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중 하나의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관리자. 문서를 고치려면 이메일 인증 절차가 필요합니다. 사용자 환경 설정에서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이메일 주소 인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 class="wikitable" style="max-width:450px; float:right; color:#ffffff; border:2px solid #C60C30;" |- ! colspan="3" style="width:550px; background:#C60C30;" | {{large|을축정변}}<br>乙丑政變<br>Eulchuk political upheaval |- ! style="4" style="background: #000000;" | <div style="margin: -6px -9px;">[[파일:무제212 20250607204646.png|420px]]</div><br> | colspen="3" style="background: #D4AF37;" | 숭례문을 지키는 어영청 병사들과 그에 맞서 싸우는 진무대 소속 병사들의 전투를 그린 기록화 |- ! style="background:#D4AF37;" | 시기 | colspan="2" | 1865년 4월 26일 ~ 1965년 5월 12일 |- ! style="background:#D4AF37;" | 장소 | colspan="2" | [[조선]]의 경기, 전라지역 |- ! style="background:#D4AF37;" | 원인 | colspan="2" |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증건 발표 |- ! style="background:#D4AF37;" | 교전국 | width=40% | [[파일:Flag_of_the_king_of_Joseon.png|28px]] '''대조선국''' | width=40% | [[파일:대한제국 국기.png|28px]] '''개혁세력''' |- ! style="background:#D4AF37;" | 전력 | style="vertical-align:top;" | [[파일:Flag_of_the_king_of_Joseon.png|28px]] '''중앙군 7,000명<br> 훈련도감 2,500명<br> 어영청 1,500명<br> 총융청 1,000명<br> 금위영 1,000명<br> 수어청 1,000명<br> '''지방군 20,000명'''<ref>주요교전은 대부분 한성 내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숫자만 많지 사실상 한게 거의 없다. 물론 훈련수준이 처참해서 애초에 대규모 전투에 참여했더라도 잘싸웠을지 의문이다.</ref><br><br><br><br>'''총합: 27,000명''' | style="vertical-align:top;" | '''정예군 5,000명'''<br>한성포위군 3,000명<br>조선혁명군 1,500명<br>진무대 500명<br>'''의군 20,000명'''<br>호남연합진 4,200명<br>지화군 3,800명<br> 농민연합군 12,000명<br><br><br>'''총합: 25,000명''' |- ! style="background:#D4AF37;" | 지휘관 | style="vertical-align:top;" | '''흥선대원군'''<br>이최응<br>이재선<br>이현익<br>김좌근 | style="vertical-align:top;" | '''[[김이영]]'''<br>[[이시정]]<br>[[정세웅]]<br>[[박흥돌]]<br>[[서광렬]] |- ! style="background:#D4AF37;" | 결과 | colspan="2" | '''반란세력의 승리'''<br>[[대한제국]]의 건국 |- ! style="background:#D4AF37;" | 영향 | colspan="2" | 흥선대원군의 실각, 조선의 멸망 |- |} {{목차}} == 개요 == 1865년(고종 2년) 4월 26일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계획을 발표하자 이에 반발한 개혁세력과 농민들을 중심으로 조선 정부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사건이다. 이 전쟁을 통해 472년이라는 오랜시간동안 존속했던 조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 배경 == 1800년대는 서구 열강에 의한 아시아의 개항과 식민지화가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유럽과 미국은 아시아 각국을 개방시키고 이권을 선점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는 조선에도 점차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의 몰락과, 쿠로후네 사건 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며 근대 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던 일본의 모습을 보며, 조선의 지식인들과 개화적 실무 관료들 일부는 쇄국 정책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강경한 쇄국 정책에 반발하며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865년 4월 26일, 흥선대원군이 70만이라는 막대한 인력을 동원해 경복궁을 재건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민중과 개혁파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에 반발한 개혁 세력과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봉기하였다. == 전개 == == 평가 == == 매체에서 == == 여담 ==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 (원본 보기) 틀:Clearfix (원본 보기) 틀:Large (원본 보기) 틀:Resize (원본 보기) 틀:목차 (원본 보기) 을축정변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