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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idth="100%" style="line-height:20px;font-size:22px;border:none;background: #222;color:#fff" | 3. 알려지기까지 | | | width="100%" style="line-height:20px;font-size:22px;border:none;background: #222;color:#fff" | 3. 공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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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idth="100%" style="line-height:20px;font-size:11px;border:none;background: #222;color:#fff" | 1948년 전쟁이 끝나지 얼마 되지 않은 해, 아르헨티나에서 충격적인 기자회견이 열렸다.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사내는 자신을 "수용소 관리자"라고 소개하며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대해 증언하기 시작했다. 출장을 빌미로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그는 귀국하지 않고 아르헨티나에 남아 아르헨티나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기자회견을 통해 홀로코스트에 대해 증언할 기회를 얻었다. 동시에 그는 독일과 대립하고 있던 미국에 망명 신청을 하며 증언을 시작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기록한 수첩들과 독일 고위 관료들의 기록을 모두 공개하였다. 그 내용에는 "절멸 대상"에 포함된 유대인의 수, 추방지 등의 상세한 기록이 담겨 있었다. 학살의 실무 총책임자에 있던 그는 독일의 학살 실태를 전 세계에 공개했다. 독일에서 정치적 수싸움에 휘말린 그는 독일에서의 자신의 입지가 위협 받자 아르헨티나 출장을 빌미로 독일에서 탈출하였는데, 그 동시에 자신의 업무 기록을 빼내어 와 서방 국가에게 알린 것이다. | | | width="100%" style="line-height:20px;font-size:11px;border:none;background: #222;color:#fff" | 1948년 전쟁이 끝나지 얼마 되지 않은 해, 아르헨티나에서 충격적인 기자회견이 열렸다.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사내는 자신을 "수용소 관리자"라고 소개하며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대해 증언하기 시작했다. 출장을 빌미로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그는 귀국하지 않고 아르헨티나에 남아 아르헨티나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기자회견을 통해 홀로코스트에 대해 증언할 기회를 얻었다. 동시에 그는 독일과 대립하고 있던 미국에 망명 신청을 하며 증언을 시작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기록한 수첩들과 독일 고위 관료들의 기록을 모두 공개하였다. 그 내용에는 "절멸 대상"에 포함된 유대인의 수, 추방지 등의 상세한 기록이 담겨 있었다. 학살의 실무 총책임자에 있던 그는 독일의 학살 실태를 전 세계에 공개했다. 독일에서 정치적 수싸움에 휘말린 그는 독일에서의 자신의 입지가 위협 받자 아르헨티나 출장을 빌미로 독일에서 탈출하였는데, 그 동시에 자신의 업무 기록을 빼내어 와 서방 국가에게 알린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반성하고 후회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이야기함과 동시에 더이상 이런 일이 계속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이를 정치적 기회로 삼아 아이히만의 망명을 허가했으나, 기자회견이 열린 1주일 뒤,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하는 날 독일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요원에 의해 암살되었다. 사실상 학살 사실을 시인한 것이나 다름 없는 독일이었으나 독일 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미국은 망명자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실수를 저질러 여론의 질타를 받아야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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