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축정변 乙丑政變 Eulchuk political upheava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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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을 지키는 어영청 병사들과 그에 맞서 싸우는 진무대 소속 병사들의 전투를 그린 기록화 | |||
시기 | 1865년 4월 26일 ~ 1965년 5월 12일 | ||
장소 | 조선의 경기, 전라지역 | ||
원인 |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증건 발표 | ||
교전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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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 ![]() 훈련도감 2,500명 |
정예군 5,000명 한성포위군 3,000명 조선혁명군 1,500명 진무대 500명 의군 20,000명 호남연합진 4,200명 지화군 3,800명 농민연합군 12,000명 총합: 25,000명 | |
지휘관 | 흥선대원군 이최응 이재선 이현익 김좌근 |
김이영 이시정 정세웅 박흥돌 서광렬 | |
결과 | 반란세력의 승리 대한제국의 건국 | ||
영향 | 흥선대원군의 실각, 조선의 멸망 |
개요
1865년(고종 2년) 4월 26일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계획을 발표하자 이에 반발한 개혁세력과 농민들을 중심으로 조선 정부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사건이다. 이 전쟁을 통해 472년이라는 오랜시간동안 존속했던 조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배경
1800년대는 서구 열강에 의한 아시아의 개항과 식민지화가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유럽과 미국은 아시아 각국을 개방시키고 이권을 선점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는 조선에도 점차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의 몰락과, 쿠로후네 사건 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며 근대 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던 일본의 모습을 보며, 조선의 지식인들과 개화적 실무 관료들 일부는 쇄국 정책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강경한 쇄국 정책에 반발하며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865년 4월 26일, 흥선대원군이 70만이라는 막대한 인력을 동원해 경복궁을 재건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민중과 개혁파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에 반발한 개혁 세력과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봉기하였다.
전개
평가
매체에서
여담
- ↑ 주요교전은 대부분 한성 내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숫자만 많지 사실상 한게 거의 없다. 물론 훈련수준이 처참해서 애초에 대규모 전투에 참여했더라도 잘싸웠을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