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중 하나의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관리자. 문서를 고치려면 이메일 인증 절차가 필요합니다. 사용자 환경 설정에서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이메일 주소 인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천녕 타이틀}} {{역대 천녕 황왕}} {{달고왕}} '''달고왕'''(達暠王, 848 ~ 875)은 [[탐라국]](耽羅國)의 군왕(君王)이자 [[천녕]](天寧)의 건국자이다. [[익평왕|아버지]]를 도와 [[구주 정벌 전쟁]](九州征伐戰爭)에 나섰다. 857년, [[오노 성 공략전]](大野城攻略戰)에서 익평왕이 전사하자, 군권을 차지한 [[정영]](鄭瑛)을 독려하였다. 864년에 지역 호족들을 규합하여 [[하익성 전투]](下益城戰鬪)에서 일본 조정군을 격파하고 구주 전역을 차지하였다. 이후 [[천녕]](天寧)이라는 국호를 내세워 독립 왕국을 건설하였다. == 개요 == {{인용문|'''一年 冬十月, 群臣上言 國名理 不定爲 臣等以爲 天者廣光意伊厼,<br/>寧者平安日新意是乎 國號定爲爲尼 王從之'''<br/><small>(일년 동십월, 군신상언 국명이 부정위 신등이위 천자광광의이며,<br/>녕자평안일신의시호 국호정위위니 왕종지)</small><ref>(달고왕)1년 10월, 군신(群臣)들이 말하기를, 나라의 이름이 일정하지 않으니 신(臣)들이 생각컨대, '천'(天)은 넓게 빛이 드리운다라는 뜻이며, '녕'(寧)은 평안(平安)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므로 국호로 삼을 것이 어떨까 하니, 왕(달고왕)이 이를 따랐다.</ref>|<small>《[[대야서기]](大野書記)》 향전(鄕傳) 中</small>}} {{인용문|왕(달고왕)은 천성이 총명하고 인자하며, 학문에 힘쓰고 문장에 능하였다.<br/>허나 '''제 명에 못 죽었으니'''(不得其死) 이를 어찌하리까.|<small>서제거(徐悌據) 「충위비문(忠委碑文)」 전문 中</small>}} '''10살에 즉위하여 28살에 사망한''' 청년 군주로서, [[익평왕|아버지]]를 대신하여 정벌 전쟁을 완수하고 측근들을 통해 매우 불안정한 지역 호족 연맹체<ref>구주 전역에서 어떠한 기반도 없이 원정을 진행했던 것이기에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ref>에서 나름대로 중앙집권체제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다자이후]](大宰府) 일대를 직할지로 운영하여 토지 기반을 마련코자 했고, 각 호족들에게는 향직(鄕職)을 내려 민심을 수습과 권력층을 회유코자 했고, 때로는 [[상수리 제도]](上守吏制度)를 통해 호족들을 억압하기도 했다. == 재위 기간 == 구주 정벌 완수 이후인 864년부터는 호족 사회가 부담하던 연공 부담을 최대한 억제했으며, [[정략결혼]](政略結婚)과 사성(賜姓)을 통해 지역적 연고가 없던 왕실과 호족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였다. 또, 남부와 중부에는 별도의 지방관을 파견치 않도록 하여 호족 사회의 지방 기득권을 인정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상수리 제도]]의 활용으로 호족들의 반기를 철저히 억누르는 모습을 보이는 등 회유책과 강경책을 적절히 이용했다. 지방 행정 체제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기존 [[율령국]](律令國)을 바탕으로 [[통일신라|신라]](新羅)의 영향을 받아 전국을 9주 3소경으로 재조직하여 편성하였다. 각 호족들은 장원의 크기와 영향력에 따라 군수(郡守)·현령(縣令)으로 임명하였다. 말년에는 이들의 행정력을 어느정도 통제하기 위해 외사정(外司正)을 파견하기도 했다. 865년, 일본 조정에서 잃어버린 구주를 회복하기 위해 [[세토 내해]](瀬戸內海)로 수상 함대들을 배치하였고 달고왕 역시 300여 척에 달하는 [[교관선]]과 6,000명에 달하는 수병들을 통해 방어하게 되었다. 이들은 풍주(豊州) 인근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이 전투를 [[뇌호 해전]](瀬戸海戰)이라고 불렀다. 이 전투에서 초기에는 일본 조정군이 우세했으나 10번에 걸친 싸움 끝에 수상 운용 능력이 뛰어났던 천녕군이 일본 수군을 격파하였고, 전쟁 수행 의지가 꺾인 [[세이와 덴노]](清和天皇)는 달고왕을 형식상 좌왕(左王)의 작위를 제수하는 것으로 전쟁을 종결시켰다. 전쟁 이후 867년에 달고왕은 [[세이와 덴노]]에게 형식상으로 조공(朝貢)하였는데, [[일본]] 조정이 재차 무력 탈환을 염두한 것으로서 조심스럽게 행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세토 내해]](瀬戸内海)와 근접했던 [[복성주]](福成州)와 [[대분주]](大分州)에는 각각 [[일전성]](日田城)과 [[저축성]](杵築城)을 축성하고 [[교관선]](交關船)을 통한 해안 경비를 강화하는 등 군사 충돌을 대비하기도 했다. 내부적으로는 호족들의 반기 소요를 막기 위해 [[노병]](弩兵)들을 양성하고 이들을 친위대로 활용했다. 870년에는 각각 [[통일신라|신라]]의 [[경문왕]](景文王)과 [[당나라]](唐國)의 [[당 의종|의종]](懿宗)에게 조공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국제 사회에 엄연한 일원임을 증명하고 일본 조정의 위협을 견제하기 위한 일이었으리라 추정된다. == 각주 == {{각주}} [[분류:천녕]]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각주 (원본 보기) (보호됨)틀:각주/styles.css (원본 보기) 틀:달고왕 (원본 보기) 틀:역대 천녕 황왕 (원본 보기) 틀:인용문 (원본 보기) 틀:일반 기타 (원본 보기) 틀:천녕 타이틀 (원본 보기) 모듈:Check for unknown parameters (원본 보기) 달고왕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