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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앨버 내전
Alber Civil War 1612-1618
19세기
1879년
신체제 혁명
로우랜즈 점거
신체제 개혁
Reformation of 1879 혹은 New Order Reform
1880년
찰스 사우스캐슬 공작 암살 사건
찰스 사우스캐슬 공작과 에드워드 세일러가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도중 폭탄 테러에 휘말려 사망한 사건.
해당 사건의 증언들 및 물적 증거들을 취합한 결과, 찰스 사우스캐슬 공작과 에드워드 세일러는 폭탄 테러 직후에는 생존해 있었으나, 휘말린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마차에서 내린 후 암살자에 의해 저격 당했다고 한다.
신체제 개혁을 주도한 찰스 사우스캐슬 공작과 에드워드 세일러의 죽음으로 인해, 신체제파는 더 이상의 급진 개혁 노선을 포기하고, 엘리자베트 사우스캐슬 공작 부인을 중심으로 온건 개혁 및 신체제 유지에 나서게 되었다.
용의자는 신체제 개혁으로 인해 몰락한 귀족 보수주의 파벌의 끄나풀로, 잔존 귀족 보수주의 파벌이 완전히 몰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세간에서 유력한 배후로 지목했던 알프레드 로워버리 백작과 로버트 국왕 등은 정작 이 사건에 개입 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었다.
1897년
학생 시위
1898년
총선
전년도의 학생 시위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치뤄진 총선.
이 총선에서 신체제파가 승리하며, 신체제파 정권이 수립되었다.
20세기
1901년
좌파당 연쇄 테러
1900년 결성된 좌파당은 결성과 동시에 공격적인 지하 저항 활동을 이어 나갔다. 각 분파 별로 선호하는 접근법이 달랐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그게 그거인 상황. 특히 평등파와 변혁파는 공격적으로 관공서에 연막탄이나 오물을 뿌려 대고, 온건하다는 자유파나 형제애파의 경우에도 전단지 살포 및 금서/불법 무기 밀수와 같은 행위를 이어나가면서 앨버셔 광역 경찰청의 수배 명단에
로버트 국왕 암살 미수 사건
1901년 11월, 웨스트 보더랜드와 니어 길거 지방에 현지 시찰을 나간 로버트 국왕이 갤그 분리주의자에게 저격을 당한 사건.
로버트 국왕은 아들 없이 딸 하나만을 두고 있었기에, 만약에 그가 사망하면 커크체스터 헌장에 의거하여 그의 딸 대신 가장 가까운 친척인 그의 조카 로버트 노스웨스트 알트체스터 공작에게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로버트 국왕은 알트체스터 공작을 총애 했고, 법적으로도 후계 1순위인 만큼 원래라면 큰 문제는 없어야 했으나, 커크체스터 헌장의 직계 남성 최연장자가 후계자가 아닌 경우, 계승에 있어 의회의 비준이 필요하다는 조항이 문제가 됐다. 로버트 국왕과 알트체스터 공작은 정치 성향이 각각 구체제파와 신귀족주의에 신체제파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던 것에 비해 현 내각은 신체제파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 때문에 엘리자베트 사우스캐슬이 알트체스터 공작의 왕위 계승에 거부권을 행사 할 가능성이 있었다.
특히, 신체제파의 수장 엘리자베트 사우스캐슬은 자신의 남편이 죽은 이후 그의 대리라는 명목으로 커크체스터 헌장을 우회해서 정계에 진출한 상황이었다. 로버트 국왕은 엘리자베트가 커크체스터 헌장을 폐지하고 정식으로 사우스캐슬 가문을 잡아먹고자 하는 야망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또 그 과정에서 알트체스터 공작을 밀어내고 신체제파에 다소 우호적인 자신의 딸을 여왕으로 옹립하려 한다는 음모론을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최대한 빨리 구체제파가 다시 정권을 잡도록 그들을 후원하고 다녔으며, 또 구체제파 지원의 일환으로 조카의 법적 본가인 알트체스터, 그리고 저번 총선에서 경합 끝에 신체제파에게 지역구를 내주고 만 뉴포트에서 구체제파 세력을 재정비 하기 위해, 공장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웨스트 보더랜드와 니어 길거를 방문하는 계획을 짜게 되었다.
그러나 니어 길거는 갤그 분리주의 운동에 의한 테러가 다발 하던 지역이었고, 로버트는 위험을 무릅쓰고 방문을 강행한 대가를 치르게 됐다.
저격 자체는 치명상을 입히지 못해 로버트 국왕이 일단 생존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미 나이가 60을 넘긴 늙은 왕은 상처가 잘 아물지 않으면서 건강이 악화 되기 시작했다.
이 저격 사건의 여파로, 알프레드 로워버리 백작이 내무부 장관 직을 사임, 니어 길거의 치안 총감으로 급파 되며 순간적으로 앨버셔 내의 감시가 느슨해 지는 결과를 낳았다.
1902년
의회 해산
1902년 4월, 로버트 국왕은 자신이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임을 직감한다. 그리고 이는 1903년으로 예정된 다음 총선을 보지 못하고, 현 신체제파 내각 하에서 왕위 계승이 이뤄질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로버트 국왕은 신체제파가 대 길거 온건파이고, 자신에 대한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인해 대 길거 강경책이 인기를 얻을 것이라 예상하고 의회 해산 및 1902년 조기 총선을 명령했다.
이에 신체제파가 반발하고, 앨버셔의 민심이 끓어오르는 상황 속에서, 결국 국왕의 권한으로 의회 해산령이 정식 통과, 엘리자베트 내각은 해산되고, 1902년 6월에 조기 총선이 예정된다.
국왕 서거
1902년 5월, 조 총선을 1달 앞두고 결국 로버트 국왕이 사망한다. 계승 서열 1순위인 로버트 알트체스터 공작은 임시로 커크체스터 대공위를 수여 받으며, 로버트 국왕의 장례 및 자신의 대관식을 위해 앨버셔를 떠나 커크체스터로 향한다.
좌파당 혁명
1902 Revolution of Leftist Party
국왕 서거에 행렬에 맞춰, 좌파당이 각 분파 사무소들과 센트럴 대학에서 거리로 뛰쳐나와 반 왕실 시위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으로 좌파당 혁명이 시작되었다.
비폭력 시위
더 이상의 로버트는 필요 없다! No more Roberts!
신체제 개혁 이후 20년간 쌓여온 불만들, 상황 해결에 소극적인 신체제파와 애초에 해결 하려고도 안 하는 구체제파, 그리고 그런 구체제파를 위해 왕의 권한을 남용한 로버트 국왕과 그가 강행한 조기 총선에 대항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발한다. 로버트 알트체스터 공작과 장례 행렬은 간신히 앨버셔를 빠져나와 목적지로 향할 수 있었지만, 앨버셔의 치안 병력은 사태 통제에 실패, 시위가 장기화 되기 시작한다. 다만, 아직까지는 버넷 반즈의 통제 하에, 폭력 사태로 확대되진 않은 상황.
니어 길거에 부임 해 있던 알프레드 로워버리 백작은 또다시 급히 앨버셔로 복귀, 시위 진압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곧 바로 수습에 나선다.
로우랜즈 사태
의회 해산과 국왕 서거로 인해 앨버 왕국의 정부가 사실상 식물인간이 된 상태에서 발발한 시위는 겉잡을 수 없이 번져 갔고, 그나마 대응이 가능한 앨버셔 시청에서는 시위대가 요구하는 사안들에 대해 답할 권한이 없었다. 결국 그 누구도 총대를 매려고 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시위대의 열기는 뜨거워져 갔고, 결국 시위를 주도하던 버넷 반즈가 시위대를 로우랜즈의 곡물 저장소 앞에 집결시킨다.
이에 맞서 알프레드 백작은 앨버셔 내 치안 병력이 소집됨과 동시에 곧장 로우랜즈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앨버셔가 식량을 자급자족 하지 못하게 된 지도 수 세기, 주요 식량 수입로인 로우랜즈 도크와 앨버셔 최대 규모의 곡물 저장소인 로우랜즈 곡창이 시위대에게 점령 당한다면 자칫 혁명의 성공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당장 신체제 개혁 당시에도 찰스 사우스캐슬 공작이 로우랜즈를 점거하면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신체제파의 요구 사항들을 강요할 수 있었다. 당시 30대의 젊은 귀족이자 로우랜즈 방어에 실패했었던 알프레드 백작은 과거의 교훈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시위대와 진압군 간의 대치 상황에서, 변수가 발생한다. 변혁파가 기어코 성질을 못 참고 진압군에게 투석을 해 버린 것. 안 그래도 과거의 경험 때문에 민감해져 있던 알프레드 백작에게 그것은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로우랜즈 곡창을 점령하기 위한 행동을 개시한 것으로 받아 들여졌고, 그는 곧바로 진압군에게 무력을 동반한 시위대 제압을 명령하고 만다.
이 명령을 시작으로, 현장에서 변혁파의 돌발 행동을 제지하고 있던 버넷 반즈가 진압군의 곤봉에 맞아 의식불명, 그를 지키려고 달려든 존 제이콥슨은 아예 사망하는 등 대규모 유혈사태로 이어졌다. 비폭력주의 노선을 고집하던 좌파당의 지도자 버넷 반즈의 공백 속에서 좌파당은 에릭 덴트와 엔드류 워커의 주도로 유혈 혁명 노선으로 선회, 웨스트사이드 브릿지와 로우랜즈 북부가 무장한 시위대에게 점거 된다.
당수 대리이자 최후의 비폭력파였던 크리스토퍼 세일러는 좌파당의 당권이 에릭 덴트에게 넘어가기 전에 마지막 권한 행사로, 돌발 행동울 통해 사태를 촉발 시킨 변혁파와 그들의 리더 체사레 핀치를 좌파당에서 제명 및 추방 시킨다. 이후 의식불명 상태의 버넷 반즈를 그의 어머니 엘리자베트에게 이송해 준다. 다만 이 과정에서 그동안 버넷 반즈가 숨겨왔던 신분을 공개한 것으로 인해, 좌파당 내부의 구심점으로써의 버넷의 영향력이 실추된 것은 그의 실책.
리버힐 참사
비록 로우랜즈 사태라는 대형 사고로 이어졌지만, 알프레드 백작의 우려는 정확했다. 좌파당 내부에서도 유혈 혁명 시나리오 상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하는 목표물로 로우랜즈 곡창이었기 때문. 비록 알프레드는 로우랜즈 사태의 책임자이자, 사우스캐슬 가문의 영애에게 중상을 입힌 것 때문에 진압군 지휘 직위에서 해임되고 리버 힐 광역 경찰청 청장으로 재배치 되었지만, 그가 남긴 작계에 따라 진압군은 기어코 로우랜즈 곡창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이대로라면 초반의 기세가 무색하게 말라 죽을 위기에 처한 좌파당은 두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첫째는 계속해서 로우랜즈 곡창을 공격해, 기어코 함락 시켜 내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공격의 방향을 돌려서 아직 좌파당이 점령하지 못한 지역이자, 자유파의 분파 사무소가 있는 리버 힐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로우랜즈 곡창을 점령할 시에는 앨버셔의 곡물 공급을 손에 넣을 수 있고, 또 대규모 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는 레드우즈와 좌파당 점령지를 연결할 수 있게 되어 레드우즈 현지의 지하 노조들과 연대할 수 있지만, 여전히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리버 힐의 경우 교통의 요충지라서 좌파당이 점거해낸다면 향후 더 많은 선택지를 확보 할 수 있게 되고 또 현지의 언론사들을 장악해 여론전에서 더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나, 해당 지역에 주거하는 중산층들 중에서 자유파의 일원들을 제외한다면 그들에게 호응해 줄 지는 미지수였다.
에릭 덴트는 고심 끝에 이 중 리버 힐로 나아가는 것을 선택했고, 웨스트사이드 브릿지를 통과하는 경로는 요격이 너무 쉽다는 이유로 웨스트사이드 브릿지 대신 노스사이드를 통과해, 로열 포트를 지나 남하하는 계획을 짜게 된다.
하지만 작전 1주일 전, 좌파당에서 제명 됐던 체사레 핀치가 에릭을 그레이브 랜드에 불러낸 후 자유파를 배제하고 그가 변혁파를 바탕으로 재편해 낸 검은 셔츠단과 손잡을 것을 요구했다. 에릭은 단칼에 거부하지만, 체사레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며 헤어진다.
동시기, 사임한 알프레드 백작을 대신해서 진압군을 지휘하게 된 전임 앨버셔 시장 앨버트 4세 레드우즈 백작은 체사레의 밀고 덕에 좌파당의 향후 계획을 확보, 미리 좌파당 몰래 로워랜즈의 병력을 빼내어 리버 힐로 이동 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