조지아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사카슈빌리는 이를 ‘러시아의 강제 병합 음모’라고 비난하며 군사적 압박을 강화했고, 러시아 역시 이에 반발하면서 양국 간 긴장이 급격히 고조되었다.
2008년 초, 조지아는 미군과 합동군사훈련을 진행했고, 이에 대응해 러시아 공군이 조지아의 UAV를 격추하며 무력 시위를 감행했다. 7월, 러시아군이 국경지대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한 후 병력을 철수하지 않으면서 긴장 상태가 최고조에 달했다. 이 과정에서 남오세티야 무장조직과 조지아군 간의 소규모 충돌이 이어졌으며, 서방에서는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전면전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 기대는 완전히 무너졌다.
2008년 8월 8일, 조지아군이 남오세티야의 수도 츠힌발리에 포격을 개시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러시아군 평화유지대 18명이 사망하고 35명이 부상을 입자, 러시아는 즉각 반격에 나섰다. 러시아 제58군이 조지아군과 츠힌발리에서 교전을 시작했으며, 러시아 공군이 조지아 영공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조지아군은 압도적인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러시아군은 남오세티야뿐만 아니라 조지아 본토까지 진격하며 흑해 연안의 포티 항구를 점령했고, 기갑부대를 앞세워 수도 트빌리시를 압박했다. 8월 12일, 조지아는 사실상 항복을 선언했으며, 러시아는 공세 종료를 발표했다. 이후 프랑스의 중재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고, 8월 16일 러시아가 평화안에 최종 서명하면서 전쟁이 종결되었다. 크라스나야는 공식적으로 러시아의 군사작전을 지지하지 않았으나, 이를 묵인하는 입장을 취했다. 예카테린부르크의 집단안보조약기구(CSTO)는 러시아군의 작전 개시를 인지했으나,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반면 미국과 유럽연합은 러시아를 강력하게 비난하며, 조지아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조지아는 전쟁 이후 러시아와 크라스나야가 주도하는 유라시아 국가 연맹(Eurasian Confederation) 및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크라스나야는 조지아의 일방적인 탈퇴가 조약을 위반하는 행위라고 규탄하며, 외교적 압박과 경제제재를 동원하여 이를 저지했다. 국제사회에서는 러시아의 강경한 군사 개입이 구소련 지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의도로 해석되었다. 냉전 종식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가 군사력을 사용해 자국의 이익을 관철한 사례였으며, 조지아의 NATO 가입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는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의 독립을 승인하며, 사실상 이 지역을 보호국화했다.
크라스나야는 전쟁을 통해 조지아가 러시아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이탈하는 것을 막고자 했으며, 조지아가 유라시아 국가 연맹에서 이탈하지 못하도록 외교적 압력을 가하는 형태로 대응했다. 결과적으로 크라스나야는 러시아의 군사 행동을 묵인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개입하지 않는 균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2008년 9월 15일, 미국의 4대 투자은행 중 하나인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 Holdings Inc.)가 6,000억 달러(약 700조 원) 규모의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을 선언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시작된 금융위기는 이제 세계 경제 전체를 강타하는 2008년 금융위기(Global Financial Crisis)로 확산되었다.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과 메릴린치(Merrill Lynch)의 긴급 매각, 다우지수의 폭락은 미국 경제뿐만 아니라 전 세계 금융시장에 연쇄적인 충격을 주었다. 크라스나야 역시 이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경제는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수상 이고르 류(Igor Liu)와 국민당-자민당 연정 내각은 위기를 방어하기 위해 다양한 경기부양 정책을 추진했다. 2008년에는 마이너스 성장률을 가까스로 피했으나, 실질적으로 물가 상승률을 고려하면 경기 침체(실질적 마이너스 성장)에 빠졌던 것과 다름없었다. 경제정책을 둘러싸고 연립정부 내에서 갈등이 심화되었다. 특히 국민당과 자민당 간의 경제정책 불일치로 인해 연정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국민당이 추진한 경제법안이 자민당과 야당의 반대로 좌절되면서 국민당이 정치적으로 밀리는 형국이 되었다. 국민당과 자민당 간의 불화는 결국 연정 붕괴로 이어졌고, 이고르는 새로운 내각을 개편하며 국민당 단독 내각을 출범시켰다. 국민당 지도부는 원내 최대 정당의 지위를 활용해 독자적인 정책을 추진하며, 경제위기 방어에 성공한다면 차기 선거에서 다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2009년 경제성장률이 결국 마이너스를 기록하면서, 국민당 내각은 야당의 강한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실질적으로 경제정책이 실패했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국제적 경제 위기의 여파를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야당은 경제 침체를 이유로 국민당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아가샤 아쿨리나(Agatha Akulina)가 국민당의 정권을 지키기로 결정하며 극적인 연정 복원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자민당과 국민당 간의 협력이 다시 재개되었고, 정권 유지가 최우선 목표가 되었다.
아가샤-리 내각(2010~2012)
자민당의 총수 아가샤 아쿨리나와 국민당의 총수 세르게이 리(Sergey Li)는 연정 지속을 공식 선언하며 총선 승리를 다짐했다. 2009년 8월 총선 결과, 자민당이 31% 의석을 확보하였으며, 국민당이 22%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결국 연정을 통해 과반 의석 확보 성공한 것이다. 이후 10월 총리 선거에서 이고르 류는 낙선했으나, 아가샤 아쿨리나가 71%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며 수상이 되었다. 이를 통해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성공했으며, 자민당-국민당 연정은 계속 유지되었다.
2009년 총선에서 아가샤 아쿨리나(Agatha Akulina)가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국민당 출신 수상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자유민주당(자민당)과 국민당 간의 연정 자체는 유지되었으며, 정치적 불안정을 막기 위해 양당의 지도부는 협력 관계를 지속했다. 아가샤는 집권 초기부터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적극적인 경제 정책을 시행했다. 경제 부양책을 신속하게 도입하며 금융 시장 안정화, 대규모 투자 유치, 기업 지원 프로그램 등을 추진했다. 이 정책들은 점차 효과를 보이면서 크라스나야 경제 지표가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금융위기의 충격을 성공적으로 완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러나 2011년 3월 11일, 크라스나야의 경제 회복이 가시화되던 시점에 예상치 못한 대형 재난이 발생했다. 일본 도호쿠 지방 센다이 동쪽 70km 해역에서 M9.1 규모의 대지진이 발생했고, 이는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지진이었다. 크라스나야 정부는 즉각 스더니츠키 제도 및 쿠릴 열도 지역에 긴급 경보를 발령하고, 쓰나미에 대비했다. 스더니츠키 남부에서는 실제로 일부 쓰나미 피해가 발생했지만, 군과 재난 당국의 신속한 대처 덕분에 피해는 경미한 수준에 그쳤다. 아가샤는 즉시 주일 크라스나야 대사를 통해 일본에 복구 지원 의사를 전달했고, 일본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대지진은 단순한 자연재해로 끝나지 않았다.
대지진 발생 직후, 10m 높이의 쓰나미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를 덮쳤다. 원자로는 자동적으로 셧다운되었지만, 비상발전 시스템이 침수되면서 냉각 기능이 마비되었다. 일본 정부는 초기 대응에 실패했고, 결국 원자로 3기가 노심용융(meltdown)을 일으키며, 원전 건물 4개가 폭발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크라스나야 정부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대응했던 기술진과 전문가들로 구성된 특별 대응팀을 일본에 파견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크라스나야가 보유한 방사능 재난 대응 노하우를 활용해 후쿠시마 사태를 조기에 수습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를 거부하며,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상황이 악화되었음에도 일본 정부는 여전히 국제사회의 개입을 최소화하려 했고, 방사능 오염수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채 무단 방류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에 대해 아가샤 아쿨리나는 공식 석상에서 일본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며 격분했고, 결국 크라스나야와 일본의 외교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크라스나야 정부는 일본의 무책임한 방사능 오염수 방류를 국제 사회에서 문제 삼을 것을 천명하면서, 양국 간 갈등이 심화되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크라스나야와 일본 간 갈등이 일었지만, 이는 일본 정부의 대응 실패 때문이지 크라스나야 정부의 실책은 아니었다. 아가샤 아쿨리나는 군사적 개입을 고려했으나, 국제적 리스크를 감안하여 이를 포기하고 외교적, 인도적 지원에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크라스나야는 도호쿠 대지진 및 후쿠시마 사태 대응에서 국제적 위신을 유지하며 정치적으로도 정당한 길을 걸었다. 아가샤는 이후 경제 회복을 위한 정책을 강화하며 경제 지표를 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정치적 상황은 더욱 불안정해졌다.
자유민주당(자민당)은 집권 이후 계속된 사회당과 좌익전선의 강력한 공세로 인해 정치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 국민당 내부의 당내 스캔들, 자민당 내 정치자금 문제 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면서 야당은 이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좌익전선은 특히 아가샤가 블라디미르 푸틴과 정상회담을 가진 것을 거론하며, 친러 정책의 정당성을 해명하라고 압박했다. 이로 인해 자민당과 국민당 간의 연정이 표면적으로는 유지되는 듯했지만, 내부적으로는 계속해서 불협화음이 발생했다. 자민당과 국민당은 경제 정책과 개혁 방향에서 심각한 견해 차이를 보였으며, 국민당 내부에서도 점점 연정 지속의 실효성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결국, 국민당 당수 세르게이 리는 2011년 10월 15일, 연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정치적 생존을 위한 전략적 판단이었지만, 이미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아가샤에게 치명적인 오판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가샤는 국민당의 연정 파기가 단순한 정치적 결별이 아니라 반란 시도의 일부라고 믿었고, 수도기계화여단을 동원해 국민당 당사를 포위했다. 동시에 경찰 병력을 동원하여 국민당 고위 당원들을 긴급 체포하는 강경 조치를 취했다. 아가샤의 보고서에는 국민당이 정부 전복을 시도하고 있다는 정황이 담겨 있었고, 차르 안드레이는 이를 신뢰했다. 안드레이는 아가샤를 신임하고 있었고, 국민당이 러시아와 미국을 오가며 불안정한 행보를 보였다는 점에서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로카제프(Rokazev)와 통합안보기획국의 조사 결과, 아가샤의 보고서가 완전한 허위임이 밝혀졌다. 국민당의 연정 파기는 단순한 정치적 결정이었을 뿐, 정부 전복을 시도한 정황은 전혀 없었다. 이에 안드레이 차르는 즉각 개입하여 군을 철수시키고, 체포된 국민당 고위 당원들을 석방했다. 동시에, 아가샤의 수상 권한을 정지하고 가택 연금에 처했다. 이는 크라스나야 역사상 차르가 실권을 행사해 수상의 권한을 정지시킨 첫 사례였으며, 국제 사회는 크라스크에서 벌어진 이 정치적 혼란에 주목했다. 안드레이 차르는 아가샤의 공적을 인정하면서도, 그녀가 심신미약 상태에서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형사적 처벌 대신 가택 연금이라는 비교적 온건한 조치를 내렸다. 본래 아가샤의 행위는 법적으로 반역죄에 해당하며, 수십 년의 징역형이 선고될 수도 있었지만, 차르의 초법적 개입으로 이를 최소한의 처벌로 마무리했다.
아가샤 아쿨리나가 가택연금을 당하면서 크라스나야의 수상직이 공석이 되었다. 국민당 출신의 부수상이었던 세르게이 리가 임시로 수상직을 이어받았으나, 이미 자민당과 국민당의 연정이 파기된 상태였다. 이에 따라 자민당은 국민당이 정권을 승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세르게이 리에 대한 불신임안을 가결했다. 안드레이 크라스나야 차르 역시 연정이 깨진 상황에서 국민당이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하며, 수상직선을 통해 새로운 수상을 선출할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큐니르 내각(2012~)
수상직선에서 사회당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황실 자문위원을 역임했던 무소속 후보 니콜라이 큐니르가 유력한 수상 후보로 떠올랐다. 그는 크라스크 대학 총장을 비롯해 다양한 직책을 역임한 지식인 출신으로, 크라스나야 국민들의 폭넓은 관심과 지지를 받았다. 큐니르가 공식적으로 사회당에 가입하면서 그의 지지층은 더욱 확산되었으며, 결국 선거에서 승리하여 크라스나야의 새로운 수상으로 집권하게 되었다. 집권한 큐니르 수상은 자민당이 시행했던 경제 방어정책을 확대하는 동시에, 보편적 복지국가를 완성하는 것이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기존의 복지정책을 북유럽 수준으로 확대하며, 사회경제적 투명성을 높이고, 모든 정책을 공개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천명했다. 안드레이 차르 역시 황실 자문위원 출신인 큐니르를 신뢰하며, 그의 정책을 존중하고 적극 지지했다.
집권 후 큐니르 수상은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주요 유럽국가를 순방하며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크라스나야의 경제 협력을 확대하고, 세계 경제 질서에서 크라스나야의 입지를 강화하는 전략을 추진했다. 이후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러시아 대통령 메드베데프는 러시아가 지정학적 위기에 처해 있으며, 이를 해결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큐니르에게 밝혔다. 이에 대해 큐니르 수상은 유라시아 국가연맹이야말로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가 유라시아 국가연맹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경제 협력을 강화하면, 가맹국 간의 경제적 발전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메드베데프 역시 이에 동의하였으며, 유라시아 국가연맹 내 경제통합을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위해 유라시아 국가연맹 내 경제통합 기구를 신설하고, 가맹국 간의 통화 통합을 위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12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이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크라스나야의 정보기관과 언론매체들은 선거 과정에서 부정투표 의혹을 일부 발견했지만, 크라스나야 정부는 러시아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이를 공식적으로 문제 삼지 않았다. 안드레이 크라스나야 차르는 푸틴의 당선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내며, 그의 재집권이 크라스나야와 러시아의 파트너십을 더욱 강화할 것이라 기대했다. 크라스나야 지도부는 과거 푸틴의 첫 번째 집권기(2000~2008) 동안 양국이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푸틴이 크라스나야와 협력하는 방향을 유지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양국의 이해관계가 서로 충돌하면서 결국 갈등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2000년대 초중반, 이라크 전쟁과 중동 분쟁으로 인한 고유가 상황 덕분에 러시아 경제는 급격히 성장했다.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러시아는 군사력 및 경제 전반을 확장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대규모 국채를 발행하여 크라스나야의 경제적 지배력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러시아는 국내 발행 국채를 자국 금융 시스템 내에서 돌려막기하며, 경제 규모를 부풀리는 전략을 사용했다. 크라스나야 당국은 러시아의 이러한 방식이 장기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양국이 공식 석상에서 서로를 "맹방(盟邦)"이라 부르며 긴밀한 경제협력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직접적인 대응을 자제했다. 하지만 러시아 경제가 커질수록, 내부에서는 크라스나야의 경제적 지배력에 대한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러시아 내부에서는 구소련의 지정학적 입지를 회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동시에 크라스나야에 대한 반감이 증폭되었다. 러시아는 크라스나야를 경제적 종속국처럼 여기던 구소련 시절의 시각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으며, 크라스나야가 러시아보다 더 강력한 정치·경제·군사적 입지를 구축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2012년 12월, 블라디미르 푸틴은 공식석상에서 "크라스나야는 러시아를 식민화하려 하고 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선이 있으며, 이를 넘으면 러시아와 크라스나야의 운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이다." 라는 강경 발언을 하며, 처음으로 크라스나야와 러시아 사이의 균열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내각은 푸틴의 발언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간주했다. 크라스나야는 러시아의 산업 발전을 지원하는 핵심 파트너였으며, 만약 크라스나야가 러시아에 대한 경제적 압박을 강화한다면, 러시아의 산업 기반은 즉시 붕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차르 안드레이는 푸틴의 강경 발언을 일시적인 변덕으로 판단했다. 러시아가 크라스나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해도, 경제적으로 크라스나야에 의존하는 한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2013년 1월, 러시아 전역에서 반크라스나야 시위 발생했으며, 2013년 1월 7일, 모스크바에서 대규모 반크라스나야 시위가 발생했다. 시위는 순식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롯한 주요 도시로 확산되었고, 러시아 내부에서 "크라스나야의 경제적 지배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졌다. 이러한 반크라스나야 시위는 푸틴에게 자신이 러시아를 변화시키고 있음을 입증할 기회가 되었다. 푸틴은 러시아 경제 발전이 오직 오일머니와 국채 돌려막기가 아닌, 그의 정치·경제적 리더십 덕분이라고 주장하며, 크라스나야의 경제적 영향력을 줄이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프레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반크라스나야 시위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내부에서는 여전히 친크라스나야 세력의 영향력이 강력했다. 친크라스나야 정당인 '러시아 공화당'은 통합러시아당을 맹추격하며 제1야당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반크라스나야 시위가 러시아의 정치 지형을 완전히 바꾸거나 크라스나야의 경제적 영향력을 무너뜨리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틴 정부가 크라스나야의 영향력을 경계하기 시작한 것은 명확한 사실이었다. 러시아와 크라스나야는 여전히 서로를 중요한 동반자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제 양국이 각자의 대러시아 회복 전략을 두고 정면으로 충돌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러시아와 크라스나야의 불협화음이 일부 존재했지만, 본격적인 갈등의 시작은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비롯되었다. 2013년 12월, 우크라이나 정부가 유럽연합(EU) 가입과 경제협력을 포기하고 러시아와 우호적인 협력 조약을 체결하자, 이에 반대하는 친서방 세력이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다. 유럽연합 가입 무산이 야기한 분노는 곧 우크라이나 내부의 민족·언어 갈등, 정치적 분열, 경제 위기 등의 복잡한 문제와 얽히면서 격화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소련 시기의 대기근과 타타르족·러시아인 이주 정책으로 인한 민족구성 변화, 니키타 흐루쇼프의 크림반도 우크라이나 귀속 결정, 오렌지 혁명과 친서방 노선, 남오세티야 전쟁과 동유럽의 반러 정서 확산 등으로 러시아와 서방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지정학적 핵심 지역이었다. 유럽연합과 러시아의 경제 지원 경쟁도 갈등을 심화시켰다.
러시아는 150억 달러 차관 제공과 함께 천연가스 가격 인하 조건을 제시, 유럽연합은 200억 유로 차관을 제안했지만 강도 높은 개혁 조건을 내걸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경제·정치적 현실을 고려해 러시아의 제안을 수용했지만, 이를 반대하는 시위대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예속될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고,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를 강경 진압하면서 갈등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특수부대를 투입했으나, 이 과정에서 다수의 부상자와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정부는 시위 자체를 금지하는 반민주적 법안(반시위법)을 공포했지만, 이는 오히려 반정부 세력을 자극하여 시위가 더욱 격렬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시위대는 단순한 저항을 넘어 갑옷과 방패, 철퇴, 투석기까지 동원하여 사실상 중세 시대를 방불케 하는 거리전투를 전개했다. 수도 키예프는 전투 구역으로 변했으며,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진압 경찰과 시위대 간의 격전이 벌어졌다.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양측 모두에게 폭력을 멈출 것을 호소했고, 크라스나야 정부도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결국 정부군이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발포하며 본격적인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2014년 2월, 율리아 티모셴코 전 총리가 석방되었고,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탄핵되었다. 이후 알렉산드르 투르치노프 의원이 임시 대통령으로 지명되었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새로운 친서방 정부를 즉각 인정했으며, 크라스나야는 중립을 유지하며 사태를 관망했다. 반면 러시아와 야누코비치 측은 "불법 쿠데타"라며 강하게 반발했다.친러 성향의 야누코비치는 결국 국외로 탈출하였으며, 같은 날 우크라이나 의회는 러시아어의 제2공용어 지위를 박탈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며 친서방 노선을 확고히 했다. 지역당 소속 의원들과 키예프 시장이 대거 탈당하면서 친러 정권의 붕괴가 현실화되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에도 우크라이나 동남부 친러 세력의 반발은 예상보다 미미했다.
친러 정권이 붕괴되는 것을 막을 결정적 저항이 부족했고, 결국 러시아가 직접 개입하지 않는 한 친서방 정권이 유지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러시아는 지정학적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EU)에 합류하면, 자연스럽게 NATO 가입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었고, 러시아의 서부 국경에서 NATO 군사력이 배치될 위험이 커지게 되었다. 특히 러시아는 역사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우크라이나를 보호국 또는 위성국으로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컸다. 우크라이나가 서방의 손에 넘어가는 것은 러시아가 지정학적 패배를 의미했고,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크라스나야 역시 우크라이나 문제에 대한 입장이 복잡했다.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정권 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으나, 우크라이나가 유라시아 국가 연맹(CSE)에서 탈퇴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크라스나야 정부는 "우크라이나의 주권적 선택을 존중하지만, 연맹에서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푸틴 정부는 우크라이나를 서방의 영향력에서 되찾기 위한 군사적 개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2014년 2월 27일, 등장한 세르게이 악쇼노프(Sergey Aksyonov)가 크림 자치공화국 총리에 취임하며, 푸틴 대통령에게 “크림의 안정을 위해 지원해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러시아는 “못 본 척하지 않겠다”며 사실상 군사 개입을 시사했다. 2월 28일, 러시아 흑해함대 소속 해군 보병들이 크림 반도의 주요 공항을 무혈 점령했다. 3월 1일,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영토에 2,000명의 무장 병력을 투입하며 본격적인 개입을 시작했다. 이에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러시아는 대가를 치를 것이다”라며 강력 경고했으며, 크라스나야 역시 “유라시아 국가연맹 조약을 위반한 행위”라고 비판했으나, 직접적인 제재는 부과하지 않았다. 이후 크림 자치공화국 의회는 러시아 합병을 결의하고, 3월 15일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UNSC)는 크림 합병을 인정하지 않는 결의안을 상정했지만, 러시아-크라스나야 공동상임위원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3월 16일, 주민투표 결과 96.77% 찬성으로 크림 반도의 러시아 귀속이 확정되었다. 3월 21일, 러시아와 크림 공화국은 공식 병합 조약을 비준, 크림 반도는 공식적으로 러시아 연방의 일부가 되었다. 러시아의 크림 병합 직후, 우크라이나는 이에 강력히 반발하며 유라시아 국가연맹 탈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크라스나야는 우크라이나의 연맹 탈퇴를 원치 않았고, 사태 해결을 위해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 조율에 나섰다. 동시에, 크라스나야는 유라시아 국가연맹 의장국으로서 러시아의 회원 자격을 정지시키는 결의를 강행했다. 4월 1일부로 러시아의 연맹 회원 자격은 공식적으로 정지되었다. 하지만 크라스나야의 이러한 결정은 실질적인 제재라기보다는 “우크라이나를 붙잡기 위한 보여주기식 조치”라는 평가를 받았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싸고, 크라스나야와 러시아의 전략은 완전히 엇갈렸다. 크라스나야는 “주권국가인 우크라이나의 선택을 존중”하며 단지 유라시아 국가연맹의 가맹국으로 남아 성실히 의무를 이행하길 원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보호국 또는 위성국으로 유지”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크라스나야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크라스나야는 러시아와 어떠한 협의도 진행하지 않은 채, 유라시아 국가연맹에서 러시아를 회원국에서 제명하고 약간의 경제제재를 부과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강한 제재는 없었기 때문에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