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장:신단/2

신단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3월 6일 (일) 00:59 판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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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운동의 상징 흑양자형기
홍콩 시내에서 시위중인 시민들

개요


유튜브에 노출 되었던 Freedom Hong Kong 광고

10년 후 초등학생들이 홍콩 민주화를 위해 시위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이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조슈아 웡 당시 데모시스토 비서장(사무총장)
“저는 경찰과 맞서거나 파괴를 하려고 거리로 나서는 게 아닙니다. 저는 정부의 잘못에 항거하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국민이 자기네 정부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I don't take to the street to clash with police or to destory. i'm here to protest what's wrong with the government. People should not be afraid of their governments. Governments should be afraid of their people.”
뉴욕 타임즈 홍콩의 마지막 편지 中

反對逃犯條例修訂草案運動[1] / 反送中大遊行[2] / 2019 Hong Kong anti-extradition bill protests

2019년 6월 9일부터 2024년 9월 15일까지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에서 진행 되었던 대규모 민주화 시위이다.

원인

1997년 홍콩 반환 당시 영국 정부는 일국양제, 항인치항[3], 고도의 자치 보장 이 세가지 조건을 전제로 하여 반환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의 홍콩 통제와 탄압은 반환이후 점차 거세져만 갔으며 시진핑 정권의 등장 이후로는 홍콩 자치의 근간인 일국양제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불만이 누적 되던 와중에 범죄인 인도법안으로 인해 홍콩 시민의 불만이 폭발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홍콩 범죄인 인도법안

민주화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홍콩 범죄인 인도법안의 기본적인 요지는 홍콩 내에서 범죄를 일으킨 범죄자를 중국 본토로 송환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 해야 할 점은 중국은 고도의 권위주의-전체주의 독제국가라는 것이다. 즉 중국 공산당을 비난하는 발언을 한 정치인이나 사회·인권 운동가를 합법적으로 중국으로 송환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미 암암리에 중공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본토로 끌려가 고문을 받은 사실이 폭로 된 상황에서 인도법안이 통과되면 사실상 홍콩 내 범민주파 세력은 질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범죄인 인도의 최고 결정권자가 사법부가 아닌 행정부의 수반인 행정장관 이라는 것 또한 큰 문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홍콩 행정장관은 친중파가 절대 다수 일 수 밖에 없는 홍콩 입법회에서 중국 공산당이 낙점한 후보 중에 한 명을 선출하는 구조이기에 중공의 지령을 받은 친중파가 멋대로 민주파 세력을 탄압하는데에 악용 될 수 있기 때문이였다.

경과

3월 31일 최초 시위 이후로 시위 참가 인원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며 참가 계층도 남녀노소, 심지어 기업인들도 참가하고 있다. 또한 시위도 홍콩섬에서 구룡반도를 포함한 홍콩 전역으로 확산되는 추세이다.

분기별 경과

2019년

2분기

2019년 6월 9일에 최초로 홍콩 경찰 추산 25만, 주최 측 추산 103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으며 거센 시위의 열기로 인해 캐리 람 행정부가 법안 처리 연기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법안의 완전한 철패를 선언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중국공산당이 법안의 신속한 처리를 요구하고 스티븐 로 경무처장 명령으로 고무탄과 최루탄이 발사되어 16세 학생이 머리에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이송되고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4] 여론에 불을 지르는 행위가 이어지자 입법회등 주요 정부 건물이 포위당하고 200만의 시위대가 운집하는 등 분위기가 고조되는 추세이다.

3분기

2019년 3분기는 7월 1일에 홍콩 입법회가 점거 당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입법회를 점거한 시위대는 본회의장에서 영국령 홍콩 국기를 휘날리는 등의 행동을 하였으며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부상자가 속출하자 결국 익일에 점거를 해제하였다. 시위가 장기화 되는 가운데 캐리 람 행정장관이 법안의 사망(Dead)를 선언하였으나 철회(Withdraw)를 선언하지 않은, 즉 말장난에 불과하기에 시위대는 시위를 이어나갔다. 한편 7월 말에는 친중파의 맞불집회와 삼합회를 동원한 대규모 백색테러[5]가 일어났으나 홍콩 경찰은 이를 외면했다. 또한 백색 테러가 외신 기자들에게도 자행된 사실이 들어나 논란이 되고 있다.

백색테러가 격화되는 와중에 8월 5일에 총파업이 감행되어 홍콩의 도시기능이 사실상 마비되었다. 공무원까지 해당 총파업에 감행하였으나 당일 오전 10시에 캐리 람 행정장관이 강경론 유지를 선언하였다. 백색테러의 주체가 홍콩이 아닌 본토출신 친 공산당 삼합회라는 추측이 나돌고 있는 가운데 8월 8일에 이례적으로 미국 국무부가 중국을 '폭력배 정권(thuggish regime)'으로 지칭하면서 강뎡하게 비난하며 충격을 주었다. 8월 12일에는 시위대가 홍콩 국제공항을 점거하면서 공항 기능이 마비되었고 시위대는 공항에 "터진 최루탄의 도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 to the city of expired tear gas)[6]"라는 문구를 부착하여 화제가 되었다. 8월 18일에 170만명 규모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으며 중국 불매운동이 시작되었다. 한편 당일 홍콩과 인접한 선전에서 17일 밤부터 18일 새벽까지 정체불명의 남성들이 국경을 넘은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되었다. 21일에 미국 존 볼턴 국무장관이 중국을 강하게 비난하였으며 당일 미국이 대만에 F-16 전투기 판매를 승인했다. 8월 23일에는 홍콩의 길 인간 띠 잇기 행사가 진행되며 시위가 소강상태에 진입하였으나 다음날부터 시작된 경찰의 최루탄 발사와 물대포, 실탄 발사등의 강경 진압으로 인해 폭력시위가 재발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26일부터 평화시위로 돌아왔다. 8월 30일에는 조슈아 웡과 아그네스 차우 등의 여러 민주화 운동가들이 체포된 가운데 다음날인 31일에 최루탄과 형광 물대포를 이용한 유혈진압이 자행되었다.

9월 2일에 홍콩 전역의 중고등학교와 대학교가 합세한 대규모 동맹휴학이 일어났으며 직장인들이 합세한 총파업이 일어났다. 9월 4일에는 시위대의 숙원중 하나이자 시위의 주 발생원인이었던 홍콩 송환법이 캐리 람 행정장관에 의해 정식적으로 철회되었다. 그러나 다음날 캐리 람 행정장관이 해당 법안 철회가 중공 지도부의 양해와 존중 하에 이뤄졌으며 송환법 철회를 제외한 나머지 4개 사안은 어느 하나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하자 범민주파 야당진영은 캐리 람의 송환법 철회를 거부했다. 또한 광복홍콩 시대혁명 구호가 최초로 등장하며 시위의 성격이 단순한 법안 반대 시위가 아닌 민주화 운동으로 격상되었다. 9월 12일 시위대에 대한 친중파의 염산 테러가 일어났다. 9월 15일 세계 민주주의의 날을 기념하여 대규모 시위가 예정되었으나 민간인권전선이 공식적으로 해당 시위의 취소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동맹휴학중인 홍콩 학생들의 주도로 수만의 시위대가 조직되었다. 9월 17일에는 캐리 람 행정장관이 시위대에 '대화'를 제의하였으나 야권과 시위대는 대화를 거부하였다. 9월 20일에는 국제엠네스티에 의해 홍콩 경찰의 인권탄압 실태를 공개하였다. 국제앰네스티에 의하면 체포된 시위대에 대하여 고문과 폭력이 자행되고 있으며 전기고문 및 성고문 협박까지 했던것으로 알려졌다. 9월 26일에는 미국 의회 외교위원회가 홍콩 인권 민주 법안을 가결 시켰다. 또한 캐리 람 행정장관이 '시민과의 대화'에 참석하여 모든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발언하였으나 연쇄살인마, 중국의 스파이 등의 모욕만을 듣고 끝내야 했다. 9월 28일에는 우산혁명 5주년을 기념하여 20만명 규모의 시위가 열렸으며 오성홍기와 중공 당기를 불사르고 시진핑과 마오쩌둥의 사진을 짓밟는 등 반중 색채가 강해졌다. 9월 29일에는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연대시위가 열렸다.

4분기

10월 3일 캐리 람 행정장관이 10월 4일부로 사실상의 계엄령인 긴급조치를 발동하고, 시위대의 복면착용을 금지하겠다고 결정했다. 결국 10월 4일에 캐리 람 행정장관과 내각이 긴급조치 발동을 발표했다. 또한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임시정부[7]의 설립을 선언하였다. 10월 5일에 공식적으로 긴급조치와 복면금지법이 실행되었으며 중국 인민해방군이 공개적으로 낮에[8] 들어오는 장면이 공개됐다. 10월 11일에 시위에 참여하던 15세 소녀가 실종된지 일주일만에 인근 바다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10월 15일에는 미국 하원 본회의에서 하원의원 435명의 만장일치로 홍콩 인권 민주주의 법, 홍콩 시위진압 금지법, 홍콩 인권 상황에 대한 중국 규탄 결의안이 가결되었다. 10월 16일에 홍콩 입법회가 소집되고 캐리 람의 시정 연설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야당 입법위원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10월 23일에는 테레사 쳉 법무장관이 홍콩 입법회에 출석하여 홍콩 범죄인 인도법안(송환법안)을 공식적으로 철회하였다. 10월 28일에는 다시 한번 인간 띠 시위가 열렸으며 10월 31일 할로윈에는 코스프레 시위가 대규모로 열렸다.

11월 1일, 중국공산당이 홍콩에 대한 전면통제 의사를 밝혔으며 다음날인 2일에 이에 분노한 시위대가 신화통신 건물을 공격해 파괴했다. 11월 8일에는 홍콩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던 홍콩과기대학 학생이 사망했다. 11월 9일에는 서울시 홍대입구역에서 연대시위가 열렸다. 다음날인 11월 10일에는 16세 여학생이 홍콩 경찰에 의한 집단 성폭행 피해를 주장하였다. 11월 11일에는 학생 수업거부, 노동자 총파업, 소상공인 철시라는 3파 투쟁이 이루어졌으나 3파 시위 와중 경찰이 시위대 1명을 향해 가슴을 조준하고 실탄을 발포했다. 11월 16일 주 홍콩 인민해방군이 '도로 청소'를 명목으로 홍콩 행정부의 동의 없이 투입되었다.[9] 11월 18일, 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에 교통 요충지인 홍콩이공대학에서 농성하는 학생들과 시위대에 대한 경찰측이 최후통첩을 날렸으나 학생들은 유서까지 작성하고 항전의 뜻을 밝혔으며 홍콩 전역의 대학들이 일제히 시위에 들어갔다. 11월 19일에 강경파인 크리스 탕이 경찰청장에 취임했다. 11월 20일에 미국 상원이 홍콩 인권 민주주의 법을 통과시켰으며 다음날에는 미국 하원이 해당 법안의 재의결해 통과시켰다. 또한 21일에는 '함께 점심 먹기' 시위가 일어났다. 11월 24일에 2019년 홍콩 구의회 선거[10]가 실시되었으며 선거 결과 범민주 388석 vs 친중파 58석으로 민주파가 압승을 거두었다. 11월 28일에는

2020년

1분기

2분기

3분기

4분기

2021년 ~ 2022년

21년 전반기

21년 후반기

22년 전반기

22년 후반기

2023년 ~ 2024년

23년 전반기

23년 후반기

24년 전반기

24년 후반기

  1. 반대도범조례수정안운동
  2. 반송중대유행
  3. 홍콩인에 의한 홍콩 통치
  4. 단 이는 총상이 아닌 진압 과정중 추락사로 인한 사망이다
  5. 명목상 공산당이 아닌 보수적 성향의 건제파가 저지른 테러이기에 백색테러라고 서술
  6. 홍콩 영어에서 'Expired'는 '터져버린'이라는 뜻이 있다
  7. 출처 및 사실여부가 불분명한 내용이며 이후 세워진 홍콩 공화국 임시정부와는 관계가 없다
  8. 홍콩 주둔 인민해방군 부대는 보통 밤에만 근무를 서며 낮에 그것도 홍콩 한복판에 등장한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다.
  9. 실제로 도로 청소와 철도 복구만 하기는 했다.
  10. 한국의 지방의원을 뽑는 선거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