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역사
정묘호란-병자호란
임진왜란에서의 충격적인 피해로 인해 조정에서는 군대의 채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하였고, 1599년 도원수 권율과 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지휘 아래 조선군의 개혁과 훈련을 시작하였다. 조선군의 대대적인 훈련으로 군대의 질이 임진왜란 전과 비교하여 눈에 띄게 개선되었다. 그러한 개혁은 1627년 빛을 발하게 된다.
1627년 2월 23일, 이괄의 난을 명분으로 청나라가 조선으로 쳐들어 오며 정묘호란이 일어난다. 청나라는 조선을 그저 변방의 나라라고 생각하며 안일하게 전투를 치뤘으나, 임진왜란 이후 군대의 개혁을 단행하여 성공한 상태였다.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와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조선과의 전투에 시간을 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예상 외로 강력한 조선군의 위력 앞에 청나라는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가게 되며 정묘호란은 조선의 승리로 끝난다.
1637년 1월 3일, 10년 만에 청나라가 다시 조선으로 쳐들어오며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10년 전 패배 이후 이를 갈던 청나라는 조선을 복속하고 후방을 안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을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10년 전 정묘호란을 일으킨 것이 청나라에게 패착이 된다. 조정은 한 번 쳐들어온 상대가 다시 오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으로 국경에 대한 요새화와 함께 엄청난 방어 병력을 배치한다. 전쟁에 착실히 준비한 결과 조선군은 또 한 번 청군을 몰아내고 간도 지역을 점령한다. 청나라는 명나라와의 전쟁에 집중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조선에게 간도 지역을 내어주고 만다. 그렇게 혜종은 조선 역사 두 번째 정복군주가 된다.
조선이 계속해서 청나라를 견제하지만, 명나라는 결국 청나라에게 멸망한다. 조선은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청나라를 천자국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그동안 천자국과의 조공관계는 폐기하기로 한다. 조선은 두 번의 전쟁을 통해 청나라를 몰아냈기에 더 이상 조공을 바칠 이유가 없다고 본 것이다.
개화기: 19세기 초반
순조는 조선의 해역에 계속해서 출몰하는 이양선들을 보며 서양 문물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832년 충청도 고대도에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의 상선 로드 암허스트호(Lord Amherst號)가 정박한다. 영국의 상선은 조선에 정식으로 통상을 요구했으며, 이러한 요구에 순조는 더이상의 쇄국은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통상 요구를 받아들인다.
1849년 7월 28일, 문조가 즉위하며 기존의 서구화 정책을 더 급진적으로 펼치기 시작한다. 문조는 근대화를 펼치던 군대를 서구 국가들과 대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를 원했고 선대부터 강력한 화력을 강조하던 군대를 신식 화포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해군 역시 미국으로부터 함선을 매입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함선을 건조한다.
1866년(문조 17년) 서구화와 함께 칭제의 필요성을 강조한 조정의 설득에 문조는 마침내 1866년 10월 26일 건양(建陽)을 연호로 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문조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칭제건원을 한다. 그와 함께 의원내각제를 도입하여 참의회와 민의회를 두어 민간에 권력을 일부 이양한다.
팽창기: 19세기 후반
1871년(문조 22년, 건양 6년) 신미불요에서 승리하며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를 넘겨 받고 대한령 대월로 칭한다. 이 전쟁의 결과로 서구 세계는 충격에 빠진다. 동방의 소국에게 프랑스가 패배하며 식민지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는 보불전쟁 패배의 여파로 프랑스 제국이 무너지고 프랑스 제3공화국이 수립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프랑스의 전력은 상당히 약화된 수준이었고, 한국은 이 점을 노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방에게 패배한 전쟁의 결과로 프랑스는 엄청난 굴욕을 겪었고, 이러한 기류는 20세기까지 이어져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1875년(문조 26년, 건양 10년) 5월 30일 문조가 승하한다. 다음 황제가 될 예정이었던 철효세자가 문조와 비슷한 시기에 승하하며 그의 아들인 경의세자 이권(26세)이 6월 4일 광명(光明)을 연호로 하여 황제로 즉위한다.
1894년(광명 20년) 7월 25일 대한제국이 청나라를 침략하며 한청전쟁이 발발한다. 한국과 청 사이에는 약 250년 전 조선으로 넘어간 간도 지역을 두고 산발적인 교전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대한제국군 1명이 청군이 쏜 총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며 한국이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한다. 전쟁은 급진적인 서구화 정책을 추진한 대한제국의 압도적 원맨쇼였으며, 청군은 한국군에게 쉴새없이 털려버린다. 그렇게 한국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성경 조약을 체결하여 요하강, 송화강 이남(남만주), 그리고 대만을 할양받는다. 추가로 청나라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통킹 지역에서 가지고 있던 영향력을 포기하며, 사실상 통킹 지역을 한국에 넘기게 된다.
1898년(광명 24년) 4월 21일 미서전쟁이 발발하자 대한제국은 미국편으로 참전하여 필리핀을 포함한 스페인령 동인도를 점령하고 할양받았다. 이때 대한제국은 남중국해 연안 일대를 대부분 점령했다.
혼란기: 20세기 초반
20세기에 들어서며 세계는 혼란에 빠진다. 열강들 사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면서 긴장도가 급상승한다. 그러는 사이 한국은 일본의 식민화를 차근차근 진행해 나가고 있었다.
1904년(광명 30년) 2월 8일 한러전쟁이 발발한다. 일본에 대한 이권을 두고 발생한 두 국가의 신경전이 전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일단 한국은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던 비사항을 점령해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괴멸한다. 러시아는 태평양 함대의 괴멸로 유럽에서 함대를 끌고 왔어야 했는데, 영국의 방해로 흑해 함대는 사용 불가했다. 결국 발트 함대를 투입하게 되었는데, 이 또한 영국이 보유중인 수에즈 운하 사용이 불가해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와야 했다. 그렇게 장거리 운항을 하면 정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영국이 항구에 접근한 러시아 함대의 무장해제를 지시하며 정비도 불가했다. 이미 비사항을 잃은 러시아 해군은 대한해협을 몰래 통과해 블라디보스토크(해성)에서 정비를 하려한다.
1910년(광명 36년) 8월 29일 한국과 일본 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은 한국에 복속되었다. 외세의 침공에도 본토를 지켜낸 일본이라는 나라가 지도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는 일본의 근대화가 한국보다 늦었던 점과 지리멸렬한 내부 정치 상황이 큰 영향을 주었다. 일본 내부 친한파의 사보타주도 한 몫했다. 또한 한러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여 동아시아에서의 경쟁자가 사라져 한국이 일본을 차지할 수 있었다.
1912년(광명 38년) 10월 14일 광명황제 이권이 승하한다. 10월 19일 대권세자 이황(31세)이 강평(康平)을 연호로 하여 황제로 즉위한다.
1914년(강평 3년) 7월 28일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한 사라예보 사건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며 영-프-러 협상국이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하고 독일이 동맹국인 오스트리아 편에 참전하며 대전쟁이 발생한다.
1916년(강평 5년) 9월 18일 1차 대전 진행중에 대한과 만주 봉천군벌 간의 한봉전쟁이 발생한다. 중국은 신해혁명, 호국전쟁, 호법전쟁을 거치며 갈갈이 찢어졌다. 그 중에 만주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군벌은 장학량의 봉천군벌이다. 그런데 봉천군벌이 대한이 장악한 남만주 지역을 차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첩보를 통해 입수했으며,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만주 전 지역을 장악하고 북방을 안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봉천군벌을 공격한다. 그 결과 봉천군벌은 분쇄되었고, 중국과의 국경은 만리장성을 기준으로 새로 그어졌다.
1917년(강평 6년) 11월 7일 러시아에서 적군과 백군 간의 내전이 발생했다. 1918년 3월 15일 대한제국은 러시아 내전에 직접 개입하여 외흥안령산맥 남쪽 외만주를 장악하고자 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동맹국과 협상국의 사실상 무승부로 종결되면서 세계는 소강상태에 들어간다. 그리고 대한제국은 독일이 점유하던 태평양 제도를 할양받았다.
1941년(강평 30년) 5월 19일 대한제국이 점유하고 있던 대월 식민지의 하노이에서 대규모 독립봉기가 발생한다. 봉기 진압에는 성공했지만 대월 독립군을 상대로 작지 않은 피해를 입으며 조정에서는 식민지들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그 결과 의회에서는 대한제국의 식민지들을 본토로 아우르는 대규모 연방을 결성하기로 결정한다.
1945년(강평 34년) 8월 15일 대한제국은 대한제국 황제를 국가원수로 하는 연방군주국가로 전환하고, 그 국명을 대한합중국으로 정한다. 그리고 이 날을 연방절로 지정하여 국가 공휴일로 만든다.
냉전기: 20세기 후반
20세기 후반, 세계는 미국과 한국이 주도하는 제1세계와 소련과 공산중국이 이끄는 제2세계로 나뉘어 치열한 냉전의 시대를 맞이했다. 두 진영은 직접적인 전쟁을 피하면서도 정치적·군사적·경제적으로 서로를 견제했고, 각국의 정세는 언제 터질지 모를 위기 속에서 흔들렸다. 대한합중국 역시 이러한 국제 질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끊임없이 내부 체제를 정비하고 외교적 전략을 조정해 나갔다.
대전쟁 이후 찾아온 평화 속에서도, 대한합중국이 지배하던 여러 지역에서는 독립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특히 대월에서의 독립운동이 거세지자, 한국 정부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대신 점진적인 자치 확대 정책을 선택했다. 그러나 대한합중국은 대월이 완전히 대한합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모색해야 했다. 이에 따라 대한합중국 내부에서 이미 성공적으로 활용했던 범민족주의 이념을 대월에도 적용하기 시작했다. 우선 대월 식민지를 자치령으로 만든다. 이후 1954년(강평 43년) 7월 21일, 한국은 대월 연방을 독립시킨다.
범민족주의는 대한합중국 내부에서 한민족을 중심으로 다양한 민족을 하나로 묶어 통합하는 데 사용되었던 이념이었다. 한국은 이를 응용하여 대월에서도 대월 내의 민족들이 같은 역사적·문화적 뿌리를 공유하며, 하나의 문명권에 속한다는 논리를 강화했다. 대월 내 친한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한국과의 문화·경제적 교류를 확대하며, 한국 내에서 대월 출신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함으로써 대월이 독립 이후에도 대한합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유도했다.
1956년(강평 45년) 5월 21일, 대한합중국을 오랫동안 통치해 온 강평황제(이황)가 승하했다. 그의 통치는 대한합중국이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대월 독립 이후에도 대한합중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전략을 확립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의 뒤를 이을 연석세자 이경은 이미 50세가 넘어 있었고, 노환이 심각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강평황제는 생전에 연석세자의 아들인 후영세자 이정을 세자로 책봉하였으며, 5월 26일 후영세자가 즉위하였다. 그는 연호를 선국(善國)으로 정하고, 대한합중국의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의회와 협력해 국내 개혁과 외교적 조정 의견을 개진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대한합중국은 본격적인 경제성장을 시작했다. 1965년 새롭게 취임한 박정희 총리는 경제 현대화를 핵심 정책으로 삼았으며, 특히 1970년대부터 중공업과 첨단기술 산업 육성을 본격화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국영기업과 민간기업의 협력을 장려하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였고, 연방 내 경제 격차 해소를 위해 대대적인 인프라 투자도 단행했다.
1973년 오일쇼크 당시 대한합중국은 자원 확보를 위해 중동과의 경제 협력을 강화했다. 대한합중국 기업들은 건설·에너지 사업에서 막대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를 통해 세계 경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1980년대에는 반도체, 전자 산업, 항공우주 기술 등을 집중 육성하면서 산업 고도화를 추진하였으며, 이에 따라 대한합중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 대국으로 자리 잡았다.
1980년대 후반, 대한합중국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통해 경제적 자유화를 가속화했으며, 이를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더욱 경쟁력을 갖춘 경제 대국으로 자리 잡았다.
1991년(선국 36년) 12월 26일, 소련이 붕괴하면서 21세기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었던 냉전이 갑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소련은 내부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해체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대한합중국은 이 변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새롭게 탄생한 국가들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데 집중했다. 특히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이 독립한 후 내부 민족 갈등으로 인해 분열될 조짐을 보이자, 한국은 연방 유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민족 통합과 국가 운영의 노하우를 제공하며 투르키스탄 정부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이는 훗날 한국과 투르키스탄 사이의 전략적 동맹의 초석이 되었다.
한국은 냉전의 종식 이후 유라시아에서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중부유럽에서는 독일이 통일되었고, 서방 국가들이 민주화된 동유럽 국가들과의 협력을 확대해 나가는 가운데, 대한합중국은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며 국제 질서에서의 입지를 강화해 나갔다.
냉전이 끝나면서, 유럽 열강의 마지막 식민지들도 하나둘씩 반환될 시기가 다가왔다. 영국은 홍콩을,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반환할 예정이었으며, 국제사회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반환 협상의 주요 대상국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러한 흐름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한국은 여전히 자유중국을 대륙의 정통 정부로 인정하고 있었으며, 공산중국이 홍콩과 마카오를 접수하는 것은 아시아의 정치적 균형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판단했다. [1]
이에 따라 한국은 영국과 포르투갈을 상대로 외교적 압박과 경제적 유인책을 활용하며 반환 협상에 개입하였다. 한국은 홍콩과 마카오가 국제적 금융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으며, 반환 이후에도 독립적인 행정 시스템을 유지해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또한, 영국과 포르투갈에는 경제 협력 강화를 제안하며, 공산중국이 아닌 자유중국에게 반환하는 것이 더 안정적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러한 노력 끝에 한국은 홍콩과 마카오 반환 협상에서 자유중국의 개입을 인정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자유중국이 실질적으로 홍콩과 마카오를 반환받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의 확실한 지지가 필요했다.
한편, 대한합중국은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홍콩과 마카오 문제를 국제적으로 부각시켰다. 미국은 공산중국의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자유중국이 홍콩과 마카오를 반환받는 것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영국과 포르투갈을 설득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결국 1997년 7월 1일, 홍콩이 자유중국으로 반환되었으며, 1999년 12월 20일 마카오 또한 자유중국으로 이양되었다. 두 도시는 특별행정구로 지정되었으며, 기존의 법률과 경제 체제를 유지하는 일국양제(一國兩制) 모델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이는 공산중국이 아닌 자유중국 주도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대한합중국과 자유중국의 긴밀한 협력이 만들어낸 외교적 성과였다.
열전기: 21세기 초반
2002년(선국 47년) 8월 10일 연방절을 닷새 앞두고, 선국황제 이정이 심장마비로 인해 승하한다. 선국황제의 장례를 마치면 연방절과 날짜가 겹치게 되어 새로운 황제의 즉위식과 연방절 기념행사를 동시에 진행하게 되었다. 그렇게 8월 15일 우완세자 이선이 현혜(賢惠)를 연호로 하여 황제로 즉위한다.
2011년(현혜 10년) 3월 11일 오우주 궁성도 선태시 동쪽 130km 해상에서 규모 9.1의 초대형 지진이 발생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동일본 지역에서 많은 건물이 무너지고 쓰나미 때문에 해안이 초토화된다. 복도 원자력 발전소 위기까지 발생하면서 오우주와 인근 지역에서 행정력 공백이 발생한다. 일본인들마저도 겪은 적 없는 대지진으로 한국은 말 그대로 혼란에 빠진다. 일본인들이 그동안 지진을 겪으며 쌓아온 노하우도 이 대지진에서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때마침 궁성도 해역에서 작전 중이던 한국 해군 일부가 쓰나미로 인해 좌초되면서 한국 해군에 일부 공백이 생긴다. 그동안 태평양의 지배권을 두고 공산중국은 진출하려 하고 한국은 막으려 하였다. 그런데 그 틈을 타서 공산중국의 잠수함이 태평양으로 진입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대궁도의 레이더가 이를 탐지했으나, 해군 대부분이 궁성도 해역에 가 있었기에 대처할 수 없었다. 결국, 경고 무전만을 보낸 채 중공해군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공산중국과 러시아가 손을 잡으면서 신냉전이 발생한다. 러시아는 구 소련 국가 복속을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2014년(현혜 13년) 10월 1일 공산중국은 대만과 하이난의 자유중국을 공격해 중화 통일을 완수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3차 국공내전 발생 이전, 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아시아에서도 전쟁이 발생할 위험이 커짐에 따라 한국은 자유중국을 PRTO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기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중국이 전쟁을 일으킨다. 공산중국은 자신의 힘을 과대평가했기에 나온 결과였다.
공산중국의 계획은 만주에서 러시아와 함께 협공하는 것이다. 속전속결로 한국군을 처리하고 반도로 몰아넣은 다음 만주를 분할할 계획이었다. 러시아가 공격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한국은 북만주에서의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초기에 러시아군에게 패퇴한다. 거기에 공산중국의 지원을 받은 만주의 독립군, 만주인민공화국이 반란을 일으키며 후방이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중국 방면 전선은 안정적이었다. 때때로 인해전술을 펼치며 공격해오는 중공군이었지만, 국경인 만리장성을 요새화한 것에 더불어 어마어마한 화력을 갖춘 한국군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전쟁 막바지, 한국은 공산중국의 인해전술을 더는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 개발 중이던 원자력을 에너지로 하는 무기의 개발 속도를 높인다. 그렇게 한국은 마지막 실험을 공산중국의 붕괴를 노리고 중국 대륙에 시행하기로 한다. 결국, 2020년 7월 12일과 7월 15일 한국이 개발한 원자력 무기가 각각 시안과 우한에 투하된다.
2020년(현혜 19년) 7월 21일 공산중국이 항복한다. 하지만 중국이 붕괴하며 각지의 군벌이 들끓게 된다. 다시금 벌어진 중국의 군벌시대에 한국은 점령한 하북, 하남, 산서, 산동에 북양 자치정부를 세우고 중국 상황의 안정화를 기다린다. 이런 선택을 한 이유는 이미 공산중국과 러시아와의 전쟁에 많은 피를 흘려 더는 개입이 힘들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명박 전시내각이 위법 논란에 휩쌓인 가운데, 2020년 9월 23일 총선이 개최된다. 이미 여러 여론조사에서 정의민주당이 크게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개표 결과, 정의민주당이 원내 1당이 되는 것이 확정된다. 그러나 정의민주당이 과반은 아니었기에 연정이 필수가 된다. 그리하여 정의민주당과 동시에 크게 힘을 얻은 노동당과 녹색당이 연정에 참여한다. 그 연정을 장미나무 연정으로 칭한다.
2020년 12월 20일 이미 내각은 정의민주당이 완전히 장악한 상태로 총리 지명 선거가 치뤄진다. 결국, 총리 지명 선거에서 문재인이 새로운 총리로 지명되며 정의민주당이 15년 만에 내각을 되찾는다. 이명박 전시내각으로 대한연방당의 민심이 나락으로 간 틈에 좌파가 정권을 잡은 것이다.
미국에서 미국우선주의자이자 고립주의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다시금 대통령이 되며 한미 간 무역 분쟁이 발생하며 긴장이 고조된다. 무역분쟁으로 서로의 철강 관세가 최대 35%까지 증가했다. 여러 개헌안을 내며 종신집권을 노리던 트럼프의 행보로 제2의 냉전이 발생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발생할 정도.
2025년(현혜 24년) 중화합중국(양호군벌)의 중국치공당을 물리친 중화민국 정부가 대륙을 안정화한다. 한국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중화민국과 회담을 시작한다. 북양 자치정부를 유지할 명분이 없던 한국이 북양 자치정부를 해체하고 중국에 반환하기로 한다.
2025년 총리 지명 선거에서 이재명이 총리로 지명되며, 사실상 문재인 내각이 유임된다. 문재인과 정의민주당의 경제 정책 실패로 인해 총선에서 많은 의석을 잃었지만, 노동당과의 연립 내각을 통해 가까스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민주당의 하킴 제프리스 하원 원내대표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미국 사회는 전쟁의 피로감에 지쳐 있었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트럼프에 대한 반감도 커져 있었다. 더 이상의 불필요한 갈등에 지친 국민들은 차기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등을 돌린다. 결국 트럼프는 공화당 경선에서 탈락하고, 공화당은 본선에서도 패배한다. 이에 따라 한미 무역 분쟁은 짧은 해프닝으로 마무리된다.
문재인 내각에 이어 이재명 내각 역시 경제 정책에 실패하면서, 국민들의 정의민주당에 대한 기대는 거의 사라지게 된다. 여론조사에서는 대한연방당이 다시 1위로 올라서며 화려하게 부활한다. 2030년 9월 18일에 실시된 총선에서 정의민주당은 심판대에 오른다. 그 결과, 대한연방당이 45%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원내 제1당에 오른다. 정의민주당은 약 20%의 득표율에 그치며, 전 정권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과반을 확보하지 못한 대한연방당은 보수 성향 정당인 대한국민연합과 연정을 구성하고, 이 연립정부는 '태극 연정'이라 불린다.
2030년 총리 지명 선거에서 안인현이 총리로 지명된다. 안인현은 대한연방당 내 개혁파 수장으로 대한연방당의 화려한 부활을 주도한 인물이다. 당내 쇠신과 개혁을 공언하여 젊은 세대와 중도층의 표심을 잡을 수 있었다.
평화기: 21세기 중반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한 이후 서방의 미합중국과 동방의 대한합중국을 중심으로 유래가 없을 평화기를 맞는다. 중화인민공화국과 러시아 연방이 전쟁에서 패배함에 따라 제2세계 국가가 완전히 절멸하여 미국과 한국, 두 열강의 적이 완전히 사라졌으며 두 열강은 서로 협력하며 공존을 선택했기에 새로운 세계 질서 아래 전세계가 뭉치게 되었다.
- ↑ 해외 국가들이 자유중국과 단교하고 공산중국과 수교하는 동안 만주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한 한국은 진영논리에 따라 자유중국이랑 수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