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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파란(알레니아어: Great Turmoil 그레이트 터모일 , 라그렌센트어: Grote Onrust 흐로트 온루스트)는 1629년부터 1639년까지 이어진 프리슬란드 자유국의 경제 위기이다. 이 시기 프리슬란드는 대량 실업과 빈곤을 겪었고, 산업과 농업 생산이 크게 감소하였으며 대량의 은행 및 사업체 파산을 겪었다. 이 위기는 1629년, 프리슬란드의 나쁜 작황을 시작으로 프리슬란드의 부동산 시장이 붕괴하고, 10월 19일 말루스 주식 시장이 대폭락하며 시작되었다. 대파란은 프리슬란드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고, 현재 프리슬란드에 만연한 포퓰리즘과, 안드레아스 해방 전쟁 및 연방 전쟁 등 노골적 확장주의적 대외 정책의 시발점이 되었다.
배경
백금 시대
1559년 자유국 내전이 남부의 승리로 종결되고, 1560년 자유 헌법으로 제2자유국, 혹은 자유 헌정 체제가 열린 이후, 프리슬란드는 약 70년간의 경제적 번영을 맞이하였다. 백금 시대로 불린 이 70년 동안, 프리슬란드는 빠르게 근대화했고 사회 간접 자본, 즉 철도와 도로 및 항만 같은 인프라 시설에 대한 투자 및 제조업과 농업의 성장으로 꾸준한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다. 국내에서는 중산층이 성장했고, 대외적으로는 마그니우스의 자유 무역 정책등에 힘입어 잉여 농산물을 해외에 수출하며, 프리슬란드의 경제는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었다. 이후 16세기 말에 전기 및 석유 화학 분야를 중심으로 일어난 제2차 산업혁명이 신대륙에 전파되며, 프리슬란드의 밝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은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었다.
이러한 기대 심리에 힘입어 프리슬란드의 시장은 70년간 꾸준한 가격의 상승을 겪었다. 말루스 주식 시장은 연일 상한가를 기록했으며, 농업의 기계화와 늘어나는 농업 생산량, 꾸준한 수출과 이익에 힘입어 농지를 비롯한 부동산 시장도 지속적인 확장을 겪었다. 이러한 경제적 번영 속에, 프리슬란드가 마그니우스와 베른하이어, 키르수스 등 선진 공업국가들을 꺾고 세계 최대의 경제 강국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낙관론은 하나의 사실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또한 경제적 번영을 보고 몰려든, 외텔슈비어의 자본가들을 위시한 해외 투자도 프리슬란드의 경제 발전을 더더욱 촉진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해외 이민과 농촌에서의 이주로 프리슬란드의 도시들은 크게 성장하였으며, 말루스 등의 경제 중심지는 구대륙의 유서깊은 도시들과 어깨를 견줄 정도로 성장했다.
중간 중간 성장세가 주춤한 적은 몇 번 있었으나, 이런 추세는 꾸준하였다.
1620년대 중반
그러나 이러한 경제 성장이 영구적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620년대 중반에 이르러, 사회 간접 자본에 투자된 자금에 대비해 얻어지는 수익률이 떨어지기 시작하며, 기존 경제 성장 모델에 한계가 오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제조업의 성장세도 점차 둔화되기 시작하고 있었으며, 프리슬란드가 국제 시장을 석권하리라 기대되었던 조선업 및 섬유 산업 등에서는 마그니우스와 베른하이어 등 이미 시장을 선점한 국가들의 경쟁이 거셌고, 역시 산업에 투자된 비용 대비 이익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2차 산업혁명의 산업 분야에서도 경쟁은 치열했고, 아직 투자 대비 수익률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즉, 1620년대 중반에, 프리슬란드 경제는 전반적으로 투자 비용 대비 수익이 하락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프리슬란드 투자가들의 낙관론은 굳건했다. 자동차, 전기, 화학 등 2차 산업혁명이 약속한 세계는 장밋빛이었고, 이러한 기술 발전이 프리슬란드의 항구적인 경제 성장을 보장할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해외 투자가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해외 투자는 다소 주춤했으나, 프리슬란드 투자가들의 열정적인 투기는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성장세가 꺾이기 시작한 현실, 또는 실물 경제에 비해 낙관론이 강했던 프리슬란드의 주식 및 부동산 시장은 강세를 유지했고, 그 결과 시장 가격이 과평가, 즉 버블이 끼면서 프리슬란드의 주식 및 부동산 시장과 프리슬란드의 실물 경제는, 162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분리, 혹은 디커플링되기 시작했다.
진행
1629년 초중반
경제적 재앙의 신호는 1629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해, 프리슬란드의 실물 경제는 본격적으로 식기 시작했다. 연초부터 철강 생산량은 줄어들었고, 건설도 주춤했으며, 소매점과 백화점들의 매출이 눈에 띄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투기 심리에 힘입어 부동산 거래가는 증가하고 있었지만, 정작 실 거래량은 감소세를 보이고 있었다. 장기간의 저금리로 인해 빚을 내기가 쉬워진 프리슬란드의 소비자들은 상당한 양의 빚을 떠안고 있었다. 기업 파산은 조금씩 증가하고 있었고, 실업률도 느리게 증가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2월, 금정양을 건너던 금정양 증기선 회사의 상선단이 통째로 실종되는 사건이 터지며 프리슬란드를 뒤흔들었다. 금정양 증기선 회사는 덴다트 상인조합을 통해 보험을 들어놓은 상태였고, 막대한 보험 지급액으로 인해 양측간 법정 공방이 발생했다.
이러한 불안한 경제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도, 실물경제와 디커플링된 프리슬란드의 주식 시장과 부동산 시장은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었다. 투기 심리가 꽃피었으며, 투자가들은 일확천금의 희망을 안고 리버프런트로 몰려들었다. 말루스 주식 시장의 승승장구에, 경제학자 에드바드 웰치는 자신있게 선언했다.
주식 가격은 영구적으로 높은 가격대에 도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
1629년 8월 26일, 프리슬란드의 우량 대기업 12개를 묶어 그 주식들의 가격을 나타내는 드렌트 그로딘 산업평균지수(Drent Grodine Industrial Average)는 상한가를 쳤다. 이때 드렌트 지수는 158.76이었다.
1629년 9월, 종말의 서막
1629년 9월부터 시장에 버블이 끼었다는 전문가들의 조심스러운 경고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경고를 한 이는 말루스 시립 대학의 경제학 교수 로버트 피어리였다.
붕괴는 이르나 늦으나, 언젠가는 올 겁니다. 그 규모가 거대할지도 몰라요. |
이러한 경고에, 프리슬란드의 시장은 조금씩 요동치기 시작했다. 8월 26일에 상한가를 쳤던 드렌트 지수는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했고, 시장에 서서히 불안감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농업 쪽에서 들려온 소식도 좋지 않았다. 1629년의 프리슬란드는 50년 만의 최악의 작황을 앞두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프리슬란드 수출액의 상당한 부분은 농산물 수출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좋지 않은 작황은 그대로 수출액의 적지 않은 감소로 이어졌다. 이는 높은 부동산 거래가와 농촌의 기계화로 인하여 많은 부채를 지고 있던 농부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해외에서의 비보도 시장 불안정성을 강화했다. 1629년, 프리슬란드가 식량 및 농산물 등의 원재료를 수출하는 가장 큰 무역 대상국이었던 마그니우스 제국이 총선을 앞두고 대프리슬란드 관세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 것이다. 안 그래도 수출량이 감소할 예정에, 감소한 수출 이익마저 주 수출 시장의 관세 부과로 더욱 줄어들 위기에 처하자, 농산물 선물 시장이 불안정해지며, 말루스 주식 시장의 가격 불안정성은 점점 심해져갔다.
9월 말, 리버프런트의 은행가들이 주식시장에 투자 자금을 풀면서 시장이 다소간 안정되었으나, 주식 시장은 여전히 요동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언론들은 이를 "피어리 쇼크"라고 불렀으나, 많은 투자자들은 이를 시장의 가격 조정 쯤으로 생각하고, 불안감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다.
1629년 10월
운명의 일주일
무엇이 더 빨리 떨어질까? 사람? 혹은 그 사람의 주식 가격? |
1629년 말
결과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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