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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 | == 사회 == | ||
=== 언어•문자 체계 === | === 언어•문자 체계 === | ||
구원고 | 구원고 시기의 언어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는 극히 제한적이며, 현재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1차 사료는 신남 금문석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구체적인 언어 체계나 어휘적 특징에 대한 단정은 어렵다. 다만 연맹의 중심 구성원이었던 올데루인이 랴오 고원 남부계 민족에 속했음을 고려할 때, 그들이 사용하던 언어가 고대 랴오어와 일정한 어휘적 및 음운적 유사성을 지녔을 가능성이 높다. | ||
구원고 연맹의 | 그러나 연맹이 성립된 시점은 기원전 9세기경이고, 올데루인의 반도 이주는 그보다 약 1,600년 앞선 시기로 추정된다는 사실 또한 고려해봐야 한다. 종합해보자면, 이러한 장기간의 정착 과정에서 토착 선주민들과의 언어적 접촉 및 상호작용이 불가피하였을 것이며, 이에 따라 올데루어는 점차 선주어와 융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결론이 나온다. 언어학계는 이를 ‘구원고어’라는 잠정적 명칭으로 지칭하며, 이 언어가 올데루계 랴오어의 요소와 토착어의 문법 및 어휘를 혼합한 일종의 접촉어(contact language)로 기능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 ||
구원고 연맹의 멸망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당국 시대, 발우(拔牛)가 저술한 『어사(語事)』에는 한자 표기를 통해 전해진 고대 원고어의 음운적 특징이 기술되어 있다. 여기에는 고대 랴오어의 흔적이 현저히 감소하고, 오히려 후기 원고국어에 가까운 형태소 및 어휘 구성이 다수 나타난다. 이에 기반한 최근 연구들은 구원고어가 사제십칠후시대 초기, 즉 진국 지배기까지 일정 수준의 공용어 내지 행정어로 유지되었으며, 이후 후기 고전 원고어의 성립에 있어 과도기적 언어로서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 |||
비록 구원고어 자체에 대한 명확한 복원이 불가능하나, 문자 체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풍부한 고고학적 자료가 확보되어 있다. 특히 후기 수도였던 개양(開陽) 지역에서는 단위 수 표기에 사용된 화폐 격골(戈骨)을 비롯하여, 치수·수량 등을 기록한 청동판 등에서 당시 문자의 사용례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한자와 병기된 형태로, 고쿠의 초기 문자체인 태서체(太書體)의 형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로 간주된다. | |||
더불어, 신남 금문석의 발굴 이후 태서체의 지역적·시기적 변천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특히 연맹 초기(의강왕대)의 서부 방언 중심 태서체와, 연맹 후기에 접어들며 동부를 중심으로 재편된 진경왕대의 태서체 간 서체 구성, 부호 체계, 서사 방식의 차이를 분석한 연구들은 구원고 문자 체계의 지역적 다층성과 정치 권역의 이동을 반영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 |||
=== 정치 체제 === | === 정치 체제 === |
2025년 6월 5일 (목) 16:01 기준 최신판
원고국의 역사 元高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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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다론 元高 / Oldaron Confederac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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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고 연맹의 강역[1] 노란 점은 왼쪽 아래에서부터 차례대로 연맹의 수도였던 서중, 아성, 개양이다. | |||
기원전 900년?~기원전 361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청동기 시대 레순자헤 문화 사이지야 문화 |
진 | ||
전제 | |||
남한 | |||
유송 | |||
별칭 | 구원고 (舊元高) | ||
위치 | 원고국 키비오시 | ||
수도 | 서중(西中) → 아성(牙城) → 개양(塏陽) | ||
정치체제 | 연맹제, 봉건군주제 | ||
국성 | 평문(平文) | ||
국가원수 | 태우왕(太禹王)[2]→왕(王) | ||
주요 군주 | 초대 태우왕(기원전 14세기) ?대 태우왕(기원전 9세기) 의강왕(기원전 8세기) 진경왕(기원전 6세기) 신무왕(기원전 6세기) 성회왕(기원전 5세기) 정위왕(기원전 4세기) | ||
언어 | 구원고어 | ||
문자 | 태서체 | ||
종교 | 제2기 태양 신앙 | ||
민족 | 선주인, 올데루인 등 | ||
화폐 | 격골 | ||
현재 국가 | 원고국 |
개요
원고(元高), 또는 구원고(舊元古) 연맹은 동천호의 올데루인과 후기 선주인에 의해 형성된 고대 국가이다. 약 기원전 1300년에 연맹의 맹주 태양국이 건국된 것을 시작으로 기원전 90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연맹이 형성되었으며, 기원전 8세기 의강왕에 의해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후기에는 연맹의 결속력이 약해지고 구성국들이 맹주인 태양국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하며 점차 쇠퇴하다가, 결국 기원전 361년 연맹 구성국 중 하나였던 진국의 문무왕에 의해 태양국이 멸망하면서 연맹이 붕괴되었다.
현대 시대에도 원고국을 상징하는 요소인 동천호 중화사상, 양교 등의 사회·문화적 원형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원고사에서 존재감이 매우 큰 국가라고 볼 수 있다. 훗날 세워진 원고국도 구원고 연맹의 상징성을 계승하여 국명을 지었으며, 현대 원고국과의 구분을 위해 고대의 원고를 구원고라 칭한다.
국호
당시에 사용한 본래의 국호는 원고(元高)이며 구원고라는 이름은 후대 사람들이 현대의 원고국과 구별하기 위해 붙인 것이다. 원고라는 단어는 지배 계층이던 올데루인을 음차한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올데루'는 고대 랴오어로 '붉다', '용맹하다'라는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3] 여기서 올데루인의 명칭은 후자의 뜻과 통하여 '용맹한 부족', 나아가서 원고국은 '용맹한 나라'를 의미하게 된다. 이후 종성이녕이 원고국을 세우기 전까지 '원고'라는 이름은 구원고 연맹을 의미하는 걸 넘어 연맹이 다스리던 키비오시 지역, 더 넓게 보자면 반도 자체와 원고 민족을 가리키는 용어로 발전했다.
원고 뒤에 '구(舊)'를 붙이는 표기법은 원고국 건국 초기부터 사용되었는데 당시에도 이를 두고 갑론을박이 오갔던 모양이다. 신국정록의 당시 기사를 보면
신국정록 3권, 태조 2년 7월 28일 양력 2번째기사
이후에도 구원고라는 명칭에 대한 관료들의 반발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으나, 광렬정록에서
광렬정록 2권, 태조 2년 3월 15일 양력 1번째기사
라며 숙종이 일갈한 이후로는 원고정록 내에서 관련 반발이 기록되지 않는 걸 보아 숙종 대부터 구원고라는 명칭이 굳어졌다고 볼 수 있다.[4]
기록상으로 '원고'라는 이름은 초나라의 역사가 사미리친 자루산이 저술한 원고국 현존 최고(最古)의 역사책 《선사》에서 처음 언급된다.
《선사》 (先史) 제1권 원고본기
참고로 여기서 나오는 사서는 진나라의 역사가 노송[5]이 쓴, 원고국 역사상 최초로 고전4서를 집대성하였다고 여겨지는 책이다. 사서는 삼국시대의 만목 통일전쟁 때 불타 없어졌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고전 4서는 만목에서 다시 정리한 것이다.
한편 동시대 칠서에서도 원고라는 이름이 언급되는데, 동쪽 먼 곳의 오랑캐로 인식되며 원고(元高)라는 명칭이 천자를 참칭하는 것 같다며 황제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잠깐 스쳐지나간다.
(칠서 연재자와 상의해야 할 내용)
사회
언어•문자 체계
구원고 시기의 언어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는 극히 제한적이며, 현재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1차 사료는 신남 금문석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구체적인 언어 체계나 어휘적 특징에 대한 단정은 어렵다. 다만 연맹의 중심 구성원이었던 올데루인이 랴오 고원 남부계 민족에 속했음을 고려할 때, 그들이 사용하던 언어가 고대 랴오어와 일정한 어휘적 및 음운적 유사성을 지녔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연맹이 성립된 시점은 기원전 9세기경이고, 올데루인의 반도 이주는 그보다 약 1,600년 앞선 시기로 추정된다는 사실 또한 고려해봐야 한다. 종합해보자면, 이러한 장기간의 정착 과정에서 토착 선주민들과의 언어적 접촉 및 상호작용이 불가피하였을 것이며, 이에 따라 올데루어는 점차 선주어와 융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결론이 나온다. 언어학계는 이를 ‘구원고어’라는 잠정적 명칭으로 지칭하며, 이 언어가 올데루계 랴오어의 요소와 토착어의 문법 및 어휘를 혼합한 일종의 접촉어(contact language)로 기능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구원고 연맹의 멸망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당국 시대, 발우(拔牛)가 저술한 『어사(語事)』에는 한자 표기를 통해 전해진 고대 원고어의 음운적 특징이 기술되어 있다. 여기에는 고대 랴오어의 흔적이 현저히 감소하고, 오히려 후기 원고국어에 가까운 형태소 및 어휘 구성이 다수 나타난다. 이에 기반한 최근 연구들은 구원고어가 사제십칠후시대 초기, 즉 진국 지배기까지 일정 수준의 공용어 내지 행정어로 유지되었으며, 이후 후기 고전 원고어의 성립에 있어 과도기적 언어로서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비록 구원고어 자체에 대한 명확한 복원이 불가능하나, 문자 체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풍부한 고고학적 자료가 확보되어 있다. 특히 후기 수도였던 개양(開陽) 지역에서는 단위 수 표기에 사용된 화폐 격골(戈骨)을 비롯하여, 치수·수량 등을 기록한 청동판 등에서 당시 문자의 사용례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한자와 병기된 형태로, 고쿠의 초기 문자체인 태서체(太書體)의 형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로 간주된다.
더불어, 신남 금문석의 발굴 이후 태서체의 지역적·시기적 변천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특히 연맹 초기(의강왕대)의 서부 방언 중심 태서체와, 연맹 후기에 접어들며 동부를 중심으로 재편된 진경왕대의 태서체 간 서체 구성, 부호 체계, 서사 방식의 차이를 분석한 연구들은 구원고 문자 체계의 지역적 다층성과 정치 권역의 이동을 반영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정치 체제
구원고 연맹은 연맹제와 봉건제의 요소를 가져오면서도 그 고유한 특성을 지닌 상후제(相侯制)를 통해 국가를 운영했다. 이는 연맹의 맹주이자 창시자인 테양국이 성장하면서 주변 부족들과의 충돌이 증가함에 따라 대두된 새로운 통치 방식이었다. 이러한 정치 형태는 태우왕 시대[6] 중후반, 그러니까 기원전 900년대부터 시행되어 연맹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구원고 연맹을 이끈 상후제는 상후(相侯), 대사(大士), 사(士), 부왕(副王)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먼저 상후(相侯)는 연맹 내 영지의 명목상 지도자이자 태양국 왕실에서 직접 임명하는 지방 감독관으로, 주로 왕실과 공신 가문 출신의 독자적인 군사력을 지닌 인물들이 이 직책을 임명받았다고 추정된다. 그들은 외교를 통해 중견급 부족을 연맹에 합류시키거나, 약소 부족들을 정복하는 등의 대외 활동을 통해 연맹을 넓히고, 그 공로에 대한 대가로 각 부족을 지배할 수 있는 명목상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들은 그들의 봉토를 직접 지배하지는 않았지만, 봉토 관할의 부족장 위에 군림하였으며 영지의 지방 행정관인 사(士)를 임명하는 등의 권한을 누리며 영지를 총괄했다. 예외적으로 상후가 군사를 이끌고 부족을 완전히 정복하여 그 지배계층을 제거하였을 때는 대사를 새로 두지 않고 상후가 부족을 직접 다스렸다.
한편 대사(大士)는 상후가 책봉받은 영지의 토착 부족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부족장에게 내려지는 직책이었다. 그들은 부족민들을 직접 다스렸지만 직책은 상후보다 한단계 아래였고, 상후가 사를 임명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또한 상후는 왕이 직접 책봉한 관리이기 때문에 대사가 그를 함부로 하지 못하는 등 여러모로 제약이 컸다.
이를 피하기 위해 연맹 후반에는 각 부족들이 자발적으로 연맹에 합류하여 부왕(副王)으로 책봉되었다. 부왕이 군림하는 부족에는 스스로 연맹에 들어온 공을 인정해 상후를 파견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부왕은 자신의 부족을 완전히 다스릴 수 있었다. 명칭에서 볼 수 있듯 실제 지위는 태양국 왕에 비해 한 단계 아래였으나 공식 문서에는 똑같이 왕으로 표기되는 등 대접이 상당히 좋았다. 여기에 상후의 간섭이 없어지니 부왕에게 있어서는 연맹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자율적으로 부족을 발전시키기에는 안성맞춤이었고, 실제로 연맹 후반 강국으로 떠오른 대부분의 연맹 구성국들이 부왕 체제를 채택한 나라들이었다.
부왕, 상후, 대사를 임명할 때는 너비 40cm, 높이 1m 정도 되는 석판에 태양국 왕이 직접 관리 임명문을 기록하였는데 이를 정명석(定明石)이라 한다. 정명석은 반도 중부에서 흔히 발견되고 있으며 신남 금문석이 대표적인 예이다.
법률
1.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2. 타인을 다치게 한 자는 피해자의 집에서 5년간 노비로 일한다.
3. 남의 재산을 훔친 자는 배상해야 하며, 배상할 수 없을 경우 노비가 된다.
4. 남자가 남의 아내를 범한 경우 사형에 처한다.
5. 여자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면 사형에 처한다.
6. 마을에 불을 지른 자는 화형에 처한다.
7. 남을 유괴하거나 감금한 자는 피해자에게 곡물로 배상하고, 20년간 감옥에 갇힌다.
8. 사람들이 다툼을 벌인 경우, 사(士)가 시비를 가린다.
9. 처벌을 피하려 도망친 자는 그 가족까지 죽인다.
상후(相侯), 대사(大士), 사(士), 부왕(副王)은 본래 나라를 다스리는 직책이나, 지금까지는 관습적으로만 행해졌을 뿐 법으로 명확히 규정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 이를 법으로 명시하여 충성을 다하도록 한다.
10. 대신이 오랑캐를 회유하거나 정복하여 항복시킨 경우, 그 땅을 다스리는 상후로 봉한다.
11. 상후가 오랑캐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그 땅을 정복한 경우, 직접 통치한다. 그러나 우두머리를 살려두고 신하로 삼는 경우, 그를 대사로 임명한다. 이 경우, 상후는 영토 곳곳에 사를 파견하여 백성을 다스리고, 대사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상후를 보좌한다.
12. 사는 대사의 명령을 따라 백성을 다스리며, 법을 시행한다.
13. 오랑캐의 우두머리가 스스로 항복한 경우, 그를 부왕으로 봉하여 그 땅을 다스리게 한다.
14. 사는 대사에게, 대사는 상후에게 충성하며, 상후와 대사, 부왕은 왕에게 충성해야 한다. 만약 이를 어기고 외부의 오랑캐와 내통할 경우, 그 일가까지 처형한다.
15. 상후, 대사, 사, 부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 법을 어겨서는 안 되며, 만약 법에 어긋나는 통치를 할 경우 사형에 처한다.
16. 상후, 대사, 사, 부왕은 왕의 명령을 받으면 군사를 징집해야 한다.
17. 전쟁에 나가 싸우지 않고 도망치거나 적에게 항복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오늘, 원고왕 성회가 진왕 사영, 송왕 ○○, 제왕 □□ 등과 함께 개양에서 이 법을 반포한다.
《17강령》, 개양에서 발굴된 목간에서 발췌
신화 및 역사
구성국
유물 및 문화
군사 제도
구성국 국왕
舊元高 구원고 연맹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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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 고대 국가의 특성상 저 넓은 영역을 실제로 모두 지배한 것은 아니며, 학자들은 구원고 연맹이 여러 성읍국가의 점조직 형태로 존속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 ↑ 고전 4서의 해석을 통해 의강왕 이전까지 초대 태우왕 말고도 태우왕이라는 칭호를 가진 군주가 더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이미 원고제국 초부터 있었고, 일부 학자들은 아예 의강왕 이전의 일곱 왕 모두 태우왕 칭호를 세습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문헌적 추론에 불과하여 고고학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한편 1993년 옛 세논루메시의 시장에서 신남 금문석이 발견되고, 거기에 후대 태우왕 관련 내용이 발견되면서 마침내 적어도 두 명 이상의 군주가 태우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음이 확실해졌다.
- ↑ 이 의미는 원고 반도에서도 계승되어 현대 원고어에서 '올데루'의 발음이 변형된 '아타'가 '빨갛다'를 뜻하는 단어로 쓰인다.
- ↑ 사실 조카인 문종을 축출하고 제위를 차지한 숙종임을 생각해보면 신하들이 구원고의 명칭에 대해 간언한 것은 단순한 명칭의 옳고 그름 문제가 아니라 태조의 선택을 부정함으로써 태조와 숙종의 정치 진영을 분열시켜 숙종의 정통성을 흐트리려는 숨은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신하들이 "이제 정권도 바뀌었는데 형이 저질러놓은 거 님이 치우세요" 라고 한 것에 숙종이 "그렇게 되면 형님이랑 나 사이에 진영 충돌로 번지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냐? 이번 한 번만 넘어가주는데 다음에도 그러면 너는 내 손에 죽는다"라며 살벌하게 반박한 것에 가깝다.
- ↑ 노양서를 저술한 노영후의 아들이다.
- ↑ 1~7대 태우왕이 집권한 시기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