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 민주화운동

4.28 민주화운동
四二八 民主化運動 | April 28 pro-democracy movement
기간
1952년 4월 28일 ~ 5월 20일
장소
금안주[1][2] -> 인별국 전역
원인
이준설 주도의 3.22 쿠데타에 대한 저항, 이준설 정부의 무자비한 반대파 숙청, 이준설 정부의 언론탄압
지휘관[3]
이준설 국가주석 겸 국방부 장관 안정호 4.28 시민군 대장
병력
인별국군
인별국 금안주인민통제부
인별청년애국반
폭동진압군
4.28 시민군
대용자유군
금안주 주민
인적 피해
결과
이준설 군사정권 (인별인민민주공화국) 정부 붕괴
4.28 민주화운동 세력 등의 주도로 인별국 과도임시정부 수립
영향
신헌법 개헌과 제2공화국 최윤주 정부 출범
새로운민주당 신뢰 완전추락[4]

개요

그대들은 들으라! 그대들은 이제 더이상 이 독재정권을 위해 일하지 말라!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라! 항쟁하라! 몰아내라! 진짜 자유로운 새 국가를 위해 맞서 싸우라!
4.28 민주화운동 당시 인별국 금안주인민통제부를 탈환한 이후 연설주석단에 오른 안정호 4.28 시민군 대장의 연설내용 中

4.28 민주화운동[5], 4.28 민주항쟁, 또는 4.28 혁명은 1952년 4월 28일부터 5월 20일까지 금안주금성직할시[6]에서 일어나 전국으로 확대된 민주화 운동이다.

상세

처음에는 인별전체자유방송과 금안주인민통제부에 의해 금안주 인민 폭동, 또는 금안주 사태 등으로 불렸으나[7], 전국으로 확대된 계기인 시민군의 인별국 금안주인민통제부 탈환 이후에도 4.28 금안주 대혁명, 금안주 시민 혁명, 4.28 반정부 대항쟁 등으로 불리며 제대로 정해지지 않다가, 민주화운동이 완전히 끝난 이후인 1960년대부터 4.28 민주화운동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인별국 헌정 역사상 최고 수준의 저항권을 행사한 사건으로, 이준설을 지지하는 친이준설단체대국민연합 등의 전체자유주의 세력들은 무장 폭동 또는 반란이라고 주장하지만 인별국 대법원에선 전체자유주의 세력의 주장에 근거가 없다고 여러번 강조했고, 정당한 저항권 행사로 인정하고 있다.

1952년 3월 22일 이준설과 그를 따르는 대용자유군 대용경계수비대 대원 중 일부가 3.22 군사쿠데타로 정부를 장악한 뒤 인별인민민주공화국이 수립되었고, 군사 정부는 민주당의 주 지지층이 결집되있던 금안주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후 작은 시위들이 일어나자 인별국 금안주인민통제부가 전투기 등으로 시위대 밀집 지역에 포탄을 떨어뜨리며 학살을 자행하자[8], 이에 분노한 금안주 주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고, 4월 28일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면서 5월 20일까지 지속되었다.

이준설 군사정권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폭동으로 규정하고, 인별국군과 인별국 금안주인민통제부, 인별청년애국반을 필두로 폭동진압군을 편성해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ㆍ성범죄ㆍ불법체포ㆍ처형 등의 방식으로 탄압했고, 총기까지 사용하며 금안주 주민들을 탄압ㆍ학살했다. 이 외에도 국영방송을 통해 폭동이라고 송출하며 국민 선동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다. 이와 같은 군사정권의 진압방식에 시민들은 4.28 시민군을 조직하고 대장에 안정호를 세우고, 시위를 전국으로 확대시켰다. 결국 5월 20일 이준설이 하야를 결정했고, 항쟁은 성공으로 마무리되었다.

원인 및 책임소지

이준설 지지자, 추종자, 전체자유당의 잔당 세력들은 4.28 민주화운동의 책임을 오로지 오영환 전 대통령과 민주당에 돌리며 자신들의 만행을 부정하고 있는데, 이는 3.22 군사쿠데타와 4.28 민주화운동 이전에 일어났던 금안주 대학살 등을 무시하고 미화하는 일방적 주장이다.

4.28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일어난 대국민 학살은 진압을 최종 결정하고 지시ㆍ명령한 이준설전체자유당, 인별국 금안주인민통제부 등 정부기관에 있다. 인별국 금안주인민통제부와 진압목적으로 편성된 폭동진압군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대국민 학살을 자행한 장본인의 범죄를 슬쩍 넘어가선 안될 것이다. 당시 문서에 따르면 4.28 민주화운동의 진압의 책임자는 손민현 인별국 금안주인민통제부 부장, 민영훈 공산파ㆍ친민주당파처벌위원회 위원장, 조충현 폭동진압군 사령관, 전두향 폭동진압군 명령책임자, 그리고 예하부대라 되있으나, 최종 명령자ㆍ책임자는 이준설 인별인민민주공화국 대통령이었다.

인별국 금안주인민통제부와 폭동진압군의 만행

항쟁 주체의 성향과 이념

전개

사진으로 보는 4.28 민주화운동 전개 당시 모습


4.28 민주화운동이 시작된 직후 인별국 금안주인민통제부에서 배포ㆍ부착한 경고 포스터.


4.28 민주화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배치된 진압군의 탱크부대의 운전병이 한 시민에 의해 끌려 내려지는 모습. 4.28 민주화운동이 전국으로 퍼진 이후 곳곳에서 폭동진압군에 저항하는 모습이 자주 포착됬다.


이준설의 하야연설 이후인 5월 21일 인별인민민주공화국의 국기가 내려지는 순간.

영향력

기념 행사

의의

폭동진압군의 범죄

항쟁 관련 어록

진압군 측의 반성 사례

논란

명칭

친이준설단체대국민연합의 4.28 민주화운동 비하

왜곡

매체에서

다큐멘터리

관련 법률

4.2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4.28 민주화운동 유공자에 대한 예우에 관한 법률

이준설 정부 및 전체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미화 밑 찬양 등에 관한 특별법

학교 교육

여담

관련 자료

둘러보기

각주

  1. 인별인민민주공화국 정부기에 민주당의 주 지역이라는 이유로 가장 많은 탄압을 받았던 지역이었기에 금안주에서 시작되었다.
  2. 더욱 자세히 들어가면 청영시에서 시작하여 금안주 전체로 퍼진 것이다.
  3. 볼드체는 주요 인물들
  4. 4.28 민주화운동을 이끈 세력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오영환 정부기의 여당이 새로운민주당이었고, 오영환 정부기에 일어난 사건들로 인해 3.22 군사쿠데타가 발생했기에 오영환 정부의 뻘짓이 없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4.28 민주화운동 이후에도 민주당계 정당의 신뢰는 더욱 낮아지게 되었다.
  5. 공식 명칭이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명칭이다.
  6. 현 금성광역시.
  7. 방송에선 금안 폭동이라 선전했다. 이후 이 명칭이 티비로 송출되며, 점점 여러 명칭으로 번지게 되었다.
  8. 금안주 대학살. 이 사건은 4.28 민주화운동 시작의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