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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헤이븐 독립전쟁은 피나클리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던 우트리아인과 게르드인이 연합하여 독립을 선포, 그에 따라 피나클리아 공화국이 대응하면서 각국의 이해관계에 맞물려 대규모로 확산된 전쟁이다.
배경
불안한 정세와 독립의 요구
1280년대 피나클리아 왕국의 정세는 상당히 불안한 상태였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왕정 철폐를 주장하는 공화파의 목소리가 상당히 거세져 공화파와 국왕파가 연일 논쟁을 벌였고,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배당한 우트리아인과 게르드인은 자신들의 대우를 개선해 줄 것을 요구하며 연일 시위를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 새롭게 즉위한 폴른 7세는 당시 피나클리아에서는 드물게 우트리아인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즉위 3개월 만인 1283년 9월 2일, 우트리아인과 게르드인의 권리 향상에 관련된 법안을 작성한 후 사전 논의도 없이 공표해 신하들을 당황시켰다. 그러나 즉위한지 1년도 되지 않은 국왕의 세력 기반은 아직 미약했고, 공화파는 국왕의 이런 '일탈 행위'에 크게 반발하여 공화파에 속한 장교들을 이용해 우트리아인과 게르드인의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한다.
이에 폴른 7세는 노발대발하여[1] 즉시 모든 신하들에게 수도 소환령을 내린다. 폴른 7세 입장에서야 화를 참고 대화로 해결해 볼 생각이었지만, 공화파는 이를 완전히 반대로 해석했다.
2.17 군사정변
공화파 과격세력은 국왕이 자신들을 숙청하려 한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때다 싶어 이전부터 혁명을 주창했던 과격세력은 즉각적인 무력대응을 제안했지만, 온건세력은 물론이고 일부 과격세력조차 휘하의 군대가 상당히 적다는 현실적인 문제 탓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과격세력은 미리 일부 용병단과 긴밀한 계약을 맺어 유사시에 자신들의 전력으로 쓸 수 있게끔 준비를 마쳐 놓은 상황이었고, 공화파 지도부 역시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다급하게 용병단을 가용하여 수도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단순 병력 규모는 국왕군이 우세했지만, 공화파 측의 최고전력인 검은 모자 용병단의 활약으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공화파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4.6 무장봉기
왕궁을 장악한 공화파는 우선 자신들의 군사정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민의가 정치에 반영되는 새로운 국가의 탄생' 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민심을 장악하려 했다. 우선 폴른 7세가 공표한 우트리아인과 게르드인의 권리 향상 법안을 전면 백지화시켰고, 왕가의 재산을 몰수하여 국민들에게 재분배를 약속함으로서 피나클리아 왕국 구성 민족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피나키아인들의 호의를 사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트리아인과 게르드인의 민심을 완전히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고, 가뜩이나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폴른 7세가 강제로 퇴위당한 상황에서 이것은 불에 기름을 들이붓는 격이었다. 결국 우트리아인과 게르드인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는 사실상 유이한 기관인 우트리아 민족해방전선과 게르드 협동조합이 합심하여 봉기를 일으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공화국 정부는 당연히 이들을 진압하려 했지만, 일부 폴른 왕가의 일원이 지방으로 도주하여 국왕파를 끌어모으려 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아직 공화파가 군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아니었기에 수도에 항상 일정 규모의 부대를 주둔시킬 필요가 있었고, 이제는 국왕파 장성들이 지휘하는 군대를 상대하기 위한 부대까지 차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정적으로 진압군의 주축인 제1보병군단이 베르테르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공화국 정부는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권리 향상 법안을 재부활시키며 사실상의 항복을 선언한다.
2.23 독립 선언과 헤이븐 독립전쟁
4.6 무장봉기가 정부군의 패배 선언으로 종결되자 대다수의 피나키아인들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신정부 청사는 연일 몰려드는 시위 인파로 인해 출퇴근조차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고, 일부 극단주의자들은 폭력 조직을 결성해 우트리아인 거주구역을 습격하기까지 한다. 우트리아인들도 이에 맞서 자경단을 조직하고 정부에 경찰 배치를 요청하는 등 조치를 취했지만 공화파의 수장격 인물인 윌리엄 카에트로 임시 총리는 수도의 치안이 불안정한 상태라 경찰력이 부족하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실질적인 조치를 취해주지 않았다.
정부의 미비한 대응은 극단주의자들이 마음껏 날뛸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주는 것과 같았고, 우트리아인들 사이에서는 민족혁명전선군을 재소집하는 논의까지 오갈 정도로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가장 큰 문제는 이 모든 것이 정부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봉기군을 얕봤다가 막대한 병력의 손실을 입은 정부로서는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우트리아인과 게르드인을 탄압하는 모양새를 만들 필요가 있었고, 그렇기에 소요 사태를 방치했다. 만약 이를 견디다 못해 봉기군이 재결성되려는 낌새를 보이면 수뇌부를 적당히 회유하는 척 하다가 사고로 위장시켜 없애 버릴 계획이었다.
실제로 이 계획은 거의 성공에 가까운 듯 보였다. 정부는 우트리아 민족해방전선군 수뇌부가 병력을 재소집하려 한다는 첩보를 접수하였고, 재빠르게 특사를 파견하여 피나클리아 정부, 우트리아 민족혁명전선, 게르드 협동조합의 대표가 모이는 삼자회담을 제의하였다. 명목상으로는 최근 우트리아인 거주구역에서 발생하는 산발적인 폭력 사태 해결을 위해서라며 꼬드겼다.
에쉬크는 우선 승낙의 뜻을 전한 뒤 애슈턴을 불러 논의하였다. 에쉬크는 정부의 진의를 의심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지금 국왕파 장성들에게 밀사를 보내 폴른 7세를 복위시키고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자는 의견을 내놓은 반면, 애슈턴은 그건 너무 성급한 행동이 아니냐며 조심스러운 접근을 제안했다.
- ↑ 아무리 당시 왕가의 위상이 약하다고는 해도 염연히 군권은 국왕에게 있었던 만큼 이는 자칫하면 반란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대형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