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루의 예화국 침공

주의. 이 문서는 해루 세계관 프로젝트 문서입니다.
주의. 문서를 동의없이 함부로 수정할 경우 반달 사용자로 지목되어 불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수정할 것이 있으시다면 문서 작성자의 동의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종전 상태
해루의 예화국 침공
해루-예화 5시간 전쟁

海樓-豫華 五時間 戰爭
Saera-Yehwa five-hour war
width: calc(100% + 5px)
날짜
2021년 11월 20일 오전 4시 ~ 오전 9시
장소
동북아시아 예화국 전역
배경과 원인
예화국이 해루의 국가병합요구 거절
예화국 주재 해루대사 피습 사건 (자작극 의혹 있음)
목표
해루 측
예화국 전 지역 점령
예화국 측
방어
결과
예화국의 패배
덕원궁 평화조약 체결
영향
동북아시아 긴장감 상승
국제사회의 압박에 해루의 예화국 전 지역 국민지역화 포기
예화국에 특별행정구 설립
참전국
해루
예화국
[ 펼치기 · 접기 ]
[ 펼치기 · 접기 ]
주요 지휘관
해루
예화국
[ 펼치기 · 접기 ]
박단아[1]
배종원[2]
안범근[3]
구성헌[4]
손동우[5]
박윤형[6]
박정하
정준호
이범길
가와치노후미 타카히토[7]
모리마츠 테츠히토[8]
와타 코스케
사와치카 시노신
[ 펼치기 · 접기 ]
유현[9]
한재훈[10]
강범진[11]
윤주혁[12]
탁성호[13]
정대용[14]
위동호[15]
조철오
송상혁
양석우
임명진
노석운
이상일
이서홍
송가덕
말로니 러셀[16]
앳킨슨 엘빈[17]
참전 병력
해루
예화국
[ 펼치기 · 접기 ]
해루 인민군
32,000명
해루 내무군
12,000명
해루 인민노동적위군
1,100명
가와치노후미 국가방위대
3,500명
[ 펼치기 · 접기 ]
예화국 왕립군
200,922명
상비예비군 100,000명
피해 규모
해루
예화국
[ 펼치기 · 접기 ]
해루
군인 1,026명 전사
가와치노후미 국가방위대
군인 1,998명 사망
[ 펼치기 · 접기 ]
군인 89,862명 전사
민간인 121,590명 사망
각주
  1. 해루 대통령
  2. 해루 국방장관
  3. 해루 인민군 총참모장
  4. 해루 인민군 육군최고지휘관
  5. 해루 인민군 해군 제독총감
  6. 해루 인민군 공군최고지휘관
  7. 가와치노후미 군주국 천제
  8. 가와치노후미 군주국 육군총사령관
  9. 예화국 매금왕
  10. 예화국 총리
  11. 예화국 국방장관
  12. 예화국 총참모장
  13. 예화국 육군참모총장
  14. 예화국 해군참모총장
  15. 예화국 공군참모총장
  16. 예화국 주재 미국대사
  17. 예화국 주재 미국대사관 주재무관

개요

2021년 11월 20일 오전 4시에 해루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개전되어 오전 9시에 예화국의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종전된 해루와 예화국과의 전쟁. 약 5시간에 불과했지만 예화국은 모든 지역이 잿더미로 변했으며, 군인 89,862명이 전사했으며 전쟁 초반 해루의 무차별적인 공습으로 민간인 121,590명이 희생되었다.

양국의 편제

해루

  • 특별군사작전사령부
    • 제3군
      • 제73보병사단
      • 제217보병사단
      • 제1공수특수임무여단 (해루 내무군 / 임시 배속)
      • 제2공수여단 (해루 공군 / 임시 배속)
    • 해군육상전투작전전대
      • 제3해군보병여단
      • 제5해군보병여단
      • 제6해병보병여단
      • 해군특수임무단 제222해상전투대대
    • 제1공수여단 1개 대대
    • 보조군
      • 제3보병여단 (가와치노후미 군주국)
      • 제5보병여단 (가와치노후미 군주국)
      • 제111해군특전대 (가와치노후미 군주국)
      • 해루 인민노동적위군 제2강습대대
      • 해루 인민노동적위군 제7유격대대

예화국

  • 예화국 왕립군총참모부
    • 육군특임대대
    • 남부군관구
      • 제3국토방위여단
      • 제1해병여단
      • 제2해병여단
      • 제112공수특전여단
    • 중부군관구
      • 수도방위사단
      • 제1국토방위여단
      • 제2국토방위기계화여단
      • 제7기계화여단
    • 북부군관구
      • 제5국토방위기계화여단
      • 제3해병여단
      • 제111공수특전여단
    • 제1함대
      • 제234특임여단
      • 제888특임여단
    • 제2함대
      • 제776특임여단
    • 제3함대
      • 제777특임여단

전개

2021년 11월 15일 예화국 주재 해루대사 김도섭(金道燮)이 피습 당한 것을 계기로 해루는 예화국에 자국민 보호를 명문으로 해루 인민군 주둔을 요구했다. 이에 예화국 정부는 총리까지 나서서 단호하게 거부했는데 이에 국가보안부가 예화국 내부의 여론을 조작하여 국내 불안정을 조장했고 5일 뒤 해루는 북부를 거점으로 삼는 모든 공군 전력을 동원해 예화국의 주요 거점도시들을 무차별적으로 공습한 것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공습 직전에 해루는 예화국 내부의 스파이들을 이용해 예화국의 방공망을 무력화시킴으로서 예화국을 효과적으로 타격할 수 있었다.

공습 직후 해루 해군 소속의 제5해군보병여단제6해병보병여단, 가와치노후미 군주국의 제3보병여단이 예화국의 남부 해안도시인 남원시에 전투 없이 상륙했다. 동시에 예화국의 수도인 예화시에는 해루 공군 소속의 제1공수여단의 1개 대대가 군 수뇌부 사살을 위해 우선적으로 강하되었으나 예화국의 최정예 육군 부대인 수도방위사단에 의해 격퇴되어 근교 도시인 경원시로 퇴각했다.

해루의 기습적인 공격에 예화국의 군 수뇌부는 우왕좌왕하며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해루 인민군이 남원시에 상륙한지 30분이 지나서야 공종에게 해루의 침공임이 보고되었다. 공종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함과 동시에 전국에 예비군 소집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해루 공군의 무차별적인 공습에 주요 거점들이 파괴되고 통신선이 끊긴 탓에 상비예비군 외에는 소집 자체가 불가능했다.

해루는 남원시에 상륙을 성공한 이후 후속 부대로 제73보병사단, 제217보병사단의 일부가 남원시의 상륙 거점을 통해 예화국으로 진입시켰으며 제2공수여단을 예화국의 예화시와 남원시를 이어주는 웅진시에, 해루 내무군 소속 제1공수특수임무여단을 성진시에 투하했다. 이때까지도 예화국 왕립군총참모부는 그 어떠한 명령도 내리지 않고 있었기에 전선에 있는 예화국 왕립군 장병들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더구나 예화국 상예비군에게는 지급할 무기까지 모자라 3명에 총 하나를 보급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예화국 제3해안경비여단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해루 포병대의 포격과 해루 인민군의 공세, 해루 공군의 무차별적 공습에 오전 4시 50분 경 해안 방어선이 뚫리고 제3해군보병여단이 예화국 동부 지역에 있는 삼원시에 상륙하였다. 상륙 과정에서 예화국 제3함대 소속 3개 고속정 편대가 해루 인민군의 상륙저지를 시도했으나 해루 해군의 반격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패퇴했다.

삼원시 상륙 이후, 해루 해군의 제3해군보병여단은 빠르게 동부 해안선을 따라 진격했다. 예화국 왕립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해루 인민군은 압도적 화력 우위를 바탕으로 예화국의 방어선을 계속해서 무너뜨리며 말 그대로 예화국 왕립군을 갈아버리며 진격하고 있었다.

제73보병사단과 제217보병사단은 웅진시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곧바로 예화국의 수도인 예화시로의 진격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예화국의 제2국토방위기계화여단과 제7기계화여단이 웅진시 북부 산내리와 웅촌리에서 역습을 시도하여 제217보병사단에 큰 피해를 입혔지만, 전황은 바꾸지 못했다. 다만 심각한 피해를 입히는 것에는 성공하여 제217보병사단은 일시적으로 진격 불능 상태에 빠졌고 사단장 오덕윤 중장이 보직해임 조치 되었다. 이는 예화국 왕립군의 마지막 승리였다.

해루 인민군은 제73보병사단과 가와치노후미 군주국의 제3보병여단으로 예화시를 직공하고 진격 불능 상태에 빠진 제217보병사단이 제3공수여단을 지원하여 예화시의 근교도시 경원시 공격에 투입했다. 그리고 성진시의 제1공수특수임무여단이 경원시 북부를 공격하여 경원시의 예화국 중부군관구 핵심병력을 포위하고자 했다.

전쟁의 끝 : 예화국의 항복

11월 20일 예화시는 해방되었습니다.

<해루 인민군 총참모부의 보도>

예화시를 포위하고 있던 인민군 사단들은 오늘 20일 7시에 예화 중심지대에 돌입하여 부패한 왕정과 서방 괴뢰정권의 소위 왕궁, 총리관저를 비롯하여 시청, 검찰청, 언론사, 교통, 운수, 체신, 은행 등 중요 기관들을 점령하였다.
20일 오전 7시 30분 우리 조국의 영웅적 인민군 부대들은 공격을 개시한 지 단 두 시간 만에 예화국의 인민들을 핍박하는 서방 제국주의 괴뢰정권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예화시를 완전히 해방시켰다.
예화국 공영방송에서 방송된 인민군 총참모부 담화

해루 인민군이 예화시와 경원시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고 예화국 왕립군의 상황은 처참했다. 너무 빠른 해루 인민군의 진격에 상당수의 병력이 예화시로 후퇴하기 못하고 포위되었기 때문에 후퇴에 성공한 중부군관구 소속 병력은 주요 요충지를 채우지도 못할 정도로 한 줌의 병력이었다. 또한 대부분의 항공기들과 대공 장비들을 상실하는 바람에 해루 공군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