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부쩍 책을 오래 들여다보지 못하게 되었다.
눈이 나빠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이 자꾸만 옆길로 새기 때문이다. 활자 위를 지나가던 시선은 어느새 창밖의 포플러 가지에 앉은 새 그림자를 더듬고, 이내 방안으로 들어와 건들기 만해도 소리가 나는 낡은 책장 그리고 먼지가 쌓인 두꺼운 책들과 젊은 시절 사진들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 사진들을 바라보며 문득, 내가 이미 일흔을 넘긴 늙은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낀다.
이젠 나는 내 몸조차 제대로 가누기 힘들다. 어렸을 적, 집에 있던 벽장 시계처럼 내 몸도 하루가 멀다 하고 삐걱이며 살아 있다는 존재를 불쾌하게 알린다. 아랫배 쪽에 뭔가가 자꾸 걸리는 듯한 통증이 며칠 째였고, 오른쪽 무릎은 작년 겨울부터 바람이 불기만 해도 욱신거렸다. 의사는 더 정밀한 검사를 권했지만, 나는 병원에 가기를 그만두었다. 이 나이엔 무언가를 들춰 내봤자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내가 이곳으로 내려온 건, 교직을 마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베를린의 대학에서 수년간 철학과 비교문학을 가르쳤고, 이후엔 칼럼리스트로서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 나는 곳은 모로코였다. 지금이야 상상도 못하겠지만 자유롭게 여행이 가능했던 시절의 모로코는 영화에서나 보던 아라비안 나이트 이상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하루는 하산 2세 모스크에서 영감이 떠오르는 데로 낮부터 바까지 글만 적었던 적도 있었다. 어딜 가도 나는 늘 '머물지 않는 이'였다. 풍경을 관찰하고, 사유하고, 기록했지만 정작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나는 침묵으로 일관했음을 늦게야 깨달았다.
아내는 나보다 먼저 열다섯 해 전 겨울에 폐렴으로 떠났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화단을 정리하며 장갑이 너무 얇다고 투덜거리던 사람이, 불과 4일 만에 내 곁을 떠났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할 줄 아는 것은 글 쓰는 것뿐이었고, 그 일도 그날 이후로는 마치 종이 위에 모래를 뿌리는 일처럼 느껴졌다. 내가 그녀하고 처음 만난 건 아마, 대학에서 처음으로 해외 연구를 나갔을 때 였을 것이다. 그녀는 문화학자를 꿈꾸던 순수한 소녀였고 절친한 사이로 친해지기까지 단 몇 시간 걸릴 것으로 기억한다. 결혼 한 이후엔 나는 해외를 돌아다니느라 집에 자주 들어가지 못했고 그녀는 묵묵히 그런 못난 나를 도와왔다.
평소에 말수가 많지 않았던 사람이었지만, 그녀가 없는 이 집은 지금도 너무 조용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도 내 귀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벽과 천장 사이에 어딘가 숨어 있다가, 한밤중이면 갑자기 벽시계처럼 돌아온다.
내 딸의 이름은 안나, 음악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어릴 때는 바이올린을 했고, 사춘기 때에는 방 안에서 오래된 재즈 음반을 반복해서 틀곤 했다.
안나가 20살이 되어 도시로 떠나고, 결혼 소식을 듣기 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었다. 그녀의 남편, 사위는 나와 나름대로 술잔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였다. 첫 만남에서 우리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두 번째 만남에선 포도주 한 병을 다 비우기도 했다. 조용하고, 성실한 사내였다. 나는 그를 좋아했고, 그가 딸을 지켜줄 거라 믿었다.
2033년, 그가 군에 다시 징집 되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은 후방의 공병 부대라 안전하다며 걱정하지 말란 말을 남겼다.
그리고 이후로 소식이 끊겼다. 한동안은 전장에서도 편지를 부치곤 했지만, 그마저도 마지막 글에서 "집에는 빨리 못들어 갈 것 같습니다."라는 문장을 남기고 멈춰버렸다. 그이가 사라지고 처음 몇 달간, 안나는 나에게 매일 전화를 걸어왔다. 포로 교환 명단, 귀환 병사 명단… 그녀는 이름을 되뇌었고, 그때의 나는 차마 그녀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안나는 더 이상 그의 생사를 묻지 않았다. 그 날 이후 안나는 음악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나도 칼럼을 더 이상 쓰지 않게 되었다. 전쟁은, 누군가를 잃는 고통과 누군가를 미워하는 고통 중 어느 쪽이 더 나은지, 내게 끝내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따금 나는 마당으로 나가 낙엽을 쓸고, 덜 마른 나뭇잎을 손으로 비비며 냄새를 맡는다.
겨울 냄새는 사람을 착각하게 만든다. 마치 세상이 깨끗해지고 있다는, 아니, 적어도 악의가 잠시 물러간 듯한 착각을.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나는 내 어깨 뒤편에 언제나 붉은 불길처럼 남아 있는 어떤 기척을 느낀다. 총성이 잦아들고, 사람들은 다시 카페와 도서관으로 모여들었으며, 신문은 종종 '평화 회복'이라는 낙관적인 제목을 달기 시작했다. 전쟁 이후 확실히 세상은 더 고요해 진 것 같다.
고요가 곧 평온을 말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나는 이제 더 낮게 말하고, 편지를 쓸 때도 한 번 더 읽고 지우고, 웃음은 더 자주 가리워지고 있다.
요즘은 책상에 앉아 있어도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내 손이 너무 느려졌고, 생각은 자꾸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어젯밤에는 "겨울 철새에 대하여"라는 글을 써보려 했다. 마당에 자주 날아오는 회색 찌르레기를 주제로 삼았는데, 한 문장을 적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종이 위에 연필심이 의미없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유일한 동반자였다.
어느샌가 나는 자주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과거를 떠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그 무엇도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시간은 무언가를 회상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고, 나는 그것을 슬퍼하지 않는다.
다만, 언젠가 어느 날
내가 이 작은 방의 커튼을 열었을 때,
멀리 언덕을 따라 한 무리의 철새들이 다시 날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나는, 아마 조금쯤 미소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들국화가 지기 전까진, 한 문장이라도 더 써야겠다. 문장이 남고, 문장은 언젠가 누군가에게 닿을지도 모르니까.
봄이면 꽃이 피고, 가을엔 잎이 진다.
이 모든 게 흐르고 사라지며 다시 오듯, 사람 사는 마음도 그리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