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창작물)/연표

Kei08087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0월 30일 (수) 18:05 판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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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앨버 내전

Alber Civil War 1612-1618

19세기

1879년

신체제 개혁

Reformation of 1879 혹은 New Order Reform

1880년

찰스 사우스캐슬 공작 암살 사건

찰스 사우스캐슬 공작과 에드워드 세일러가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도중 폭탄 테러에 휘말려 사망한 사건.

해당 사건의 증언들 및 물적 증거들을 취합한 결과, 찰스 사우스캐슬 공작과 에드워드 세일러는 폭탄 테러 직후에는 생존해 있었으나, 휘말린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마차에서 내린 후 암살자에 의해 저격 당했다고 한다.

신체제 개혁을 주도한 찰스 사우스캐슬 공작과 에드워드 세일러의 죽음으로 인해, 신체제파는 더 이상의 급진 개혁 노선을 포기하고, 엘리자베트 사우스캐슬 공작 부인을 중심으로 온건 개혁 및 신체제 유지에 나서게 되었다.

용의자는 신체제 개혁으로 인해 몰락한 귀족 보수주의 파벌의 끄나풀로, 잔존 귀족 보수주의 파벌이 완전히 몰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세간에서 유력한 배후로 지목했던 알프레드 로워버리 백작과 로버트 국왕 등은 정작 이 사건에 개입 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었다.

1897년

학생 시위

1898년

총선

전년도의 학생 시위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치뤄진 총선.

이 총선에서 신체제파가 승리하며, 엘리자베트 사우스캐슬 공작대리를 총리로 하는 신체제파 정권이 수립되었다.

20세기

1901년

로버트 국왕 암살 미수 사건

1901년 11월, 웨스트 보더랜드와 니어 길거 지방에 현지 시찰을 나간 로버트 국왕이 갤그 분리주의자에게 저격을 당한 사건.

로버트 국왕은 아들 없이 딸 하나만을 두고 있었기에, 만약에 그가 사망하면 커크체스터 헌장에 의거하여 그의 딸 대신 가장 가까운 친척인 그의 조카 로버트 노스웨스트 알트체스터 공작에게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로버트 국왕은 알트체스터 공작을 총애 했고, 법적으로도 후계 1순위인 만큼 원래라면 큰 문제는 없어야 했으나, 커크체스터 헌장의 직계 남성 최연장자가 후계자가 아닌 경우, 계승에 있어 의회의 비준이 필요하다는 조항이 문제가 됐다. 로버트 국왕과 알트체스터 공작은 정치 성향이 각각 구체제파와 신귀족주의에 신체제파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던 것에 비해 현 내각은 신체제파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 때문에 엘리자베트 사우스캐슬이 알트체스터 공작의 왕위 계승에 거부권을 행사 할 가능성이 있었다.

특히, 신체제파의 수장 엘리자베트 사우스캐슬은 자신의 남편이 죽은 이후 그의 대리라는 명목으로 커크체스터 헌장을 우회해서 정계에 진출한 상황이었다. 로버트 국왕은 엘리자베트가 커크체스터 헌장을 폐지하고 정식으로 사우스캐슬 가문을 잡아먹고자 하는 야망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또 그 과정에서 알트체스터 공작을 밀어내고 신체제파에 다소 우호적인 자신의 딸을 여왕으로 옹립하려 한다는 음모론을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최대한 빨리 구체제파가 다시 정권을 잡도록 그들을 후원하고 다녔으며, 또 구체제파 지원의 일환으로 조카의 법적 본가인 알트체스터, 그리고 저번 총선에서 경합 끝에 신체제파에게 지역구를 내주고 만 뉴포트에서 구체제파 세력을 재정비 하기 위해, 공장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웨스트 보더랜드와 니어 길거를 방문하는 계획을 짜게 되었다.

그러나 니어 길거는 갤그 분리주의 운동에 의한 테러가 다발 하던 지역이었고, 로버트는 위험을 무릅쓰고 방문을 강행한 대가를 치르게 됐다.

저격 자체는 치명상을 입히지 못해 로버트 국왕이 일단 생존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미 나이가 60을 넘긴 늙은 왕은 상처가 잘 아물지 않으면서 건강이 악화 되기 시작했다.

이 저격 사건의 여파로, 알프레드 로워버리 백작이 내무부 장관 직을 사임, 니어 길거의 치안 총감으로 급파 되며 순간적으로 앨버셔 내의 감시가 느슨해 지는 결과를 낳았다.

1902년

의회 해산

1902년 4월, 로버트 국왕은 자신이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임을 직감한다. 그리고 이는 1903년으로 예정된 다음 총선을 보지 못하고, 현 신체제파 내각 하에서 왕위 계승이 이뤄질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로버트 국왕은 신체제파가 대 길거 온건파이고, 자신에 대한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인해 대 길거 강경책이 인기를 얻을 것이라 예상하고 의회 해산 및 1902년 조기 총선을 명령했다.

이에 신체제파가 반발하고, 앨버셔의 민심이 끓어오르는 상황 속에서, 결국 국왕의 권한으로 의회 해산령이 정식 통과, 엘리자베트 내각은 해산되고, 1902년 6월에 조기 총선이 예정된다.

국왕 서거

1902년 5월, 조 총선을 1달 앞두고 결국 로버트 국왕이 사망한다. 계승 서열 1순위인 로버트 알트체스터 공작은 임시로 커크체스터 대공위를 수여 받으며, 로버트 국왕의 장례 및 자신의 대관식을 위해 앨버셔를 떠나 커크체스터로 향한다.

좌파당 혁명

1902 Revolution of Leftist Party

국왕 서거에 행렬에 맞춰, 좌파당이 각 분파 사무소들과 센트럴 대학에서 거리로 뛰쳐나와 반 왕실 시위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으로 좌파당 혁명이 시작됨.

반 왕실 시위

더 이상의 로버트는 필요 없다! No more Roberts!

신체제 개혁 이후 20년간 쌓여온 불만들, 상황 해결에 소극적인 신체제파와 애초에 해결 하려고도 안 하는 구체제파, 그리고 그런 구체제파를 위해 왕의 권한을 남용한 로버트 국왕과 그가 강행한 조기 총선에 대항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발한다. 로버트 알트체스터 공작과 장례 행렬은 간신히 앨버셔를 빠져나와 목적지로 향할 수 있었지만, 앨버셔의 치안 병력은 사태 통제에 실패, 시위가 장기화 되기 시작한다.

니어 길거에 부임 해 있던 알프레드 로워버리 백작은 또다시 급히 앨버셔로 복귀, 시위 진압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곧 바로 수습에 나선다.

로우랜즈 사태

리버힐 참사

검은 셔츠단의 부상

레드우즈 전투

좌파당의

사우스 앨버 기동타격대의 개입

결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