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주요국 목록 ]
|
[ 설정 목록 ]
| ||||

![]() |
이 일이 일어난 것은 10시간전, 영국의 심장부가 관통 당한 것부터 였다. 나는 런던 MI6 본부 지하에 있는 오퍼레이터룸으로 향하고 있다. 익숙한 공간. 몇 년 전에도 이곳에서 러시아와 이란의 군사적 충돌, 그리고 칼리프당의 테러 위협을 맞닥뜨리며 온갖 위기를 넘겼다. 그때마다 상황은 무겁고 긴박했지만, 이번 사건은 다른 차원의 불안을 몰고 왔다. 모두의 얼굴에 드리운 공포는 분명했고, 그 공포가 나에게도 스며들고 있었다. 오퍼레이터룸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공기는 팽팽했다. 한쪽 벽에 걸린 큰 런던 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는 몇 장의 사진이 붙어있고, 사건을 연결하는 붉은 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오래된 가죽 자켓을 입은 국장님이 전화기를 들고 서 있었고, 내 동료 클린트는 그녀의 눈을 피하며 서류 더미를 훑어보고 있었다. 이스라엘 정보특수작전국과 중국 국가안전부의 문양이 찍힌 문서들. 말도 안 되는 조합이 같은 사건에 얽혀있다. 두 정보기관이 동시에 관련된 사건이라면, 그 파급력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나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텔아비브에서 온 정보원들이 도착했습니다." 클린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말했다. “바실로프 관련인가?” "그래. 바실로프의 정보가 어떻게 새어 나갔는지, 그놈들이 확인한 것 같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국장님을 바라봤다. 그녀는 전화를 끊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눈빛은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웠다. "4시까지 브리핑 준비해. 국장님을 모셔오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바실로프. 그는 천재였다. 기억을 인위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기술, 이른바 ‘유령기억’을 만들어냈다. 이 기술은 인간의 기억뿐만 아니라 행동까지도 조작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힘을 지녔다. 우리가 그를 놓친 이유도 이 기술 때문이었다. 그는 러시아로 도주했고, 그곳에서 망명을 요청했다. 하지만 누군가 우리보다 먼저 그를 죽였다.
나는 프로젝터를 켜고 그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국장님의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그때, 행크가 내 옆에서 불쑥 말했다. “샌들러, 본론만 말하지. 얘기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프레젠테이션을 이어갔다. "바실로프의 인공신경망을 해독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누군가의 인위적인 전기 신호 조작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누군가 바실로프의 신경망에 접근해 정보를 주입했고, 그는 그 조작된 기억에 의해 자살한 것입니다. 즉, 유령기억이 행동까지 영향을 미친 사례입니다." 내가 말을 마치자, RDSIA 장관이 당황한 표정으로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그럼… 누가 그 신경망을 조작했단 말인가? 우리가 찾던 자는 대체 누구지?” 나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사실, 나도 그 답을 알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털끝만 한 증거조차 없었다. “아직 놈이 남긴 물리적 증거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찾는 '놈'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방 안이 다시 침묵에 잠겼다. 모두가 사건의 미스터리한 본질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있었다. "국장님, 이번 사건은 몇 년 전 미대사관에서 벌어진 사건과 유사합니다. 아니, 어쩌면 훨씬 더 심각합니다." 침묵하던 행크가 내 편을 들어주며 말했다. 평소와 달리 그도 심각한 얼굴이었다.
이번 사건은 그때와는 다르다. 이번에는 끝을 내야만 한다. 그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국장님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차갑고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돼. 이번이 마지막이야."
행크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마치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천천히 나를 향해 말을 건넸다. "이젠 정말 마지막이길 바란다. 3시간 뒤 짐싸서 정문 앞으로 와." 텔아비브부터 런던까치의 여정으로 그의 목소리엔 지친 기색이 스며있었다. 그 말을 남기고 행크는 곧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행크가 단독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은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혼자만의 계획을 세우고 나에게는 한마디도 아나는게 그가 언제나 해오던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하는 일은 나쁘게 끝난 적은 없었으니깐. 나는 행크가 전화를 끊기도 전에 조용히 캐비닛으로 향했다. 캐비닛 문을 열고 먼지 쌓인 오래된 더플백을 꺼냈다. 수년간 동고동락했던 그 가방을 의자 위에 올려두자, 묵직한 짐들이 스르륵 풀렸다. 한쪽에선 가방이 낡은 가죽 냄새를 풍기며 그간의 세월을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침착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마치 이번 임무가 익숙한 일상인 것처럼. 더플백 속을 채워가던 중 문득, 캐비닛 구석에 낡고 오래된 권총이 눈에 들어왔다. 이 권총은 몇 번의 위기를 함께 넘겼던 무기였다. 손잡이에는 내 손의 흔적이 남아있었고, 총신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내가 과연 이 총을 다시 사용할 날이 올까? 잠시 망설였지만, 곧 결단을 내렸다. 오늘 밤의 작전은 그 어떤 예측도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권총을 손에 쥐고 잠시 바라보다가 코트 속에 집어넣었다. 캐비닛을 닫고 더플백을 어깨에 멘 뒤, 나는 계단으로 나갔다. 행크는 이미 정문 앞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피곤함이 깔려 있었지만, 그 속엔 어떤 단단한 확신이 느껴졌다. "허, 휴가 나가는 토니 블레어처럼 입고 나왔군." 행크는 헛웃음을 흘리며 나를 보더니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그의 말투에는 그 특유의 가벼움이 있었지만, 농담 뒤에 감춰진 긴장감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말을 받아치며 웃었다. "그래, 전혀 준비가 안 된 것처럼 보이길 바랐지. 누구도 날 예상할 수 없도록." 행크는 미소를 지었다. “잘했어. 예상 밖의 상황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강해지는 순간이지. 하지만 이 임무는 다르다, 샌들러. 이번에는 우리가 먼저 예상해야 돼.” 그의 말투가 차분해졌고, 그가 짓는 미소는 짙은 그림자 아래에서 어딘가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우리는 나란히 차로 향했다. 차에 타기 전, 나는 런던의 차가운 새벽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이 공기에는 어떤 불안한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기 직전의 고요함, 그것과 비슷했다. "히스로 공항하고 개트윅 공항은 어렵다더군, 가까운 런던 시티 공항으로 가기로 했어." 육십을 바라보던 그의 몸이 힘겹겨 자리를 앉으며 뱉은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행크가 이미 모든 계획을 다 짜놓았다는 건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런던의 이른 아침, 진눈깨비가 휘날려 거리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MI6 본부를 나선 뒤 우리는 런던 시티 공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정적 속에 차는 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리고 있었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젖은 도로와 얇게 깔린 새벽의 안개가 차창을 타고 번져나가며 긴장된 분위기를 덮었다. |
(추가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