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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치아 전투 Battle of Firenzia | ๒คՇՇLє ๏Ŧ Ŧเгєภչเ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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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시아 전쟁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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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
1495년 7월 7일 ~ 1498년 3월 14일 (총 2년 8개월 7일) | |
장소 | |
나일리아 왕국 피렌치아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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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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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 |
엘리시움 왕국의 승리 피렌치아 붕괴 | |
영향 | |
완전히 엘리시움에게로 돌아간 전쟁의 헤게모니 엘리시움의 그레이터리시움 진입 |
개요
피렌치아 전투(Battle of Firenzia | ๒คՇՇLє ๏Ŧ Ŧเгєภչเค)는 클레이시아 전쟁의 일부로서 1495년 7월 7일부터 1498년 3월 14일까지 피렌치아에서 총 2년 8개월 동안 진행된 전쟁이다.
고작 피렌치아라는 도시 하나를 뚫기 위한 전투에 불과했음에도 약 2년 8개월 간의 기나긴 기간과 수많은 인명 피해를 동반한 전투이며, 이 전투에서 패배한 나일리아 왕국은 그레이터리시움 전투와 센트럴 스테이트 전투에서 허무하게 패배하며 센터에리어 지역과 전쟁의 헤게모니를 엘리시움에게 넘겨주고야 만다.
배경: 왜 꼭 피렌치아였는가?
피렌치아는 그 자체가 서부에 새로이 등장한 독립 세력 엘리시움 왕국을 견제하고 수도 그레이터리시움과 그 일대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요새 지대로서, 기다란 방어선에 수많은 병력, 엄폐물, 공성 무기들이 무장된, 그야말로 토리노 9세 시대의 역작이다. '대요새'라는 별칭 때문인지 피렌치아 자체를 요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피렌치아는 엄밀히 말하면 요새가 아닌 '도시'이며,[2] 피렌치아 서쪽을 감싸고 있는 '요새 지대'는 설계를 담당했던 닉 폰 카이로프의 이름을 따 카이로프 지대라고 불렸는데, 이것이 공식 명칭도 아니었던 지라 두 용어가 혼용되다 보니 아예 이 요새 지대 자체를 피렌치아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 당시 피렌치아에는 전시 상황이 아닌 평소에도 군단 하나급 병력[3]이 상비군으로 위치해있었으며, 근처의 레즈벨트, 리시니아, 수도 그레이터리시움에서 지원 가능한 병력까지 포함한다면 '상비군'만 일주일 내로 15만 명 가량이 가용 가능했다. 엘리시움이 요새 지대를 침공하는 입장인 만큼 전략적 위치도 나일리아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고 할 수 있었기에 엘리시움의 전반적 계획에 있어서는 이 피렌치아에서의 전투가 첫 번째 고비이자, 최대 고비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드는 질문은 바로 그냥 피렌치아를 치지 말고 다른 곳을 공격하면 되지 않느냐?이다. 그레이터리시움주 중서부에 위치한 피렌치아를 굳이 치지 말고, 북쪽 전선이나 남쪽 전선을 공략하여 전쟁의 제1목표인 수도 그레이터리시움을 먼저 섬멸하면 되지 않느냐는, 어찌 보면 굉장히 그럴 듯한 말이고 전쟁 당시에도 말이 많았던 계획이었지만, 이는 전쟁의 하나는 알고 둘은 몰라서 발생하는 오류이다. 만일 실제로 피렌치아를 공격하지 않고 북쪽이나 남쪽을 먼저 공격하여 그레이터리시움을 섬멸하기 위해 진격하고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피렌치아에 위치해있는 군단 하나급 병력은 어디서 뭘 하고 있겠는가? 당연하게도 자신들의 뒤에 있는 엘리시움 왕국군을 포위하려 할 것이고, 양쪽에 5만씩 위치해있는 나일리아군의 인해전술에 비교적 수가 부족한 엘리시움군은 보급도 불가능해져 끝내 항복하여 전쟁이 오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엘리시움 왕국 작전총사령관 윌리엄 크로우가 직접 말한, 피렌치아를 공격해야만 하는 이유였다.
이러한 이유로 피렌치아에서의 전투는 이미 이칼루스 1세와 존 T. 프랭클린이 전쟁의 초기 계획을 짤 때부터 확정되어있었으며, 이 피렌치아 전투의 향방이 전쟁 전체의 결과를 좌우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엘리시움에 존재한 4개의 군단인 제1군단, 제2군단, 제3기동군단, 제5방어군단 중 남서부 방어를 담당하던 제5방어군단을 제외한 나머지 세 군단을 전부 가용할 예정이었고, 경우에 따라 제5방어군단이나 수도를 지키는 수도방위사령부까지 본진으로 합류할 계획까지 짜놓았다.
그동안 나일리아 왕국은 이미 나일리아 전쟁을 겪은 만큼 당연하게도 추가 침공이 일어날 것을 예상했으며, 그레이터리시움주의 군대 전체에 긴장 세태를 유지할 것을 명령했고 리시니아에 병력을 밀집시켰다. 그러나 더욱 더 긴장을 유지해야 할, 가장 중요한 피렌치아 병력들에게 추가적인 명령은 내리지 않았고 결국 이는 후술할 빈틈을 야기시키며, 또 다시 나일리아 수뇌부의 오만함을 증명하고야 말았다.
1495년 7월 1일 뉘베트와 헤이니어를 가져온 엘리시움은 헤이니어에 제1군단과 제3기동군단의 전 병력, 제2군단의 일부 병력을 배치했고, 침공 날짜를 1495년 7월 7일로 확정지으며 일주일 가량의 준비 기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개
가장 약한 곳으로
전쟁 이전부터 정찰병들을 보내 피렌치아를 샅샅이 조사하던 국왕 이칼루스 1세가 가장 원했던 것은, 피렌치아 요새 지대에서 가장 약한 곳이 어디냐는 질문의 답이었다. 10km 이상의 요새 지대가 전부 수많은 병력과 공성 무기들로 구성되어있었기에 답을 찾기는 굉장히 어려웠지만, 끝내 정찰병들은 젠치 일대의 성의 이음새가 끊겨져있는 것을 발견했으며, 이를 바로 보고하면서 그곳이 엘리시움이 피렌치아를 침공하는 장소가 되었다.[4]
1495년 7월 7일 새벽 5시,
- ↑ 나일리아 전쟁 때는 직접 전장에 나가기도 했으나 노쇠화의 영향으로 클레이시아 전쟁에선 작전 지휘의 역할을 맡았다.
- ↑ 고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짓고 살던 꽤 오래된 도시였다. 과거에는 피렌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 ↑ 약 4~5만 명.
- ↑ 이 지역을 보고한 시점이 1495년 6월 22일로, 피렌치아 전투의 침공일인 7월 7일과 무려 2주 가량 차이가 난다. 2주 동안 끊겨진 이음새를 고칠 법도 했는데, 최전방에서 추가적인 명령도 받지 못한 피렌치아의 병력들은 경계 태세에 굉장히 해이해진 상태였고 결국 이곳의 존재는 초반 전투의 향방에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