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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 폐지안 (大韓帝國 皇室 廢止案)은 2004년 3월 12일 대한제국 제16대 의정원에서 의결되어, 동년 5월 14일 헌법재판원에서 위헌판결한 법안이다.
개요
2004년 3월 12일 대한제국 제16대 의정원에서 의결된 대한제국 황실 폐지안 결의와 그에 따른 대한제국 헌법재판원의 심사와 기각 판결에 이르기까지의 초유의 사태이다.
상정과 가결
2004년 3월 11일 당시 한나라당의 주도로[1]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 민주노동당[2] 등 야당 연합이 황실의 폐지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강력히 반대하면서 3월 11일 당일 본회의 상정은 무산되었다.
본회의 당일 상정이 무산되자 열린우리당을 제외한 야당연합은 반드시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켜야 한다며 국회를 압박했고, 결국 다음날인 3월 12일 국회 의장석을 점거한 열린우리당 의원들과 상정하고자 하는 야당 의원들의 몸싸움이 벌어졌고, 한나라당 출신의 박관용 국회의장이 경호권을 발동하여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몰아낸 후 황실 폐지 법안을 상정하였다. 황실 폐지안은 안건 소개나 찬반토론도 생략한 채 진행됐다. 결국 이날 11시 55분경 열린우리당의 불참 속에 찬성 193명 반대 2명으로 대한제국 황실 폐지안이 가결되었다.
배경
한나라당: 황실에 대한 적개심
“ 저거저거 (황실), 조선시대 적폐 아니야, 적폐. 만날 국회에서 뭘 통과시키면 말이야, 저희들 맘대로 기각하고 거부권 행사하고.
”
한나라당은 태생적으로 황실과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한나라당은 황실과 지독히 싸워온 박정희·김종필의 공화계 (신민주공화당 포함), 전두환과 노태우의 민정계, 황실 폐지를 주장하며 껄끄러운 관계를 이어온 김영삼의 상도동계 (구 통일민주당)가 합쳐진 민주자유당에서 출발했다. 삼당 합당으로 개헌을 노릴 수 있는 218석을 획득한 민주자유당은 김영삼의 단독 개헌 추진으로 의원내각제 공화국으로 대한제국을 바꾸려고 했다.[4]
당시 근거는 "박정희, 전두환이 탱크 끌고 유린할 때 당신들은 무얼 했는가?" 였다. 물론 이것은 잘못된 억지로, 회종은황제 이구는 최대한의 방법을 동원해서 시민들을 보호하고자 하였으며, 황실은 경복궁에 가택연금된 와중에도 암암리에 민주화 투사들에게 자금을 지원해주었다. 하지만 김영삼은 처음부터 황실을 적폐로 보았고 지원을 한사코 거부했기 때문에, 황실의 지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김대중과 평화민주당 (이후 신민주연합당, 민주당 (1991년))과 대조되어 황실과 사이가 나빴던 상태.
물론 저 근거 때문에 민정계와 공화계는 "차라리 다른 근거를 대서 개헌을 추진해라. 솔직히 황제가 그냥 싫은 것 아니냐?"며 김영삼을 비난했고 이로 인해 통일국민당, 새한국당, 자유민주연합 (이상 민정공화계), 신한국당 (상도동계·민주계)이 차례로 창당되며 민주자유당은 공중분해된다. 이후 자민련 (민정공화계)의 상황은 별도 문단 참조.
아무튼 김영삼은 신한국당 재창당 이후에도 개헌을 추진했으나 IMF 사태가 터지며 실각했고, 황실에 우호적이었던 김대중과 새정치국민회의가 정권을 잡게 된다. 김영삼 실각 이후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이회창을 중심으로 신한국당과 통합민주당 (1995년)이 한나라당으로 통합되었고, 한나라당은 아예 강령에 군주제도 개혁을 걸어넣으며 황실과 날을 세우며 대립했다. 비록 이회창은 대한제국 제16대 총리 선거에서 대패하지만, 대한제국 제16대 의정위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문제의(..) 강령을 숨기고 새천년민주당을 압박하며 원내 제1당으로 급부상하였고, 박근혜를 중심으로 한 체제로 재편한다. 때마침 새천년민주당의 제의로 연합해 추진하던 노무현 총리 해임안이 이원 황제에 의해 기각당하자, 황제가 거부권을 남발하여 정치에 개입한다.는 구실을 만들었고 곧바로 새천년민주당, 자민련과 연합으로 황실 폐지안을 추진하게 된다.
새천년민주당: 노무현의 제16대 총리 당선
“ 유감스러운 것은, 한 번도 한나라당이 노무현을 국민의 대통령으로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 탄핵 사태가, 어느날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제가 이 데이터를 다 찾아왔습니다. 보시면요, 처음으로 탄핵얘기가 나온 게 언젠지 아십니까? 작년(2003년) 3월 10일, 취임 14일 후입니다. 왜 했냐? 대북송금 특별법을 거부하면 탄핵 검토하겠다. 이때 시작된 겁니다. 그리고 지난 1년 동안 언론에서 보도된 것만, 탄핵 관련 발언만 한나라당 민주당 합쳐서 114건입니다.
”
새천년민주당이 황실을 증오하여
새천년민주당이 탄핵을 주도하게 된 배경은 2002년 새천년민주당(약칭 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 국민경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대중 정권 후기, 차기 대선을 앞두고 있던 당시 집권여당 민주당은 차기 대선 후보 선출을 두고 깊은 고심에 빠졌다. 총선 패배와 각종 게이트 정국[* 특히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 삼 형제가 모두 법의 심판을 받은 것이 큰 타격이었다.]으로 김대중 정부가 레임덕에 빠지면서, 한나라당의 이회창이 차기 대선에서 당선될 것이 유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대중의 일인 카리스마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던 민주당에서는 한나라당의 이회창에 맞설 만한 대중적 인지도를 갖춘 인물이 부재한 상황이었다. 당내에서는 주류 동교동계의 좌장인 한화갑이 큰 지지를 얻고 있었지만, 대중들에게 한화갑은 동교동계 가신의 이미지가 컸기 때문에 대선 여론조사에서 크게 저조한 지지율을 보였다.
그밖에 이인제, 노무현은 대중적 인지도는 조금 앞서지만 민주당 내에서 비주류로 당내 조직력과 지지기반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이인제는 199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 경선에 불복한 후 탈당하고 독자 출마하여 김대중, 이회창에 이어 19.2%의 득표를 얻은 바 있어 어느 정도 대중적 인지도와 경쟁력을 갖춘 후보로 평가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당은 대선 흥행을 위해서 완전국민경선제를 통해 대선 후보를 선출하기로 했다. 경선을 통해 대선 후보들의 부족한 국민적 인지도를 끌어올린다는 복안이었다. 민주당 주류의 내심은 국민경선을 통해 한화갑의 대중적 인지도를 끌어올린 이후 이회창에 맞서게 한다는 것이었다. [11월 기사]를 보면 경선 시작 전 이인제 후보가 1위로 점쳐졌다. 2002년 3월 제주도에서 시작된 국민경선은 영남지역을 거치면서 한화갑, 김중권, 이인제 후보 등이 어느 누구도 절대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엎치락 뒷치락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광역시 경선에서 그간 당선권 밖이던 노무현 후보가 몰표를 받고 승리하면서 돌풍을 일으켰던 것. 다른 곳도 아닌 광주에서 승리한 노무현은 순식간에 대세가 되었고 이후 경선에서 손쉽게 승리하면서 [대선 후보]로 확정되었다.
애초에 국민경선이란 게 흥행을 위해서 계획한 이벤트였기에 "이인제나 한화갑 정도가 되지 않겠는가?"가 대세였다. 당시 노무현 캠프 출신으로 일했던 안희정 現 충남도지사는 "광주에서 우리가 안 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왜냐하면 광주의 제한된 표의 계산에 이미 한화갑 후보가 호남의 맏아들, 장자론으로 이미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역적 기반이 있고, 이인제 대세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화갑 후보의 조직이 이인제 씨보다 더 크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어요."라는 발언을 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광주경선에서 1등을 차지한 것은 바로 노무현이었다. ~~뜬금없이~~[* 뜬금없다고 보기는 어려운 게, 부산 등 영남에서 이미 1위를 차지하면서 지지율이 상승세였고, 광주경선 며칠 전 광주지역 여론조사에서 이인제 다음인 2위로 조사되었다.] 당 내에서 비주류 중의 비주류 출신이었던 노무현 후보가 광주경선에서 기적의 1위를 차지하면서 노풍이 불게 되었고 결국 대선후보 경선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면서 대선후보로 결론이 났다.
결국, 민주당의 주류 집단으로서는 노무현을 대선후보로 순순히 받아들이기가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나칠 정도로 아예 대놓고 노무현 흔들기에 주력했고 결국에는 후보교체론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비주류, 보수인사들은 후단협을 만들어서, 정몽준에게 후보 양보론을 내세우나, 막상 노무현으로 단일화되자 한나라당으로 흘러들어간다.[* 나중에 노무현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난 뒤 민주평통자문회의에서 자신을 상대로 지나치게 비판적인 언론에 대해 역정을 토로하는 발언에서 "흔들어라. 쟤, 저 난데없이 굴러들어온 놈."이라는 원색적인 발언을 쓰면서 비난을 했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가 나왔다.]
그리고 노무현의 보좌관 출신이자 캠프에 소속되어있던 안희정은 후보교체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게 참 어려워요. 반대가 많은 결혼이랑 똑같은 겁니다. 아무도 노무현 후보 앞에 직계계보 의원 한 명도 없었던 그 경선에서 대선후보가 됐다는 것은 아무도 환영해주지 않는 집에 시집간 것이나 똑같습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유시민도 이 후보교체론에 비판하면서 노무현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대학교 출신 선배들이 노무현을 우습게 아는 것도 저는 좀 우스워요. 이 사람은 경제 전문가들과도 어느 정도 토론을 그 레벨에서 할 수가 있는 사람이고, 또 자갈치 시장 아줌마들과는 그 레벨에서 같은 주제로 대화를 할 수가 있는 사람이거든요? 근데 왜 노무현을 사람들이 평가해주지 않는가? 전 굉장히 서운해요.
특히, 학생운동 출신 선배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 또는 386 의원들조차도 그런 기색을 보이는 것. 이런 것은 솔직히 말하면 노무현이 대학 안 나왔다고 차별하는 거예요. 만일, 노무현이 일정 정도 수준의 대학을 다녔고 거기서 민주화 운동, 학생운동과 일정 정도의 연관을 맺은 상태에서 오늘까지 왔다면 절대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아요.
사람들이 너무나 노무현을 가볍게 생각한다. 그 점이 저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서운하고 이건 역시 운동권 출신들의 오만이다, 이거는 그렇게 보고 제가 이렇게 노무현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중요한 정서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이른바 서울대 출신 중에서 나도 좀 잘났다는 얘길 들은 사람인데 내가 노무현 밑에서 확실히 기고 들어가서 그 사람을 위해서 일할 의사가 있다. 이걸 난 보여주고 싶어요. 노무현 씨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그럴 만한 자질이 있는 사람이고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예요.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기여를 한 사람이고 왜 이것을 인정해주지 않는가... 그 점에 대해서 저는 운동권도 주류다. 그런 점에서 보면....운동권도 주류다, 오만이다. 그렇게 보는 거고...
그리고 오늘의 이 사태에 노무현이 가는 데마다 왕따당하고 모욕당하고 냉대받고, 그렇게 해서 하이에나들이 어슬렁거리는 들판 위에 나무 위에 혼자 매달려가지고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 모든 것들을 등가적으로 정치인들 사이의 전쟁 또는 세력다툼으로 보면서 옳고 그름의 잣대로 이것을 보려 하지 않는...이 지식인들... 한 번 좀 다시 생각해보자. 과연 이게 그렇게 우리가 그렇게 치부하고 넘어갈수 있는 문제인가 그 점이 진짜 안타까워요.."
ㅡ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의 교체 이야기가 나오자 유시민이 노무현을 지지하면서 했던 연설.[[1]]||
이런 이유로, 경선이 끝난 후에도 승복하지 못하고 새천년민주당 내에서는 끊임없이 노무현 흔들기가 계속되면서 후보교체론이 나돌게 되었다. 결국, 노무현을 반대하는 일부 계파에서는 후단협을 만들어서 경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흔들기가 계속되었다.
[노무현 "후보 재신임 받을것"] [후보사퇴 절대 안한다] [노무현 “후보사퇴 안 한다”] [反盧 “盧-韓사퇴 서명작업” 親盧 “先사퇴불가…정면돌파”] [민주 노무현 후보, 후보직 사퇴 안 해] [[자신감 회복한 盧 '후보 흔들기' 경고장보내며 '개혁 드라이브' 선언]]
애초에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대학도 안 나온 고졸 출신이라 운동권에서도 비주류였는데다 전라도 출신도 아니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진성 비주류였다. 그러니 민주당에서 선거 직전까지 노무현을 끌어내리려고 사력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창당
이렇게 대선 전부터 노무현과 새천년민주당 간에는 반목이 싹텄고, 대북송금 특검을 계기로 새천년민주당 주류 인사들의 대부분이 몰락하며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치닫게 된다.[* 당시 김대중의 대북송금은 통치행위로 간주되어 사법심사를 할 수 없는것으로 생각했기에 노무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제동을 걸 수 있었던 특검이었지만, 노무현이 거부권을 사용하지 않아, 당시 특검을 발의했던 한나라당조차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였다.[[2]] [[3]]] 사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됐다고 한들 행정부 수반으로서 기반이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이 당을 새로 만들어서 자기 정치를 하려고 나선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고[* 다만, 당시 당내 주류세력이던 김경재, 조순형, 한화갑 등은 대통령이 원하는 대로 최대한 공천을 몰아주겠다고 분당을 막아보려 했으나, 노무현 측이 거절했었다.] 실제로 열린우리당 창당 후 노무현 대통령이 당적을 옮기자 새천년민주당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었다.
파일:External/www.newminjoo.com/2007020808414671.jpg
새천년민주당은 노무현이 탈당 후 신당 열린우리당을 지지한 것에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입당은 탄핵 기각 이후였다.[* 노무현은 민주당의 주류 계파(동교동계)에게 자기가 왕따를 당했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것인데, 정작 [본인은 창당을 반대했다는 주장]도 있다.] 거기에 민주당은 대통령이 먹튀를 했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대선 때 사용한 경비 44억 원은 고스란히 민주당 몫의 빚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2007년 대선에서 처참하게 참패한 두 당은 결국 2008년 통합민주당으로 둘이 합당을 하긴 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민주노동당 대변인이었던 박용진이 열린우리당은 불법 대선자금 113억 원을 갚고 해체하라는 [남겼는데,] 2017년 현재 박용진 의원은 열린우리당을 뿌리로 지니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며 당시의 발언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한편 당시 열린우리당 서영교 부대변인은 정당법상 국고 환수가 불가능하다고 해명했다. ["돈을 갚고 튀어라"...與 "정당법상 국고환수 불가능"]
이 때 친노 주류들은 세 갈래로 나뉘어 졌다. 한명숙을 중심으로 한 친노는 통합민주당에 합류하였다. 유시민을 중심으로 한 친노는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국민참여당을 창당하였다. 문재인을 중심으로 한 친노는 김두관 지사와 박원순 시장을 영입하여 혁신과 통합이라는 단체를 만들고 2012년에 시민통합당을 창당하였다. 이후 시민통합당은 통합민주당에서 당명을 바꾼 민주당과 합당하여 민주통합당이 되었다.[* 18대 총선에서 박재승 공천심사위원장이 민주당계 정치인들을 대거 공천 탈락시키면서 시작된 친노와 비친노간의 갈등은 민주당 계열 정당 내에서 계속 이어져 왔고 이로부터 10년이 넘게 지난 2016년에도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분열양상이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라고 기존 문서에는 적혀 있지만 [[4]] 이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때는 다 짤려나갔다.
그리고, 한나라당은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업의 병풍 사건과 [설훈 의원]의 허위사실 유포가 이회창 후보의 패배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인식하는 터라 노무현에게 좋은 감정을 지닐래야 지닐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노무현 탄핵소추안의 원인은 바로 노무현 본인의 '열린우리당 지지 논란'과 '개헌 저지선 논란'이었는데, 이에 옛 친정 정당격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이 노무현의 이런 행동에 분노를 표하며 탄핵소추를 제안했고 한나라당과 자민련의 공조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 자민련은 노무현에 대한 반감은 있었지만 탄핵까지 가는 것은 명분이 없다는 이유로 탄핵 동참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친형인 노건평씨에게 3천만 원을 건넨 혐의로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던 대우건설 사장 남상국 사장에 대해 기자회견에서 구체적으로 이름을 언급하며 '좋은 학교 나오시고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 촌부에게 인사청탁을 하면 되겠느냐'며 공개적으로 질타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이 일로 남상국은 결국 한강에 투신하여 자살을 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자민련이 기존의 소극적인 입장에서 선회하며 적극적으로 탄핵에 찬성하게 된다.
당시의 노무현은 ["나의 불법 대선자금이 한나라당의 1/10을 상회하면 대통령직을 사퇴하겠다"]는 돌출 발언을 남기며 은연 중 검찰에 수사 가이드라인을 내림[* 당시 검찰은 한나라당의 차떼기 사건과 함께 최악의 정치스캔들을 들여다봐야 했다. 그러나 차떼기 사건과 이 사건의 수사는 비교적 검찰이 소신껏 수사했다는 평을 받고 있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대통령이 가이드라인을 내렸다고 보기도 애매. ~~무엇보다 현 시점에서 보면 저 때의 검찰이 차라리 공정했다.~~]과 동시에 차떼기 사건으로 조소에 시달리던 한나라당의 약을 잔뜩 올려놨고, ["민주당 찍으면 한나라당 돕는 꼴"]이라는 발언과 ["개헌 저지선이 무너지면 어쩔 수 없다"]는 발언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것이 곧 열린우리당을 지지해달라는 해석으로도 인식됐다.
그리고 방송기자클럽과 가진 자리에서는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지지해줄 것으로 기대한다"]는 발언이 뇌관이 되어서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거기에 중립을 지켜달라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권고를 "나는 계속 열린우리당을 지지할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5]]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노 대통령이 권고를 무시하고 중립성을 또 위반하면 한단계 더 높은 수준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결국 탄핵안 찬성세력은 노 대통령의 사과가 없다면 탄핵안을 제출할 것이라 경고했고 노 대통령은 사과를 거부하며 탄핵안은 국회를 통과한다.[* 다만 청와대 홍보수석이 "잘잘못을 떠나 국민 여러분께 오늘과 같은 대결국면의 탄핵정국에 이르게 된 것을 참으로 죄송하게 생각한다."라고 발표했다.]
원칙적으로 보면 일국의 대통령이 대놓고(...)[* 돌려말하기만 했어도 선관위에서까지 태클걸지는 못했을 것이다. 직접 말한 건 아니라고 핑계를 대면 되니까...] 특정 정당의 지지를 호소하는 것은 법률 위반[* 실제로 헌법재판소에서 그 위법성은 인정했다. 그런데 이 논리면 12년 후 총선 때 직접 유세를 도운 박근혜 피의자는 진작에 탄핵되어야 했지만, 굳이 탄핵할 만한 이유까지는 아니었을 뿐이다. 그리고,19대 총선에서는 박근혜와 손수조가 카퍼레이드까지 하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지만 별 일 없이 넘어갔다.]이자 삼권분립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에 결코 사소한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이 부분도 좀 생각해봐야 할 것이 미국이나 유럽같은 민주주의 선진국들은 총리나 대통령의 선거 운동을 허용하는 나라도 많다. 당장에 미국만 하더라도 오바마는 공개적으로 힐러리를 지지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도 시장이나 도지사들은 정당 활동을 활발히 한다. 국민이 기존 정치 세력의 집권 연장을 인정할지, 야당으로 권력을 넘겨줄지 판단함에 있어 기존 정치 세력과 대통령은 결국 한 묶음이다. 대통령은 정당의 1번 당원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 이론상, 원칙적으로는 정당의 1번 당원으로서 자신의 정파를 위해 활동하는 것은 당연하다. 근현대사에 비춰볼 때 공권력의 개입이 부정선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하는 것이지 민주주의가 성숙하다면 공직자의 선거중립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 ] 이 문제에 대해 선관위의 자제 요청을 '거절'했고 일절의 사과를 하지 않았던 노무현의 태도는 도발적이었고, 탄핵 직전조차 노무현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또한 노무현의 경솔한 발언으로 인해 남상국이 자살한 것은 대북송금특검 때 정몽헌 회장이 자살한 것을 떠오르게 해 미온적인 입장을 보이던 자민련까지 돌아서게 만들었다.
가결 당시
[include(틀:대통령 노무현 탄핵소추안)] [youtube(S7_l3ArYxtY)] [youtube(jgN7StwxTmw)] >"여러분,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설마 그러랴 했습니다마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됐습니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의 개별적인 판단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193명의 찬성으로, 비리로 점철된 16대 국회는 이제 대통령의 권한을 정지시킨 것입니다. 탄핵 가결, 그 최대 피해자는 물론 우리 국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 >- 6분 52초부터 나오는 엄기영 앵커의 오프닝 멘트. 당시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뉴스데스크이다. 워낙 사상 초유의 사태인지라 1부[* 해당 일자 뉴스데스크는 1, 2부가 나뉘지는 않았지만 동영상 업로드한 사람이 편의상 1, 2부로 나눈 것이다.] 임에도 불구하고 2시간 가까이 된다. 동영상에도 나와있지만 8시부터 시작해서 10시 반까지 2시간 반으로 진행했다. 앞에 오프닝 보면 제공자막(광고주 목록)이 끝없이 나오는 이유도 원래는 7시대에 방영될 프로그램이나 일일연속극이 방영할 때 나와야할 광고들을 죄다 특집 뉴스데스크 광고로 편성했기 때문이다.[* 제공자막이 원래는 이것보다 훨씬 느렸지만 이 날만큼은 빨리 지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오프닝 음악 2절까지 나왔으니 얼마나 광고가 많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간에 Asycall은 덤.--] 그래서 뉴스데스크 시작전에 보통 2분 45초 정도 나와야할 광고를 5분간 편성했고 뉴스데스크가 끝나기 직전에 나온 광고는 10분 30초씩이나 편성했다.
오죽했으면, 첫 동영상 11분 08초쯤에는 이를 도저히 보다못한 카메라맨이 "저 양아치들....."이라는 말까지 한다. 그야말로 목불인견
11분 30초에 만신창이가 된 유시민 의원이 울면서 "이거는 아니에요...! 이렇게 하면 안 돼요…!" 하는 것을[* 참고로 이때 당시 유시민 의원은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사지가 잡혀서 질질 끌려 나갔다! 심지어 바지도 벗겨져서 팬티가 그대로 다 보일 정도로 못볼 꼴까지 보였다. --그때부터 새누리당만 보면 뿔딱지가 서셨던 건가...--] 또한 한나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한 이부영 의원은 국회 경위들에게 끌려나가며 "이거 놔! 이거 쿠데타야!!"라고 격분했고, 본회의장밖에서도 언론을 향해 "이건 완전히 쿠데타예요! 쿠데타!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고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의 의원총회에서 탄핵을 가결했다는 거예요!"라면서 탄핵을 주도한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맹비난했다.[[6]]
여담으로, 당시 탄핵을 결사반대했던 정동영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과 탄핵을 추진했던 추미애 당시 새천년민주당 의원이 나오는데, 정작 2016년 현재 기준에서 놓고 보면 정동영은 친노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고, 추미애는 친노계 후신의 친문계와 다시 손을 잡고 재기에 성공했다는 것을 잘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다만, 두 사람은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에는 위 아 더 월드로 뜻을 같이 하였다.
유튜브에서 탄핵 당시 돌발영상을 보면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탄핵이 가결되자 웃으면서 떠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악마의 웃음~~ ~~법때 유시오도~~[* 국회의장이 말할 때 마이크가 끊겼나보다.] [[7]] 그리고 12년 후... 한 마디로 자업자득.
이때 탄핵에 반대한 2명은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호 의원과 새천년민주당의 이낙연 의원이다.
가결 이후
탄핵소추결의안 가결에 따라 국회의 탄핵소추의결서가 청와대와 헌법재판소에 접수되었고, 청와대에 탄핵소추의결서가 도착하자마자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이 정지되어 직무에 임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다.
탄핵소추결의안에 반대하였던 열린우리당은 모든 의원들을 총동원하여 국회 상정 저지를 위해 고군분투를 하였다. 하지만 야당들의 기습적인 처리를 막지 못하였고,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의 만행에 분노와 비분강개함을 금할 수 없다며 대국민사과를 하였다. 반면,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은 당연한 결과이자 국민의 명령이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민심은 야당 연합의 기대와는 다르게 흘러갔다. 당시 [[8]][* 항목은 가결 이후이지만 날짜를 자세히 보면 가결은 3월 12일이고 기사는 10일이다.]에서 보듯 KBS의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지지발언을 한 것에 사과해야 한다는 의견이 62.5%를 차지했지만 연합뉴스 여론조사 기준 탄핵반대 의견은 78.2%였고 찬성은 21.5%에 불과했었다. 즉 대통령이 잘못한 건 맞지만 이건 사과하고 넘어가든가 혹은 비난받는 정도로 끝날 문제일뿐, __탄핵까지 가는건 지나치다는 게 다수 국민의 의사였던 것__.
문제는 노무현 대통령은 탄핵으로 갈 때까지 이 부분에 대해 사과할 생각도 타협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좋게 보면 소신이 뚜렷한 것이지만, 나쁘게 본다면 상대로 하여금 선택지가 없는 선택을 하게 만드는 외골수적 사람이었으며 적을 만드는 스타일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노무현 대통령이 호불호가 극명한 정치인이란 이미지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되는 내용처럼 당시 한나라당이나 새천년민주당은 이해 당사자라 대결 양상으로 가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자민련만큼은 막바지까지 중립을 지켰던 만큼 노무현 대통령의 선택에 따라 극적인 화해 양상으로도 갈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야 3당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정치적으로 기회를 준 부분은 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생각은 확고했고 결국 강 대 강으로 부딪치게 된 파국의 결과가 탄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탄핵 소추 결의안이 가결되면서 이에 경악한 민심은 __"우리가 뽑은 대통령을 감히 너희들이 뭔데 맘대로 끌어내리냐?"__라는 야당 연합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건 전국적으로 공통된 현상이었다. 2년 전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가장 낮았던 TK에서조차 반발 여론이 거셌는데 한 중년 남성이 __"대통령은 국민이 뽑았지, 국회의원이 뽑지 않았다! 국민들의 의견을 듣고서 해야지? 무작정 멋대로 하는 건 말이 안 된다!"__라고 열변을 토하는가 하면, 한 주부는 __"지역 경제가 그렇잖아도 힘든데, 정국이 시끄러워져서 걱정이다."__라는 반응을 내놓았다.
즉, 노무현 대통령 정부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의회가 정국을 뒤흔들어서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행위는 더더욱 싫다는 게 지역 민심이었던 것이다. 대구, 경북마저도 이 정도니 다른 지역이야 오죽했을까? [[9]]
국회의 탄핵소추안이 비난받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전국적인 투표로 뽑은 대통령과 특정 선거구에서 선출된 국회의원 간의 민심의 선택은 그 무게가 다르기 때문에에 국회의원이 민심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제멋대로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킬 자격이 있느냐는 논리였고,[* 대의제 민주주의 하에선 대표자들이 개별 국민의 뜻(소위 민심) 하나하나에 얽매일 의무가 없기 때문에(자유위임주의) 저러한 행위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절차적 하자가 없다는 것일 뿐 다수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한 것은 분명하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는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한 대표자는 추후의 선거 등을 통해 심판하면 된다는 것이 통설이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또 하나는 온갖 비리나 철새정치 등 그 막장성을 보여주는 것은 대통령보다 국회의원이 더하면 더했지, 못 한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분을 내세워 탄핵을 했으니까 __"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다!"__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탄핵무효 민주수호"의 기치하에 민중가요 헌법 제1조를 부르며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 복귀를 요구하는 촛불집회[* 사실, 촛불집회의 효시는 미선이 효순이 사건 때라고 할 수 있으나, 이 시기에 최고조에 달하며 시위 문화의 주류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12년 후, 이번에는 정반대의 이유로 촛불집회가 열리게 되었다.]를 갖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탄핵 반대시위는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파일:External/dimg.donga.com/6916098.1.jpg 2004년 3월 20일 광화문 촛불집회 사진이다. 광화문 네거리부터 덕수궁 대한문까지의 길 전체가 시민들의 촛불로 가득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으로 직무정지를 당했을 때와 박근혜 대통령이 직무정지를 당했을 때 똑같이 촛불집회가 벌어졌지만 의미는 정반대다. 노무현 대통령 직무정지 당시에는 노무현의 복직을 위한 촛불집회인 반면 박근혜 대통령 직무정지 당시에는 박근혜 완전 퇴진을 위한 촛불집회였다.]
보수 지지층의 특징은 국가와 현 체제 및 정권의 안정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는 경항이 강하다. 이러한 특징은 보수층만이 아니라 중립층에도 팽배해 있는 의식이기에 대통령 탄핵 소추 같은 초유의 정국에서는 기존 한나라당 지지층마저도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당시의 시민 여론은 탄핵으로 대통령을 축출하는 행위를 마치 과거 군부의 쿠데타와 동일시하면서 바라봤다.
한편, 12년 뒤에 일어난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비교해 보면, 이 당시에는 "탄핵 주도세력이 국가 정치를 뒤 흔든다"고 보았고, 박근혜 게이트의 경우는 "대통령 쪽에서 스스로 국정을 무너뜨렸다"고 보았기에, 두 탄핵 소추 결의안에 대한 민심의 반응은 극명하게 달랐다.
그런 이유들로, 탄핵소추 결의의 역풍은 실로 엄청났고 때마침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있던 시기였던지라 다수 국민의 반감을 사게 된 야당 연합은 그야말로 궁지에 몰렸다. 한나라당은 회초리 맞는 CF를 내보내고 거대 여당의 독주를 막기 위한 견제론을 내세웠다. 즉, "우리가 잘못했지만 그래도 이대로 가면 열린우리당이 독재여당이 될 수 있으니까 독재를 견제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지지해달라"는 논리였다. 실제로 여론 조사를 살펴보았을 때 열린우리당은 과반은 따놓은 당상이었고, 최대 180석에서 헌법을 바꿀 수도 있는 200석 확보도 꿈은 아닐 만큼 상황이 좋았다.
이렇게 한나라당은 사과하면서 지지를 호소했지만 한나라당의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영남, 그것도 대구·경북에서조차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을 10% 이상의 차이로 제치고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고 한나라당의 주 지지층이라 할 수 있는 50대 이상의 노년층마저도 열린우리당 지지를 외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민주당 등지에서도 박태영 당시 전남지사 등의 집단탈당이 이어지면서 세력이 크게 흔들렸다. 게다가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는 "2004 총선시민연대" (www.redcard2004.net)[* 당연히 지금은 열리지 않는다.]라는 하부단체와 웹사이트까지 만들어 주로 탄핵을 찬성한 의원들을 대상으로 [펼쳤고,] 이 총선시민연대 공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한 김기식은 2012년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소속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하는데 성공한다.
비록 선거 3주 전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저지른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다"]는 발언이 노인들을 폄하한 것이라는 여론의 질타를 맞아 열린우리당의 잘 나가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버리지만[* 총선 결과 한나라당의 텃밭인 [선전하던 후보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대부분 낙선한다.] ] 국민들은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의 의석을 확보하는 압승[* 총 299석중 152석을 확보했고 한나라당은 121석을 차지한다. 만약 정동영 의장의 발언 문제가 없었다면, 열린우리당이 개헌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2/3의 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을 거라는 견해도 적지 않았다.]을 거두게 하며 탄핵을 주도한 야당 세력을 사실상 심판해 버렸고, 탄핵 주동자들로 지목되었던 조순형 새천년민주당 대표,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 김종필 자민련 총재, --박관용 국회의장--[* 본인이 탄핵소추안 처리 이전에 이미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등이 줄줄이 참패하면서 사실상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 때 추미애 의원도 당시 낙선을 했으나 18대 총선 때 다시 화려하게 부활하여 12년 뒤에 다시 한 번 박근혜 대통령을 상대로 탄핵을 주도하게 된다.
그나마, 한나라당은 텃밭인 서울 강남 3구와 영남지역 등에서 겨우[* 이 때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의 진정한 텃밭인 대구, 경북에서 두 곳을 제외한 나머지 지방에서 평상시의 두 배 정도인 무려 20%-40%(구미시 을!)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또 다른 텃밭인 울주군을 빼앗았다.] 승리를 거둬 체면을 세울 수 있었고, 후에 제18대 대통령이 되는 박근혜가 전 대표였던 최병렬의 후임으로 당 대표를 맡으면서 수습에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자유민주연합은 당의 구심점이었던 9선 국회의원 김종필 총재를 비례대표 1번으로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지지세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김종필 총재조차 당선시키지 못하는(...) 굴욕의 치명타를 입는다.[* 득표가 2.98%였기 때문. 지역구 의석이 5석 이상이었다면 1석=3% 제한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김종필이 당선될 수도 있었겠지만, 4석밖에 못 건지는 바람에....안습.]
새천년민주당 또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인 전남 신안, 목포, 무안[* 그나마 지역구 의원이 한화갑과 DJ의 장자인 김홍일이었다.]등지에서 그나마 지지세를 확보하였지만, 텃밭 호남지역에서까지 열린우리당에 크게 밀리면서 원내 제2당의 자리를 내줬음은 물론이고 민주노동당에게까지 밀려서 원내 제4당으로 전락하는 굴욕을 당한다.
반면, 탄핵 찬성을 당론으로 하지 않았던 민주노동당은 지역구 2석 포함 총 10석을 확보하면서 원내 제3당으로 약진하게 된다. 새천년민주당이 입은 타격은 당이 소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자민련에 못지 않은 것이었는데 탄핵 전 지지율은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과 비슷한 지지율로 천하삼분지계를 형성할 수도 있는 정도였으나 탄핵 역풍 한 방에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고 식물정당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결과만 보면 정치 9단 노무현이 완벽히 깔아둔 판 위에서 민주당-한나라당이 놀아났다고 설명해도 믿을 법 하다-- --그만큼 당시 국회가 국민들과 유리된 그들만의 리그였다는거지--
탄핵심판
사건접수와 심리
2004년 3월 헌법재판소는 국회의 탄핵소추의결서를 접수함에 따라 대통령(노무현)탄핵심판 청구사건에 2004헌나1이라는 사건번호를 부여하였고, 1차 변론을 시작으로 해당 사건에 대한 심리를 하게 되었다.
대리인단
당시 피청구인인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를 담당한 대리인단의 주요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이 사건 당시의 직함을 쓰고, 이후의 직함을 괄호 안에 적는다.)
* 문재인 : 간사. 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후일 대통령비서실장,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 * 유현석 :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고문, 전 서울형사지법 부장판사 (이 사건 탄핵기각결정 며칠 뒤 작고하였다.) * 하경철 :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 (현 법무법인 양재 고문변호사) * 이용훈 : 전 대법관 (후일 14대 대법원장, 현 고려대학교 석좌교수) * 박시환 : 전 서울지법 부장판사 (후일 대법관, 현 인하대학교 교수) * 이종왕 : 전 대검찰청 수사기획관 (후일 삼성그룹 법무실장, 현 삼성전자 고문) * 법무법인 광장 * 한승헌 : 전 감사원장 (현 가천대학교, 전북대학교 석좌교수) * 법무법인 화우 * 조대현 :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 (후일 헌법재판소 재판관, 현 법무법인 화우 고문변호사) * 양삼승 : 전 헌법재판소 헌법연구부장, 대전고법 부장판사 (현 법무법인 화우 고문변호사) * 강보현 : 전 서울고법 판사 (현 법무법인 화우 고문변호사) * 법무법인 율촌 * 윤용섭 : 전 헌법재판소 헌법연구부장, 서울지법 서부지원 부장판사 (현 법무법인 율촌 대표변호사) * 법무법인 호민 * 김덕현 : 여성변호사회장, 국가인권위원회 비상임위원, 전 서울민사지법 판사 (현 법무법인 호민 변호사)
피청구인인 노무현 대통령은 대리인단과의 상견례를 겸한 오찬에서 이들에게 “수고해달라”는 말만을 하고 아무런 주장 없이 탄핵의결이 부당하다는 대리인단의 의견을 듣기만 했다고 [[10]]
기각결정
||<-4><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3F51B5><#3F51B5><:> {{{#white {{{+1 {{{#white 대통령}}}({{{#white 노무현}}}) 탄핵심판}}}}}} || ||<-4><#5c6bc0><:> {{{#white (사건번호: 2004헌나1) (개시일: {{{#white 2004년 3월 12일}}}) (선고일: 2004년 5월 14일)}}} || ||<-4><#5c6bc0><:> {{{#white 헌법재판관 7인 이상 출석, 6인 이상 인용의견 시 탄핵^^(헌법재판소법 제23조 제1항 및 동조 제2항 제1호)^^}}} || ||<#5c6bc0><:>{{{#white 선고 내용}}}||<-3><#ffd8d8><:> 7인 이상이 출석하였으나 6인 이상이 인용하지 않았으므로{{{#red {{{+1 [br]기각}}}}}}|| ||<#5c6bc0><:>{{{#white 후속 절차}}}||<-3><#FFFFFF>{{{#3F51B5 ● {{{#3F51B5 대통령}}}:}}} 직무 복귀(헌법 제65조 제3항 - 반대해석)|| >주문. 이 사건 심판청구를 기각한다. >---- >- 헌법재판소장 윤영철 헌법재판소법 제23조 제2항에 따르면 탄핵심판청구사건의 경우 헌법재판소 재판관 9명 중 6명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만 탄핵결정을 하도록 하고 있으나 탄핵에 필요한 찬성수에 도달하지 못함에 따라 결국 2004년 5월 14일 탄핵심판청구를 기각하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고[* 단, 해당 결정서에는 헌법재판소 재판관 개개인의 찬반의사가 실명으로 표시되지 아니하였고, 대통령의 탄핵에 각각 몇 명의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찬성과 반대를 하였는지 또한 표시되어있지 않다. 이는 당시 헌법재판소법에 재판관 의견표시의무에 대한 명시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헌법재판소법은 '헌법재판소법 36조 - 위헌, 권한쟁의, 헌법소원심판에 관여한 재판관은 의견을 표시해야 한다.' 였었다. 탄핵 심판과 위헌정당해산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헌법재판소법 제정에 참여하고 4대 헌법재판소장을 역임한 이강국 전 헌법재판소장에 따르면 헌법재판소법 제정당시 재판관들의 정치적 부담감을 덜어주려고 탄핵과 정당해산심판은 소수의견을 달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아마도 탄핵이라는 굉장히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었기에 헌법재판소 재판관들도 본인들의 의견을 보이는데 꺼려했을 것이다...라는데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실상은 정 반대다. 2004년 5월 14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선고일 당시에 선고예정 시각은 10시였다. 선고를 앞두고 합의실로 모이는 와중에 김영일 재판관이 오지 않았다. 참고로 김영일 재판관은 탄핵을 주장한 재판관으로 알려져 있다. 김영일 재판관은 서명하는 것도 거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고 시각인 10시가 넘었음에도 대심판정에 재판관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10시가 넘어서 윤영철 소장의 설득이 있은 후에야 내려왔다. 게다가 아침 출근길에서도 기자들에게 예민하게 굴었다. 이랬던 이유는 탄핵을 기각했던 다수의 재판관들이 앞서 밝힌 헌법재판소법 36조에 따라 탄핵 심판에는 소수의견을 공개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에 참여했던 송인준 전 헌법재판관도 '고성이 많이 오갔다. 굉장히 치열하게 격론을 벌였다.' 라고 말한다. 헌법재판소법에 참여했고 훗날 윤영철의 뒤를 이어 헌법재판소장이 되는 이강국으로 부터 자문까지 구했다고 한다. 이강국은 앞서 말한 바를 헌재에 전했다고 한다. 즉 소수의견은 표시를 하지 말라고 한 것. 결국 탄핵을 주장한 소수 재판관들은 한 발 물러서서 탄핵의 정당성을 담은 장문의 소수의견을 쓸 것을 요구했고 탄핵을 기각한 다수의 재판관들은 이것을 받아들였다. 즉 오히려 탄핵을 주장했던 소수의 재판관들이 자신의 의견을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는 것. 그러나 이렇게 결정서에 각 재판관들의 의견표시가 나오지 않은 것은 문제가 있다며 비판받았고, 이후 "심판에 관여한 재판관은 결정서에 의견을 표시하여야 한다."(헌재법 제36조 제3항)고 헌법재판소법을 [[11]]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시 탄핵소추위원이던 김기춘 주도로...] 그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은 그 권한을 회복하고 직무에 복귀하게 되었다. 10년 만에 취재 결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3명[* 권성, 이상경, 김영일. 권성 재판관은 한나라당 추천, 이상경 재판관은 민주당 추천, 김영일 재판관은 최종영 대법원장 지명이였다. 참고로 저기서 권성 재판관은 이후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때 해산을 주장하는 정부 측으로 나왔다. ~~아주 정치인이여~~]이 인용, 5명[* 윤영철, 김효종, 송인준, 주선회, 김경일]이 기각, 1명[* 전효숙. 최초의 여성 헌법재판관이다. 후에 노무현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장으로 지명했으나 한나라당의 말도 안되는 트집잡기에 결국 스스로 물러난다. 자세한 것은 헌법재판소 항목 참조.]이 각하했다고 [[12]][[13]] 다만 당시 주심 재판관이였던 주선회 재판관이 말하길 "2004년 당시 재판부는 소수 의견 공개 여부를 놓고 선고 전날까지 논의를 한 끝에 비공개를 결정했다. 주선회 주심 재판관[* 재밌는 점은 주선회 재판관은 검사 출신 재판관으로 검사 시절 변호사 노무현을 대우 조선 노동자 이석규씨 사망 사건과 관련하여 제3자 개입 혐의로 구속수사한 적이 있다.]은 선고 뒤 찬반 숫자를 알려 달라는 질문에 죽을 때까지 공개하지 않기로 재판관들끼리 약속했다며 자신이 그것을 밝히면 법 위반으로 탄핵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왜 법 위반인지는 각주 참조.[[14]]
탄핵을 기각한 재판관은 탄핵을 해야 할 만한 중대한 이유가 없다는 의견을 결정문에 밝혔다. 권성, 이상경, 김영일 재판관은 대통령의 직무수행에 위법이 있었고, 국회가 결의를 했다면 인용해야 한다며 탄핵에 찬성했다고 전해진다.
12년 후에 있을 박근혜 탄핵 심판처럼 이쪽에도 막말을 했었다. 다만 박근혜 탄핵때는 탄핵을 반대하는 박근혜 대리인단이 막말을 했다면 이때는 탄핵을 주장하는 탄핵소추인단이 막말을 쏟아냈다.(...) 즉 소추인단, 대리인단이라는 위치의 차이만 있을 뿐 막말을 했던 놈들은 똑같은 놈들 이라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15]] 참조 ~~이 새끼들은 12년이나 지났는데 어쩌면 저렇게 한결같이 X 같을까...~~
[외에도 여러 여담이 있다. 자세한 건 링크 동영상 참조.]
탄핵 실패의 원인
>헌법은 기본권 조항, 권력구조로 나뉘는데 기본권 조항 내버려 두고 (개헌을 해서) 대통령 4년 중임제로 바꾸고 국무총리 통해서 내각 구성하고 내치를 담당할 권한을 국회의원이 가지겠다는 것 아닙니까? 언제 국민들이 그러라고 했어요? 국회의원들은 대통령보다 뭐가 잘났습니까? >------ >- 유시민,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후 'JTBC 특집토론-탄핵심판 이후 대한민국, 어디로 갈까' 에서.[[16]] 탄핵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은 국회의원들이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 신뢰도가 밑바닥수준으로 매우 낮은데 그런 국회의원들이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국민의 동의도 없이 탄핵한다? 실패가 불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것을 못본 것은 국회의원 뿐이지만. 탄핵을 찬성하던 국회의원들은 탄핵이 국민의 뜻이라고 주장했지만 정작 국민의 뜻은 17대 총선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차라리 처음 본 사람 믿겠다] 이 사건으로부터 1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런 기사가 나오는 것을 보면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의 신뢰를 얻기에는 아직 갈길이 멀어 보인다.[* 현재 유행하는 '이게 다 야당 때문이다' 드립이 먹히는 원인중 하나가 이런 국회의원들에 대한 불신이다. 그렇다고 여당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신뢰도가 압도적으로 높은것도 아니다.]
여담
정치 풍자의 르네상스
파일:External/pds.joins.com/htm 20040317183050j000j300-0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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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사태 당시 인터넷을 중심으로 정치 풍자 및 패러디가 크게 발전하였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정치 커뮤니티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고 탄핵을 주도한 야당 인사들과 그들의 발언이나 행동을 풍자하는 이미지, 영상, 노래 등이 유행하였다. 유명한 '물은 셀프' 패러디도 이 당시 등장한 것. [뽑아 그들에게 던져라]
이 사건 이후로 정치권에서는 상대에 대한 너무 지나친 공세는 오히려 역으로 여론의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기게 된다. 이는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탄핵에 주저했었던 원인이기도 하다.[* 당시 박근혜 측이 차라리 탄핵하라 고 자신있게 말했던 것도 이런 역풍을 기대하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해달라는 대로 해주었습니다--] ~~근데 박근혜때는 국회의 탄핵소추 부작위 위헌확인 헌법소원까지 나올정도의, 탄핵찬성 80%의 압도적 탄핵 찬성 분위기였는데~~
이때 이후로 인터넷에서의 소위 개혁/진보 활동이 두드러지며 이는 한국 진보진영의 SNS 의존 현상에까지 이어지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의 비교
>'234대 56'. 헌정사에 영원히 남을 숫자들입니다. 또한 시민들이 만들어낸 숫자이기도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은 그렇게 압도적 표차로 통과됐습니다. 그리고 조금전인 오후 7시 3분을 기해 박 대통령의 직무는 정지됐습니다. 이 시간 이후 한국사회는 12년 전 한번 열었던 문을 다시 열고 들어갑니다. 그 때 열었던 문과 지금 열고 있는 문은 '탄핵'이란 이름은 같지만 그 안의 세상은 완연히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모두의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 국회의 탄핵안 가결 당일(2016.12.09) JTBC 뉴스룸 손석희 앵커의 오프닝 멘트
>촛불의 물결. 태극기의 반격. 길고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이제 막을 내렸습니다.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21분. 우리는 대통령을 잃었고 민의와 법치의 승리를 얻어냈습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사에 또 한고비를 넘은 셈입니다. 이제 남은 건 화해와 통합입니다.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돼야 할 만큼 모든 국가기관의 존립 근거인 헌법을 중대하게 위배했다고 판단했습니다. 만장일치였습니다. >---- >-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결정 당일(2017.03.10) SBS 8 뉴스 김성준 앵커의 오프닝 멘트 기각과 인용 --결과적으로 향후에 탄핵하는 데에 좋은 경험과 판례가 됐다.--
그리고 12년이 지나 2016년, 역사는 반대로 반복되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가 가결되자 웃으면서 회장을 떠났던 박근혜 당시 의원은 이번에는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 본인이 탄핵받게 되었으며, 2004년 광화문 앞에서 촛불을 들고 당시 대통령의 탄핵 반대를 외쳤던 시민들은 2016년 같은 자리에서, 아니 점점 청와대를 향해 나아가면서 촛불을 들고 대통령의 탄핵촉구 및 퇴진을 외치게 된다.
2016년 정국을 뒤흔들었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파문이 계속 커지면서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가 이루어질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에 2004년 탄핵과 상황을 비교하는 분석이 많아졌다. 그리고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이 처음에는 탄핵소추에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했던 것에 대해 이 탄핵 사태와 연관이 있다는 해석이 강하다. 야권 인사 중 이 탄핵 사태를 직접 경험한 인사들이 많다 보니, 탄핵 역풍의 가능성을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여서 탄핵소추를 주저하게 된다는 것. 실제로 2004년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추미애 의원마저 탄핵 후 총선에서 자기 지역구에서조차 낙선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은 경험이 있다. 2016년에는 더불어민주당 대표로서 탄핵을 이끌었던 추미애 의원은 이 낙선을 제외하면 광진구 을 지역구에서만 5선을 지낸 광진의 여왕인데 그런 그녀조차도 낙선을 면치 못했을 정도이니 탄핵의 역풍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탄핵 관련 집회만 봐도 2004년 당시는 주로 탄핵 반대 촛불집회가 열렸지만 2016년에는 퇴진 찬성 촛불집회가 다수라 탄핵 후폭풍으로 인한 역풍이 불 가능성은 낮았다. 당장에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보면 알겠지만 국회의 탄핵소추 부작위 위헌확인 헌법소원까지 나올정도로 탄핵찬성 80%의 압도적 탄핵 찬성 분위기였다. 그나마 탄핵을 반대하는 이유도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탄핵 소추 및 헌재 결정으로 시간 끌지 말고 박근혜가 당장 자진 하야를 해야 한다', '탄핵 가능성도 불확실한데 만에 하나 탄핵 표결 및 헌재 인용에 실패하면 박근혜에게 면벌부를 줄 수 있다'라는 인식이 더 강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안 했다가는 국민들의 촛불이 국회로 향할 판이었다. 당시의 여당인 새누리당 내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2004년에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으로 인해 탄핵무효 촛불집회가 열렸다면, 2016년에는 탄핵촉구 촛불집회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귀결된 것도 차이이다.
두 탄핵소추 모두 국회의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되었지만, 탄핵 '반대여론이 78%'(KBS 여론조사 2004년 3월 10일)에 달했던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는 야당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쉽게 탄핵안이 가결되었던 반면, '탄핵 찬성 여론이 78%'에 달하는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은 새누리당의 대통령 4월 퇴진 당론 결정 및 비박계의 동조로 예측불허 상태가 되었다가, 12월 3일 232만의 촛불에 당황한 비박계 의원들 주축의 새누리당 비상시국위원회가 12월 4일 탄핵 투표에 참여하기로 선회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탄핵 원인도 급수가 상당히 다르다. 노무현 때는 대통령이 중립을 지키지 않고 대놓고 특정 정당을 지지한 것이 원인이지만, 박근혜는 국민의 어떠한 동의 없이 최순실 및 몇몇 사람들과 짜고 국정을 농단하여 초대형 부정부패를 저지르도록 만든 것이 원인이다. 즉, 박근혜는 나라를 최순실 일당에게 팔아먹은 것이다. 중립의무 위반도 중대한 과실이기는 하지만, 나라 팔아먹은 것은 급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즉 전자는 대통령이 사죄를 하거나 하면 충분히 용납은 해줄 수 있는 일이고 당시 여론도 그러한 분위기가 대다수였지만, 후자는 용납 자체가 불가능한 문제였다.
국회의 모습도 상당히 다르다. 2004년 당시 국회는 국회선진화법이 없어서 밥먹듯이 날치기, 국회 공성전이 벌어지던 때였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에도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미리 의장석을 점거하고 있었으며,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이 국회의장 경호권 발동과 의원 수의 수적 우위로 밀어붙여서 국회의장석을 차지하여 탄핵소추안을 가결 시켰다.
하지만 2016년의 탄핵 본회의는 보는 눈도 많아졌다. 탄핵에 대해서 뜻도 잘 모르고 설마 탄핵시키겠냐고 하다가 날치기로 탄핵시켰던 12년 전과 달리 이미 국민 모두가 발전된 매스미디어를 통해 탄핵을 원하고 있었고 국회 앞에서 시민들이 시위하면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서 깽판을 친다면 당장 시민들의 반응이 어떨지는 불보듯 뻔하다. 이 때문에 국회는 진지하다 못해 매우 싸늘할 정도로 정적이 감돌았다.본회의가 시작되자 국민의당 원내수석 김관영이 발의자를 대표하여 탄핵 소추안을 제안 설명하였고, 곧바로 표결이 시작되었다. 최경환 의원만 투표에 참여하지 않고, 299명의 의원이 차분하게 가부 투표를 진행하였다.
개표 이후의 반응도 많이 다른데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에는 이긴 쪽은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였던 반면에 진 쪽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오열하였고, 죄책감에 무릎을 꿇고, 화풀이로 개표함을 부수기도 하였다. 반면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에는 탄핵을 주도한 야당 쪽에서도 거의 침묵에 가까운 반응을 하였고 여당 의원들도 침통한 모습으로 가결을 덤덤히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노무현 때는 카메라맨이 양아치들이라고 욕했고, 박근혜 대통령 때는 세월호 유가족이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더불어민주당은 가결되어도 웃거나 환호하지 말고, 아예 국회 내부에 들어가면 의원들끼리 대화도 하지 않도록 지시하였다. 대한민국 헌정사의 비통한 역사라면서 대놓고 웃는 모습을 남길 수 없다는 우상호 원내대표의 의견이 있었다고 한다. 방청석에서 과정을 지켜보던 세월호 유가족 등 시민들이 잠시 감정에 북받쳐 박수를 치거나 울음을 터뜨렸을 뿐이고 이쪽도 곧 소란을 스스로 가라앉혔다.
피청구인 대리인단들의 태도도 판이하게 다르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리인들은 '속도전'을 강조했다. 국회 측이 변론기일이 부족하다며 변론을 한 번 더 요청해서 결국 최종변론기일 이후에도 또 변론이 열렸을 정도였다. 반면 박근혜 대통령의 대리인들은 곧 퇴임을 앞둔 두 재판관의 퇴임 이후까지 어떻게든 재판을 끌어가려고 억지를 썼고 그 과정에서 온갖 추태가 벌어졌다. 의미 없는 증인 신청, 질질 끄는 질의응답, 필리버스터 하냐는 소리까지 들은 일장연설 변론, 법정 모독에 가까운 막말 변론들, 재판정에서 태극기 퍼포먼스, 주심에게 기피신청 등등. 증인 수도 변론 횟수도 노무현 대통령 쪽이 훨씬 적은 건 덤.
한편,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와 현재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는, 탄핵 추진을 주도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의 위치가 몇몇을 제외하면 거의 뒤바뀌었기에 두 시기의 사진과 영상 자료를 비교하면서 당시와는 완전히 입장이 뒤바뀐 의원들의 모습을 보고 묘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일치치고는 상당히 드라마틱하다.]
아래는 예시.
* 정세균: 2004년 탄핵 소추 당시 열린우리당의 정세균 의원은 탄핵 발의를 막기 위해서 국회의장석을 강제점거하고 --박근혜 공개투표 하지마!를 외치고-- 있었는데, 2016년에는 국회의장으로 선출되면서 정당한 권리를 가진 상태로 국회의장석에 서서 공식적으로 탄핵 가결을 선포하게 된다.[[17]] --이건 뭐 거의 운명의 데스티니다.-- --사실 의자에 앉아서 12년 뒤의 미래를 본거라 카드라-- * 추미애: 2004년 당시 새천년민주당 의원으로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하나로 알려졌고, 이후 탄핵 사태로 인해 국민에게 사죄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반면 2016년에는 더불어민주당의 당대표로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주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두 탄핵 사태에 모두 주요 인물로 참여한 탓에 추미애는 '프로탄핵러', '돌아온 탄핵 전문가'와 같은 별명까지 붙었다. 다만 2004년 때의 추미애의 입장은 2016년에 비하면 좀 더 복잡하다. 추미애 문서를 참고. * 문재인: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당시 피청구인 대리인단 간사로 활동했던 문재인은 2016년에 막후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이끄는 인사 중 1명이 되었다. 문재인 본인이 촛불 정국에서 맡은 역할은 정국이 뒤집혀 지지 않고 끝까지 유지하게 하는 역할이라고 하였다.[* 사실 안철수가 더 일찍이 주장하였다.~~굳이 따지자면 이재명이 제일 처음 주장했지만~~ 하지만 거대 정치 계파 친노, 친문의 수장, 제 1당의 실질적 리더이며 지난 청와대 시절부터 18대 대선을 포함하여 노무현과 더불어 가장 박근혜에 대항했던 인물이라는 상징성 덕분에 언론 및 여론은 문재인을 더 주목할 수 밖에 없었다. 문재인이 탄핵을 본격적으로 주장한 기자회견의 규모를 보아도 안철수와 문재인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이후 2017년에는 파면된 채 청와대에서 물러나게 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빈자리를 채우게 된다. * 김기춘: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 소추위원[*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자격]으로 활동했던 김기춘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피의자 신분이 되어서 구속되었고, 결과적으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원인 제공을 한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심판에 관여한 재판관이 결정서에 의견을 표시하게끔 개정하는 헌재법을 통과시킨 인물이 김기춘 본인인데, 이는 후에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의 만장일치 인용을 보여주는 결과로 돌아오게 된다. * 박근혜: 2004년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당시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며] 아예 가결 표시가 되어있는 투표 용지를 다 보이게 투표함에 집어넣기도 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을 조롱하다시피 했는데, 12년 후에는 오히려 본인이 탄핵당하는 위치가 되고 만다. 당시의 모습이 현재와 대비되면서 인과응보라는 평가도 있다. 여담이지만 아수라장이 펼쳐진 2004년의 탄핵 소추에 비해 자신에게 향한 탄핵 소추는 비교적 평화롭고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 이는 국회선진화법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국회선진화법의 통과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박근혜 본인이다. --자승자박--
물론,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이 사건은 기각되었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은 인용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대통령의 탄핵이 기각되는 허용 범위의 선을 그었다고 한다면,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그 선을 넘어 파면된 경우를 명확하게 보여줬다.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두 사태 모두 찬성 측과 반대 측이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았다는 것과 절대다수의 국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가장 극명한 대조라면 범죄자가 된 법사위원장 vs 대통령이 된 변호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각주
- ↑ 새천년민주당에서 황실 폐지를 주창하던 많은 이들이 이인제의 경선 패배 이후 한나라당으로 넘어갔다. 그 후 황실을 지지하는 친노 성향의 신주류가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 ↑ 의외일 수도 있는데, 황실 폐지에 대해서는 민주노동당의 NL (민족해방)계가 자유주의 정당보다 훨씬 적극적이었다. 민노당의 후신을 표방하는 정의당도 기본적 당론은 황실의 권한 축소이며, 신설 민중당은 아예 황실 추방을 목표로 표방했다.
- ↑ 이후 열린우리당 후보에게 제17대 의정위원 선거에서 대패하고 황실에 고발당하며 정치적 생명이 끝장난다. 현재는 대한애국당에 합류.
- ↑ 대한제국의 총리는 노태우의 6.29 선언으로 국민직선제 유지로 합의를 보았다. 그래서 다른 입헌군주제 국가와는 다르게 대통령의 성격을 많이 지닌다. JP는 이것을 바꾸어서 일본처럼 완전 의원내각제가 되기를 원하였고, 노태우도 내심 황제의 압박으로 이루어진 6.29 민주화 선언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으므로 YS를 끌어들여 삼당 합당을 추진한 것.
- ↑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기 하루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