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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을 지키는 어영청 병사들과 그에 맞서 싸우는 진무대 소속 병사들의 전투를 그린 기록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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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위영 1,000명<br> | 금위영 1,000명<br> | ||
수어청 1,000명<br> | 수어청 1,000명<br> | ||
'''지방군 | '''지방군 10,000명'''<ref>주요교전은 대부분 한성 내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숫자만 많지 사실상 한게 거의 없다. 물론 훈련수준이 처참해서 애초에 대규모 전투에 참여했더라도 잘싸웠을지 의문이다.</ref><br><br><br><br>'''총합: 17,000명''' | ||
| style="vertical-align:top;" | '''정예군 5,000명'''<br>한성포위군 3,000명<br>조선혁명군 1,500명<br>진무대 500명<br>'''의군 20,000명'''<br>호남연합진 4,200명<br>지화군 3,800명<br> 농민연합군 12,000명<br><br><br>'''총합: 25,000명''' | | style="vertical-align:top;" | '''정예군 5,000명'''<br>한성포위군 3,000명<br>조선혁명군 1,500명<br>[[진무대]] 500명<br>'''의군 20,000명'''<br>호남연합진 4,200명<br>지화군 3,800명<br> 농민연합군 12,000명<br><br><br>'''총합: 25,000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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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D4AF37;" | 지휘관 | ! style="background:#D4AF37;" | 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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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 개요 == | ||
1865년(고종 2년) 4월 26일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계획을 발표하자 이에 반발한 개혁세력과 농민들을 중심으로 조선 정부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사건이다. 이 전쟁을 통해 472년이라는 오랜시간동안 존속했던 조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 1865년(고종 2년) 4월 26일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계획을 발표하자 이에 반발한 [[대한협회]]의 개혁세력과 농민들을 중심으로 조선 정부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사건이다. 이 전쟁을 통해 472년이라는 오랜시간동안 존속했던 조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 ||
== 배경 == | == 배경 == | ||
1800년대는 서구 열강에 의한 아시아의 개항과 식민지화가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유럽과 미국은 아시아 각국을 개방시키고 이권을 선점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는 조선에도 점차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 1800년대는 서구 열강에 의한 아시아의 개항과 식민지화가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유럽과 미국은 아시아 각국을 개방시키고 이권을 선점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는 조선에도 점차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 ||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의 | |||
1865년 4월 26일, 흥선대원군이 | 조선은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의 몰락으로, 강했던 청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걸 느꼈다. 그에 비해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 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며 근대 국가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이걸본 조선의 지식인들과 개화적 실무 관료들 일부는 쇄국 정책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강경한 쇄국 정책에 반발하며 점차 세력을 확장해 1865년 1월말에는 그 수가 5천여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조선을 전복시키고 새나라를 세우기 위해 비밀리에 무기를 모았다. | ||
1865년 4월 26일, 흥선대원군이 막대한 인력과 국가예산을 동원해 경복궁을 재건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민중과 개혁파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리고 결국 이에 반발한 개혁 세력과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봉기하였다. | |||
== 전개 == | == 전개 == | ||
===대한협회 내부의 상황 === | |||
1865년 4월 26일,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계획을 발표한 후 백성들의 불만이 거세지자 [[대한협회]]의 [[김이영]]은 이때를 기다렸다는듯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가진 사병들과 무기, 그리고 백성들을의 힘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자" 그러나 대한협회의 [[임준석]]은 이에 반대했다. 그는 "지금은 아직 군사들이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 글도 깨우치지 못한 백성들과의 협동이 제대로 이루어질리 없다"라고 주장하며, 반란은 보류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이영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자 임준석은 이건 미친짓이라면서 결국 대한협회를 탈퇴한다. | |||
===전주 감영 함락작전=== | |||
다음날인 4월 27일 아침, 대한협회에서 예상한대로 나주에서 [[박흥돌]]을 중심으로한 농민연합군 9,000여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무기를 얻기 위해 전라좌도 감영과 병영에서 2,500여명의 관군들과 교전했다. 농민연합군은 죽창, 사제 조총, 농기구등으로 무장하고 있던 반면에 관군들은 환도나 창도 있었지만 60%정도가 조총으로 무장하고있었다. 농민군들이 공격해오자 관군들의 조총이 불을 뿜었고, 농민연합군의 대열이 무너지며, 승리는 관군들이 가져가는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더 많은 농민군들이 몰려오자 농민군을 제압할수 없게됐고, 그날밤 8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익산방면으로 철수한다. 어쨌든 농민군은 승리한 셈이다. 농민군들은 2,000여명이 다치거나 죽었으나, 전라좌도 감영에서 무장한 후 주변 마을에서 병력을 모아 다음날인 28일부터 익산방면으로 간 관군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 |||
== 평가 == | == 평가 == | ||
== 매체에서 == | == 매체에서 == | ||
== 여담 == | == 여담 == |
2025년 6월 8일 (일) 16:10 기준 최신판
을축정변 乙丑政變 Eulchuk political upheava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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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을 지키는 어영청 병사들과 그에 맞서 싸우는 진무대 소속 병사들의 전투를 그린 기록화 | |||||
시기 | 1865년 4월 26일 ~ 1965년 5월 12일 | ||||
장소 | 조선의 경기, 전라지역 | ||||
원인 |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증건 발표 | ||||
교전국 | ![]() |
![]() | |||
전력 | ![]() 훈련도감 2,500명 |
정예군 5,000명 한성포위군 3,000명 조선혁명군 1,500명 진무대 500명 의군 20,000명 호남연합진 4,200명 지화군 3,800명 농민연합군 12,000명 총합: 25,000명 | |||
지휘관 | 흥선대원군 이최응 이재선 이현익 김좌근 |
김이영 이시정 정세웅 박흥돌 서광렬 | |||
결과 | 반란세력의 승리 대한제국의 건국 | ||||
영향 | 흥선대원군의 실각, 조선의 멸망 |
개요
1865년(고종 2년) 4월 26일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계획을 발표하자 이에 반발한 대한협회의 개혁세력과 농민들을 중심으로 조선 정부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사건이다. 이 전쟁을 통해 472년이라는 오랜시간동안 존속했던 조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배경
1800년대는 서구 열강에 의한 아시아의 개항과 식민지화가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유럽과 미국은 아시아 각국을 개방시키고 이권을 선점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는 조선에도 점차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조선은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의 몰락으로, 강했던 청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걸 느꼈다. 그에 비해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 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며 근대 국가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이걸본 조선의 지식인들과 개화적 실무 관료들 일부는 쇄국 정책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강경한 쇄국 정책에 반발하며 점차 세력을 확장해 1865년 1월말에는 그 수가 5천여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조선을 전복시키고 새나라를 세우기 위해 비밀리에 무기를 모았다.
1865년 4월 26일, 흥선대원군이 막대한 인력과 국가예산을 동원해 경복궁을 재건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민중과 개혁파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리고 결국 이에 반발한 개혁 세력과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봉기하였다.
전개
대한협회 내부의 상황
1865년 4월 26일,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계획을 발표한 후 백성들의 불만이 거세지자 대한협회의 김이영은 이때를 기다렸다는듯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가진 사병들과 무기, 그리고 백성들을의 힘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자" 그러나 대한협회의 임준석은 이에 반대했다. 그는 "지금은 아직 군사들이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 글도 깨우치지 못한 백성들과의 협동이 제대로 이루어질리 없다"라고 주장하며, 반란은 보류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이영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자 임준석은 이건 미친짓이라면서 결국 대한협회를 탈퇴한다.
전주 감영 함락작전
다음날인 4월 27일 아침, 대한협회에서 예상한대로 나주에서 박흥돌을 중심으로한 농민연합군 9,000여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무기를 얻기 위해 전라좌도 감영과 병영에서 2,500여명의 관군들과 교전했다. 농민연합군은 죽창, 사제 조총, 농기구등으로 무장하고 있던 반면에 관군들은 환도나 창도 있었지만 60%정도가 조총으로 무장하고있었다. 농민군들이 공격해오자 관군들의 조총이 불을 뿜었고, 농민연합군의 대열이 무너지며, 승리는 관군들이 가져가는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더 많은 농민군들이 몰려오자 농민군을 제압할수 없게됐고, 그날밤 8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익산방면으로 철수한다. 어쨌든 농민군은 승리한 셈이다. 농민군들은 2,000여명이 다치거나 죽었으나, 전라좌도 감영에서 무장한 후 주변 마을에서 병력을 모아 다음날인 28일부터 익산방면으로 간 관군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평가
매체에서
여담
- ↑ 주요교전은 대부분 한성 내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숫자만 많지 사실상 한게 거의 없다. 물론 훈련수준이 처참해서 애초에 대규모 전투에 참여했더라도 잘싸웠을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