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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요 == | | == 개요 == |
| 게르마니아의 설정을 작성한 문서다. | | 게르마니아의 설정을 작성한 문서다. |
| == 전전 == | | == 역사 == |
| 소련은 [[니콜라이 부하린 (게르마니아)|니콜라이 부하린]]이 경쟁자인 [[이오시프 스탈린 (게르마니아)|이오시프 스탈린]], 레프 트로츠키,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마네프를 밀어내고 레닌의 신임을 받아 후계자가 되었다. 레닌의 사망 이후 소련의 지도자가 된 부하린은 레닌의 뜻을 이어 신경제정책을 도입했으나 완전히 실패하여 소련의 경제는 완전히 몰락하였다. 이후 뒤늦게 산업화를 시도했으나 경제가 몰락하여 대규모 산업화를 할수 없었고 대규모 재정 긴축 및 군비축소가 이루어졌다. 이후에도 심각한 경제난을 해소하지 못하자 여러가지 사회적 혼란이 발생하였고 군비축소 때문에 트로츠키가 만든 군 체계는 완전 엉망이 되었고 규모 또한 매우 축소되었으며 부하린은 자신의 반대파에 대해 제대로 숙청을 진행하지 않아<ref>그래도 숙청의 여파 때문에 100만 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스탈린, 트로츠키, 지노비에프와 카마네프는 '정치적 리스크' 때문에 오히려 숙청시키지 않으면서 더 문제가 커졌다.</ref> 소련 공산당은 스탈린이 이끄는 중앙파, 트로츠키가 이끄는 좌익반대파, 소수지만 지노비예프파와 카마네프파와 자신이 이끄는 우익반대파가 서로 단합하지 못하고 서로 갈등만 일으키면서 정치적으로도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 | === 타임라인 === |
| | * 관동 대지진 - 1923년 9월 1일 |
| | * 쇼와금융공황 - 1927년 1월 26일 |
| | * 대공황 - 1929년 10월 24일 |
| | * 아돌프 히틀러 국가수상 취임 - 1933년 1월 30일 |
| | * 수권법 제정 - 1933년 3월 24일 |
| | * 아돌프 히틀러 퓌러 취임 - 1934년 8월 2일 |
| | * 라인란트 재무장 - 1936년 3월 7일 |
| | * 안슐루스 - 1938년 3월 13일 |
| | * 제2차 세계 대전 - 1939년 9월 1일 |
| | * 모스크바 협정 - 1943년 1월 13일 |
| | * 런던 협정 - 1943년 8월 4일 |
| | * 신질서 선포 - 1944년 1월 31일 |
| | *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1945년 9월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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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때문에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체결하지 않았으며 이후 매우 손쉽게 한달만에 폴란드 전역을 점령하였다. 이후 베저위붕 작전을 통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적은 피해로 매우 쉽게 점령하였다. 또한 프랑스 전선에서는 구데리안의 기갑부대가 쉬지 않고 덩케르크에 고립된 연합군을 완전히 괴멸시켜 버리면서 다이나모 작전은 시도도 못하고 완전히 실패로 돌아 연합국은 대규모 군사적 피해를 입어야 했고 프랑스도 함락되었다.
| | == 사건 == |
| | === 권력투쟁 === |
| | === 신경제정책 === |
| | {{글씨 크기|10|자세한 내용은 '[[신경제정책 (게르마니아)|{{color|#000000|'''신경제정책 (게르마니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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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 영국 해군은 프랑스가 함락당하자 영국 본토가 위험해질수 있다는 판단때문에 지중해 함대를 본토로 불러 들이려 했지만 이 정보를 미리 알아낸 독일 측에서 스페인의 협조 아래 독일과 이탈리아 공수부대가 지브롤터에 강하하여 지브롤터를 점령하였고 이후 지브롤터 해협 전체를 기뢰로 덮어버려 지중해 함대를 고립시켜버렸다.<ref>이후 몇몇 함선은 스스로 항복하여 무장 해제를 당하거나 각개 격파를 당해버렸다.</ref>
| | 1924년 블라디미르 레닌의 사망 이후 소련 공산당 내부에서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니콜라이 부하린 (게르마니아)|니콜라이 부하린]]이 블라디미르 레닌의 유산을 이어한 정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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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때문에 북아프리카 주둔 영국군은 보급이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이때를 이용해 이탈리아군은 영국령 이집트를 침공했다. 이후 이탈리아군도 보급 문제로 진격을 멈추고 영국군은 이때를 이용해 재정비를 하여 다시 이탈리아군에게 반격을 개시했으나 독일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북아프리카에 도착한 에르빌 롬멜의 독일 아프리카 군단이 영국군을 완전히 쓸어버리고 수에즈 운하까지 점령했다.
| | 그러나 정책은 완전히 실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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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던 문제들 때문에 소련군은 독일군과 사실상 쪽도 못쓰고 연이은 패배를 당하다가 완전히 무너졌고 그대로 A-A선과 우랄 산맥 근방까지 밀려나버렸다. 이에 소련은 스탈린의 소련, 트로츠키의 소련, 지노비예프의 소련과 카마네프의 소련으로 나누어졌고 이후 부하린은 이들의 의해서 실각된후 실종되었다.
| | === 제2차 세계 대전 === |
| | {{글씨 크기|10|자세한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 (게르마니아)|{{color|#000000|'''제2차 세계 대전 (게르마니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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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1943년 유럽을 정복하고 소련까지 끝낸 독일은 눈을 돌려 다시 영국으로 향했고 육군, 해군, 공군 가릴거 없이 전력이 약화된 영국은 독일을 이미 막을수 없었다. 또한 독일은 아일랜드 공화국군을 지원하여 영국 각지에서 테러를 발생시켜 사회 혼란을 야기시켰고 독일은 이때를 틈타 바다사자 작전을 개시하여 성공시켰고 영국을 점령했다.<ref>영국 해군은 지중해에서의 일로 인해 약화되었으며 독일 또한 잠수함 300척 이상을 대서양에 배치해버리면서 대서양 해운이 마비되어 영국은 당시 미국에서 수입해오는 모든 물건들이 전부 영국에 오지 못해 물자, 장비 및 식량 부족 문제를 겪었다. 또한 당시 영국 육군은 다이나모 작전의 실패로 인해 인력과 장비 부족을 겪고 있었다. 더불어, 독일의 밤낮 없는 폭격으로 인해 영국 공군 또한 절멸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고 장비를 생산할 공장과 설비 조차 마비되어 영국은 사실상 저항할 힘 없이 무너져 버렸다.</ref>
| | 1939년 [[대게르만국 (게르마니아)|독일국]]의 [[폴란드 침공 (게르마니아)|폴란드 침공]]에 의해 발발하여 [[대게르만국 (게르마니아)|독일국]], [[이탈리아 제국 (게르마니아)|이탈리아 왕국]], [[대일본제국 (게르마니아)|일본 제국]] 3국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과, 이에 [[미합중국 (게르마니아)|미합중국]]과 [[대영제국 (게르마니아)|대영제국]], [[소비에트 연방 (게르마니아)|소비에트 연방]], [[중화민국 (게르마니아)|중화민국]], [[자유 프랑스 (게르마니아)|프랑스 공화국]]이 이끄는 연합국이 맞서면서 1945년 [[중화민국 (게르마니아)|중화민국]]과 [[중국 공산당 (게르마니아)|중국 공산당]]이 항복할 때까지 총 6년 동안 이어진 전쟁이다.<ref> 단 [[중화민국 (게르마니아)|중화민국]]은 1937년부터 일본 제국과 싸우고 있었으므로 [[중화민국 (게르마니아)|중화민국]]의 실질적인 항전 기간은 8년이다. 자세한 내용은 [[중일전쟁 (게르마니아)|중일전쟁]] 문서 참고.</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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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미국에서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로 당선되긴 했지만 뉴딜 정책은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 결과 공화당이 의석 수를 크게 늘리고 민주당에서는 남부 민주당원들이 목소리를 내면서 뉴딜 정책은 더 탄력을 잃었다. 이렇게 인기가 떨어진 루스벨트는 레임덕이 왔고 어찌저찌 4년의 임기를 마치고 다시 한번 대선에 도전했지만 알프 랜던이 당선되었다.<ref>그러나 랜던은 상황을 수습하기는 커녕 더더욱 악화시키기만 했다.</ref>
|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21년 만에 일어난 세계 대전인 이 전쟁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으로, [[대게르만국 (게르마니아)|대게르만국]], [[이탈리아 제국 (게르마니아)|이탈리아 제국]], [[대일본제국 (게르마니아)|대일본제국]]이 새로운 초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만듦과 동시에 전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지금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전쟁으로 평가받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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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1937년에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였고 이에 반발하여 미국은 일본에 석유 금수 조치를 발효했다. 1941년 일본은 이에 반발하여 진주만 공습을 강행하여 항공모함과 군함 및 연료저장고를 모조리 파괴하였고 이로 인해 미국은 작전 수행능력이 매우 약화되었다. 또한 미국은 여전히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어서 또 다른 전쟁을 하기에는 매우 무리가 있었고 따라서 미국은 자신의 태평양 함대가 박살나는 모습을 보기만 해야했다. 이후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승리하여 태평양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 | === 신질서 선언 === |
| | | {{글씨 크기|10|자세한 내용은 '[[신질서 선언 (게르마니아)|{{color|#000000|'''신질서 선언 (게르마니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 그러나 1943년부터 미국은 압도적인 공업력으로 해군을 재건하며 일본은 재건된 태평양 함대에 의해서 계속 밀려나다가 1944년 결국 이오지마까지 밀려났다. 이후 미 해병대는 이오지마에 상륙했지만 상륙을 지원하러 온 태평양 함대가 연합함대와의 함대결전 중 유인전술에 걸려 대패하였으며 상륙한 해병대가 대량으로 항복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그러나 미국의 마지막 희망인 맨해튼 계획은 슬슬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맨해튼 계획은 대공황이 극복되지 못 한 상황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가중된 경제 문제로 인해 지지부진했고, 결국 독일이 우란프로옉트를 성공시키며 핵개발 경쟁에서 앞지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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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1945년 핵폭탄을 실은 독일의 전략폭격기가 베를린을 이륙해 우랄과 중국과 일본을 경유해 하와이에 핵을 투하하면서 미국의 태평양 함대가 전멸하고 홀시 제독과 니미츠 제독과 수많은 병사들이 사망하면서 미국은 전의를 상실하고 종전을 제의해왔고 이후 야마토 전함 갑판 위에서 종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종전을 대가로 미국은 하와이를 포함한 태평양의 섬들과 샌프란시스코와 산호세 일대를 일본에게 영구조차지로 넘겨야만 했으며 또한 추축국들에게 막대한 배상금 또한 지불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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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미국마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하자 연합국 편에서 싸우는 국가는 이제 중국밖에 남지 않았다. 또한 츠지 마사노부와 무타구치 렌야가 임팔 작전을 기적같이 성공시키며 그나마 영국령 인도에서 오던 보급이 완전히 끊기게 되어 중국은 완전히 고립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항복을 거부하고 국공합작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대륙타통작전을 게시하여 중국을 점령해 나갔으며 이후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충칭에서 최후의 저항을 한다음 죽음을 맞이했다. 이후 쇼와 덴노가 라디오를 통해 "아세아와 우리 시대의 평화"를 선포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은 추축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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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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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re would never again be silence for People of Germania" "앞으로 다시는 게르마니아의 사람들에게 고요란 없을 것이다" 가장 현실적인 추축국 승리 시나리오... 그리고 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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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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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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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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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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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게르마니아의 설정을 작성한 문서다.
역사
타임라인
- 관동 대지진 - 1923년 9월 1일
- 쇼와금융공황 - 1927년 1월 26일
- 대공황 - 1929년 10월 24일
- 아돌프 히틀러 국가수상 취임 - 1933년 1월 30일
- 수권법 제정 - 1933년 3월 24일
- 아돌프 히틀러 퓌러 취임 - 1934년 8월 2일
- 라인란트 재무장 - 1936년 3월 7일
- 안슐루스 - 1938년 3월 13일
- 제2차 세계 대전 - 1939년 9월 1일
- 모스크바 협정 - 1943년 1월 13일
- 런던 협정 - 1943년 8월 4일
- 신질서 선포 - 1944년 1월 31일
-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1945년 9월 2일
사건
권력투쟁
신경제정책
자세한 내용은 '신경제정책 (게르마니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24년 블라디미르 레닌의 사망 이후 소련 공산당 내부에서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니콜라이 부하린이 블라디미르 레닌의 유산을 이어한 정책이다.
그러나 정책은 완전히 실패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 (게르마니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39년 독일국의 폴란드 침공에 의해 발발하여 독일국,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3국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과, 이에 미합중국과 대영제국, 소비에트 연방, 중화민국, 프랑스 공화국이 이끄는 연합국이 맞서면서 1945년 중화민국과 중국 공산당이 항복할 때까지 총 6년 동안 이어진 전쟁이다.[1]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21년 만에 일어난 세계 대전인 이 전쟁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으로, 대게르만국, 이탈리아 제국, 대일본제국이 새로운 초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만듦과 동시에 전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지금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전쟁으로 평가받는다.
신질서 선언
자세한 내용은 '신질서 선언 (게르마니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 단 중화민국은 1937년부터 일본 제국과 싸우고 있었으므로 중화민국의 실질적인 항전 기간은 8년이다. 자세한 내용은 중일전쟁 문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