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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몇 쿠폰어치 사람입니까?
해광에서 시민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번호'를 부여받는다. 이름보다도 먼저 기록되는 것은 직원번호이며, 그 번호는 삶의 모든 국면에 깊숙이 각인된다. 시민은 충승이 발행하는 디지털 쿠폰을 수령하며 생존을 시작한다. 급여도, 복지혜택도, 보조금도 쿠폰 형태로 지급되며, 오직 충승 계열 상가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쿠폰으로 살 수 있는 식품과 의약품, 의류, 가전재품은 모두 충승이 충승의 상점에서 판매하는 물건들이다. 예외는 없다. 시민들은 충승의 물건을 사기 위해 충승의 돈을 쓰고, 다시 그것을 벌기 위해 충승이 제공하는 일자리에 지원한다. 이는 자급자족이 아닌, 자사자사(自社自社)의 순환이다.
아이들은 (주)충승교육 산하 학교에서 교과과정과 함께 충승 윤리강령을 배운다. "헌사진충 성민본분(獻社盡忠 星民本分)"이라는 교훈이 교실 정면에 큼지막하게 걸려 있으며, 교사들은 충승의 사훈을 어린 나이에 체득시키는 데 열을 올린다. 병원에서는 쿠폰으로 진료를 받고, 쿠폰이 없으면 진통제 하나 받을 수 없다. 우편과 통신 또한 (주)충승우정통신 소관이다. 심지어 사망신고서조차 충승의 양식이 아니면 접수받지 않는다. 이 행성은 국기 대신 사기(社旗)가 휘날리고, 기업 약관이 법을 대신하는, 철저한 사유화된 세계다.
그러나 이 체계는 모두를 평등하게 품지 않는다. 행성 전체 면적의 90%가 바다인 이곳에서, 하층민의 삶은 심해에 묻혀 있다. 그들은 바닷속 채굴기지에서 희귀 금속을 캐낸다. 살인적인 수압과 기계 고장, 가스 누출, 무엇보다 해저괴수의 습격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누군가 죽어나간다. 시체는 떠오르지도 않는다. 해저에서 죽는다는 건 존재가 삭제된다는 뜻이다. 그 대가는? 한 달 치 식량을 사면 동나는 50쿠폰. 상류층이 거주하는 '유광구'의 고고한 백색 회랑과 자율주행 도로, 기후제어 시스템은 바로 이 심해의 죽음 위에 세워졌다. 유광구는 언제나 깨끗하고 안락하다. 골든 네트워크의 접속권을 가진 상류층은 유전 편집과 연장 생명 서비스를 정기적으로 구독한다. 이 도시는 충승의 성공을 증명하는 쇼윈도이며, 동시에 아래층을 은폐하는 휘황한 거울이다. 무광구, 진광구를 비롯한 '하층지구'는 전혀 딴판이다. 어둡고 비좁은 골목, 착란을 일으킬만큼 번쩍이는 네온 간판, 배출구에서 올라오는 연기와 쓰레기 더미 속에서, 하층민들은 불안정한 의수를 달고 생존을 도모한다. 누군가는 장기이식을 위해 신체를 팔고, 누군가는 쿠폰을 위해 아이를 저당잡힌다. 거리는 항상 시끄럽지만, 아무도 제대로 된 말을 하지 않는다.
이 모든 시스템은 행성의회에서 유지되고 있다. 의회는 오직 주주들로만 구성되며, 한 표의 가치는 지분율로 정해진다. 이익은 최우선 가치이며, 윤리는 손익계산서의 각주로만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다. 회의록은 비공개이며, 시민의 알 권리는 ‘영업기밀 보호정책’ 하에 철저히 차단된다. 하층민의 진입이 철저히 차단된 금권 지배의 정점에서, 주주총회와 다를 바 없는 의회는 언제나 이렇게 결론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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