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와 동지들


로마와 동지들(Roma et socii, Ῥώμη καὶ ἑταῖροί)은 제이위키의 창작자 블파가 제작한 세계관으로, 합작 세계관이었던 해뜨는곳의 십자가가 해체된 이후 블파가 창작한 국가들을 이 세계관으로 이동하였고, 더불어 일부 국가를 신설하여 개설하였다.

"로마와 동지들"은, 현대까지 살아남은 로마 제국이라는 If로 구상되었다. 전 유럽의 유일한 보편 제국, 세계관은 재에 가려진 옛 영광을 파내고 재조명한다. 로마가 시련을 극복했다면, 역사가 바뀔 수 있다면? 로마는 어떻게 해야 조상들과 같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이 세계관에서는 이러한 지점을 재조명하고 있다.

특징

로마 제국

로마와 동지들에서 동로마 제국은 13세기까지 현실 역사와 동일하다. 4차 십자군으로 인해 중앙 정부가 붕괴되면서 수도권과 유럽 영토는 라틴 제국과 베네치아를 위시한 십자군 국가들(프랑코크라티아)이 장악했고 이피로스와 트라페준타, 그리고 니케아에서 라틴인들과 가톨릭 십자군을 배격하며 중앙정부 회복을 위해 나선 지방정권들이 난립했다. 트라페준타와 이피로스는 각각 니케아 제국에 한 차례씩 패배하며 수도 수복의 경쟁에서 탈락했고, 국운이 쇠해 가는 라틴 제국의 우편에서 로마인들의 길이요 빛이 될 니케아가 부상하고 있었다..

(※ 여기서부터는 가상역사와 첨가되어 있습니다.)
1291년, 32세의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가 친라스카리스파 계열 소아시아 권세귀족이었던 콘스탄티노스 11세 암피클리토스에 의해 폐위됐다. 그는 소아시아를 순방하고 요충지 방어를 위한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님페온에 들렸다가 동생 콘스탄티노스와 콘스탄티노스 스트라테고풀로스가 자신을 폐위하려는 음모를 세우고 있단 걸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를 위시한 음모에 결탁한 소아시아의 유력 귀족 콘스탄티노스 암피클리토스에게 체포되었다. 찬탈로 시작한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요안니스 4세가 당했듯이, 안드로니코스 2세 역시 시력을 잃는 형벌을 당하고 유폐된 것을 마지막으로 찬탈로 끝났다. 1282년 무리한 원정과 교회통합 건으로 중앙 교회의 반발을 산 미하일 8세가 허망하게 전쟁터에서 병사하고 수도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조차 거부당한 지 5년만의 일이었다.

새로 등극한 암피클리토스 왕조는 바타치스-라스카리스 왕조의 신흥 지지자였다. 1225년의 요안니스 3세 재위기에 처음 등장했는데 당시 가주는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부인 테오도로스 암피클리토스였다. 그는 니케아 제국의 국부 테오도로스 1세의 사위로 황제에 등극한 요안니스 3세와 동년배로, 룸과 창칼을 맞대는 라스카리스 왕조의 본향이나 다름없는 소아시아 변경에서 룸의 팽창을 저지하는 실적을 세우며 고공행진했고, 황제와 전장에서 친밀감을 다졌다. 메가스 헤테리아르키스(Megas Hetairearches)를 역임했던 테오도로스는 1233년을 지나 1235년 즈음에 들어 쿠로팔라티스(Kouropalates), 메가스 스트라토페다르키스(Megas Stratopedarches) 등의 고위 관직까지 올라 황제를 보좌하여 제국군을 이끌면서, 암피클리토스를 고위 귀족가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부친인 요안니스 암피클리토스는 아버지 테오도로스가 요안니스 3세의 신임받는 지휘관이었던 관계로 일찍이 요안니스 3세의 아들 테오도로스 2세의 친우로 군사 부분 말고도 개인사에 있어 돈독한 우정을 지녔다. 요안니스는 정치적인 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때때로 수반되는 극심한 발작 증세로 인해 한계에 부딪혔던 황제가 추진하는 정책의 실무를 도맡아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1258년 테오도로스 2세가 발작으로 요절하고, 어린 외아들 요안니스 4세가 즉위하자 요안니스 암피클리토스는 미하일 8세를 위시한 팔레올로고스파들에 밀려 님페온 외곽으로 물러났고, 미하일 8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며 단독 황제로 등극한 뒤에도 암피클리토스 가문은 지방귀족 무관으로써 소아시아의 방어에만 집중할 뿐 한동안 정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하지만 1282년 미하일 8세가 원정 도중 전장에서 병사하자, 암피클리토스 가문은 안드로니코스 2세 시대 중앙정계로 다시 불러들여졌다. 부황의 실책을 수습하기 위해 정책 방향을 틀고 대사면을 선포한 안드로니코스 정부의 정책 기조에 발맞춰, 그 선두에는 미하일 황제를 파문한 아르세니오스파와 친라스카리스의 암피클리토스 가문이 있었다.

1285년 요안니스가 사망한 뒤 가주가 된 콘스탄티노스 암피클리토스는 이미 1282년에서부터 안드로니코스 2세의 휘하에서 여러 정책 실무에 다시 참여하기 시작했다. 우연하게도 안드로니코스 2세와 사실상 또래였던 콘스탄티노스는 그의 충실한 2인자로 활동하면서 제국 내에서의 입지를 넓혔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요안니스와 달리 1286년부터 가문을 위한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용병과 해군 병력 다수를 해체시킨 안드로니코스 2세의 통치에 반발하면서, 점차 안드로니코스에 대한 정치적 명분을 도모하기 시작한 콘스탄티노스는 1287년 새해에 이르러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여전히 소아시아의 최대 지주이자 가장 많은 사병을 가느리는 암피클리토스 가문에서, 젊은 가주는 황가에 충성하기보다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붕괴를 선택했다.

1291년 10월,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안드로니코스 2세가 수도를 나와 소아시아를 순방하기로 한 것이다. 마침 콘스탄티노스는 황제의 동생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가 제위를 노리고 있으며, 콘스탄티노스 스트라테고풀로스 장군 등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터였다. 암피클리토스는 콘스탄티노스에게 접근해 제위의 접수를 도와줄 테니 황제가 자신을 방문했을 때 그 장소에서 대비하라고 일렀고, 황제의 동생은 그 말을 철썩같이 믿기로 했다.

황제는 재정을 비롯한 내정에 치중하던 10여년간의 치세를 뒤로 하고 지지 기반을 상실한 소아시아 각 요충지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1291년 11월 둘째 주의 수요일에 이르러 황제는 암피클리토스 가문의 근거지이자 니케아 제국의 옛 도읍 님페온에 방문했다. 암피클리토스는 그를 열성으로 영접하면서 동시에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에게 때가 다가왔음을 일렀고, 동시에 황제에게도 미하일 선제의 피와 같은 배를 나눈 친동생이 스트라테고풀로스라는 성을 가진 장군과 찬탈을 준비하고 있다는 유력한 정보를 귀띔했다. 황제는 놀라 격노했고,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도 그 만큼 광기에 휩싸였다. 직후 양자는 차분히 서로 간의 대치에 들어갔고, 감시는 암피클리토스 자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한가해졌다. 그들 사이에서 엄청난 줄타기와 첩보를 벌이던 암피클리토스에게 마침내 기회가 다가왔다. 물론 그는 그 와중에도 양측에서 상대에 대한 첩보를 공유하는 '충성스런 신하'역을 주저하지 않았다.

며칠 뒤 확신에 찬 안드로니코스 2세는 느지막한 달빛에 찬 어둠이 올라와서야 자기 병력을 끌고 콘스탄티노스를 찾아갔다. 콘스탄티노스는 자신이 그런 일을 벌이겠느냐며 형에게 계속 발뺌했지만 ㅡ이미 의심과 분노로 가득 찬ㅡ 황제는 동생의 말을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 하지 않았고 그를 그 자리에서 수도로 끌고 가려 했다. 결국 위기감에 빠진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는 계획을 실행하기로 결심하고 장군을 불러 황제와 대치를 시작했다. 콘스탄티노스 스트라테고풀로스 장군은 자신이 처음부터 계획한 만큼의 병력을 끌고 왔는데 단지 심리작전이었기에 황제 자신이 두려움에 빠질 수 있을 만큼이었고ㅡ그다지 많은 병력은 아니었으나ㅡ 그래도 족히 200명은 되었다.

콘스탄티노스 암피클리토스는 그때 자신이 4년이나 준비해온 음모를 실행하기에 적기를 맞았다. 소아시아에 남은 몇 없는 모든 테마의 스트라티고스이며, 니케아와 님페온과 니코미디아의 모든 귀족과 민중이 그를 마지막 남은 용맹한 로마인 장군이요 적법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으되 감옥에서 시들어 가는 불쌍한 라스카리스 폐주의 보호자로 여겼다. 3대째 이 지역의 텃밭을 맡고 있는 그로써는 이곳에 제발로 찾아온 팔레올로고스가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테마군과 가문 사병들을 모두 부른 암피클리토스는 한방에 어리둥절한 바보가 된 황제와 그의 동생과 그 옆의 장군을 체포하고 안드로니코스에게 폐위를 고했다.

암피클리토스는 안드로니코스 황제와 콘스탄티노스 형제, 황제의 동생과 동명이인의 장군을 체포하고 그들을 데리고 수도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군대가 수도 근처에 다가간 순간에, 그러니까 1291년 11월의 셋째 주 네번째 날에, 암피클리토스는 즉시 ㅡ비록 태어나서 본 적은 없었지만, 그 불쌍한 요안니스 전 황제가 유폐생활을 하고 있는ㅡ마르마라의 다키비제 요새에 들러 그를 개인적으로 대면했다. 요점은 암피클리토스가 라스카리스에게 인정받았다는 점이다. 그는 먼저 자기 신분과 자기 조부와 부친이 가진 선대 라스카리스 황제들과의 소중한 관계 ㅡ그것은 아마도 콘스탄티노스에게 그냥 정통성에 불과했지만ㅡ 를 설명했다. 요안니스는 그 팔레올로고스 황제(의 아들)이 폐위됐다는 사실에는 그리 흥미를 가지지 않았고, 단지 자신에 대한 자비의 의사를 표명한 몇살 연하의 암피클리토스에게 자유를 청원하는 것 정도였다. 암피클리토스는 즉시 동의했고 요안니스를 마그니시아 근처 시필로스 산의 한적한 수도원에 데려다 주라고 명했다. 요안니스는 그 조치에 감사를 표하며 그에게 할 일을 하라는 짧은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이제 남은 단 한 가지 문제는 수도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암피클리토스는 그 점에 대해 소아시아에서 온 난민들과 아르세니오스파, 교회통합 반대파 수도사들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암피클리토스의 주요한 심복이자 수도사들의 우두머리에는 학자 요안니스 필로스가 있었고 그는 그와 생각을 공유하는 귀족, 사제, 주교, 수사, 백성을 가리지 않고 협력자들을 점점 늘려나간 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소아시아 난민들을 조직화해서 암피클리토스의 수도 진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두려움에 떨며 그 자리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자신이 믿었던 동년배의 반란자에게 체포되었으며, 요안니스 4세가 그러했듯이 묶여 두 눈의 시력을 영구히 잃는 형벌을 당한 뒤 행방불명되었다.(어떤 사가는 연대기에 안드로니코스가 수도 인근의 바다에 수장되었다고 썼으나 당시 콘스탄티노스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이집트

이집트가 로마 제국에 복속된 것은 현실과 동일하나, 방계인 파벨라노스 가문이 왕조로써 군림하던 시절 쌓은 부를 통해 여전히 이집트에서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보존할 수 있었고, 7세기에 지속된 정치적 혼란과 이슬람 세력의 발흥으로 동로마 제국이 이집트 지역에 대한 통치력을 거의 잃자 파벨라노스 가문이 로마와 함께 이슬람 세력을 방어해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의 통치권이 그리스와 아나톨리아 일대로 쪼그라들면서, 이집트는 로마로부터 자연스레 독립하게 되었으며 신흥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당하지 않고 국체를 보존한 만큼 오늘날까지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아프리카의 지도국으로 군림하였다.

아비시니아

아비시니아(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으로는 에티오피아)는 기존이 군주정이 유지됐지만 현실에서와 같이 제국이 아닌 왕국이라는 점이 다르다.

소속 국가

  • 로마 제국
    세계관의 대표국.

  • 이집트
    콥트 정교회의 거점국이자, 아프리카의 기독교 강대국.

  • 루스 차르국
    동북유럽의 강대국.

  • 아비시니아
    동아프리카의 대국이며, 이집트 교회와 함께 아프리카 교회의 양대산맥이 위치한 국가.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의 후손인 자그웨-솔로몬 왕조가 통치하고 있다.

소속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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