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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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1|짐이 태어났을 때 결코 신령스럽거나 기이한 징조들이 보이지 않았다. 또 자라날 때도 신기한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18살에 제위에 오른 후 지금까지 58년 동안 역사책에 실려 있는 상서로운 별, 상서로운 구름, 상서로운 독수리가 나타나는 경사라든가 궁궐 앞에 불타는 진주와 구름이 나타나거나 별똥별이 하늘의 뜻을 나타내려고 떨어지는 것 따위의 하늘에서 내려준다는 상서로운 조짐은 사람들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모두 헛된 말일 뿐이다.<br> 짐은 감히 그렇게까지 잘 다스렸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하루하루의 일상을 진실된 마음을 갖고 실제에 도움이 되도록 다스렸을 뿐이다.}} | {{인용문1|짐이 태어났을 때 결코 신령스럽거나 기이한 징조들이 보이지 않았다. 또 자라날 때도 신기한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18살에 제위에 오른 후 지금까지 58년 동안 역사책에 실려 있는 상서로운 별, 상서로운 구름, 상서로운 독수리가 나타나는 경사라든가 궁궐 앞에 불타는 진주와 구름이 나타나거나 별똥별이 하늘의 뜻을 나타내려고 떨어지는 것 따위의 하늘에서 내려준다는 상서로운 조짐은 사람들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모두 헛된 말일 뿐이다.<br> 짐은 감히 그렇게까지 잘 다스렸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하루하루의 일상을 진실된 마음을 갖고 실제에 도움이 되도록 다스렸을 뿐이다.}} | ||
=== | === 가정사과 건강 === | ||
재위 도중의 찬란한 업적과는 달리 가정사는 상당히 불행했다. 아버지이자 부군인 [[윌리엄 4세]]가 45세에 지병으로 급사하였고 아들들도 그렇게 오래 살지 않았다. 장남 [[프레더릭 4세]]는 운동과 소식, 규칙적 생활로 매우 튼튼한 몸을 가졌던 아버지와 달리 어려서부터 잔병치레를 많이하여 프레더릭 3세의 마음을 애태웠고 결국 프레더릭 3세가 승하한 이후 황제 직을 맡은지 4년만에 쓰러져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하다가, 6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차남인 길버트 프레더릭 화이트로이드도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나마 3남인 윌리엄 덩컨 존스 화이트로이드가 '''92세'''로 매우 장수한 편이다. | |||
반면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킹혼]]은 76세로 당대 기준으로 꽤나 장수했다. 게다가 프레더릭 3세는 '''80세'''까지 살아서 역대 영국 황제중 손에 꼽을정도로 오래 살았다. 과도한 업무로 인해 요절하는 사람이 많았던 영국 황제중에서,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프레더릭 3세가 장수했다는 점이 꽤 흥미를 모으고 있다. | |||
평소 프레더릭 3세는 채소 중심의 식단으로 하루 2끼만 먹었고 이것도 많이 먹지 않았다. 식후에는 소화를 위해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는 활동을 가졌다. 또한 밤 12시에 되면 무조건 잠에 들어 다음날 6시에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가졌다. 이러한 생활 패턴은 과도한 업무에 시달렸던 프레더릭 3세가 장수하는 원인이 되었다. | |||
== 비판 == | == 비판 == |
2021년 11월 15일 (월) 01:10 판
![]() 브리타니아 제국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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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제국 제3대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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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 초대 황제 프레더릭 3세 | Frederick III | |||||||||||||||||||||||||||||
중화제국 초대 황제 태조 선황제 | 太祖 宣皇帝 | |||||||||||||||||||||||||||||
B.B. 22년 50세 생일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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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 敬誠信中和功德大成宣皇帝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 경성신중화공덕대성선황제 | |||||||||||||||||||||||||||||
이름 | 프레더릭 조지 필립 아서 화이트로이드 Frederick George Philip Arthur Whitelloyd | ||||||||||||||||||||||||||||
출생 | B.B. 72년 6월 23일 | ||||||||||||||||||||||||||||
대영제국 아메리카 리치몬드 화이트로이드 | |||||||||||||||||||||||||||||
대관식 | B.B. 54년 3월 3일 | ||||||||||||||||||||||||||||
대영제국 아메리카 임페리얼 캐피톨 아일스버리궁 | |||||||||||||||||||||||||||||
사망 | 8년 9월 10일 (향년 80세) | ||||||||||||||||||||||||||||
대영제국 아메리카 임페리얼 캐피톨 헌팅던하우스 | |||||||||||||||||||||||||||||
능묘 | 태건릉(太建陵) | ||||||||||||||||||||||||||||
국적 | ![]() | ||||||||||||||||||||||||||||
재위 | 연합왕국 국왕 | ||||||||||||||||||||||||||||
B.B. 54년 3월 3일 - B.B. 1년 12월 31일 | |||||||||||||||||||||||||||||
대영제국 황제 | |||||||||||||||||||||||||||||
0년 1월 1일 - 8년 6월 23일 | |||||||||||||||||||||||||||||
중화제국 황제 | |||||||||||||||||||||||||||||
0년 1월 1일 - 8년 6월 23일 | |||||||||||||||||||||||||||||
인도제국 황제 | |||||||||||||||||||||||||||||
B.B. 54년 3월 3일 - 8년 6월 2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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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영제국과 중화제국의 초대 황제, 그리고 인도제국의 제3대 황제.
상세
영국 뿐만 아니라 전 서양서를 통틀어서도 가장 뛰어난 군주 중 한명으로 꼽힌다. 대영제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인 62년간 제국을 통치하였다. 즉위 당시에는 18세의 어린 나이였고, 승하 당시에는 80세였다. 흔히 "황제"로 알려져있지만, 황제로 재위한 기간은 마지막 8년 정도로 그렇게 길지 않다. 그러나 그의 치세동안 영국이 본격적인 제국주의 팽창 정책을 통해 황제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기에 "황제"로 자주 불리는 것이다.
엄청난 공부와 수양을 통해 지식과 교양을 쌓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 전쟁을 지휘하고 원정을 강행한 것에서 보이듯이 대영제국의 군사력을 단련하는데 힘썼다. 진정한 의미에서 문무를 겸비한 황제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청나라의 영향으로 유교 성리학적인 요소를 대영제국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왕위를 재편하고, 서양 뿐만 아니라 동양의 학문 역시 수용하여 영국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한편으로는 적극적인 제국 팽창 정책에 따라 중국, 인도, 아프리카 지역을 식민화하였고, 파운드화 우위 속에서 대영제국의 압도적 경제 우위 체제를 성립하였다. 즉, 세계 패권국으로서의 대영제국은 프레더릭 3세의 치세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애
유년기
연합왕국 국왕으로의 즉위
영토 확장
산업화와 국가의 혼란 속에서
세계전쟁
칭제건원과 말년
개인사
중국을 사랑한 황제
여러면에서 중국의 제도를 많이 연구하고, 대영제국의 체제에 도입하였다. 대영제국의 황실에는 다른 서양권 왕정에서 볼 수 없는 제도가 많다. 황제가 총리와 독대하는 것이 아닌 매주 내각 구성원 전체와 모여 국정에 대한 보고를 듣고 토론하고, 여러 학자들과 모여 학문에 대해 공부하고 토론하는 것은 중국의 제도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사관을 두어 황제의 말과 행동을 기록하게하여 사후 황제의 기록물을 편찬하고, 화이트로이드 궁에 시신이 안치되는 것 외에 중화제국 본토에 능묘도 따로 조성된다. 황제가 생전 퇴위하면 태상황으로 오르는 것 역시 중국의 제도를 참조한 것으로, 원래 영국 왕실에서 시행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듯 프레더릭 3세에 의해 "좋은 황실 문화"라고 생각된 것중 상당수가 대영제국 황실에도 도입되었기 때문에, 대영제국 황실이 사실상 중화 왕조를 이은 것이나 다름 없다는 평가도 있다.
중국의 제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문화도 크게 동경하여 어려서부터 궁술, 기마 등 중국의 여러 문화들을 배웠으며, 중국의 고문서와 도자기, 그림들을 모으는 것을 취미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10대 중반부터 중국어를 공부하여 20대 중반에 들어서는 거의 원어민과 다름 없는 수준의 중국어를 구사하였다고 한다. 노년에는 아예 자신이 중국의 역사를 정리한 15권의 책을 저술하여 출간하기도 하였다. 중국식 분재 키우기, 서예, 수석모으기 등의 취미도 가졌다고 전해진다. 중국의 전통 음악에 대해서도 연구하였지만 악기를 잘 다루지는 못했다고 한다.
다만 청나라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었다. 25세에 광서제의 즉위식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서태후의 각종 실정으로 인해 망가진 청나라의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평소에 성리학에 관심이 많아 제왕학도 공부했던 그는 청나라의 부패하고 국정에 무관심했던 황제 일가와 신하들을 경멸, 혐오하였다. 광서제의 즉위 이후 얼마 안가 -42년 영국이 청나라와 전쟁을 겪으면서 홍콩이 영국의 영토로 복속되었고, -4년에는 아예 청나라가 영국에 합병되어 옥새를 건내받는 등의 일이 일어났다. 프레더릭 3세는 서양인들중 누구보다도 중국의 역사, 정치, 문화을 흠모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2,300년간 이어진 중화 왕조를 끝내고 "백인 천자"의 시대를 세운 장본인이 된 것이다.
종교
프레더릭 3세의 종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모태신앙인 성공회보다 유교 성리학을 더 신뢰하였을 것이라는게 중론이다. 창조론보다 진화론에 더 관심이 많아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신의 섭리에서 어긋난다할지라고 신민에게 더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학문이라면 학문을 따르겠다고 한 적이 있다. 또한 성경에 써져있는 말이 무조건적으로 이치에 맞거나 도덕적으로 옳지는 않다고도 하였다.
오히려 삼강오륜, 논어 등 중국의 유교 성리학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20대때부터 중국의 학문에 큰 관심을 보여 30대에는 거의 모든 유교 경전을 접하였다. 그는 실리주의자로서 신비주의적인 종교에 의지하기보다는, 스스로 수양하고 지식을 쌓으며, 국가와 신민에게 더 도움이 되는 방법을 추구하고자하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대영제국 내에서 가장 성리학자에 가까운 면모를 보인 군주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프레더릭 3세의 신앙은 죽기 직전인 76세에 남긴 말에서 잘 드러난다.
짐은 감히 그렇게까지 잘 다스렸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하루하루의 일상을 진실된 마음을 갖고 실제에 도움이 되도록 다스렸을 뿐이다.
가정사과 건강
재위 도중의 찬란한 업적과는 달리 가정사는 상당히 불행했다. 아버지이자 부군인 윌리엄 4세가 45세에 지병으로 급사하였고 아들들도 그렇게 오래 살지 않았다. 장남 프레더릭 4세는 운동과 소식, 규칙적 생활로 매우 튼튼한 몸을 가졌던 아버지와 달리 어려서부터 잔병치레를 많이하여 프레더릭 3세의 마음을 애태웠고 결국 프레더릭 3세가 승하한 이후 황제 직을 맡은지 4년만에 쓰러져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하다가, 6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차남인 길버트 프레더릭 화이트로이드도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나마 3남인 윌리엄 덩컨 존스 화이트로이드가 92세로 매우 장수한 편이다.
반면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킹혼은 76세로 당대 기준으로 꽤나 장수했다. 게다가 프레더릭 3세는 80세까지 살아서 역대 영국 황제중 손에 꼽을정도로 오래 살았다. 과도한 업무로 인해 요절하는 사람이 많았던 영국 황제중에서,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프레더릭 3세가 장수했다는 점이 꽤 흥미를 모으고 있다.
평소 프레더릭 3세는 채소 중심의 식단으로 하루 2끼만 먹었고 이것도 많이 먹지 않았다. 식후에는 소화를 위해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는 활동을 가졌다. 또한 밤 12시에 되면 무조건 잠에 들어 다음날 6시에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가졌다. 이러한 생활 패턴은 과도한 업무에 시달렸던 프레더릭 3세가 장수하는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