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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미셴 가족은 셋 다 제르멩의 다수를 이루고 있던 [[에르멜스인]]이었으며, 이에 따라 모어로는 [[에르멜스어]]를 썼으나 접경지대 다민족 지역 거주민답게 [[센어]]에도 능통하였다{{ref|그러나 학교에서 배우는 [[루메르스어]] 수업은 별로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 요나스는 제르멩 시가지와 접해 있던 [[아르보디앙 세느데실 왕국|세느데실]] [[아르지엥]]을 드나들며 농산물을 사고파는 상인이었으며, 어머니 에르사는 가족 소유 과수원{{ref|에르사는 과수원을 운영하던 집안이었다. 그녀의 남동생 에르민 체른스트 아를리헨(Ermin Cernsst Arlichen, 1930~19??)과 나누어 물려받았다.}}을 운영하였다{{ref|당시 제르멩을 비롯한 [[에르멜리시아]] 서안은 이러한 소규모 자영농이 일반적이었다.}}. | |||
한넬스는 | 1969년, 한넬스는 [[오르튀에 제1초중교]]를 졸업했다{{ref|당시에는 점차 의무교육이 전 대륙에 도입되어가고 있었다.}}. 유년기의 한넬스는 방과후에 아버지를 돕거나, 시장에 들르는 잡심부름을 하거나, 때로는 자전거를 끌고 직접 세느데실로 건너가기도 했다{{ref|일 년에 한 번 정도 통행증을 잃어버릴 때면, 부모님에게 꾸중을 듣기도 했다.}}. | ||
한넬스는 전형적인 제르멩에 사는 에르멜스인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개방적이고 세속적이였다. 종교는 [[칼레메닐]] 구파였고, 매주 교회에 다녀왔다{{ref|그러나 독실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1962년, 제르멩 공화국이 [[에르멜스 공화국]]에 합병되었으나 자신이 어렸을 때였기에, 여기에 따른 정체성 갈등은 별로 겪지 않았다. 합병 이후에 학교 생활을 보냈으므로, 자연스레 스스로를 "제르멩에 사는 에르멜스인"이라고 정의하였다. | |||
그의 | 한편으로, 한넬스는 에르멜스의 우경화와 군국주의화, 배타성을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제르멩은 [[제2차 동서대전]] 직전까지도 국경이 활짝 열려 있었던 월경지였으며, 주변국의 무역을 통하여 먹고살았던 이곳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개방적이었다. 한넬스도 이러한 성향에 가까웠으며, 여기에 제르멩이 에르멜스 본토와 동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는 점에서 본토의 프로파간다 물결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한넬스가 국제 화합과 평화를 중시했던 것은 순전히 국경을 넘나들며 생계를 유지하는 자신과 제르멩인들의 안위와, 인구가 작아 군사력이 약해 무력 분쟁에 휘말리면 매우 불리해지는 위치에 속해 있던 제르멩의 지정학적 위치를 를 고려한 처사였다. | ||
당시 에르멜스는 징병제 국가로, 18세 이상의 남성에게 2년간의 복무가 의무적으로 부여되어 있었다. 한넬스는 이에, 바로 입대해 금방 전역하고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아 이후로는 농산물 유통업을 이어나가겠다는 목표를 세워 그가 18세 되던 1972년 [[9월 10일]]에 징집되었다. 당시 제르멩에는 훈련소가 없어 본토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그는 배를 타고 생전 처음으로 본토에 가게 되었다. 그렇게 동년 [[10월 21일]], 한넬스는 [[슈타에노아 육군훈련소]](Staénois)에 입대하였다. 이때 '''C-72-23-0812097'''라는 군번을 달게 되었다{{ref|C는 육군이라는 뜻, 72는 1972년에 입대했다는 뜻, 23은 그의 거주등록지인 [[제르멩]]이 제23군구(제르멩 관할)에 속했다는 뜻, 나머지는 그의 고유번호이다.}}. 이듬해, 1973년 [[1월 20일]], 한넬스는 기초군사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았다. | |||
그는 [[제32기갑여단(에르멜스 공화국)|제32기갑여단]]에 배치받았다. 일단 그가 여기저기 이동하는 아버지를 많이 따라다녔기 때문에 그러한 기계를 다루는 부분에서 유능하다는 점, 그리고 제32기갑사단의 주둔지가 다름아닌 제르멩이라는 점에서{{ref|높은 기동성을 자랑하여, 접경지이자 요충지인 제르멩을 높은 효율로 지켜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 부대.}} 정해진 것이었다{{ref|에르멜스군은 보통 출신지에 배치해주었다. 그러나 사실은, 한넬스가 에르멜스에서 '우월민족'인 순혈 에르멜스인이었다는 점에서 이런 '우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후일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는 조국(정확히는 정권)에 대한 큰 회의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제32기갑여단에서 1년 9개월 동안 지내며 1975년 [[2월 2일]]에 만기전역하여 다시금 민간인 신분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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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30일 (금) 20:5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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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르멜스 공화국 육군 C-72-23-0812097 한넬스 그레미셴 Hannels Gremiche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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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한넬스 유르고트 그레미셴 Hannels Jurgott Gremichen[1] | ||
별칭 | 한스 Hanns 코르만 4 Cormann 4(nott)[2] | ||
성별 | 남성 | ||
출생 | 1954년(5331년) 5월 22일 | ||
자유로운 제르멩 공화국(Xermen), 시내, 오르튀에구(Ortuè), 헤뉴 가(Henue) | |||
사망 | ? | ||
? | |||
거주지 | 에르멜스 공화국 제르멩 자치시 오르튀에구 헤뉴 가 | ||
부모 | 요나스 마르쿠스 그레미셴 Jonas Markus Gremichen | ||
에르사 멜리아 아를리셴 Erssa Mellia Arlichen[3][4] | |||
형제자매 | 없음 | ||
아내 | ? | ||
자녀 | ? | ||
민족 | 에르멜스인 | ||
모국어 | 에르멜스어, 센어 | ||
국적 | 제르멩 공화국 → 에르멜스 공화국 | ||
종교 | 칼레메닐 (구파) | ||
신체 | 175cm, 65kg, A형, Rh+ | ||
학력 | 오르튀에 제1초중교[5] |
개요
한넬스 그레미셴(Hannels Gremichen)은 에르멜스 공화국 육군 제32기갑여단 소속 군인이다.
생애
전전
1954년 5월 22일, 제르멩 오르튀에의어느한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났다[6]. 덕분에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유년기를 행복하게 보내었다.
그레미셴 가족은 셋 다 제르멩의 다수를 이루고 있던 에르멜스인이었으며, 이에 따라 모어로는 에르멜스어를 썼으나 접경지대 다민족 지역 거주민답게 센어에도 능통하였다[7]. 아버지 요나스는 제르멩 시가지와 접해 있던 세느데실 아르지엥을 드나들며 농산물을 사고파는 상인이었으며, 어머니 에르사는 가족 소유 과수원[8]을 운영하였다[9].
1969년, 한넬스는 오르튀에 제1초중교를 졸업했다[10]. 유년기의 한넬스는 방과후에 아버지를 돕거나, 시장에 들르는 잡심부름을 하거나, 때로는 자전거를 끌고 직접 세느데실로 건너가기도 했다[11].
한넬스는 전형적인 제르멩에 사는 에르멜스인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개방적이고 세속적이였다. 종교는 칼레메닐 구파였고, 매주 교회에 다녀왔다[12]. 1962년, 제르멩 공화국이 에르멜스 공화국에 합병되었으나 자신이 어렸을 때였기에, 여기에 따른 정체성 갈등은 별로 겪지 않았다. 합병 이후에 학교 생활을 보냈으므로, 자연스레 스스로를 "제르멩에 사는 에르멜스인"이라고 정의하였다.
한편으로, 한넬스는 에르멜스의 우경화와 군국주의화, 배타성을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제르멩은 제2차 동서대전 직전까지도 국경이 활짝 열려 있었던 월경지였으며, 주변국의 무역을 통하여 먹고살았던 이곳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개방적이었다. 한넬스도 이러한 성향에 가까웠으며, 여기에 제르멩이 에르멜스 본토와 동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는 점에서 본토의 프로파간다 물결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한넬스가 국제 화합과 평화를 중시했던 것은 순전히 국경을 넘나들며 생계를 유지하는 자신과 제르멩인들의 안위와, 인구가 작아 군사력이 약해 무력 분쟁에 휘말리면 매우 불리해지는 위치에 속해 있던 제르멩의 지정학적 위치를 를 고려한 처사였다.
당시 에르멜스는 징병제 국가로, 18세 이상의 남성에게 2년간의 복무가 의무적으로 부여되어 있었다. 한넬스는 이에, 바로 입대해 금방 전역하고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아 이후로는 농산물 유통업을 이어나가겠다는 목표를 세워 그가 18세 되던 1972년 9월 10일에 징집되었다. 당시 제르멩에는 훈련소가 없어 본토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그는 배를 타고 생전 처음으로 본토에 가게 되었다. 그렇게 동년 10월 21일, 한넬스는 슈타에노아 육군훈련소(Staénois)에 입대하였다. 이때 C-72-23-0812097라는 군번을 달게 되었다[13]. 이듬해, 1973년 1월 20일, 한넬스는 기초군사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았다.
그는 제32기갑여단에 배치받았다. 일단 그가 여기저기 이동하는 아버지를 많이 따라다녔기 때문에 그러한 기계를 다루는 부분에서 유능하다는 점, 그리고 제32기갑사단의 주둔지가 다름아닌 제르멩이라는 점에서[14] 정해진 것이었다[15]. 그는 제32기갑여단에서 1년 9개월 동안 지내며 1975년 2월 2일에 만기전역하여 다시금 민간인 신분이 되었다.
그는 다시는 총을 잡지 않을 줄 알았다.... 수레 대신 전차를 몰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전중
전후
대인관계
한넬스와 클레어 프레티앙은 어릴 때부터 자주 만나던 사이였다. 국경이라는 선을 사이에 두고는 있었으나, 넘나들며 생계를 유지하는 두 가족에게는 별다른 실체감이 없었던 것도 한몫했다. 두 가족은 자전거로 한 시간 조금 안 되면 바로 닿는 가까운 거리에 살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일을 도우러 자주 (놀러) 나왔던 한넬스는 자연스레 아르지엥에 자주 왕래하게 되었다. 또 과수원을 운영하던 클레어네 집과의 거래를 위해 자주 방문했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많이 만나게 되었다.
둘은 성장하면서 각자 학교에 가야 했으므로, 청소년기에는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다. 한넬스는 전역 이후 유통책으로서의 일을 배우고, 상인 일을 물려받을 준비를 하며 평범하게 자라고 있었다. 이들은 여전히 서로 만나거나, 연락하거나 하면서 친한 사이로 남았다.
기타
- ↑ 유르고트는 할아버지의 이름이다.
- ↑ /코르만 노트/. 콜사인 비슷한 거다. 뜻은 "삽살개".
- ↑ 물론 결혼 전 성씨로, 결혼 이후에는 그레미셴이라는 성씨를 쓴다.
- ↑ 부부의 성씨에 둘 다 등장하는 셴(chen) 부분은 들판이라는 뜻이다.
- ↑ 학제는 5-3.
- ↑ 양친 다 건재하고, 제르멩의 무너져가는 균형 속에서 용케 살아남은 중산층이었다.
- ↑ 그러나 학교에서 배우는 루메르스어 수업은 별로 못했다고 한다.
- ↑ 에르사는 과수원을 운영하던 집안이었다. 그녀의 남동생 에르민 체른스트 아를리헨(Ermin Cernsst Arlichen, 1930~19??)과 나누어 물려받았다.
- ↑ 당시 제르멩을 비롯한 에르멜리시아 서안은 이러한 소규모 자영농이 일반적이었다.
- ↑ 당시에는 점차 의무교육이 전 대륙에 도입되어가고 있었다.
- ↑ 일 년에 한 번 정도 통행증을 잃어버릴 때면, 부모님에게 꾸중을 듣기도 했다.
- ↑ 그러나 독실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 ↑ C는 육군이라는 뜻, 72는 1972년에 입대했다는 뜻, 23은 그의 거주등록지인 제르멩이 제23군구(제르멩 관할)에 속했다는 뜻, 나머지는 그의 고유번호이다.
- ↑ 높은 기동성을 자랑하여, 접경지이자 요충지인 제르멩을 높은 효율로 지켜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 부대.
- ↑ 에르멜스군은 보통 출신지에 배치해주었다. 그러나 사실은, 한넬스가 에르멜스에서 '우월민족'인 순혈 에르멜스인이었다는 점에서 이런 '우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후일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는 조국(정확히는 정권)에 대한 큰 회의감을 느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