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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수스 제국
Kircusses Foligerreich
에로베러 계획(키르수스어: Eroberer-Plan 에로베러플란) 혹은 54년 대량살해(키르수스어: 54-Massaker 피어 운트 퓐프치히 마사커)는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이 끝난 1654년 7월, 혹은 이르게는 1651년부터 50년대 후반까지 블린트란트를 비롯한 키르수스가 점령하거나 합병한 구그란치프 영토에서 일어난 집단학살이다. 아슈트카이트-그란치프 전쟁에서 승전한 정복왕 오토(Otto der Eroberer)의 별명에서 유래하여 드베르그를 비롯한 아인종과 그란치프계 반란분자 제거를 목적으로 했다.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초기인 1651년 봄, 마이오렌츠(그란치프어: Mayorens 마요르앵) 인근의 포이푸르트(키르수스어: Feufurt, 그란치프어: Feufourt 푀푸르트)의 한 마을에서 황립육군과 마을 주민 간의 갈등이 발생한다. 비교적 무력 사용을 자제하던 황립육군에게 드베르그 주민이 모욕적인 발언을 행하자 황립육군 장교가 지체없이 권총을 뽑아 해당 주민을 사살했다. 이에 반발해 마을 주민이 황립육군에게 폭력을 가했고, 한 명의 사병이 사망하자 대대적인 보복이 뒤따랐다. 하루 동안 마을 주민의 절반이 총살되었으며, 희생자의 40%는 드베르그를 포함한 아인종 주민이었다. 포이푸르트를 중심으로 해당 사건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자 막대한 소요가 발생했고, 황립육군 측은 이를 진압함과 동시에 해당 사건의 책임을 드베르그로 돌리는 선전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했고, 꽤나 성공을 거두었다. 점령지 내 소요가 잦아들면서 황립육군은 야전경찰(키르수스어: Feldpolizei)을 이용해 점령지의 아인종을 체포하고 비밀리에 제거했다. 1651년부터 1653년까지 야전경찰에 의해 살해된 아인종의 수는 대략 2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1653년 여름, 반 년 가량 지속된 춘계공세의 결과로 키르수스가 로우판란트(키르수스어: Loufanland)를 점령한다. 로우판란트는 드베르그의 주요 서식지로서, 아인종에 극심한 혐오감을 보이는 키르수스가 그들을 통치하게 됨에 따라 지난 2년 간의 무성한 드베르그 암살 소문에 더불어 드베르그 공동체에 있어 큰 우려를 끼쳤다. 우려와 달리 도시에 진주한 황립육군으로부터의 도심 내 학살은 발생하지 않았고, 드베르그 암살 소문은 소문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도심에서 벗어나 오지에서부터 블린트란트에서 행해졌던 야전경찰의 드베르그 학살이 발생했고, 1653년 여름부터 1654년 여름까지 1년의 기간 동안 전 점령지에서 5만 건에 달하는 아인종 살해가 발생했다.
1654년 재림절 공세를 통해 올랑드에 대한 완전한 점령이 이루어졌고, 곧이어 7월에 그란치프가 무조건 항복하면서 전쟁은 막을 내렸다. 협상에서 키르수스는 로우판란트와 블린트란트를 합병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합병이 유력해지면서 황립육군 주도로 지난 4년간의 학살에 비교되지 않은 대량학살이 계획되고 대대적으로 실행되었다. 합병 영토에 대해서 외부의 어떠한 출입도 금한체 전지역적으로 학살을 개시했다. 도시를 제외한 외각 지역에서 황립육군에 의한 노골적인 아인종 학살이 발생했다. 황립육군은 마을을 봉쇄하고 아인종을 색출해 트럭에 실었으며, 저항하는 이를 아인종, 인간 가리지 않고 척결했다. 도시 지역에서는 제국내무부 소속의 제국경찰이 가담하며 아인종을 색출해냈다. 색출되어 트럭에 실린 아인종들은 오지나 파괴된 마을에 세워진 임시 수용소에 감금당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구덩이에 산채로 매장 당했다. 아인종에 대한 학살만으로 최소 100만 건의 학살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마요르앵 공방전 |
1655년 키르수스 사회민주당-키르수스 진보당 측에 의해 점령지에서의 대량 학살이 폭로되었다. 황립군은 제국인민의회에 의해 호출돼 이에 관해 해명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중점적으로 비판한 것은 드베르그 등의 아인종이 아닌 블린트란트 내의 그란치프계 키르수스인들에 대한 탄압이었다. 해당 폭로에 의하면 무비인국화를 위시한 노동자 탄압이 마요르앵 공방전 이후 보복 과정에서 발생한 이래 점령지 주요 도시에서 행해졌다고 추산된다. 1654년까지 황립육군 소속 야전경찰에 의해 유의미한 사망자가 나오고, 종전 이후에는 제국경찰에 의해 세자리가 넘어가는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해당 조치가 제국헌법 __조에 의해 보장되며, 페르디난트 슈트를라우크 폰 리펜슈탈 대장군참모장에 의해 주요 폭로자가 국가 비상사태 내 비상조항으로 체포되면서 폭로는 무력화되었다. 이후 체포된 폭로자가 제2차 사회주의자법에 따라 처벌받으면서 점령지에서 1655년까지 발생한 민간인 살해는 은폐되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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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로니아 시절 구축된 아인종(비인, 키르수스어: Nichtmensch 니흐트멘쉬) 혐오주의는 40년 전쟁 및 신념교 성립 당시의 사회상 및 정통성 구축을 위해 더욱 심화되어 키르수스를 대표적인 '무비인국'(키르수스어: Nichtmenschenrein 니흐트멘셴라인)으로 만들었다. 반면, 그란치프 제국은 아인종에 대한 박해는 존재할지언정 국가 단위의 조직적인 학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40년 전쟁 와중에도 많은 아인종 집단이 학살을 피해 그란치프 제국으로 이주하였으며, 꽤나 유의미한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란치프 제국 북부의 로우판란트(그란치프: Roipeland 로이플랑)는 고대 팔로렌스 왕국의 기원지임과 동시에 드베르그의 주요 서식지였다. 드베르그는 그 신체적 특성이 매우 단신에 대부분의 개체로 하여금 갑각병이라 불리는 비늘과 같은 형태의 피부를 지닌 아인종으로 로이플랑과 사련의 페데르티프나 등지에 널리 분포했다. 드베르그의 쉽사리 구분되어지는 신체적 특성으로 인해 슈베로니아 제국의 통치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차별과 박해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년이 넘도록 광업과 수공업 등에 종사하며 스스로의 지위를 수호함과 동시에, 비교적 아인종에 유한 그란치프 황제교와 팔로렌스 문명의 미약한 영향에 의해 현대까지 종을 존속할 수 있었다.
올랑드(그란치프어: Olande), 혹은 블린트란트(키르수스어: Bilndland)는 슈베로니아 제국 이후 반천년 간 아슈트카이트 영방국가연합과 그란치프 왕국 사이에서 수 차례 주인이 바뀌는 격전지였다. 중세봉건질서의 미약한 국가의식 아래 비옥한 토지를 찾아 이주한 슈베른-게이만 민족과 팔로렌스-슈베른 민족이 섞여 살았다. 그러나 중세가 쇠퇴하고 국가와 민족의 개념이 확립됨에 따라 올랑드는 선천적인 민족 문제를 지닌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올랑드의 민족 문제는 쉽사리 터지진 못했는데, 40년 전쟁의 와중 그란치프 공동국이 아슈트카이트 영방국가연합으로부터 올랑드를 강탈하며 지배권을 확립시켰다. 40년 전쟁 이후 성립된 키르수스는 그란치프 제국의 아성에 맞서지 못했고, 그들에게서 블린트란트는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까지 200년 이상을 상실되었다.
1550년 대, 올랑드는 그란치프 제국의 산업화의 수혜를 완벽히 받은 지역으로, 제국 최대의 산업지대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노동자 계급의 숫적 증가가 발생했고, 노동자 계급의 수적 증가는 자연스럽게 노동자 계급의 정치력 증가로 이어졌다. 그들 계급의 정치력 확대는 1590년 대의 그란치프 제국의 범좌익 정당인 급진당 형성에 큰 기여를 했으며, 차후 인민연맹의 피의 나흘과 조르푸아 사건에 동조하는 등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좌경화된 올랑드의 정치성향은 그들의 민족적 특성으로 자리잡혔고, 이는 조약을 통해 그들을 합병한 키르수스에게 거대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40년 전쟁 도중의 그란치프 공동국의 기습 공격은 키르수스로 하여금 국가적 트라우마를 안겼다. 슈베른란트 통일 전쟁 기간에는 그란치프 제국이 레란스토비 공화국을 침공했음에도 국경에서 군대를 마음껏 차출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전쟁 이후 산업혁명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극복되는가 했으나, 모르티민 공황과 함께 그 기대는 붕괴되었다. 이렇게 축적된 국가적 트라우마는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터져나왔으며, 그란치프를 온전한 국가로 기능하지 못하게 하는 가혹한 전후 조약을 탄생시켰다. 그조차도 200년 간 축적된 국가적 트라우마를 극복시켜주지 못했고, 결국 게비트라는 범-동방적 침략 이념으로 표상하였다.
그란치프가 반파되었지만, 여전히 게파르토 제국은 제국의 남동부에서 위협을 가하고 있었고, 그란치프 제국이 담당하던 반사회주의 대사련 방파제의 임무를 키르수스가 맡게되었다. 당시 키르수스는 재림절 선언으로 인해 보통 선거를 비롯한 여러 정치적 개혁이 약속되어 있었고, 이는 그동안 정치적 특권을 유지하던 기득권의 이득에 큰 위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55년 사건을 통해 사회주의의 위협이 제국의 정치·경제 지도자 뿐 아니라 민중에게도 직접적으로 다가오면서 반사회주의의 프로파간다가 증가하였다. 이러한 프로파간다의 증가는 정치·경제 지도자들의 바람대로 사회주의의 총본산인 사련에 대한 적대로 나타났고, 게비트는 사련을 무너트리기 위한, 무너트린 이후를 위한 이념이 되었다.
게비트의 본래 탄생 과정은 키르수스가 동쪽으로는 그란치프 제국에, 남쪽으로는 베른하이어에, 바다 너머로는 마그니우스에 가로막혀 그들의 팽창이 억제되는 상황에서 산업화로 인한 생산과잉과 식량부족, 실업증가의 문제가 제국 내적으로 축적되며 큰 위협으로 다가왔음에 있었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그란치프 제국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동방으로의 확장의 기회가 찾아왔고, 이는 애국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제국의 욕구와 문제를 해소할 절호의 기회로 보였다. 게비트의 이론이 1570년 대 대불황의 혼란상 속에서 형성되었음에도 그 이론의 구체적인 건설은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의 도중, 혹은 이후임이 이를 뒷받침한다.
1650년 8월 2일,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이 발발했을 때, 키르수스 제국정부조차도 사면초가(키르수스어: Augustfünfzig 아우구스트퓐프치히, 50년 8월)의 상황에서 승전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1651년 1월까지 블린트란트에 대한 슐리트리히 계획의 부분적 성공이 이루어지자 일부 지역에 대한 제한적인 영토 할양을 구상할 수 있었다. 펜마제부터 마우엔까지와 발마르의 일부 지역에 대한 할양이 그것이었다―이 계획은 현재의 블린트란트주 힐페현의 경계의 기원이다―. 그러나 마요르앵 공방전에서의 전략적 패배와 함께 에르미니아 왕국과의 전투가 고양되면서 이러한 협상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여전히 해당 지역은 키르수스의 손아귀에 존재했고, 새로운 영토에는 '무비인국'화가 행해질 것이 당연시되었다.
1652년 여름, 투리스문트 공세가 대승을 거두면서 황립육군이 에세르 지역까지 진격하자 새로운 영토 계획이 작성되었다. 블린트란트 전체와 에세르 지역에 맛닿는 현 푸르메니주 일부와 레느발레주를 합병하고, 에세르 지역에 괴뢰국을 세우는 등 1650년 겨울의 계획에서 매우 확장된 계획이 구상되었다. 그러나 게파르토 제국의 에세르 배역과 라우지츠부르크 일대의 에르미니아 왕국과 그란치프 제국의 공세에 계획은 폐기되었다.
1653년 1월, 에르미니아 왕국이 내전으로 전쟁에서 벗어나고 그 이후 이루어진 춘계공세의 결과로 로우판란트 전역이 키르수스에 점령된다. 로우판란트는 역사적으로 매우 단기간 아슈트카이트 영방국가연합에 소속했으며, 아인종이 다수 존재하는 지역이었기에 해당 지역의 처분에 대해 키르수스 내에서 큰 의견 다툼이 있었다. 주요 쟁점으로 해당 지역을 전후 그란치프에 포함시키냐의 차이가 있었다. 관료와 지식인 계층은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의 존재로 인해 해당 지역을 그란치프로 하여금 통치하게하되 비무장 지대임과 동시에 공개된 시장으로서 관리하기를 원했다. 지주 귀족과 군부는 로우판란트를 합병하여 기존 지배구조를 완전히 무너트리고―아인종 절멸 등을 통해서― 드라이히와 같은 지역의 지주 귀족 위주의 구조를 이식시키기를 원했다. 로우판란트를 전쟁에 동맹으로 참전한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에게 넘기는 구상은 없었으며, 지주 귀족들의 구상이 수용되어 지주 귀족이 동방으로 수출됨과 동시에 게비트에 영향을 끼쳤다.
춘계공세로 그란치프 제국의 완전한 패배가 확실시 됨에 따라 전후 그란치프의 처우에 있어서 키르수스의 선택이 온전해졌다. 로우판란트를 키르수스에 합병시키기로 결정하며 아슈트카이트 영방국가연합의 전성기의 이상을 추구할 수 있었고, 쿤트부르크주 지역과 푸르메니주와 레느발레주 지역을 합병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푸르메니주와 레느발레주는 게파르토 제국이 점령한 에세르 지역과 접경해 게파르토 제국과의 분쟁이 우려됨에 따라 해당 지역을 합병하지는 않았다. 대신 이를 비무장화하고, 키르수스 측에게 무차별적인 군사통행권을 부과하며―카스텔부르크 조약의 결과 키르수스는 그란치프 전역에 대해 군사통행권을 보장받았다―, 해당 지역의 주요 철도망이 키르수스의 키르수스 제국철도에 귀속이 되는 등―키르수스 제국철도는 전쟁 후 그란치프의 모든 철도 회사 주식의 절반을 소유하여 그란치프의 철도는 사실상 키르수스 제국철도의 손에 놓였다―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했다. 해당 지역에 영향력을 투사할 오스트오타카레 제국판무관부가 계획되었으나 폐기되었다.
아인종, 특히 드베르그에 대한 노골적인 학살은 그들로 하여금 망명을 감행케했다. 망명한 드베르그는 대부분 산맥과 국경을 너머 드베르그 국가인 페데르티프나로 향했다. 하지만 로우판란트 남부와 그 아래에 거주하던 드베르그는 남쪽의 그란치프로 내몰렸다. 그란치프로 향한 드베르그는 열악한 난민촌에 거주하며 그란치프의 혼란한 사회상 속에 또 하나의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란치프에로조차 향하지 못한 드베르그는 불과 1655년까지 황립육군에 의해 모조리 절멸되었다.
본래 로우판란트는 고대부터 드베르그의 주요 거주지였다.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의 페데르티프나가 최근에 드베르그의 권리가 인정된 것처럼 역사적으로 드베르그의 처우는 열악했으나, 그럼에도 2천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그들만의 문화가 축적되었다. 하지만 키르수스의 학살로 인해 지역 공동체가 파괴되었고, 살아남은 드베르그가 망명길에 오르면서 해당 지역의 미약한 문화적 명백은 완전히 끊어졌다.
블린트란트의 게이만계 인구나 팔로렌스계 인구 모두 그란치프 제국의 긴 통치 동안 그들 독자의 동질성이 생겨났다. 키르수스 황제교와 달리 아인종에 유했고, 꽤나 많은 이들이 블린트란트의 아인종 학살에 있어서 저항했다. 도시에서는 그들이 제국경찰의 탄압 대상인 도시 노동자로서 존재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대탄압은 키르수스와 독립된 정체성, 동키르수스인(키르수스어: Ostkircusser 오스트키르쿠서, 그란치프어: Estkircoussien 에스트키르쿠시앙)을 형성시켰다. 블린단텐주와 일부 쿤트부르크주에 존재하는 이들은 그들 지역의 자치권을 요구하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했고, 1656년 동키르수스인을 창당시켰다. 1655년 제국인민의회 선거와 1655년 블린트란트·쿤트부르크 주선거를 놓쳤지만 민간에서 영향력을 증대시키며, 1660년 제국인민의회 선거에서는 원내에 진입하기에 이르렀다.

로우판란트 북부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의 가입국, 페데르티프나는 학살의 주요 타겟이 된 드베르그에 의한 평의회 공화국이었다. 학살 과정에서 많은 수의 드베르그가 페데르티프나로 월경해 망명했고, 불과 반백년도 되지 않은 때에 인간의 폭압적인 지배에 궐기해 현 체제를 건설한 페데르티프나는 키르수스의 대학살극에 막대한 공포와 분노를 느꼈다. 더구나 비슷한 시기 55년 사건을 계기로 키르수스의 대대적인 내부 사회주의자 척결이 발생하며 그 배후로 의심받은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와의 관계가 악화되며 로우판란트의 대학살은 그들의 주요 프로파간다 대상이 되었다. 학살극의 참상은 많은 사련인들을 공포로 몰아넣었고, 키르수스에 대한 적대심이 민중에게 쉽게 뿌리잡혔다.
55년 사건 이후로 키르수스와 사련 국경에서는 수 차례의 국경 분쟁이 발생했고, 지리적으로 이들과의 국경을 수비하는 페데르티프나의 드베르그 군대는 황립육군와 격렬히 싸워 그들에게 많은 피해를 강요했다. 더해서 페데르티프나 공화국군은 망명 드베르그의 자원입대가 줄을 이루며 키르수스와의 싸움에 사기가 고양됐다. 반면, 제국최대무장화라는 궤변에 의해 강제적으로 긴 복무를 보내는 황립육군 측은 그들 장병의 사기를 향상시키는 것이 주요한 과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