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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문단|right|4. 내용|반유대주의를 기반으로 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의 노선은 1933년 집권 이후부터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불이익을 가했다. 1935년에는 뉘른베르크법을 제정하여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법제화하였고, 1939년 개전 이후 유대인 격리 구역인 게토를 만들어 유대인을 수용했다. 소련과의 개전 이후 전국적으로 유대인의 조직적인 관리를 위한 수용소가 도입되었다. 이 수용소에는 유대인 뿐 아니라 장애인, 집시, 성소수자, 정치범(대개는 공산주의자) 또한 수용되었다. 독일의 예상보다 소련과의 전쟁이 장기화되자, 1942년 반제 회의에서 최종해결책을 채택하여 국가 주도적인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다.}} | |||
[[분류:1961/국가]] |
2025년 3월 27일 (목) 23:2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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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실제 나치 독일에 의해 이루어진 홀로코스트가 반인륜적 범죄였음을 인식하고, 이하의 내용이 모두 창작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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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대인을 소개시키고 유대 인종을 말살하려고 한다. 말로는 쉽다. 모든 당원들이 '우리는 유대 인종을 제거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것은 당의 계획이니까. 우리는 유대인을 제거할 것이다.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일이다. |
하인리히 힘러 |
1. 개요 |
홀로코스트(The Holocaust) 유대인,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제노사이드를 뜻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까지 독일의 통제에 의해 극비로 부쳐졌으나 전쟁 이후 유럽에서 탈출한 유대인들, 이탈리아 남부의 연합국 협력자들, 그리고 여러 독일 출신 망명자들의 증언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러한 학살 사실이 알려지며 독일은 국제사회에서 심각한 외교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
2. 명칭 |
홀로코스트(The Holocaust)의 어원은 고전 그리스어로 "번제"를 뜻하는 『홀로카우스토스』에서 유래했다. |
3. 공개 |
1948년 전쟁이 끝나지 얼마 되지 않은 해, 아르헨티나에서 충격적인 기자회견이 열렸다.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사내는 자신을 "수용소 관리자"라고 소개하며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대해 증언하기 시작했다. 출장을 빌미로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그는 귀국하지 않고 아르헨티나에 남아 아르헨티나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기자회견을 통해 홀로코스트에 대해 증언할 기회를 얻었다. 동시에 그는 독일과 대립하고 있던 미국에 망명 신청을 하며 증언을 시작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기록한 수첩들과 독일 고위 관료들의 기록을 모두 공개하였다. 그 내용에는 "절멸 대상"에 포함된 유대인의 수, 추방지 등의 상세한 기록이 담겨 있었다. 학살의 실무 총책임자에 있던 그는 독일의 학살 실태를 전 세계에 공개했다. 독일에서 정치적 수싸움에 휘말린 그는 독일에서의 자신의 입지가 위협 받자 아르헨티나 출장을 빌미로 독일에서 탈출하였는데, 그 동시에 자신의 업무 기록을 빼내어 와 서방 국가에게 알린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반성하고 후회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이야기함과 동시에 더이상 이런 일이 계속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이를 정치적 기회로 삼아 아이히만의 망명을 허가했으나, 기자회견이 열린 1주일 뒤,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하는 날 독일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요원에 의해 암살되었다. 사실상 학살 사실을 시인한 것이나 다름 없는 독일이었으나 독일 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미국은 망명자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실수를 저질러 여론의 질타를 받아야만 했다. |
4. 내용 |
반유대주의를 기반으로 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의 노선은 1933년 집권 이후부터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불이익을 가했다. 1935년에는 뉘른베르크법을 제정하여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법제화하였고, 1939년 개전 이후 유대인 격리 구역인 게토를 만들어 유대인을 수용했다. 소련과의 개전 이후 전국적으로 유대인의 조직적인 관리를 위한 수용소가 도입되었다. 이 수용소에는 유대인 뿐 아니라 장애인, 집시, 성소수자, 정치범(대개는 공산주의자) 또한 수용되었다. 독일의 예상보다 소련과의 전쟁이 장기화되자, 1942년 반제 회의에서 최종해결책을 채택하여 국가 주도적인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