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1961):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38번째 줄: 38번째 줄:
|}
|}
</div>
</div>
{{1961 문단|right|4. 내용|반유대주의를 기반으로 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의 노선은 1933년 집권 이후부터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불이익을 가했다. 1935년에는 뉘른베르크법을 제정하여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법제화하였고, 1939년 개전 이후 유대인 격리 구역인 게토를 만들어 유대인을 수용했다. 소련과의 개전 이후 전국적으로 유대인의 조직적인 관리를 위한 수용소가 도입되었다. 이 수용소에는 유대인 뿐 아니라 장애인, 집시, 성소수자, 정치범(대개는 공산주의자) 또한 수용되었다. 독일의 예상보다 소련과의 전쟁이 장기화되자, 1942년 반제 회의에서 최종해결책을 채택하여 국가 주도적인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다.}}
[[분류:1961/국가]]

2025년 3월 27일 (목) 23:24 판


1961 배너1.jpg


과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를 통제한다. 현재를 통제하는 자는 과거를 통제한다. 그리고 현재는 원자력이 통제한다.
1961은 유럽에서의 최종승리를 이룩한 대독일국과, 태평양 전쟁 이후 태평양과 대서양, 자유 세계의 수호자로 등극한 미합중국, 그리고 중일전쟁에서 승전하여 동아시아 대륙 패권을 장악하고 초강대국으로 급부상한 중화민국, 세 초강대국의 냉전을 다룬 1961 팀의 대체역사 세계관입니다.
PC 환경에서의 감상을 추천합니다.
이 버튼을 누른다면, 세계의 운명은 파멸로 향할 것 입니다.
CONFIRM NUCLEAR LAUNCH   CONFIRM   CANCEL
The World Info

중화민국


민국의 위대한 국부 쑨원삼민주의 사상을 중국에 남기고 세상을 떠남으로서, 중국 국민당에는 새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중화민족이 가야 할 길인 민족, 민권, 민생의 원리를 제시한 삼민주의 사상은 중화민족을 풍요롭게 할 쑨원의 유산이었습니다. 특히 토지 개혁과 독과점 자본을 반대한 민생주의 이론은 당 내의 우익과 좌익의 의견 차이를 정리하고 해법을 제시함으로서 중국 국민당은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민주적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국민당은 토지 개혁 등 민생 안정에 힘쓰며 북쪽의 군벌들을 몰아낼 실력을 갈고 닦았습니다. 그리하여 1926년 시작된 북벌. 즉, 국민혁명을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가 북양정부를 무너뜨리고 중국을 통일하는 것으로 완수했습니다. 이후 황금십년이라 불리우는 10년간의 태평성대를 통해 중국은 고도로 성장하며 아편전쟁 이후 비로소 다시 세계 무대에 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37년, 통제파가 장악한 일본의 중국 대륙을 향한 야욕은 커져만 갔습니다. 1932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대륙을 향한 야욕을 드러내오던 일본이 1936년 루거오차오에서의 사건을 빌미로 중국을 침략했습니다. 8년 항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중국의 우방 독일을 포함한 많은 국가들이 중국을 지원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군은 패퇴를 거듭했으며, 개전 1년도 채 되지 않아 수도 난징을 내어주어야 했습니다. 수도를 적에게 내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중화민족의 항일전쟁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국민정부는 항전을 계속했고, 1941년에는 일본이 미국과 개전, 45년에는 미국이 일본에 원자력의 힘을 선보여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서 중화민족은 다시 한번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상처는 깊이 남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기근에 시달렸고, 인플레이션은 종잡을 수 없이 커져갔습니다. 미국과 독일이 중국에 대한 영향을 확보하고자 수 차례의 원조를 제공하여 상황이 나아지긴 하였으나, 이러한 원조는 중국을 세계 무대에서 곤란히 만들었습니다. 전통적 우방이던 독일과 새로운 동맹인 미국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한 정부는 경제 개발 계획을 통해 산업 복구에 주력하며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했습니다. 이는 성공하였습니다. 정부와 인민의 노력으로 중국은 7억 인구를 보유한 경제 대국이 되었으며 이제는 미국, 독일과 경쟁하는 강대국 중 하나입니다.

▶정치에 대해 알아보기◀

▶경제에 대해 알아보기◀

대독일국


1914년의 대전쟁에서 패배를 경험한 독일의 독수리는 1930년대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지도력으로 조약의 쇠사슬을 끊어내고 비상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연합국의 계속 되는 실패로, 독일은 유럽에서의 완전한 승리를 달성했습니다. 파괴적인 전쟁 기술을 통해 대서양의 영국을 분쇄하고, 저항하는 크렘린에는 원자력의 폭풍을 선사해 천년제국의 운명을 달성했습니다. 고고히 빛나는 세계수도 게르마니아를 중심으로 유럽에는 신질서가 도래했습니다. 파리, 런던, 빈, 바르샤바, 암스테르담, 밀라노, 그리고 모스크바까지. 한때 위대했던 유럽의 도시들은 이제 라이히의 지배 하에 있습니다. 비록 과거의 적이었던 미합중국이 원자력을 이용해 라이히와 다시 경쟁하려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국가들이 라이히의 패권에 경외심을 품고 있습니다.
악화되는 총통의 건강과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경제 능력이 라이히의 발목을 잡고 있긴 하지만, 그저 라이히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 비상할 뿐 입니다.

미합중국
중화민국
대독일국
미합중국
3대 열강 국가
타임라인
희생
민권
고국
서고
중화민국의 정치 상황

중화민국 입법원

중화민국은 중국국민당의 일당 체제이다. 다만 국민당 내부에서는 우익 계열인 민권(民權)계, 좌익 계열의 민생(民生)계 2개 파벌로 입법원에서의 대립이 일어난다. 현재 민권계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는 후스, 민생계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는 저우언라이이다.

중화민국의 경제 상황
중화민국의 경제는 급격히 성장했다. 장강의 기적이라고 불리우는 경제 개발을 통해 항일전쟁의 상처를 겸허히 씻어내고 비상하였으며, 현재는 미국, 독일과 경쟁하는 경제 강국이다. 내수 경제 뿐 아니라 중화민국 본토와 한국, 베트남, 시암, 인도네시아를 아우르는 경제권을 이끄는 국가이기도 하다.
등장 팩션
티저 · 크레딧 · 편집지침서 · 가이드

본 문서는 실제 나치 독일에 의해 이루어진 홀로코스트가 반인륜적 범죄였음을 인식하고, 이하의 내용이 모두 창작임을 밝힙니다.

나는 유대인을 소개시키고 유대 인종을 말살하려고 한다. 말로는 쉽다. 모든 당원들이 '우리는 유대 인종을 제거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것은 당의 계획이니까. 우리는 유대인을 제거할 것이다.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일이다.
하인리히 힘러
1. 개요
홀로코스트(The Holocaust) 유대인,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제노사이드를 뜻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까지 독일의 통제에 의해 극비로 부쳐졌으나 전쟁 이후 유럽에서 탈출한 유대인들, 이탈리아 남부의 연합국 협력자들, 그리고 여러 독일 출신 망명자들의 증언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러한 학살 사실이 알려지며 독일은 국제사회에서 심각한 외교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2. 명칭
홀로코스트(The Holocaust)의 어원은 고전 그리스어로 "번제"를 뜻하는 『홀로카우스토스』에서 유래했다.
3. 공개
1948년 전쟁이 끝나지 얼마 되지 않은 해, 아르헨티나에서 충격적인 기자회견이 열렸다.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사내는 자신을 "수용소 관리자"라고 소개하며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대해 증언하기 시작했다. 출장을 빌미로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그는 귀국하지 않고 아르헨티나에 남아 아르헨티나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기자회견을 통해 홀로코스트에 대해 증언할 기회를 얻었다. 동시에 그는 독일과 대립하고 있던 미국에 망명 신청을 하며 증언을 시작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기록한 수첩들과 독일 고위 관료들의 기록을 모두 공개하였다. 그 내용에는 "절멸 대상"에 포함된 유대인의 수, 추방지 등의 상세한 기록이 담겨 있었다. 학살의 실무 총책임자에 있던 그는 독일의 학살 실태를 전 세계에 공개했다. 독일에서 정치적 수싸움에 휘말린 그는 독일에서의 자신의 입지가 위협 받자 아르헨티나 출장을 빌미로 독일에서 탈출하였는데, 그 동시에 자신의 업무 기록을 빼내어 와 서방 국가에게 알린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반성하고 후회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이야기함과 동시에 더이상 이런 일이 계속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이를 정치적 기회로 삼아 아이히만의 망명을 허가했으나, 기자회견이 열린 1주일 뒤,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하는 날 독일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요원에 의해 암살되었다. 사실상 학살 사실을 시인한 것이나 다름 없는 독일이었으나 독일 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미국은 망명자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실수를 저질러 여론의 질타를 받아야만 했다.
4. 내용
반유대주의를 기반으로 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의 노선은 1933년 집권 이후부터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불이익을 가했다. 1935년에는 뉘른베르크법을 제정하여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법제화하였고, 1939년 개전 이후 유대인 격리 구역인 게토를 만들어 유대인을 수용했다. 소련과의 개전 이후 전국적으로 유대인의 조직적인 관리를 위한 수용소가 도입되었다. 이 수용소에는 유대인 뿐 아니라 장애인, 집시, 성소수자, 정치범(대개는 공산주의자) 또한 수용되었다. 독일의 예상보다 소련과의 전쟁이 장기화되자, 1942년 반제 회의에서 최종해결책을 채택하여 국가 주도적인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