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수 (아침해의 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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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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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승
대조선국 제 2대 의정대신
박규수
朴珪壽|Bak Gyusu
출생 1807년 10월 27일
(음력 1807년, 순조 7년 9월 27일)
조선 한성부 북부 양덕방 계생동계
(現 대한국 한성부 성내방 계생동)
사망 1884년 2월 9일 (향년 76세)
(음력 1876년, 개국 584년 12월 27일)
대한국 한성부
국적 조선
대한국
재임 기간 통리기무아문 총리
1871년 7월 28일 ~ 1872년 8월 24일
의정부 우의정
1873년 6월 13일 ~ 1874년 4월 16일
제 2대 의정대신
1874년 2월 17일 ~ 1876년 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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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명 규학(珪鶴)
환경(桓卿,瓛卿), 정경(鼎卿)
환재(桓齋,瓛齋), 헌재(獻齋), 환재거사(瓛齋居士)
부모 아버지 박종채
어머니 전주 류씨
배우자 연안 이씨
자녀 박제응(朴齊應)
학력 증광시 병과
종교 유교(실학)
최종 당적 개화당
시호 문충공(文忠公)
주요 업적 임신대경장

개요

조선 후기, 선말한초의 반가 출신 문관 관료이자 학자, 정치인.

명문 거족 반남 박씨의 일원이기는 하지만 권력의 중심에 있던 가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사상적으로 개화파의 시조로서 개화 사상을 품게 되었으며, 본인의 제자들이 조정에 진출하여 한국의 개화를 이끈 것은 물론이고, 본인 또한 저명한 고위직 관료로서 여러 국내 개화정책을 이끌었다. 이러한 그와 제자들의 노력이 고조 광무제의 선견과 맞아떨어지며 나온 결과가 임신대경장이다.

생애

초기

박종채 (1780년 ~ 1835년)의 장남으로 오늘날의 대한국 황경 한성부의 계생동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대과에는 붙지 못한 탓에 부귀영화를 누리지는 못했고, 이 탓에 박종채도 음서로 현감 등을 지내며 박지원의 저작들을 모아 정리하는 데 인생 대부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박규수는 부모가 결혼한 지 8년 만에 얻은 귀한 아들로 태몽이 학이라 규학이 원래 이름이었다. 박규수가 태어난 시대는 영정조 시기의 두번째 영화도 서서히 삼정의 문란 속에 빛을 잃어가고, 알게 모르게 서양 세력의 동아시아 침략이 태동하던 때였다. 특히 조부 박지원은 열하 부사로 순나라에 다녀오는 한편 동래화관에서 여러 서적들을 사들이면서, 서양 철학의 연구와 순나라가 서양을 겪은 내용, 네덜란드산 서적에 적힌 정보들을 인맥이나 개인적인 집필, 혹은 공무를 통해 조선에 들여 왔다. 박규수는 그래서 지구가 둥글고 우주가 있으며, 지동설을 정설로 정확히 알고 있는 한편 5대주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16살 때 태양, 지구, 지구의 위성 달에 대해 읊은 시가 남아 있는데 배움을 정리하는 정도의 시로 세 천체를 '환약'으로 표현했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천재성을 보인지라 나이 많은 유학 선배들도 서로 친구했다는 일화가 있다고 전해진다. 특히 박지원의 제자들을 찾아다니며 폭넓은 배움을 익혔으며 추사 김정희와도 교분이 깊었다[1]. 약관의 나이에 천재로 소문이 자자했던 박규수는 문조 익황제와도 깊은 친분을 자랑했는데 효명세자는 순조의 대리청정을 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세워 세도정치를 견제하고자 했는데 그에 맞는 젊은 인재로서 중용됐다. 아직 정식 대과에 급제도 못한 상태였지만 효명세자는 경연 자리에도 박규수를 배석시키고 견해를 들었고 박지원의 사상에 관심을 보여 박지원의 저작을 모두 올리라고 박규수에게 명을 내렸다. 그러나 효명세자는 곧 요절했고 이 충격으로 박규수는 관직에서 물러난 채 20여 년간 칩거했다. 효명세자의 다음 대는 효명세자의 어린 아들 헌종이라 세도정치의 횡포는 효명세자의 개혁 시도에 대한 역사적 반동으로 더욱 심해졌다. 만약 효명세자가 정치적 행동을 계속하려 했다 치더라도 있을 곳은 없었을 것이다.

20년이 흘러, 1848년에 문조의 아들로서 왕위에 올랐던 헌종도 슬슬 병색이 완연하고 세도정치의 악폐가 해결될 기미가 없자 박규수는 다시 벼슬길로 출사한다. 이때 헌종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내 너를 너무 늦게 알아봤다. 부친의 총애를 받던 너를 중용하겠다."

그러나 박규수는 장동 김문으로서도 요주의 인물로 찍히고 있었으며 뒷배경도 별로 없는 박규수가 요직에 앉을 리 없었다. 외직인 용강현령이 된 박규수는 그 시간 동안 이런저런 여러 학문의 흔적들을 찾아, 머리 속에 새로운 세상을 그렸다. 세상에 대한 비관도 상당했던 모양인데 이때 남긴 글 중에는 이런 글도 존재한다.

"조선 조 내내 글 좀 읽는다는 사람들이 벼슬길을 피하고 안분지족을 즐겼던 것은 깨끗해서가 아니라 자기 만족을 위한 이기심의 발로일 뿐이다. 결코 청렴 결백 등으로 미화할만한 것이 아니다. 권력에 눌려 뜻을 펼 수 없으니 도망간 것일 따름."

중기

그러던 중 1850년 사헌부 장령이 되어 중앙 정계에 복귀하는 데 성공했고, 1851년에는 곧바로 경상좌도 암행어사가 되어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그래도 왕의 측근으로 꽤나 길게 일했던 셈이다. 하지만 이후에는 실록에도 기록이 적어지는 것을 봤을 때에는 사실상 큰 뜻을 펼치기에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이고, 그러던 중 헌종이 승하하고 철종 장황제가 즉위하자 1858년 경 다시 외직인 곡산부사를 맡게 된다. 그러던 중 1861년 영순전쟁으로 인해 열하로 피난 가 있던 순 명흥제에게 파견될 위문사의 부사로 임명되어서 연행을 하게 되었고, 여기서 중국이 처한 국제 정세와, 서양의 막강함을 확인한 그는 이후 다음과 같은 기술을 남겼다.

"이제 천하의 근본이 뒤틀리는 데에 이르렀다. 속히 일신을 도모하여 밖으로는 다가올 환란을 맞을 준비를 하고,안으로는 민생을 보살피지 않으면 어찌 만세토록 생민들의 삶이 형통하겠는가?"

열하에서 돌아온 이후 성균관 대사성이라는 꽤나 높은 직책을 받은 그는, 1862년 진주에서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나자 수습을 위해 안핵사로 파견되었다. 이때 그는 조정에 백낙신을 파면해 민란을 수습해야 한다고 보고했고, 그의 건의로 삼정이정청이 설치되었으나 세도정치가들은 개혁의 의지가 전혀 없었기에 제안은 무산되었다. 한편 그의 직책도 이조참의로 복귀했다가 부호군으로 사실상 강등되는 등, 정치적 관운도 거의 끝나는 듯 한 상황이였다.

재기와 개항

하지만 1864년에 들어 고조가 왕위에 오르자 그의 관운도 확실하게 펴게 된다. 고종이 즉위하자마자 도승지, 예문관 제학,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제학을 거쳐 이조참판에 곧바로 오르게 된다. 이렇게 오르는 시기가 1년도 채 안 되었다. 그리고 1865년에는 공조판서와 예조판서를 거치게 되면서 판서직에 처음으로 오르게 된다.

그러던 중 186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을 실행할 인사로서 그가 발탁되었고, 이후 큰 이슈가 된 해당 조약을 이용해 조정이 세도가를 뿌리뽑으려는 행보를 시작하자 이에 가세하여 제자들과 '일신소'를 올리는 등의 행보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그의 최대 정적이였던 이항로와 세도정치의 원흉이였던 장동 김문의 궤멸이 한꺼번에 이루어지자, 단기간에 사화에 성공한 조정의 주요 인물로서 단기간에 신분의 상승을 이루었다.

이후 정치제도의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그는 통리기무아문 총리라는 요직을 맡게 되었고, 이후 제자들을 보빙사에 대거 참가시킨 동안, 토지개혁안 마련 등 내부의 개혁에 집중했다. 그러나 이 시기를 기점으로 흥선군과 정치적인 견제가 시작된 탓에 그 다음해에 일시적으로 물러나는 격으로 통리기무아문 총리직을 사퇴했고[2], 대신 이유원을 그 자리에 앉혀 실질적으론 영향력이 건재함을 알렸다. 짧은 휴식기를 가진 동안 그는 불평등조약의 개정 등에 참여하는 등, 휴식기에도 사절단의 복귀 후 닥칠 대격변에 대응할 준비를 했다. 이미 이 시점에서 그는 임신대경장과, 몰아닥칠 서구화의 파도를 얼추 예상한 것으로 보인다.

임신대경장

수신사, 보빙사, 통신사의 귀환 후, 쇼크를 받은 사절단과 그 쇼크에 영향을 받은 조정이 이내 자강론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전면개화를 외치는 목소리로 가득차게 되자, 그는 개화파의 종주격인 자신의 위상과 정치적 실력을 이용하여 이내 1876년 6월 13일에 의정부 우의정으로 발탁되었다. 당시에는 사절단에게서 정보를 입수한 흥선군이 노선을 자강양이론에서 독일식의 수구적 개화론으로 재정비하던 기간이였던 탓에 박규수에게 유의미한 정치적 공세를 넣는 데에 무리가 있었고, 기세를 이어 우의정으로서의 업무를 끝낸 뒤 제 2대 의정대신으로 취임했다.

한편으로는 당시 개혁의 전권을 틀어쥐고 있던 고조에게도 어전에서 개혁안을 상주할 때 다음과 같은 동의를 받아냈다.

"경의 식견이 고명하고, 도량이 정통하니 짐[3]은 물론이고 온 조야(朝野)가 고대하는 바이다. 융허하노라."

또한 이 시기의 박규수는 개화를 내부에서 진행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고, 두루뭉실하던 요동에서의 국경 측량 업무에도 관여해 '의정토지보고서'를 작성, 후에 정부에 전달했다.

시간이 흐르며, 그의 제자들 중에서도 개화의 속도에 따른 이론이 갈리기 지삭했다. 처음에 그는 헌법 제정 등의 개혁에는 회의적인 입장이였으나 이내 마음을 바꿔 좀 더 급진적인 제자들에게 힘을 실어주었고[4], 이 때 그의 제자였던 김옥균을 프랑스로 유학보내 경험을 쌓게 했다.

1876년에는 흥선군의 정치적 공세가 계속되자 의도적으로 수구파이나 성향이 애매하던 심순택에게 차대 의정대신직을 넘긴 뒤[5] 내부아문으로 물러났고, 얼마 후엔 고조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예 정계에서 낙향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그는 제자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후계자 교육에도 힘을 썼고, 관직 진출 이전에 그러하였던것처럼 박규수의 사랑방에는 또 다른 젊은이들이 들어섰다. 낙향한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활동을 계속한 셈이다.

사망

그러나 세월이 흐른 탓에 박규수의 몸은 점차 쇠약해졌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고조가 직접 독일 출신 의사인 리처드 분쉬를 보내 병을 진단하게 하였으나 큰 차도는 없었다.

결국 1884년 2월 9일, 향년 76세의 나이로 한성부에 위치한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장례식은 2월 14일에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생전 명재상으로서 평가가 자자했던 그의 행적이 고려되어 고조의 지시 하에 박규수의 시호는 문관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시호인 문익공(文忠公)으로 정해졌다. 이러한 이유 탓에, 현재도 반남 박씨 종친회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평가

현대에 들어와 그는 개화파의 시조이자, 근대화의 주역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수많은 개화파들을 양성하였고, 본인 또한 고위 관료로서 개화기에 여러 정책을 수행하였으니 어찌 보면 정확한 평가다.

후세의 평가에서 보았을 때 박규수의 식견은 특기할만한 수준으로, 그 안목을 실행에 옮긴 결과 또한 임신대경장, 신미사화, 개화정책, 북진론 논쟁 등 근대사에서 굵직한 사건들이다.

역관 오경석, 승려 이동인, 의관 유홍기, 실학자 최한기 등이 박규수와 함께 했던 개화 사상의 선구자로 꼽히는 편. 일명 '박규수의 사랑방'은 '개화파의 양성소'로 불렸을 정도로 박규수가 후학들인 개화파에게 남긴 영향력이 큰 편이었다. 훗날 수구파로 변한 박영교, 박영효 형제 역시 함께 박규수의 집을 드나들며 개화 사상과 서양 학문을 배웠고, 그것을 김옥균에게 전하면서 개화파가 형성된 것. 어지간한 한국 근대사에 등장하는 개화 사상가들 및 정치인들은 모두 박규수와 인연이 있다.

한편으로는 음험한 정치적 거물로서의 이미지 또한 가지게 되었다. 그의 최대 정적이였던 흥선군과의 정치적 암투가 있기도 했고, 낙향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제자들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 이러한 이유로 당시 그에게 붙었던 별명이 바로 반남댁 큰어른이다. 더 넓게 가면 아예 이 시기에 만들어진 둘의 비선실세식 주고받기가 후대 대한의 정치에도 영향을 끼친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오곤 한다.

결론적으로, 박규수는 한국인들에게 근대시대 인물 중 흥선군 이하응과 더불어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 개화기의 중신들 중 하나이며, 개화사상의 종주로서 알려지고 있다.

사상

그의 개화 사상의 근원에는 조부인 연암 박지원을 비롯한 북학파의 실용주의, 남학파의 서양 학문에 대한 고찰과 연구가 기반에 깔려 있다. 북학파들은 대체로 순나라로 왕래하는 사신들을 통해 베이징에서 서양 문물들을 접했는데 이런 연결고리는 후손 중 1명인 박규수에게까지 이어져서 박규수 또한 서양의 정세와 문물에 밝은 편이었다. 여기에 화관을 통해 직접 입수한 양서는 그에게 서양 철학, 구조 및 제도에 대한 이해 또한 제공했다.

대한 개화파의 시조로 평가받기도 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메이지 유신 주도 세력들 중에서도 특히 조슈파의 사상적 스승이었던 요시다 쇼인(1830~1859)과도 종종 비교된다. 물론 요시다 쇼인은 젊은 나이에 사망한 점이나 관직에 진출하지 못했다는 점, 정한론같은 악질적인 주장[6]도 서슴치 않고 하는지라 오늘날 와선 과대평가, 미화되었다는 소리도 듣는 편. 하지만 박규수 또한 집권시기동안 형성시킨 정치가 끝내 양당의 대립 과열과 황권의 만기찬람, 군부의 폭주 등의 나비효과를 일으켰다는 점을 들며 흥선군과 더불어 대한제국 시기 정치의 혼란사에 대한 책임을 비판받기도 한다.

여담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 만화 <유생전>에서는 잠시 등장하고, 2부에선 사망한 관계로 등장하지 않았지만 작중 그의 제자 중 하나가 조의롤 표하며 언급된다.
  • 2010년 KBS 대하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는 배우 허현호가 연기했다.
  • 일본 만화 <왕도의 개>에서도 김옥균의 언급을 통해 잠시 등장. 헌법 연구를 위해 자신을 유럽으로 보냈을 때 스승의 심정이 이랬을까라는 생각에 잠기며, 그가 이완용을 하얼빈으로 보내는 장면에서 언급되었다. 왕도의 개 자체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한, 일을 중심으로 팽배했던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만화인 만큼 딱히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 묘사하지도 않았다.
  • <유림:최후의 사대부>에선 이항로의 죽음에 비통을 표하는 한편, 다가올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문제는 하필 해당 묘사가 대금민국 측에서 민감한 반응을 자아냈다는 점. 결국 대금 정식 발매는 취소되었다.
  • <굽시니스트의 본격 한중일금 세계사 만화>에서도 조선 편의 주역으로 등장. 호랑이 귀가 달린 사람으로 묘사되었으며, 이항로가 뇌진탕으로 사망하자 '살아남은 나의 승리네'를 패러디한 장면이(...)등장했다.

  1. 김정희는 박지원의 문인인 박제가의 제자였다.
  2. 당연히 만류하는 이는 여럿이였지만, 기이하게도 고조는 그를 크게 만류하지 않았다. 정확상 일시적인 사퇴라는 것을 이미 예상한 모양.
  3. 이 시기는 외왕내제 시기였던 탓에 내정에선 짐이라는 인칭이 사용되었다.
  4. 이러한 행보로 인해 그의 재임기동안 고조의 신임과 더불어 개혁의 속도가 가속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훗날 일부 제자들이 흥선군과 결탁하여, 개화파가 크게 계생계와 운현계로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5. 다만 이 시기엔 이미 좌의정에 이유원이 앉혀져 있었고, 심순택의 성격상 의정대신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발휘하기엔 힘든 상황이긴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후조치를 완료하고 실행한 의도적인 사퇴였던 셈이다..
  6. 박규수는 반면 흥선군 등이 제창한 북진론에 반대하는 입장이였다. 물론 그가 만주를 실제로는 어찌 생각했는지는 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