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벨라루스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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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벨라루스 쿠데타
Беларускі пераварот 2014 года | 2014 Belarus Coup d'état
벨라루스 쿠데타 이후 자축하는 제38근위강습여단
일시
2014년 6월 10일
장소
벨라루스 민스크
원인
루카셴카 정부에 반발한 친유럽 군부의 권력 찬탈 의도
교전군
진압군 반란군
벨라루스 정부
벨라루스 공화국군
벨라루스 육군본부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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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제52독립특수수색대대
제11근위기계화여단
제5스페츠나츠여단
직할대
제6근위기계화여단
제557공병여단
제38근위강습여단
제103공수여단
피해
사망 9명
부상 17명
사망 2명
부상 5명
결과
쿠데타 성공
루카셴카 실각
치하노우스키 과도정부 수립
영향
민스크 조약 체결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개요

2014년 6월 10일, 벨라루스에서 친유럽 성향의 육군 사령관 알략산드르 니키틴 소장이 루카셴카 정부의 독재와 러시아와의 국가연합 결성 시도에 반발해 취임 초기부터 계획한 쿠데타. 이 쿠데타로 인해 세계는 100년 만에 다시금 전쟁의 화마에 휩싸이게 된다.

배경

이웃 국가인 우크라이나가 돈바스 전쟁으로 신음하고 있을 때, 벨라루스는 예전부터 계획해온 러시아-벨라루스 연맹국을 급진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다. 점점 강대해지는 러시아의 세력에 빠르게 올라타려 하는 루카셴카의 계획이 반영된 것이다. 이러한 계획은 벨라루스 내 반대파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루카셴카 독재 체제를 깨트릴 정도의 영향력을 확보할 수는 없었다.

2012년 4월 17일, 새롭게 재편된 벨라루스 육군 총사령관에 알략산드르 니키틴 소장이 임명된다.

전개

2014년 6월 9일 23시, 민스크 인근의 육군본부 소속 병력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데타 세력은 작전명 새벽의 별빛을 통해 철저히 위장, 민간 차량을 동원해 병력을 운송했다. 일부는 민스크 시내 주요 통신 시설 및 전력망 장악을 위해 이동했다.

2014년 6월 10일 01시 30분, 반란군은 민스크 중심부의 통신 기지를 급습해 주요 네트워크를 마비시켰다. 인터넷, 휴대전화 서비스가 차단되며 민스크는 외부와 단절되었다.

2시, 반란군이 벨라루스 M9 고속도로, 민스크 순환도로를 점령한다. 이로서 민스크가 포위되고 외부의 지원이 차단된다. 민스크 시민들은 전력 및 통신 장애로 혼란에 빠졌다. 훗날 니키틴은 이를 민간 희생 최소화라는 이유로 단기간의 충격 작전을 선택했다고 이후 발표했다.

3시, 반란군이 민스크-파사지르스키역을 점령하고 독립궁(대통령궁)으로 진격한다. 그리고 3시 30분에는 독립궁 코 앞의 РНПЦ «Мать и дитя» 종합병원을 점령하고 독립궁 경비병력과 교전한다. 이때 상황을 전달받은 제11근위기계화여단이 민스크로 출동한다.

4시, 니키틴 소장은 민스크 방송국 점령 이후 녹화된 메시지를 송출했다. 그는 "벨라루스의 새로운 미래"를 선언하며 루카셴카 정권의 부패를 비난했다. 니키틴의 메시지는 쿠데타 세력의 도덕성을 강조하며 민스크 시민들의 잠재적 지지를 얻기 위한 전략이었다.

5시, M9-P28 고속도로 교차로에서 반란군과 진압군이 대치한다. 진압군의 제11근위기계화여단은 기갑 차량을 투입했으나, 반란군의 대전차 무기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 그 과정에서 반란군은 2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진압군은 2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을 당한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반란군이 확실한 승기를 잡았다고 평가한다. 이미 반란군은 민스크 내 주요 거점을 점령한 상태였고 진압군이 시도할 수 있는 전략은 많지 않았다.

6월 10일 6시, 민스크의 독립궁이 함락되며 알략산드르 루카셴카는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반란군은 "민스크 해방 선언"을 발표했다. 니키틴은 독립궁 발코니에서 구 벨라루스 국기를 들고 시민들에게 승리를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