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투쟁 (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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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0년, 유라시아 주권국가연맹 모스크바

거대한 제국은 무너졌습니다.
하나의 민족이 자신의 이름과 언어, 오만과 자부를 찬장 위 녹슨 양철 그릇에 담아두었던 제국은 총성 없이 몰락했습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자신들이 과거의 유령이 되었다는 사실을
거울을 보며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껍질 속 씨앗처럼 침묵하며 자라났습니다.
굴욕은 기억 속에 뿌리를 내려
복수라는 어두운 수액을 천천히 키웠습니다.
그리고 긴 겨울이 지나고 우리는 마침내 봄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되돌아왔습니다.
그들이 강요하는 위선적인 정의는 우리의 군홧발 아래 해체되고,
수 많은 목숨을 희생 시킨 위선자의 손짓은
포승줄에 묶여 어둡고 침침한 독방에 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붉은 광장에는 90년 전의 그날처럼,
수 많은 인파와 용맹스런 장병들이 승리를 자축하고 있습니다.
이제서야 지난 수 십년 간, 세계를 오염 시킨 불건전한 사상에서 해방되었음이 체감됩니다.

구 시대의 성벽이 무너지고
그 파편 아래에서 생존을 이어가던 유라시아는
마침내 파편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승리를 거두었으니,
세계는 신질서를 받아드릴 준비에 급급합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제 입에 들어가는 축하주는
쓴 물 위에 띄운 사탕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였는지 서방 세계와 동방 세계는
다른 언어를 말하고, 다른 가치관을 섬기는 너무나 당연한의 흐름을 차이점으로 인식해 서로를 증오해 왔습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증오는 결국 끊을 수 없는 증오의 연결 고리를 형성했으니,
그들은 우리를 악이라 부르고,우리는 그들을 위선이라 일컬었습니다.
그러나 서로가 내민 진실은 언제나 회색이며, 총구는 어느 편이든 인간을 향해 있었습니다.

언젠가, 증오에 서린 또 다른 바람이 제국의 입구를 지우고, 장군들의 초상화가 골동품 시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쓸 때,
우리가 쌓아 올린, 해변의 모래성만도 못한 권력은 무너져 내릴 것 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위선을 증오했던 것처럼, 그들은 우리가 강요한 폭력적인 사상을 증오하고 저항 할 것 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무고한 이들의 시신 위에서 새로운 정의를 섬기게 될 것 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이 순환을 끊지 못한 패배자로 기록되고 조롱 받을 겁니다.

누군가는 우리의 기나긴 행군을 역사의 역류라 부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되, 언젠간 하늘로 증발할 것이고,
그 물은 자신의 방향을 기억해 다시 그 자리로 떨어져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이후, 제 그림자는 길어졌습니다.
그림자 아래의 땅은 붉은 저녁노을과 대비되게 어둡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이 순간을 살아갑니다.
공허한 승리일지언정, 패배보다 더 깊은 자존감을 주기에
나는, 우리는, 이 마지막 투쟁의 순간을 붙들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