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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혹은 그란치프 전쟁(키르수스어: Grankischer Krieg 그란키셔 크리크), 4년 전쟁(그란치프어: Guerre de Quatre Ans 게르 드 카트르 앙), 천하전쟁(제1연합어: Поднебесная война 포드네베스나야 바이나)은 1650년 8월 2일부터 1654년 7월 7일까지 헤스페로스벨트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이 전쟁을 통해 키르수스가 기존의 그란치프 제국을 꺾고 헤스페로스벨트의 패권국으로 군림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이다.
배경
키르수스-그란치프 적대
역사적으로 키르수스와 그란치프 제국은 여러 차례 중대하게 충돌했다. 고대의 슈베로니아-팔로렌스 전쟁에서부터 중세의 아슈트카이트 영방국가연합과 그란치프 왕국의 전쟁 등이 존재했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1391년의 투리스문트 전쟁이다. 40년 전쟁의 와중, 아슈트카이트 영방국가연합의 후방을 뤼시앵 샤를루이나의 그란치프 공동국이 공격해 막대한 타격을 입히면서 250년에 걸친 적대 관계가 형성이 된다. 40년 전쟁 이후 수립된 키르수스는 그 군대의 대부분을 그란치프 제국과의 국경에 배치했고, 전략적으로 그들을 가상 적국으로 삼았다. 이 상태는 내전인 슈베른란트 통일 전쟁에서도 유지되었다.
슈베른란트 통일 전쟁과 같은 시기, 대양전쟁과 레란스토비 전쟁이 일어난 시대를 통칭해 보편전기라 부른다. 슈베른란트 통일 전쟁 당시 키르수스의 동방견제는 그란치프 제국의 레란스토비 전쟁으로 일시적으로 완화되었다. 대양전쟁과 슈베른란트 통일 전쟁을 동시에 치루던 라그렌센트 왕국이 키르수스의 명목상 제후국이 되었고, 키르수스는 비교적 빠른 산업혁명을 누렸다. 1560년대의 제2차 베른하이어 내전에서 베른하이어 남부의 경제력을 강탈하였으며, 베른하이어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했다. 반면, 그란치프 제국은 발키로르 왕국과 벌인 레란스토비 전쟁에서 사흐트라한 제국을 비롯한 오플렌티엠의 여러 국가들과 대규모의 전쟁을 치루어 패배했고, 이는 그들이 외교적 중요성을 깨닫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대키르수스 포위망
키르수스는 대영방전쟁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그란치프 제국을 제외한 타국에 대한 관계를 구성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키르수스가 위치한 슈베른란트는 통일되어 있고, 막대한 인구와 그를 지탱할 농업 생산력을 지녔고, 대륙 최대의 산업화 국가였다. 때문에 외부와의 관계가 형성될 필요가 없었다. 반면, 그란치프 제국은 지리적으로 그 영토가 셋으로 나눠져 있었으며, 에세르 지방의 막대한 농업 생산력을 제외하면 특출난 것이 없었다. 산업혁명조차 1550년대 중반에 들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산업 지대도 미약하게 밀집되어 있었다. 그러나 1614년의 기근은 해외로 그들의 시선을 돌리게 하였고, 코르보날, 에르미니아 왕국, 베른하이어, 게파르토 제국 등과 외교·정치적 관계를 맺게 했다.
슈베로니아 제국 이후 헤스페로스벨트에는 황제교라 불리는 종교가 뿌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지리적 폐쇄성과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여러 종파로 분열되었다. 키르수스 황제교, 그란치프 황제교, 게파르토 황제교, 코르보날 황제교 등 각 국가마다 서로 다른 교리를 가진 황제교를 믿었다. 그 중 키르수스 황제교와 게파르토 황제교는 국가의 수장인 황제가 곧 신적 존재인 신정일치 국가였고, 코르보날에게 있어서 그들과의 종교적 충돌은 항상 우려되었다. 더구나 그들의 북부, 키르수스와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키르수스계 자치령의 영향력 확대에 있어서 그들이 키르수스와 손을 잡고 준동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두 주요한 문제를 포함한 기타 문제로 인해 코르보날과 그란치프 제국은 16__년 __월 __일, __ 조약을 통해 동맹 관계를 맺는다.
/**에르미니아*/
1514년 탈분리를 통해 라그렌센트 왕국, 베른하이어는 키르수스의 제후국이 된다. 1558년부터 1663년에 걸친 제2차 베른하이어 내전을 통해 키르수스는 베른하이어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1674년 대불황에 의해 양국의 경제가 타격을 입고 베른하이어에는 문화적 쇠퇴, 키르수스에는 정치적 쇠퇴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627년 베른하이어의 학자들에 의해 추성 협상이 발생한다. 그 요지는 그들의 정치 질서를 시민 엘리트 위주로 개편함에 있었고, 해당 정변에 그란치프 제국의 군대가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후 그란치프 제국-베른하이어 관계는 돈독해졌고, 비밀 조약인 __ 조약을 통해 그들의 동맹 관계가 구축되었다.
에세르 지방은 헤스페로스벨트 최대의 곡창지대로서, 중세에서부터 위상이 돋보였다. 그란치프 왕국에서 약 반천년의 기간 동안 그란치프의 영토였고, 해당 지역의 농산물은 그들의 산업화의 큰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1614년 기근의 큰 타격을 받았고, 그란치프 제국은 필수불가결하게 해외로부터 곡물을 수입해야 했다. 그 과정에세 에세르 지방과 접하고 있던 게파르토 제국과의 관계가 형성되었으며, 관세 조약을 시작으로 여러 경제·군사적 교류가 발생했다. 키르수스의 노골적인 적대감의 대상인 그란치프 제국도 당연하게 키르수스를 가상 적국으로 삼았으며, 그런 점에서 중요한 에세르 지방과 접하는 게파르토 제국을 적어도 중립국으로 둘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경제적인 교류는 곧 16__년 불가침 조약을 시작으로 군사적 교류가 촉진되었고, 16__년의 __ 조약을 통해 불안정하지만 사실상의 동맹 관계가 구성되었다.
그란치프 입헌주의
레란스토비 전쟁의 패전 이후 의회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그 본질은 도시에 인구가 집중됐음에도 선거구의 설치는 농촌에 우세하게 설치된 악랄한 게리멘더링으로 이루어진 눈속임이었다. 당연하게 근황당인 샤를루이나당은 게리멘더링의 수혜를 받으며 의석의 90%를 차지했다. 그러나 1550년대의 산업화가 발흥하며 부르주아 계층이 성장했고, 점진적으로 성장해 1590년대에 들어서며 점차 자유주의가 퍼졌다. 국민당과 급진당 등이 선거에서 약진했고, 샤를루이나당 내에서도 자유파가 구성되었다. 1614년 기근에 샤를루이나당 지지의 원천인 농촌이 붕괴하고, 이어서 도시 경제가 붕괴하며 정치적 역변이 촉발되었다. 1614년 식량 위기를 대처하기 위해 샤를루이나당은 국민당과 급진당과 협력하고자 했고, 국민당은 승락했으나, 급진당 내에서는 갈등 끝에 자유당과 급진민주당으로 분당했다.
1630년대 말, 니콜라 2세는 국가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자 유학생으로 구성된 인민연맹을 설립한다. 당대 경제적 여건 하에서 유학생은 대부분 귀족이나 부르주아 계층이었으나 진보적 성향을 띄었다. 주요 좌익 정당인 급진민주당은 이들과의 협력을 두고 당 내에서 다시금 분열이 일어났고, 인민연맹은 그들을 흡수하며 규모를 키웠다. 셰브르 1세가 즉위할 때 쯤, 인민연맹 내 급진파가 주도권을 잡으며 국민주권 확립과, 선거권 개혁, 자유 보장을 요구하였다.
레란스토비와 오플렌티엠
1187년의 그란치프-발키로르 전쟁을 통해 그란치프 왕국은 오플렌티엠 서부 레란스토비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광대한 레란스토비의 평야의 비옥한 토지는 그란치프 왕국으로 하여금 막대한 잠재력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1327년의 동방전쟁에서 대패하면서 그란치프 공동국이 선포되는 혼란기에 레란스토비 공동국이 그란치프 공동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이후 그란치프 제국이 선포되고 내부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1508년 __가 레란스토비 공동국에 선전포고를 하며 레란스토비 전쟁이 발발한다. 그란치프 제국은 발키로르 제국과 동맹을 맺고 레란스토비 공동국의 영토 대부분을 장악하며 승리를 목전에 두었으나, 오플렌티엠의 패권국인 사흐트라한 제국이 해당 전쟁에 개입하며 소모전으로 이끌린다. 결국 사흐트라한 제국과 그 연합국에 의해 레란스토비 전쟁에서 패전하며 레란스토비에 대한 영유권을 잃었다.
레란스토비 전쟁의 패전으로 로트리에는 무력에 의한 확장 대신 경제·외교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노선으로 선회했다. 레란스토비 공동국은 사흐트라한 제국의 국정개입에 그란치프 제국과 손을 잡으며 독립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란치프 제국은 레란스토비 공동국의 흑토파를 지원하며 레란스토비 공동국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켰고, 정치·경제적인 종속상태를 형성한다.
사흐트라한 제국은 레란스토비 전쟁 이후 오플렌티엠에 대한 광범위한 영향력을 상실하며 그란치프 제국의 침투를 견제하지 못했다. 1625년 사흐트라한 제국이 혁명으로 멸망하고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이 형성되었다. 사련은 과거 사흐트라한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국가들을 정복하며 사회주의 정부를 설립했다. 그러나 팔로렌스 산맥 동안에서 레란스토비 공동국만이 사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그란치프 제국 반동주의자의 지원을 받으며 대립했다. 레란스토비 공동국은 그란치프 제국의 동방 진출의 교두보였으며, 그란치프 제국의 지원을 받은 흑토파는 그들 지주 귀족의 이익을 위해 봉건제 철폐를 비롯한 당대 자유주의적 흐름을 거부하며 농민과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행하고 있어 레란스토비 공동국은 사련의 고베오스카야 스보드니에게 있어 반드시 정복해야할 목표였다.
서막
피의 나흘과 비테르 암살사건

셰브르 1세가 즉위한 1645년, 인민연맹은 노농의 정치적 입지 증가와 국민주권을 목적으로 대대적인 선거권 개혁과 입헌군주제를 요구했다. 셰르브 1세는 이를 '무리한 요구'라 거절했고, 곧 인민연맹는 혁명을 조직한다. 1650년 _월 _일, 인민연맹은 로트리에의 상브르 궁전에의 행진을 개시했다. 인민연맹 소속 군인은 소속을 이탈해 시위를 주도했고, 노동자와 시민이 합류하며 그 수가 10만을 초과했다. 셰브르 1세는 이들에 유화적으로 접근했으나, 시위대의 귀족 및 자본가 살해가 발생하는 등 폭동으로 발전하며 시위 진압을 명령했다. 근위척탄병 제1 로트리에 연대 및 로트리에 근위대 총 9천여 명의 병력이 포와 기병대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했으며, 4일 간의 산발적인 교전이 발생한다. 주동자 대부분이 처형되었고, 인민연맹은 해체되었다. 일부 주모자는 국경을 넘어 사련으로 도주했다. 4일 간의 사건을 피의 나흘이라 부른다.
상브르 궁전 행진에 의한 귀족 및 자본가 살해는 그들로 하여금 대중에 대한 적대감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총리인 아돌프 비테르는 대대적인 개혁의 필수성을 인지했다. 개혁안의 주요 쟁점은 기존의 악랄한 게리멘더링과 헌법적 제약들에 의한 비자유주의적인 선거제도의 개편과 선거권의 확대, 노동조합 합법화 등이었다. 대다수의 지배층에게 개혁안은 수용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때문에 비테르 총리는 입법부 양원에서 큰 반발에 부딫쳤다. 그러던 1650년 5월 12일 오전 6시 경, 의회에 개혁안의 필요성을 호소하러 가던 비테르 총리는 출발 직전에 의문의 사고로 사망한다.
조르푸아 소요

셰르브 1세와 의회는 해당 사건에 대해 사회주의자들에 의한 소행이라 주장하며 전국의 노동자 조직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일부 지식인과 노동자 계층은 해당 사건이 황제의 조작극임을 주장하며, 6월 8일 노동절에 맞춰 상브르 궁전 앞으로 다시금 시위를 진행한다. 피의 나흘과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을 우려하여 다시금 부대가 배치되었으며, 로트리에 근위대 연대장 장 라푸르는 진압군에 발포를 허가했다.
시위대를 이끌던 인민연맹의 카자마르 조르푸아와 진압 부대 사령관 에밀 가브로슈가 접선해 협상하였으나 결렬되었다. 시위대는 진압군을 압도했으며, 결국 상브르 궁전으로 가는 길을 내주었다. 과정에서 에밀 가브로슈와 그의 진압군이 살해당했으며, 시위대는 상브르 궁전을 비롯해 여러 관청을 파괴하며 로트리에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황제와 정부는 로트리에에서 탈출하였으며, 카자마르 조르푸아는 인민위원회를 결성했다.
인민위원회는 로트리에를 장악하고 모든 민중에게 투표권을 부여했으며, 급조된 선거를 통해 80명의 의원을 선출 및 임명하였다. 이를 코뮌이라 칭했는데, 코뮌은 수도 곳곳의 동상 따위를 파손했으며, 코뮌에 지정된 반동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로트리에를 들쑤셨다. 그 과정 속에서 조르푸아와 그의 시위대(향후 인민전선군)의 혁명 선전도 포함되었다. 황제 또한 자신의 지지세력과 병력을 결집시키며 그란치프는 본격적인 내란 상태에 돌입했다.
7월 1일부터 4일까지 페리그낭에서 시위대에서 군사 조직으로 재편된 인민전선군 1만 2천 명과 그란치프 대륙군 2만 명이 집결하여 전투가 펼쳐진다. 평범한 노동자 계층으로 구성된 인민전선군은 수적·질적 열세에 패배하며 페리그낭은 대륙군의 손에 떨어진다. 대륙군은 반란에 대한 보복을 위해 지옥종대(Colonnes Infernales)를 구성하여 사로잡은 인민전선군을 고문을 자행했다.
탈영병
페리그낭에서 패전한 인민전선군은 에테르뮈테, 벨쿠르, 그란빌티로 질서 없이 퇴각했다. 대륙군은 흩어진 반란군을 각개격파했으며, 수복한 지역에서 무차별적인 잔당 진압을 벌였다. 잔당 진압은 매우 가혹하고 잔인하여, 키르수스 국경 인근의 그로멜로에서 대륙군 장교인 조르주 플라티에르는 잔당 진압에 항명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궐기를 일으켰다. 로트리에 인근까지 당도한 대륙군은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적극적인 공세를 자중하였고, 예비군인 국민위병으로 약화된 전력을 유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로멜로의 반란으로 대륙군은 양면전선에 당면했다. 전선은 몇 달 간 지속되었고, 자연스레 발생한 탈영병은 국경 인근을 배회했다.
7월 24일, 그란치프 대륙군은 키르수스 국경의 탈영병 체포를 위해 이들을 추적을 하던 중 키르수스 국경을 월경한다. 그란치프군의 월경에 키르수스 황립군 또한 국경에 부대를 전진시켰고, 양측은 탈영병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다. 그란치프군은 탈영병의 신변 이관을 요구하며 말다툼이 발생하였고, 이윽고 육탄전으로 발전한다. 급조된 부대였던 그란치프군 부대는 육탄전에서 열세를 보였고, 그란치프의 장교가 권총을 꺼내 키르수스 장교를 피살했다. 이를 계기로 양측은 총기와 기관총, 대포까지 동원된 국경분쟁으로 발전한다.
국경분쟁이 계속해서 피해를 누적하자 키르수스 제국정부는 8월 1일까지 상황해결을 위한 대안을 수용하지 않을 시 선전포고 및 전시체제에 임할 것을 통보했다. 그란치프 제국 또한 대외적으로 탈영병의 인도와 피해 보상을 요구했으나 내부적으론 타협 의도가 복잡했다.
키르수스 제국의 요구 사항 |
키르수스 측의 요구는 그란치프에게 불리했고, 그란치프 정부의 매파로 하여 분노를 일으켰다. 매파는 내란은 빠른 시일 내에 진압될 뿐더러 전쟁 수행에 어떠한 지장을 끼치지 않다며 키르수스와 전쟁도 불사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비둘기파는 내란 세력이 사련의 지원을 불러 일으킬 수 있음을 경고하며 혹여나 전쟁으로 확전되더라도 이는 내란 진압 이후의 일이여야 한다 주장했다. 셰브르 1세는 두 의견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선은 키르수스의 조항을 일부 수정해 수용할 것을 키르수스 측에 타진하였다.
양측이 조항의 타협안을 구상하고 있을 무렵, 키르수스에로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중서원의 무전이 타전된다. 당시 사련 측은 그란치프의 사회주의 내란 진압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그란치프 제국의 반사련 전선으로의 레란스토비 공동국 지원에 대해 적대 의식을 함양하고 있었다. 더구나 팽창주의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에 키르수스의 대그란치프 전쟁이 발발할 경우 이에 따른 지원 및 참전을 이 무전을 통해 약속했다. 키르수스는 사련과 같은 체급의 국가가 동맹으로 참전한다면 사면초가의 열세도 극복 가능한 것으로 보았고, 이를 기점으로 키르수스는 전쟁을 결정하고 그란치프의 타협안을 모조리 거절한다. 결국 키르수스는 조항을 바꾸지도 수용하지도 않은 그란치프에 대해 1650년 8월 2일, 전쟁을 선포한다.
진행과정
동부 전선

서부 전선

북부 전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